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494화 (494/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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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번째 스킬

"하아.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당신들을 구한 건 아니에요."

내 체념 섞인 말투에 두 여자는 나를 바라본다.

한번 실수했기에 약간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성연.

그리고 복잡한 표정의 신영.

"그러니 감사하다느니 그런 말 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당신들 둘 다 깨어났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도 열어놨으니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머뭇거리면서 입을 여는 성연. 내가 지긋하게 바라보니 말문이 막히는 듯 입을 다문다.

내가 했던 짓들은 싹 무시하고 현재 표면적인 상황만 봤을 땐 저 여자가 나에게 뭔가를 요구할 수는 없다.

그야말로 물에 빠진 거 구해줬더니 보따리도 건져내라는 식이 되니까.

성연 역시 그걸 알기에 저렇게 입을 다무는 걸 거다. 그정도로 안하무인에 뻔뻔한 여자는 아니잖아?

"뭐요. 할 말 있어요?"

"당신을 잡는 건 염치 없는 짓인 거 저도 알아요. 게다가 어제 실수도 했고. 하지만…. 이야기라도 들려줘요. 그 후로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누워있던 두 달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성연의 말은 지극히 타당했기에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자기 처지도 잘 알고 실수했다는 것도 인정했고 바라는 것도 그렇게 큰 게 아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의 범주 안에서는 그녀의 요구 정도는 들어줄 만하잖아?

"하아. 그래요. 그 정도까진 상관없겠지. 뭐, 힘든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다시 둘을 본다. 끈 떨어진 연 같은 신세의 두 여자.

사실 저 둘의 스킬이면 나쁘진 않을 거다. 매혹과 반사, 수납.

매혹이 둘이니 괜찮은 남자 하나만 잡으면 번갈아 가면서 매혹을 유지하며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겠지.

근데 그건 나 같은 놈이나 생각할 일이고…. 저들이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재벌 집 며느리와 아가씨.

물론 그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 복잡한 삶을 살았겠지만, 과연 집안의 보호가 사라진 지금도 그렇게 당당하게 살 수 있을까?

게다가 저들의 외모는 극상. 저들을 보고 노리는 놈들이 한둘이 아닐 거다.

그러니 함부로 세상에 함부로 나가긴 힘들겠지. 본인들도 잘 알 거고.

"이렇게 어두컴컴한 벙커 안에서 이러고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죠? 둘 다 두 달 동안 햇볕 한번 못 쬐었을 텐데."

그렇게 말하며 계단으로 향했다.

나를 따라오는 두 여자. 나는 일부러 아까 옷에 묻혔던 흙들을 털며 올라갔다.

뒤에서 나를 따라오다가 내가 낸 흙먼지 때문에 기침을 하는 성연.

"아. 미안해요."

내가 사과하자 괜찮다고 표정으로 말하는 여자. 음. 분위기 괜찮네. 이정도면 좋지.

비상계단을 걸어 올라가 비행장으로 나온 나와 두 여자.

완연한 봄 날씨. 따듯한 바람이 비행장을 가로질러 우리를 스친다.

"어때요? 두 달 만에 바깥세상을 본 느낌은?"

"두달이라고 해봐야 잠들어있었기에 실감은 안나요. 내 기억으론 불과 엇그제도 밖에 나갔다 왔는걸요?"

담담한 얼굴로 나에게 말하는 성연.

"아. 그렇지. 너무 내 위주로만 생각했네요."

그런 나를 보고 피식 웃는 성연. 그러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도 분명 그때까지만 해도 추웠는데 이렇게 봄바람이라니. 믿기지 않네요. 정말 두 달이나 지난 거구나."

살포시 웃는 그녀의 표정. 상당히 보기 좋다. 뒤에 서 있던 신영 역시 마찬가지.

분명 자기가 두 달이나 누워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나 보다.

근데 이렇게 직접 확인하니 신기한 듯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붙잡으며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어디 앉을 곳 없나."

