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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조작. 생각했던 것만큼 좋다.
이놈들 스킬 설명이 없어서 드럽게 불편하긴 하지만 효과는 기가 막힌단 말이지.
어쨌든 효과는 입증됐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써본다.
잠깐 짱박아놨던 올가. 그리고 애태우고 있을 이바노비치. 그리고 그 곁에 있는 핏맨.
기억 조작이 원하는 성능을 내니 생각했던 것들이 가능할 거야. 바로 하러 간다. 주저하거나 망설일 필요 없지.
멀티 벙커에 있는 올가. 나를 보자 울면서 나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빈다.
하긴, 이 여자는 어처구니없겠지.
정신 차리고 보니 이런 곳에 잡혀있었고, 자길 여기에 가둔 놈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 거다.
그런 그녀를 재우고 기억을 지운다. 납치당했던 기억. 깔끔하게.
그 기억을 지움으로 이 여자는 납치당한 적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세심하게 새로운 기억을 심어 놓는다. 장인이 보석을 세공하듯 조심스럽게.
먼저 이 여자에게 나는 구면이어야 한다. 기왕이면 목숨을 구해줬던 게 낫겠다.
강렬한 인상을 만들어줘야지.
교통사고가 날뻔한 걸 구해준걸로 하자. 약간 기억에서 내 생김새도 미화시켜야지.
어차피 조작인데 이 정도는 상관없겠지?
그럴듯한 스토리와 이유는 중요하다. 아무리 조작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개연성이란 건 있어야지.
너무 뜬금없으면 안 되잖아?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다.
이런 짓 한 번으로 핏맨 그놈을 잡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시간을 투자할 수 있어.
그렇게 나에대한 조작은 얼추 했다. 시간이 엄청 걸렸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다.
올가에게 나란 녀석은 예전에 목숨을 구해준 반가운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 후로도 몇 번은 더 보면서 얼굴은 익힌 사람이 되었고.
거기에 이 여자가 속으로 나를 보며 두근두근했던 기억도 만들어줬다. 이건 생각보다 쉬웠지.
본인이 짝사랑하던 남자. 그를 보며 두근거렸던 기억. 그걸 나로 바꾸기만 하면 됐으니까.
어휴. 진짜 끔찍하네. 이런 짓이 가능해지다니.
좋아. 일단 1단계 세팅은 끝났고. 이제 2단계 세팅을 할 차례.
그녀의 기억 속에 핏맨에 대한 의심스러운 기억을 심는다.
음흉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기억이라던가, 의도적으로 신체 접촉을 한다던가, 이상한 소문을 들었던 기억.
근데 이 여자는 운전기사가 핏맨인 걸 모른다. 그러니 더 좋지. 밝혀졌을 때의 충격이 그대로 나에 대한 신뢰가 될 테니.
그렇게 핏맨에 대한 의심스러운 기억을 마무리 짓고 이제 마지막 기억을 만든다.
내가 이바노비치의 저택에 덤프트럭을 떨군 그 기억. 거기에 약간의 MSG를 쳤다.
운전기사인 그놈이 그 틈을 틈타 올가를 납치하려고 했던 기억을 만들어 넣었다.
그리고 내가 그걸 구해낸 거로.
자. 기억 조작 끝.
이제 확인해봐야지.
그녀를 깨우고 재우고 기억을 지우길 반복하면서 문제 없다는 걸 확인한다.
좋아 됐어. 이제 마지막 기억 이후의 일만 연기하면 돼.
아까 성연과 신영의 앞에서 연기하고 와서 그런지 한껏 자신감이 붙었다.
연기가 제법 괜찮았단 말이지? 내가 얼굴만 조금 더 잘생겼으면 배우로 잘 나갔을 수도 있을 거야. 잘생기지 않은 게 문제지.
잠시 올가를 두고 러시아로 넘어갔다.
어디가 좋을까. 일단 루블료프카 주변의 괜찮은 저택들을 살펴본다.
