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501화 (50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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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500화입니다.

매번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블라디보스토크

잔뜩 흐트러진 차림의 여자를 안고 이야기 하는 건 색다른 묘미가 있다.

그냥 차분하게 앉아있어도 야한 기운이 풍기는 민희다.

근데 이렇게 몸을 노출한 채로 방만한 자세를 하고 있으면 그 파괴력은 엄청나지.

이 여자가 어떻게 의사를 했을까? 환자들이 정신 못 차렸을 거 같은데.

"민희."

"네에?"

목소리마저 나른한 게 사람의 마음을 잔뜩 풀어놓는 기분이다.

역시 좋아. 헤어나올 수가 없다니까.

"카타스트로피라고 알아?"

"알죠."

"오. 역시. 너라면 알고 있을 거 같았어. 뭔데?"

"화장품 이름요."

"엥?"

"농담이에요. 농담. 그렇게 정색할 거까지야."

민희가 웃긴다는 듯 나를 보고 생글생글 웃는다.

이게 웃긴가? 이 여자도 개그 코드 정말 이상하네?

"카타스트로피라. 근데 갑자기 왜 그런 이야기를?"

"궁금한데 주변에 그런 걸 아는 사람이 없어서. 너라면 알 거 같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요?"

"지난번에 심연 이야기할 때도 그렇고. 너는 똑똑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으니까?"

"흐응. 내가 의사여서?"

"그런 이유도 없진 않겠지?"

"그래도 다행이네요. 아는 걸 물어봐서. 기대에 부응할 수 있겠네."

"오."

슬쩍 자세를 고치는 민희.

사실 우리가 하고 있는 자세는 조금 불편한 자세다.

소파에 나와 민희가 약간 꾸겨져서 박혀있는 모습? 그나마 소파가 커서 다행이지, 조금이라도 작았으면 이러고 있을 수 없었을 거다.

거기에 가슴은 훤히 드러내놓고 스타킹은 찢겨있는 민희. 바지는 벗고 있는 나다.

그리고 나는 그런 민희의 가슴을 만지작거리고 있고.

그런 상태에서 내 손길에 살짝 몸을 움찔거린 민희가 나를 보며 계속 이야기한다.

"나비 효과라고 알아요?"

"알지. 유명하잖아?"

"그렇죠. 어쩌다 보니 상당히 유명해진 말이죠. 어느 한 곳에서 일어난 나비의 날갯짓이 뉴욕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론. 카타스트로피는 그거랑 비슷한 개념이에요. 엄밀히 말하면 차이는 있지만, 개념만 보면 비슷하다고 봐요."

"으음…."

"뭔가가 아주 조금 변했는데 그게 급격하게 큰 변화를 만들어낸다면 그런 걸 카타스트로피라고 부르죠. 보통은 재난이나 재앙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요."

"그렇군. 재난이나 재앙이라…. 딱 맞네. 그래서 기본 스킬 열 개인가."

"네?"

"아. 스킬 중에 카타스트로피라는 스킬이 있는데…."

민희에게 스킬에 대해서 설명해줬다. 내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은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한다.

"기본 스킬 열 개라고요? 그리고 그걸로 해일에 지진, 한파…. 거기에 메뚜기떼?"

"어."

"되게…. 그럴듯하네요. 스킬 효과도 그렇고 조건도 그렇고."

"그치? 나도 니가 말한 설명을 들으니까 이해가 가더라고."

"기본 스킬 열 개가 모이면 커다란 재앙도 부를 수 있다는 건가? 아니지. 작은 기본 스킬이라도 결국엔 재앙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건가? 근데 기본 스킬 열 개라. 그건 쉽지 않겠네요. 그쵸?"

"맞아. 열 개나 배우긴 쉽지 않지. 솔직히 필수라고 부를 수 있는 기본 스킬은 몇 개 없으니까. 보호막, 반사, 비행, 투명화, 탐지. 이거 다섯 개 정도 되려나."