주변을 둘러본 나는 비행기 격납고 옆으로 다가갔다.

앉으라고 만들어진 곳은 아닌거 같다. 뭔가 철제 박스같이 생긴 것.

그 위에 걸터앉자 성연과 신영이 내 앞에 선다.

"두 사람도 앉죠?"

"괜찮아요. 그냥 이렇게 있을게요."

신영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저 여자 의외로 되게 수줍어하네. 그런 성격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하아. 어디부터 말해야 하나."

내가 한숨을 쉬며 말하자 두 사람 다 표정이 어두워진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은 하겠지. 그리고 지금은 그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시간이고.

"제가 말주변이 별로 없어서 세세하게 신경 쓰면서 말은 못 해 드려요. 그러니 알아서 들으세요."

내 포지션. 그게 중요하다. 이제는 당신들에게 별로 미련 없다는 듯한 태도…. 그게 핵심이다.

저쪽이 나에게 매달리게 해야 한다.

만약 그게 자연적으로 안 되면…. 매혹을 쓰거나 기억 조작을 또 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대호 그룹은 망했어요."

"하아."

"그 과정은 저도 잘 몰라요. 제가 따라다니면서 지켜본 건 아니니까. 하지만 대부분은 사라졌어요. 어지간한 건 SG에서 다 흡수했어요."

"SG? 그 SG 그룹?"

"네. 근데 그건 그쪽 잘못은 아니에요. 그 복면 녀석이 SG랑 같은 편이었던 것도 아니고요. 제가 알기론 그래요. 자세한 속사정은 모르지만."

"하아."

계속해서 한숨만 쉬는 성연. 그리고 신영은 아무런 반응 없이 이야기를 듣는다.

그렇게 두 사람에게 알고 있는 것을 적당히 이야기해주었다.

아홉 개의 진실과 한 개의 거짓.

될 수 있으면 사실에 가깝게 이야기한다. 그래야 지금 상황이랑 충돌이 안 생기지.

변명하기도 편하고.

결국, 성연이 더는 궁금한 게 없을 때까지 아는 걸 모두 이야기해줬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아무 말 없이 땅바닥을 바라보는 성연.

머리가 복잡하겠지. 근데 나는 최신영 저 여자가 궁금하다.

왜 저렇게 무반응이지? 마치 남 일을 듣는 거 같다. 별다른 감흥이 없는 건가?

"아으. 이런 분위기 진짜 싫네."

내 말에 나를 바라보는 두 여자.

나는 바로 허공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초코바 두 개가 내 손에 잡힌다.

그러자 깜짝 놀라는 두 사람. 그런 그들에게 하나씩 나눠주며 말한다.

"우울할 땐 일단 단 걸 먹어야죠. 하나씩 먹어요. 달달한 게 최고야."

얼떨결에 초코바를 받아든 성연과 신영. 상당히 놀란 표정이다.

당연하겠지. 아무리 재벌 집 사람들이라도 초코바는 구할 수 없었을 거다. 못 먹어본 지 몇 년은 됐을걸?

"그…. 방금 어떻게 한 거예요? 그거 수납 맞죠?"

"네?"

"이거 허공에서 꺼낸 거. 수납 스킬로 꺼낸 거죠?"

"어.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저도 있으니까요. 그 스킬."

그러면서 작게 '수납'이라고 말한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생긴 뻥 뚫린 구멍. 그러면서 나를 바라본다. 왜 자기 수납이랑 다르냐는 듯한 표정.

"뭐야. 수납이 있어요? 어떻게? 스킬을 세 개 이상 가지고 있는 거예요?"

"아…. 네."

"이야. 그렇구나. 몇 개나 있어요? 아. 이건 비밀이지. 못들은 걸로 해요. 자기 스킬 개수 같은 걸 남에게 알려주는 게 어딨어."

"세 개요."

"네? 아니아니아니. 말하지 말라니까요. 그런 걸 왜 남한테 막말해요? 당연히 꼭꼭 숨겨야지."

