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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
너무 탐지에 의존했나 보다.
드론은 정말 생각도 못 했다. 게다가 투명화를 보다니. 그건 아예 상상도 못 했다.
제길. 군대도 안 다녀온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아냐고. 근데 군대 다녀오면 이런 걸 염두에 둘 정도가 됐으려나?
모르겠다. 암튼 간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이 난관을 극복하는 것.
저 드론 두 기를 처리하는 건 뭐 일도 아니다. 그냥 다가가서 수납으로 꿀꺽하면 되잖아?
제약 해제 같은 게 없어도 드론은 생명체가 아니니 그냥 삼켜질 거다.
문제는 드론을 잡는 게 아니다. 저놈들에게 선전포고하느냐 마느냐의 문제.
내가 저 드론을 잡아내는 순간 녀석들은 경계 등급을 격상시키겠지? 이놈 저놈이 다 알게 될 거고.
그런 상황은 별로 맞이하고 싶지 않다. 어디까지나 이고르 놈만 쓱싹 납치하는 게 베스트였는데.
그렇다고 내가 여기에서 그냥 떠난다고 저 녀석들이 경계를 낮출까? 그건 아닐 거다.
그래. 우연히 잘못 온 민간인이든 적대 세력이든 한번 발각된 이상 그냥 둘 리가 없다.
거봐. 출동하는 놈들이 있잖아. 탐지에 느껴지는 사람의 기척들.
확실하게 이쪽으로 오는 놈들. 비행인가? 속도가 제법 빠르네.
드론으로 목표를 계속 지켜보면서 타겟을 제거할 인원을 바로 보낸다?
새끼들 제대로네. 그래. 그래야 이 망한 세상에 어울리는 놈들이지.
내 결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이미 전투는 시작된 것과 다름없다. 결국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정면 대결이 되어버린 것.
하지만 녀석들은 내 능력을 모른다. 나 역시 녀석들의 능력은 모르지만 어쨌든 녀석들의 아지트 위치를 안다.
존재 자체를 들킨 건 큰 손해지만 그것뿐이잖아? 게릴라는 아직 유효하다.
나를 잡으러 오는 놈들이 도착하기 전에 빠르게 이 전투의 목적을 상기해본다.
내 목표는 이고르의 포획. 녀석이 잠적하면 실패다.
이놈들을 모조리 전멸시킨다고 하더라도 이고르를 못 잡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소리.
탐지에 걸리는 숫자는 엄청 많지만…. 이바노비치에게 들었던 것처럼 만 명 단위 그런 건 아니다.
아마…. 많이 죽었겠지. 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전부 유지하려면 보급이 쉽지 않았을 거야.
알아서 다이어트를 한 건지 아니면 강제로 된 건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숫자가 많지는 않다.
어쨌든 해보자. 그렇다면 일단 이고르의 위치부터 알아야겠지.
나를 잡으러 오는 세 개의 기척. 거의 근처까지 왔다. 비행으로 오고 있지만, 지면에서 가깝다.
멍청이들. 바보들인가? 내가 뭐 하는 놈일 줄 알고 저렇게 당당하게 오지?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예정과는 다르지만, 속전속결로 간다.
녀석들이 방심한 사이, 아직 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이에 빨리 끝내버리자.
그게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좋은 방법이지.
거의 가까워진 녀석들. 자 그럼 가보자. 먼저 지금의 자리를 저장했다.
그리고 블링크. 그리고 수납을 열어 드론 두 기를 집어넣었다.
그러자 바로 오던 걸 멈추는 세 녀석. 하지만 내가 빠르다. 블링크. 그리고 광역 스킬 무효화. 수면. 수면. 수면.
두 녀석은 그대로 땅에 떨어지고 한 놈의 밑에는 내가 방금 저장한 위치의 게이트를 열었다.
퍽 퍽 소리가 나고 땅바닥에 두 녀석이 떨어진다. 하나는 빛이 되었고, 하나는 안 죽었다.
오. 죽은 놈이 운 나쁜 거야? 아니면 산 놈이 운 좋은 거야?
뭐가 됐든 의미 없다. 고작 몇 초 더 살게 되는 거니까.
블링크. 그리고 마체테. 녀석이 빛이 되었고 코인이 나에게 들어온다.
10만 코인 정도. 그리고 죽은 다른 놈의 코인도 회수한다. 이놈은 9만. 고맙다. 잘 쓸게.