"그래도 그거 말고 좋은 스킬들은 많잖아요? 열 개 고르라면 고를 수 있겠는데."

"맞아. 쓸만한 스킬은 더 있지. 염력, 폭발, 괴력, 질병 치료, 나 같은 경우엔 수면은 필수고. 그 외에도 많지. 얼마든지 있어."

잠금 해제와 침묵에 대해서는 일부러 말을 꺼내지 않았다.

민희를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정보를 퍼트릴 필요는 없잖아?

"근데 염력이요? 염력은 왜요?"

"처음엔 듣고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제약이 조금 심해. 사거리도 짧고 운용시간도 짧고. 하지만 인제 와서 보니까 패시브로 다 커버가 가능하더라고. 이것도 한번 배워볼 만한 스킬인 거 같아."

물론 거기에 제약 해제까지 고려한 거긴 하지만.

방금 말하지 않겠다고 생각해놓고 나도 모르게 제약 해제를 말할뻔했다. 하여간…. 나란 놈은.

"흐음. 염력이라. 그것도 멋지겠네."

"아무튼, 그렇단 말이지. 음. 나쁘진 않은데."

"왜요? 배우게요?"

"나도 공격 스킬이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생각해보니 당신은 이렇다 할 공격 스킬이 없네요? 아! 스킬 더 생겼겠죠? 이제 몇 개예요?"

"열아홉 개."

"열아홉…. 어휴. 전부 파악하기도 힘들겠네. 말해줘도 다 기억도 못 하겠네요."

"너는? 블링크 마스터 했나?"

"아직요."

"빨리빨리 배워야지. 너무 꾸물거리는 거 아냐?"

"재촉하지 마요.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요."

그러면서 살짝 눈을 흘기더니 몸을 일으킨다.

"일어나게?"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하긴. 나도 하반신이 허전하네."

간단하게 씻고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나와 민희.

창밖은 어느새 제법 어두워졌다. 음. 슬슬 블라디보스토크로 다시 가볼까?

"별일은 없지?"

"없죠. 근데…. 우리 계속 여기 있어도 되는 거예요?"

"아니."

"네? 그럼요?"

"니가 게이트 배우면 떠나야지. 저기 먼 남국의 섬으로."

"정말…. 그걸 하려고요?"

"왜? 싫어? 그편이 훨씬 더 살기 좋지 않나?"

"아니. 그게 어디 나 혼자 정할만한 일인가요? 여기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는데요. 그 사람들의 의향도 물어봐야죠."

"그거야 네 자유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민주주의적일 필요는 없다고 봐. 가고 싶은 사람은 가고 가기 싫은 사람은 안 가는 거지."

"가기 싫다고 하는 사람은 순순히 보내줄 생각이고요?"

민희의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설마. 내가 그렇게 순수할 리가 있나.

상세하게 잘 아는 것은 아니더라도 우리의 정보를 아는 사람들인데 그렇게 막 보낼 리가 없다.

그리고 민희 역시 그걸 알고 있을 거다. 그러니 저렇게 말했겠지.

"에휴. 결국은 내가 설득해야 하겠네요."

"어차피 아직 시간 있어. 먼저 게이트나 찍으라고."

"알겠어요. 노력하고 있다니까요."

"그래. 그럼…."

"가려고요?"

"어.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빨리 가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냐. 애초에 잠시만 들리려고 했던 거고…."

"알아요. 그러니 그렇게 떠날 때마다 눈치 볼 필요 없어요. 당신 정말 웃긴 거 알아요? 세상에서 가장 무례한 사람처럼 굴면서도 정작 되게 예의 바른 거?"

"그런 거 몰라. 신경 안 써."

"에이. 그 누구보다 신경 쓰는 거 같은데요? 당신 보면 재밌어요. 아마….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에는 굉장히 순진하고 착했던 사람이지 않았을까 싶은데."

"어눌하고 멍청했던 거지. 사람을 좋게 포장해주는 재주가 있네?“

내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 민희.