잠시 말이 없는 성연.

"나도 수납 있어요."

그리고 갑자기 끼어든 신영. 뭐지? 쟤는 또 왜 말해? 이해가 안 가네.

근데 어떻게 보면 좋은 시그널이긴 하다. 자신들의 스킬이 몇 개고 뭘 가졌는지 말할 정도면 그만큼 믿는다는 뜻이잖아?

"으. 그런 건 남한테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요."

"근데 그건 어떻게 한 거예요? 게다가 이건…. 초코바? 이거 먹어도 되는 거예요? 수납에선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까 괜찮은 건가? 아니잖아요!? 시기가 안 맞는데?"

"아. 정말…. 일단 그 초코바가 먹어도 되는지는 대답해 줄 수 있어요. 괜찮으니까 준거에요. 문제 있는 거였으면 당연히 안 줬겠죠. 그리고 다른 건 대답해 줄 수 없어요. 내 비밀이니까."

내 말에 약간 수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성연. 그러더니 포장지를 까기 시작한다.

킁킁하고 냄새를 맡아보더니 조심스럽게 조금 베어 물어본다.

"진짜…. 초코바네."

"아. 진짜. 속고만 사셨나."

그리고 그런 성연에 비해 포장지를 까더니 바로 한입 크게 무는 신영.

우물거리면서 입안에 퍼지는 초코의 강렬한 단맛을 느끼더니 바로 또 입에 넣는다.

순식간에 한 개를 금방 먹어버린 그녀. 나와 성연이 쳐다보고 있는 걸 알아채고는 부끄러운 듯이 말을 더듬는다.

"아…. 아니. 초코바잖아요. 진짜 오랜만에 먹어보는 건데…."

내가 피식하고 웃자 신영은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부끄러워한다.

아. 진짜 귀엽네. 저런 여자였구나. 되게 쌀쌀맞고 도도한 여자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저런 맛이 있네.

"초코바에 그 정도면 이건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내가 이번엔 아이스크림을 꺼내자 두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래. 초코바와 아이스크림은 차원이 다르지. 저들의 반응을 보니 뿌듯하네.

역시 회귀는 개씹사기 스킬이 맞아. 보여주는 사람마다 리액션이 이렇게 좋으니 배운 보람이 있어.

"둘 다 수납 있다고 그랬죠? 열어볼래요?"

두말하지 않고 수납을 여는 두 여자.

나는 수납에서 이것저것을 꺼내서 그녀들에게 나눠준다.

종류를 망라한 수많은 간식, 음식들, 생필품, 샴푸, 로션, 뭐 하여간 기타 등등.

끝도 없이 나오는 물건들을 보면서 나를 얼빠진 모습으로 바라보는 두 여자.

이정도면 됐지? 충분히 임펙트는 있었어. 그럼 이제 막타를 쳐야지.

"자. 이제 이별 선물로 이정도면 충분하죠?"

내 말에 깜짝 놀라는 두 여자.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음? 표정 왜 그래요? 모자라요?"

"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 이제 이대로 가는 거예요?"

이건 아니다 싶은 성연과 뭔가 잔뜩 아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신영. 아. 이런 반응 좋네. 중독될 거 같아.

"저도 아름다운 두 분이랑 조금 더 오래 있고 싶지만, 아쉽게도 할 일이 많아서요. 게다가 괜히 더 오해받고 싶지는 않아요. 제가 당신들에게 더 신경 쓰면 다른 목적이나 사심이 있는 거로 오해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이쯤에서 아름다운 이별을 하죠."

"그건…. 제가 잘못했다고 사과했잖아요!"

빼액하고 소리 지르듯이 말하는 성연.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를 웃으면서 바라본다.

"당연히 그 이야기가 아니에요. 어쨌든 저도 건장한 남자고 두 분 곁에 이렇게 오래 있는 게 그다지 좋을 일은 없으니까요. 내가 주체가 안 돼요. 어휴.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거봐요. 이렇게 헛소리나 삑삑 한다니까. 암튼…. 저는 이만 갈거에요. 말리지 마요."