잠든 채로 바닥에 곱게 누워있는 한 놈. 녀석의 기억을 읽는다. 다른 기억은 필요 없다. 이고르 트미트렌코. 녀석의 위치.
다행히 이곳은 이고르의 사설 용병대가 맞았다.
쟈칼랴띠? 뭐 내 귀에는 그렇게 들리는데 이건 뭐 들어도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번역에는 자꾸 담금질 용병단 뭐 이렇게 들리니까. 번역은 이게 좀 어이없어.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어쨌든 녀석의 위치를 알았으니 됐다. 내 목적은 오직 이고르. 다른 녀석들은 천천히 잡아도 돼.
그렇다고는 하지만 대놓고 너희 지휘관을 잡으러 왔다고 밝힐 필요는 없다.
그러니 일단 시선 분산용 공격은 필요하다.
그것도 시간차로. 이건 이미 방법을 알지.
빠르게 기억 읽은 놈을 처리하고 볼쇼이어쩌구 도시로 블링크 한다.
그리고 차들을 잔뜩 수납에 집어넣었다.
수납 크기가 커져서 그런가? 승용차 같은 건 엄청나게 많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거…. 몇대까지 들어가는 거야? 분명 몇십대는 집어넣은 거 같은데?
아마 거의 백 대는 되는 거 같다. 더 넘을 수도 있고.
진짜 눈에 보이는 차는 몽땅 다 집어넣었는데도 이렇다.
하긴, 가로세로높이 15.2미터는 결코 작은 공간이 아니긴 하지. 어쨌든 됐어. 그럼 가볼까.
녀석들의 기지가 있는 산 위로 블링크 한 다음 하늘 위로 솟구쳐 오르며 수납을 열고 차를 뿌리기 시작했다.
무수하게 많은 차가 수납에서 나와 차례대로 떨어진다. 이정도면 제법 신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지?
그렇게 차가 더는 나오지 않을 때까지 하늘로 올라갔고 얼어 뒤질 것 같은 하늘에서 바로 지상까지 블링크를 쓴다.
그리고 페이즈 아웃. 산 아래로 몸을 통과해 바로 기지 안으로 침투한다.
아까 죽인 놈의 기억에서 본 위치라면 이쪽이 맞을 거야. 일단 비어있는 방 안에서 페이즈 아웃을 해제하고 탐지를 돌렸다.
그때 들리는 폭음. 그리고 진동.
내가 떨어뜨린 차들이 산에 떨어지면서 내는 굉음.
안에서 들으니 마치 폭탄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굉장하네. 아무리 들어도 공격당하는 느낌이잖아?
그런데 투시로 보이는 녀석들의 반응은 침착하고 신속했다.
공습을 받았는데도 되게 차분한 모습이네. 훈련이 잘되어 있어.
녀석들은 일사불란하게 자신들의 맡은 구역으로 움직인다.
이 와중에 헬기를 출동하는 게 신기하네. 헬기가 무슨 의미가 있나? 하여간 나랑은 상관없다.
뭐가 됐든 내가 노리는 것은 딱 하나. 이고르 녀석. 놈은 자신의 방에 있었다. 다급하게 달려온 부관의 보고를 받는 모습.
찾았다. 새끼. 찾았으면 됐다. 이곳은 실내. 실내전투에선 질 생각이 없다.
내가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건 스킬 사용 불가 지대. 그것만 안 깔리면 된다. 나머지는 내가 방심만 안 하면 돼.
차는 계속해서 기지가 있는 산을 두드렸고 녀석들의 움직임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헬기가 한 대씩 밖으로 나가고 차량을 이용해서도 밖으로 출동하는 놈들이 있었다.
그리고 장비를 갖추고 비행으로 밖을 향해 나가는 놈들까지. 체계가 잡혀있는 모습이 제법 무섭다.
그러던가 말던가.
내 눈은 이고르 놈에게 집중하고 있다. 나는 솔개가 되어야 한다.
병아리를 낚아채듯이 녀석만 낚아채면 돼.
녀석이 뭐가 됐든 무효화 수면 콤보는 막을 수 없다. 그러니 나는 내가 제일 자신 있는 그걸로 녀석을 재우면 된다.
보고를 받으면서도 기지로 떨어지는 폭음에 계속해서 불안한 눈빛을 보내는 중년의 남자.