그런 그녀에게 한 번 더 짧은 키스를 하고 민희에게 손을 흔들면서 집무실을 나섰다.

이번엔 입술에 립스틱이 안 묻어서 다행이네.

또 집에 립스틱 묻혀서 가면 이번엔 쉽게 못 넘어갈 거야. 아. 어디 또 묻어있는 거 아닌지 몰라.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돌아온 블라디보스토크.

살짝 싸한 공기. 하지만 그리 춥진 않다. 방금까지 따듯한 몸을 안고 있다가 와서 그런가?

어쨌든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왔으니 이고르 녀석을 찾는 데 집중하자. 문제는…. 밤이라고 해서 딱히 달라질 건 없다는 것.

적어도 사람이 있으면 불빛이 있어야 할 텐데 불빛이 없다.

물론 저 볼쇼이 어쩌고 하는 도시에는 불빛이 있다. 비어버린 도시에 아직 남아있는 불빛들.

하지만 그 외의 구역은 불빛이 그리 많지 않다.

있긴 있어도 역시 비어있는 곳이다. 외딴곳에 하나씩 있는 집의 불빛이나 작은 마을 정도.

용병단. 그놈들의 숫자가 그리 적지 않으니 저 정도 불빛이 아닐 거다. 근데…. 왜 없을까?

이바노비치의 기억을 더 읽어야 하나? 녀석이 여길 직접 와본 기억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답답하네. 답답해. 사람이라도 하나 보이면 뭐라도 해볼 텐데 코빼기도 안 보이고.

그렇다고 해서 쉽게 포기하진 않는다. 지켜본 지 얼마나 됐다고 포기하겠어?

그저 지켜본다. 뭔가 이상한 것. 의심스러운 것. 그런것들을 찾아본다.

녀석들이 이곳에 있다면 뭔가 의심 가는 게 있을 거야.

사소한 것 하나라도 허투루 보지 않고 주변을 다 살펴본다.

분명 여기가 맞아. 내가 발견을 못 하고 있을 뿐인 거야.

그렇게 믿으며 주변을 돌고 탐지와 천리안으로 계속해서 찾아본다.

결국,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두 시간 정도 탐색을 하던 중 혹시나 해서 본 산 쪽.

터널 같은 게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차들이 지나다니던 터널이 시간이 지나 입구가 식물에 가려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 곳은 많았으니까. 터널이란 산에 있기 마련이고 불어난 식물들 덕분에 입구가 가려지거나 하는 곳은 많았다.

근데 저긴 아니었다. 그런 터널이 아니었어.

자세히 보니 산을 뚫고 지나가는 도로가 아니었다. 다른 목적으로 만든 인위적인 통로.

투시가 있기에 그 터널 쪽을 세심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래. 그 누구도 산 안쪽에 뭔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진 않지.

그렇기에 나도 투시를 쓰고 있으면서도 산 안쪽을 볼 생각은 안 했었다.

그리고 지금, 투시로 살펴본 산 안쪽은…. 기가 막혔다.

"이야."

나도 모르게 나온 감탄.

이고르 이새끼는 대체 뭐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의 로망을 아는 새끼다.

산 안쪽에 기지를 만들어? 씨발. 뭘 좀 아는 새끼네.

그야말로 비밀기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거주구라고 보이는 곳도 있고 격납고인 듯한 곳도 있다.

열 맞춰서 세워져 있는 헬리콥터. 그리고 제법 보이는 사람들.

홀린 듯이 산 안쪽에 있는 비밀기지를 훑어본다. 통로. 방. 격납고. 공동. 하나하나 쫓아가면서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살핀다.

진짜…. 영화에 나올만한 비밀기지다. 저걸 대체 어떻게 만들었지?

딱 악당들이 살고 있을 것 같은 곳. 산 하나를 통째로 쓰고 있는 곳이다.

여기저기로 뻗어있는 통로도 많고 헬기가 나갈 수 있는 통로도 있다.