이곳은 세상이 망하기 전과 크게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빈집이나 빈 곳은 제법 있다.
그런 빈 저택 한곳을 찾아 게이트를 열고 비어있는 방 침대에 올가를 눕혔다.
올가를 막 납치해왔을 때와 최대한 똑같이 만들어둔다.
자. 이제 시작해볼까? 준비됐지? 그래. 그럼 이제 시작이야.
바로 무효화를 썼다.
잔뜩 인상을 쓰며 깨어나는 올가. 옆에 앉아있었던 나는 깜짝 놀라는 척하며 그녀에게 다가간다.
"올가. 괜찮아?"
"아? 드미트리!?"
그녀에게 나는 권성철이 아닌 드미트리 권이다.
한국에서 러시아로 유학온 유학생. 이곳에 있다가 세상이 멸망해버려서 집에도 못 가는 불쌍한 학생.
내가 조작한 기억이지만 드미트리란 이름을 듣자 나도 모르게 웃을 뻔했다.
다른 이름을 할 걸 그랬나? 너무 웃기는데?
생각나는 이름이 그것밖에 없어서 대충 지었는데. 너무 성의 없었네.
"괜찮아? 어디 이상한 곳은 없어?"
자상한 나의 말투와 표정에 올가의 표정이 풀어진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여긴 어디고?"
"너희 집에 문제가 생겼어. 네가 기절하기 전 일. 생각나?"
"아. 그 폭음!? 그리고 그 운전기사…."
"아. 아니다. 지금 막 일어났는데 정신없겠지. 일단은 조금 쉬어. 천천히 이야기해줄게."
내가 살짝 빼자 올가의 표정이 다급해진다. 이 정도로 궁금증을 증폭시켜놨는데 한발 뒤로 빠지면 애가 타겠지.
"아냐. 몸은 괜찮은 거 같아. 그러니 어서 말해줘. 무슨 일인데!?"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올가를 보며 말했다.
"하. 진짜 괜찮아? 너 지금 거의 꼬박 하루를 누워있었다고."
그제야 자신의 몸을 살피더니 나를 황당하게 바라보는 올가. 하루나 지났다는 게 믿기지 않을 거다.
실제로 그녀는 하루 만에 일어난 게 아니니까.
"내가? 하루나 누워있었다고!?"
"그래.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차마 너희 집에는 말도 못 하고! 지금 너희 집에선 내가 너를 납치한 거로 돼 있을 거야."
"뭐? 드미트리 네가 나를 납치해?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조작이 잘됐는지 올가의 상태는 괜찮아 보인다.
기억 조작이 사기적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속으로 느낀다.
이거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인데 지금은 할 수 없다는 게 아쉽네.
"되게 복잡한 상황인데…. 괜찮겠어?"
"말해줘. 대체 무슨 일이야!?"
나는 한숨을 한번 푹 쉬고 올가의 옆에 앉았다.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여자. 그런 그녀에게 천천히 내가 꾸민 상황을 설명한다.
"네 아버지를 수행하는 운전기사. 알지?"
"알지…. 그 음흉한 남자."
"혹시 핏맨이라고 알아?"
"핏맨?"
"모르는구나. 핏맨이란…. 너희 집에 있는 경호원들의 교관 같은 거야. 스킬을 열 개 넘게 가지고 있고 사람들을 파리처럼 죽이는 녀석들이지."
내 말에 충격받았다는 듯 깜짝 놀라는 올가. 그녀는 핏맨의 존재에 대해 제대로 몰랐으니 놀랄만하다.
"그 운전기사가 핏맨이야. 그리고 그런 그 녀석이 네 아버지를 뒤에서 조종하려 하고 있어. 게다가 기회를 틈타 너도 노리려고 했고. 어쩌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되어서 다행히 너는 구할 수 있었지만…. 지금 너희 집의 상황은 그리 좋진 않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올가. 내가 심어둔 기억 때문인지 그녀는 내 말을 의심 없이 믿는다.
"대체 이게…. 그런 게 가능해?"
"네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잖아?"