부관을 향해 뭐라고 소리치는 모습. 하지만 별로 위협적이지 않다.
안나의 기억에서 봤을 때보다 더 나이를 먹은 모습. 중년이라고 쳐주기도 어렵다.
아무리 봐도 배 나온 아저씨인데 꼴에 전투복은 입고 있다. 저렇게 전투복이 안 어울리는 것도 능력인데.
대체 무슨 소질이 있어서 이렇게 큰 세력을 만들어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역시 사람은 겉보기만으로는 모든 걸 파악해서는 안 돼. 그것도 방심이잖아?
부관이 방을 나오자마자 바로 움직였다.
3초. 딱 3초면 된다. 녀석을 붙잡는 데는 그만큼이면 충분하다.
탐지와 투시 덕분에 문밖에 아무도 없는 건 알고 있다.
그리고 나와 이고르 녀석의 사이에는 저 부관 녀석밖에 없다.
밖에서 공습을 당하고 있는데 이미 코앞에 적이 와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너희들의 태만과 방심이 문제야.
아…. 이런 생각은 다잡고 나서 하자. 또 기고만장해서 실수하지 말고.
모든 버프를 걸고 문을 연다. 그리고 블링크. 통로 끝 기역자로 꺾이는 곳. 거기에서 다시 블링크.
그리고 무효화. 수면. 잠들어버리는 부관 녀석.
녀석이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그대로 마체테로 목을 쳤다.
그대로 빛이 되어버리는 녀석. 코인을 회수하는 건 나중에.
그대로 다시 블링크로 이고르의 방문 앞에 도착해서 페이즈 아웃을 쓰고 안으로 들어간다.
서둘러서 자신의 장비를 챙기는 이고르. 해제와 동시에 무효화. 그리고 수면.
자기가 뭐에 당했는지도 모르는 채 쓰러지는 녀석.
크으. 이 짜릿함.
아무런 문제나 변수 없이 목표를 무력화시켰을 때의 이 성취함.
이 순간을 위해서 모스크바로 가는 그 장거리 비행을 했고, 이바노비치를 공략하기 위해 개뻘짓을 했잖아?
다소 허무한 마무리였지만, 나에겐 좋은 일이다. 이런 녀석에게 고생할 거였으면 애초에 공략하지도 않았지.
그대로 이고르 녀석의 몸 밑에 게이트를 열었다. 그리고 나도 순간이동 했다.
벙커. 남자 놈을 이 벙커 안에 들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상황이 급하니 어쩔 수 없다.
"안나!!! 승희! 미나! 세아!"
아직 안 자고 있었기에 후다닥 내 방으로 들어오는 네 여자.
바닥에 쓰러져있는 이고르를 본 안나의 눈이 커진다.
"안나는 이놈 무력화 좀 시켜줘.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황당함에 말도 나오지 않는지 나를 보면서 커다랗게 변한 눈으로 고개만 끄덕이는 안나.
"승희랑 미나, 세아는 나랑 같이 좀 가자."
"지금요?"
"어. 빨리 준비해 봐."
후다닥 방 밖으로 나가는 세 여자. 그리고 안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와 이고르를 향해 온다.
"미안. 니가 활약할 틈도 없이 내가 잡아버렸네?"
"아니에요. 그게 대체 왜 미안한 거예요. 그보다…. 진짜로…."
"녀석 맞지? 기억이랑 똑같이 생기긴 했는데."
"네…. 맞아요."
"말 못 하게 하고. 손발 다 못 움직이게 하고…. 바로 죽일 거 아니면 그렇게 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안나. 힐끔 본 그녀의 눈빛이 화르르 불타는 게 보인다.
그럼 이놈은 됐고. 내가 맡은 역할은 완벽하게 완수했다.
이제 남은 건 안나의 복수뿐.
내가 할 일은 끝이지만, 이제부턴 보너스 스테이지가 남았다.
남아있는 저 담금질 녀석들. 가만히 놔둔다고 해도 상관은 없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마저 마무리 짓는 게 낫겠지.
"근데…. 어디 다시 가요?"
"이놈의 부하들. 마저 잡으러."
"그렇다면 나도 갈래요."
"너도? 이고르 이놈은?"
잠시 입술을 깨무는 안나. 나야 뭐든 상관없다. 다만 안나까지 간다면 이놈의 처리는 확실하게 하고 가는 게 낫지.