"자…. 잠깐만요!"

조용하던 신영이 나를 붙잡아 세웠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자 신영은 더듬더듬하며 힘들게 말한다.

"그. 아…. 저희를 책임지라거나 돌봐달라는 소리는 안 해요. 그냥…. 다음에도 또 와줄 수 있어요? 그냥 가볍게라도?"

"양손 가득 군것질거리를 가지고?"

"어…. 그게 아닌데. 어휴. 그래요. 양손 가득 군것질거리를 가지고."

하. 진짜 귀엽네. 어쩜 저렇게 티가 팍팍 나지?

나한테 반하라고 기억 조작을 한 게 아닌데도 어떻게 저런 반응일까?

신기하네. 여자들은 정말 알 수 없어.

"그런 거라면 부담 없이 올 수 있겠죠. 두 사람 혹시 탐지 스킬 있어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두 사람. 물론 나도 없는 건 안다. 그냥 형식적인 질문일 뿐.

"밖은 솔직히 위험해요. 그러니 밖에 나갈 일 있으면 조심히 다녀요. 개인적으론 탐지 없으면 안나가는 걸 권장하는데…. 식량은 있어요?"

"수납에 들어있는 거 있어요."

"아.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 그럼 앞으로 먹고살 방법은요?"

내 질문에 아무 대답도 못 하는 두 사람. 하긴,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자기들이 망할 걸 예상이나 했을까?

"몇 가지 확인해 봐야 해요. 근데 돌아다닐 수가 없으니…."

얼래? 뭔가 믿고 있는 게 있나 본데?

"하아. 그럼 며칠만 여기서 버티고 있어 봐요. 내가 지금은 급해서 가봐야 해요. 그러니 다음에 내가 와서 그 확인한다는 건 도와줄게요."

그러자 성연과 신영의 표정이 밝아진다. 이거 일이 술술 풀리니 기분 좋네.

"그럼 조심하고 잘 숨어서 살아있어 봐요. 지난 두 달 동안 근처에 얼씬하는 놈들은 없었으니 나오지 않으면 그리 위험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예요."

"알겠어요. 그…. 고마워요."

"저도요. 고마워요."

나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두 여자. 나는 그런 그녀들을 향해 어깨를 으쓱이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페이즈 아웃을 쓴 뒤 바로 몸을 돌린다.

성연은 별로 놀라지 않는데 신영은 깜짝 놀라는 모습. 한번 봤다 이거지?

내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본 두 여자는 뭐라고 말하더니 비상계단 쪽으로 내려갔다.

페이즈 아웃 상태로 완전히 두 사람이 계단 밑으로 내려가는 것을 확인한 나는 바로 해제한 뒤 모든 버프를 다 켜고 벙커 밑으로 순간이동 했다.

그리고 벙커로 내려오는 두 여자를 확인한다.

계단을 내려와 비상계단 문을 단속하는 두 여자.

잠금장치를 닫는 것만으로는 불안한지 둘이 힘을 합쳐 가구를 밀어와 문을 막는다.

저런 걸 보면 참 순진하네. 저걸로 막히겠냐. 어휴.

페이즈 아웃으로 계속 지켜보고 싶었지만, 저들이 말하는 걸 듣고 싶었다.

근데 안으로 돌아온 두 여자는 뭐라고 서로 대화를 길게 하진 않았다.

그저 작게 몇 마디 이야기하고는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다.

뭐지? 삭막한 여자들이네. 서로 프리하게 노터치 한다는 건가.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에게 감금되다시피 했을 때 보다는 표정이 밝다는 거다.

비록 거짓과 기만으로 만들어낸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지난번보단 이게 그나마 낫겠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렇게 상황을 만든 이상 계속 가본다.

어차피…. 내 맘대로 잘 흘러가지 않으면 언제든지 기억을 지우고 다시 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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