"아빠…. 그래. 그렇긴 하지. 하지만…."
"지금 너희 아버지는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야. 지금 너희 집은 핏맨과 그의 부하로 가득한 상황이라고. 네 아버지는 경호 받고 있는 게 아니고 구속당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야. 당장이라도 구해드려야 해."
"어떻게 하지!? 가서 아빠한테 말하면 되지 않을까? 어쨌든 그 남자는 아빠가 고용한 사람이잖아?"
"아냐. 오히려 그러면 네 아버지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어. 지금은 이빨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상황이 이상해지면 어떻게 될지 몰라. 게다가 지금 너희 아버지와 핏맨 그 남자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세상에. 이럴 수가…."
입술을 깨물며 손톱을 입에 가져가는 올가.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한다.
그렇게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나를 바라보더니 내 손을 잡는다. 아주 자연스러운 터치. 하. 이 여자 웃기네?
"드미트리.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방법…. 쉽지 않지. 지금 너를 이런 곳에 피난시키고 숨어있는 게 고작이니까.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다 위험한 일들 밖에 없어."
옆에서 제삼자가 지켜보고 있었다면 상황이 상당히 작위적인걸 눈치챌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지금 올가의 상황은 그정도로 냉정하지 않다.
조작된 기억, 몰아가는 나의 연기, 급박한 상황.
게다가 그녀는 수동적인 여자가 아니다. 그녀의 기억을 보고 성격 맞춤으로 제작된 이 연극.
그녀의 반응은 뻔하다. 이렇게 말하면 몸을 사릴 여자가 아니다.
"위험한 일? 지금 이 상황에서 위험하지 않은 일이 있어? 뭔데?"
"하아. 거봐. 이럴 줄 알았어. 이래서 아예 말도 안 꺼냈어야 하는데."
"말해봐. 드미트리. 똑똑한 너라면 알 거 아냐. 너는 승산 없는 일은 안 하잖아? 이렇게 말을 꺼낸 것도 가능할 거 같으니까 슬쩍 나에게 말한 거고?"
"젠장. 역시 올가 너는 다 꿰뚫어 보는구나. 그래. 내가 너를 어떻게 이기겠니."
진취적이고 자존심 강하고 실패를 모르는 여자. 그리고 자기가 똑똑하다고 믿는 여자.
적당히 띄워주니 얼굴에 자신만만함이 가득하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에게 말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올가 네가 네 아버지를 조종하려는 핏맨을 제압하는 거야."
"뭐? 내가??"
"거봐. 어려운 일이라니까. 그러니 못들은 걸로 해. 이건 무리야."
내 말에 다시 입술을 깨문다. 그러더니 결심한 듯 나를 보고 비장하게 말한다.
"가능성이 있으니까 말을 꺼낸 거겠지? 불가능하고 희박한 일이라면 네가 말을 꺼냈을 리가 없어."
"당연하지…. 근데 괜찮겠어?"
"말해봐. 방법이 있을 거 아냐. 일단 들어보는 건 상관없겠지."
"하아. 내가 잘하고 있는 짓인지 모르겠다."
"제발! 드미트리! 기껏 그렇게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자꾸 빼려고 하지 말라고! 네가 나를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해야 할 일이라면 해야지!"
"알았어! 알았다고! 젠장. 나중에 나한테 책임지라고 하지나 마라."
그리고 나는 내 계획을 말했다.
내 이야기를 모두 들은 올가의 눈이 커진다. 그러더니 나를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본다.
"그게…. 되겠어?"
"내 생각엔 될 수밖에 없어."
"그래. 그렇긴 해. 그는 나를 건드리지 못하니까. 표면적으로는…. 하아. 근데 드미트리 네가 그런 게 가능하다는 건 또 처음 알았네."
"스킬을 가지고 있는 걸 대놓고 떠들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나도 네가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입 다물고 있었을 거야. 너니까…. 아니다. 쓸데없는 말이 너무 길었네."
그러자 나에게 와락 안기는 올가.