"죽일게요."
"그렇게 쉽게 죽여도 돼? 복수잖아? 조금 더 고문하거나 지옥을 맛보게 해주는 게 낫지 않아?"
"그렇긴 하지만…."
"뭐, 나야 안나 니가 원하는 대로 해줄 거야. 편한 대로 해."
"그럼 이 녀석 좀 집 밖으로 꺼내줄래요?"
나는 바로 집 밖으로 나간 다음 내 방으로 게이트를 썼고 게이트를 넘어와 이고르 놈을 발로 밀어 게이트로 넘겼다.
뭔가를 가져온 안나가 이고르의 입안에 가지고 온 것을 잔뜩 쑤셔 넣는다. 천? 못 쓰는 천을 뭉쳐놓은 건가?
그렇게 계속해서 벌려진 입에 천을 쑤셔 넣은 안나는 입을 테이프로 막기 시작했다.
칭칭 감기를 몇십 번. 그 작업을 끝내더니 이고르의 양팔과 어깨, 허벅지, 다리, 발목에 바람 칼날을 썼다.
푸식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얇은 상처만 입히고 아예 자르지는 않은 안나.
"힘줄을 다 잘라냈어요. 이제 이놈은 다시는 팔다리를 못 쓸 거예요."
와. 기술적이네. 되게 오래 생각해온 일인가보다. 하는 행동이 아주 자연스러워.
"그럼 이 녀석 수면 깨워도 되나?"
"네. 상관 없을 거예요."
무효화를 썼더니 녀석이 눈을 떴다.
자신의 상태를 알게 된 녀석이 음음거리며 뭔가를 외쳐보지만….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다리. 그리고 옅은 피 냄새.
그리고 그런 이고르의 앞에 쭈그려 앉는 안나.
어느새 준비를 다 하고 온 여자들은 내 옆에 서서 그런 안나를 지켜보고 있다.
"오랜만이에요. 이고르 트미트렌코. 암캐 매춘부. 너는 내가 누군지 모르겠지? 기억하니?"
암캐 매춘부라니? 아. 욕인가. 근데 번역이 이렇게 나오나 보네.
하여간 번역은 다 좋은데 이렇게 가끔씩 깬다니까. 아까도 담금질이라고 하더니.
근데 안나가 욕하는 건 또 처음 들어보네. 뭐, 그정도로 화났다는 이야기겠지.
근데 이고르의 눈빛은 안나를 모르는 거 같다.
어휴. 저 새끼 저거….
하긴. 그간 했던 짓을 생각하면 녀석이 피해자를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하겠지.
어디나 다 똑같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전부 기억하지 못한다.
나만 해도 다를 게 없지. 멀리 생각할 필요 없어.
"그럼 예브게니 스타르체바는 기억하겠지?"
그제야 이고르의 눈이 커진다. 눈빛에 깃드는 절망.
안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우리 주변을 빙 두르고 서 있던 들개 중 렉스를 바라보면서 짧게 말한다.
"테이밍."
그리고 렉스의 옆에 있는 들개 세 마리도 더 테이밍 했다. 그리고는 렉스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충성스러운 렉스. 부탁 하나만 할게요. 저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이 입 가린 걸 풀거나 저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면, 사정없이 물어버리세요. 그렇게 할 수 있죠?"
컹!
안나의 말에 대답한 렉스. 그걸 본 안나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돌아왔다.
"그럼. 갈까요?"
무섭네. 역시 무서워. 한을 품은 여자는 몇 번을 봐도 무섭다고.
"그대로 가도 되겠어?"
"네. 괜찮아요. 언제든 갈 수 있게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다른 여자들과 달리 안나는 옷을 전부 입고 있는 상태였다. 브라도 하고 있는 거 같고.
아마 내가 그녀의 저택을 보여준 이후로 안나는 언제든지 튀어나올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그럼. 가자."
나는 게이트를 열었고, 승미세안 네 여자는 바로 게이트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나는 바닥에 누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고르를 바라봤다.
몸을 꼼짝도 못한 채 절망적인 표정으로 들개에게 둘러싸여 나를 바라보는 모습.
직접 고문을 당하는 것도 끔찍하지만, 저렇게 있는 것도 공포스러울 거야.
앞으로 당할 일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미치는 기분이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로 게이트를 넘었다. 이제는…. 저 이고르 녀석의 잔당들을 처리할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