진짜 신기하네. 저렇게까지 만들어야 했던 이유가 있을까?

아마…. 내 생각으론 저걸 이고르 그놈이 만들었을 것 같진 않다.

세상이 망하고 만들어진 게 아니야. 원래부터 있던 시설인 거 같다. 아마 군사시설이었겠지.

이곳의 위치는 생각보다 중요한 곳이잖아?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이 지척으로 있는 곳이니까.

그런 곳을 얻어서 들어온 것일 거다.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어쨌든 이고르 녀석이 있을 법한 곳을 발견했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어디 한번 탐지로 살펴볼까? 투시로만 봐서는 얼마나 있는지 제대로 모르겠네.

어차피 밤이고 투명화는 기본으로 걸고 있는 데다가 비행으로 날아가고 있기에 크게 경계를 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아직 거리가 많이 남았잖아? 거의 1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니까.

그래서 저 멀리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게 드론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 했다.

저 멀리에서 지면에 바짝 붙어있다시피한 두 개의 물체. 그걸 발견했을 때는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 두 개의 드론은 분명 나를 관찰하고 있는 거다.

블링크를 쓸뻔했지만, 겨우 참았다. 잘했어. 잘한 거야.

언제부터 저것들이 나를 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능력을 더 보여줄 필요는 없어.

드론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걸 눈치 못 챈 척하면서 머리를 열심히 굴려본다.

대체 저건 뭘까? 바보가 아닌 이상 저 산 안쪽에서 온 거라는 건 알 수 있다.

이고르 이새끼. 만만한 상대가 아니구나? 이렇게 거리가 있는데 드론 정찰을 굴려?

문제는 어떻게 이게 가능하냐는 거다.

아니 그래. 드론은 이해한다. 굴릴 수 있겠지. 내가 드론은 잘 모르지만, 영상 같은 거 수신은 되잖아? 그래. 이해했어.

근데 나를 어떻게 봤지? 투명화 쓰고 있는데? 투명화 쓰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가 있는 건가? 드론인데?

드론이 탐지를 쓰는 건 아닐 거 아냐? 탐지를 쓰고 있는 놈이 드론으로 본다고 그게 적용이 될 리도 없을 거고.

스킬…. 스킬이 아니다. 이건 과학. 분명 과학적인 방법으로 투명화 쓰고 있는 사람을 발견할 방법이 있는 걸 거다.

열 감지? 그런 건가? 투명화를 쓴 거지 내 몸에서 열이 안나는 건 아니니까. 그래. 그런 거라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지.

내가 모르는 군사기술들은 엄청나게 많을 거니까.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다행히 내가 쓴 건 투명화와 비행 두 가지. 다른 스킬을 쓰는 걸 보진 못했을 거다.

산 쪽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천리안과 투시가 있다고 생각할까? 모르겠네. 그정도로 상상력이 풍부할지는.

어쨌든 지금은 나에게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니다.

은밀함과 매복, 빈틈을 노리는 공격을 선호하는 내가 먼저 선을 잡히다니.

좆같네. 한 방 먹었어.

이렇게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지역에 투명화와 비행을 쓰는 놈이 철새들 사진 찍으러 왔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을 거다.

아마 저놈들은 잔뜩 경계하고 있겠지. 그것만으로도 내 이점의 반이 날아갔다. 아니…. 반 넘을지도.

으. 골치 아프네. 빠르게 비행도 못 하잖아? 만약 내 비행 속도를 측정할 수 있다면? 녀석들이 한계 돌파 패시브를 안다면?

내 비행 최고 속도를 체크 하는 것만으로 내 수준을 계산할 수 있을 거다.

망했네. 이미 들켰을까? 내가 빠르게 날았었나? 제발 그것까진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어쨌든 지금은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자연스럽게. 마치 다른 일 때문에 왔다는 듯이.

근데…. 그게 가능한가? 안될 거 같은데. 상황 참…. 거지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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