하…. 효과 정말 좋네. 미친 스킬이야. 기억 조작은.
"고마워. 드미트리. 꼭 성공해서 이 보답은 확실하게 할게. 나도, 내 아빠도."
"하아. 그런 말은 성공하고 나서 하자고."
그리고는 슬그머니 나를 안은 팔을 푸는 올가. 본인도 왜 나를 끌어안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어쨌든 그렇게 올가와 나는 핏맨을 제압할 방법을 준비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세 시간 뒤.
늦은 밤이 된 이바노비치의 저택.
하지만 그곳은 아직도 정신없었다. 엉망이 된 정원과 파손된 저택을 복구하기 위한 인부들은 밤이 늦어도 작업을 계속한다.
이바노비치는 여전히 보이질 않았다.
딸이 납치되고 자신이 해야 할 일도 있을 텐데 이렇게 계속 모습을 감추고 있다고?
아니지. 내가 모르고 있는 곳에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도 있지.
어쨌든 저택에만 돌아오지 않는 거니까.
그런 저택 입구 근처. 올가가 자신의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녀를 발견 한 건 저택 입구 근처에 있던 경호원 하나.
놀란 눈으로 올가를 바라본 그는 귀에 손을 대고 다급하게 외친다.
그러자 조금 지나고 다른 경호원과 저택의 사용인인듯한 사람들이 튀어나와 올가를 발견하고 서둘러 그녀를 둘러싼다.
잔뜩 걱정하는 모습의 주변 사람들. 하지만 올가는 냉담하게 그런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더니 경호원을 보고 뭐라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호원들이 올가를 호위하고 이바노비치의 방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에서는 게이트가 열렸다. 거기에서 나타난 이바노비치와 핏맨.
음. 그리 먼 곳이 아니었나? 단거리 통신 같은 게 됐나 보지? 저렇게 빨리 튀어오다니?
문 앞에 당도한 올가. 문이 열리고 이바노비치가 올가를 보더니 바로 달려가려 한다.
하지만 그걸 막는 핏맨.
이바노비치는 그런 핏맨에게 소리 지르듯 뭐라고 외친다.
미동도 하지 않고 이바노비치에게 뭐라고 말하는 핏맨. 그러더니 올가를 보면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순간 올가가 휘청이더니 눈을 끔뻑끔뻑 뜬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보더니 멍하니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제야 딸에게 달려가는 이바노비치. 올가를 끌어안은 모습.
핏맨은 씨익 웃더니 그런 부녀에게 다가갔다.
여유로운 모습. 자신만만한 표정.
하지만 그 표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바노비치의 품에 안겨있던 올가가 그대로 붉게 변한 손을 뻗어서 핏맨의 가슴을 찔렀으니까.
상상할 수 없었던 그 공격에 핏맨은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가슴이 꿰뚫렸다.
아니. 가슴이 아니고 오른쪽 가슴과 어깨 사이쯤?
어쨌든 그렇게 예측하지 못한 일격을 당한 핏맨은 차마 반격을 하지 못하고 눈을 부릅뜨며 올가를 바라본다.
깜짝 놀란 이바노비치, 그리고 어찌할 줄 모르는 주변 경호원들. 미소 짓고 있는 올가.
나는 바로 블링크를 써서 저택 벽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페이즈 아웃. 벽을 통과 후 사각에서 해제.
무효화를 뿌리고 눈에 보이는 모든 인간을 재웠다. 일단 가장 먼저 핏맨부터. 그리고 이바노비치와 모든 경호원까지.
마지막으로 혼자 서있는 올가. 나를 보더니 씨익 웃는다.
"봤어? 나 잘했지?"
"잘했어. 최고야."
그렇게 올가에게 다가간 나는 그대로 그녀를 안아줬다. 그리고 수면.
내 품에서 잠든 올가. 힘없이 쓰러지는 그녀를 바닥에 살짝 눕혀줬다.
크크크. 미치겠네. 이렇게 잘될 줄이야. 기억 조작 만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