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492화 (492/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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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번째 스킬

"아…. 당신은."

"이런. 제가 함부로 막 들어왔네요. 죄송합니다. 깨어났다는 게 너무 반가워서…. 정말 죄송해요."

내 사과에 성연의 표정이 조금 풀린다.

내가 볼 수 없었던 표정.

매혹을 걸면 나에게 푹 빠진 헬렐레한 표정만 볼 수 있다.

매혹이 안 걸렸을 때는 굳어있거나 표독스러운 표정만 봤고.

그렇기에 저런 자연스러운 표정은 낯설다. 이제야 조금 살아있는 사람 같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아니…. 근데…. 옷이."

그녀는 운동 후 샤워를 마치고 나서 목욕가운만 입고 있는 상태다.

내가 눈 둘 곳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니 성연이 부드럽게 말한다.

"내 옷차림이 조금 부실했네요. 미안한데 잠깐만 나가 있어 주시겠어요? 금방 갈아입을게요."

"네. 네. 죄송합니다. 제 잘못인걸요."

"아니에요. 죄송하실 거까지야."

방 밖으로 나왔다.

성연의 반응을 봐서는 기억 조작이 잘 된 거 같다. 그래도 아직은 몰라. 철저하게 확인해야지.

일단 내가 말하는 걸 조심해야 한다. 괜히 쓸데없는 말까지 떠벌리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투시로 벽 너머의 성연을 바라본다.

목욕가운을 벗고 옷을 꺼내 입는 여자. 역시 몸매 좋아. 보는 즐거움이 쏠쏠하거든.

몸매 좋고 이쁜 여자는 제법 많다. 하지만 그런 여자를 그냥 덮치는 건 이제 의미 없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게 더 즐겁지.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

나는 그런 거에 중독된 거 같다. 진짜…. 내가 생각해도 정말 비틀어진 놈 같네.

옷을 다 갈아입은 성연이 문 쪽으로 걸어 나왔고 나는 고개를 돌려서 인공정원을 바라보고 있는 척했다.

"들어오세요."

문을 살짝 열고 말하는 성연.

수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나를 자연스럽게 들어오라고 하는 것 보니 기억 조작은 확실히 잘된 거 같다.

그녀에게 나는 벙커가 습격당할 때 구해준 사람이니까.

그리고 자신이 왜 이러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방안으로 쭈뼛거리면서 들어갔다.

이런 연기가 먹힐지 모르겠네. 이 방에 들어오면서 이래 본적이 한 번도 없는데.

하지만 그리 어렵진 않다. 원래의 나. 세상이 망하기 전의 나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정도는 별거 아니잖아?

어떻게 보면 지금 내 모습이 원래 나의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을 거다.

하. 생각해보니 웃기네. 상대를 기만하고 있는 주제에 그 누구보다 진실한 모습이라니.

"앉으세요."

차분한 그녀.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의자에 앉은 나는 침대에 걸터앉는 그녀를 바라본다.

잠깐의 침묵. 그리고 그런 침묵을 깬 건 역시 성연.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죠?"

"아. 그게요."

내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성연이 쓴웃음을 짓는다.

"다…. 죽은 건가요?"

씁쓸한 말투. 하지만 거기에 슬픔이나 원통함 같은 것은 없다.

"네. 안타깝게도. 제가 조금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그게 그쪽의 잘못인가요. 사과할 필요 없어요. 대신…. 지금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조금 해줄래요? 머리가 혼란스러워서 말이에요."

"그러실만해요. 무려 두 달 가까이 누워있었으니."

"두 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성연. 그래. 저런 반응이 당연하지.

그녀도 혼자 생각하면서 두 달이나 지났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을 거다.

내가 가장 고민한 부분도 그거다. 두 달.

아무리 기억을 지우고 조작한다고 해도 두 달이라는 시간의 갭은 어떻게 할 수 없다.

거기에 대해서 머리를 많이 굴려봤지만 뾰족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크게 걱정은 없다. 나에겐 마법의 단어가 있으니까.

"네. 당신은 두 달이나 그대로 누워있었어요. 그리고 저기 저 방에 있는 여자분도 마찬가지고요."

"신영이도? 대체…. 어떻게…."

"저도 궁금해요. 어떻게 뭘 먹지도 않고 두 달 내내 잠자듯 누워있었는지. 몸이 축나거나 야위는 기색도 없었어요. 그냥 그렇게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고요. 아. 물론 죽었다고 생각은 안 했지만."

"세상에…."

혼란스럽다는 듯 곰곰이 생각하는 성연. 그러더니 나를 보고 말한다.

"마지막에 뭔가를 맞았는데…. 그것 때문일까요?"

"뭔가를 맞아요? 뭘요?"

"그 괴한…. 복면 쓴 그놈이 나에게 뭔가를 쐈어요."

"스킬?"

"아마…. 그런 거 같아요."

그래. 그거다. 마법의 단어. 스킬.

어떤 스킬이 있는지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맞으면 죽지도 않고 두 달 동안 쓰러져있는 스킬이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

어차피 저 여자가 모든 걸 확인할 방법은 없다. 참 편안한 방법이야. 모든 걸 스킬 탓으로 돌릴 수 있으니.

"믿기지 않아."

"그쵸? 매일 같이 확인한 저도 믿기지 않아요. 죽은 듯 잠들어있던 당신들도 믿기지 않았는데 이렇게 일어났으니."

내 말에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성연.

"그런데…. 왜 나를 살려줬죠? 신영이도? 게다가…. 당신은 누구죠?"

아이고. 일찍도 물어본다. 혼자서 그거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했었는데.

"아. 제가 제 소개도 제대로 안 드렸네요. 권성철입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성연. 저 태도는 더 말하라는 무언의 압력이겠지?

역시 대기업 며느리를 했던 여자라 그런지 어느 정도는 고압적인 자세가 기본으로 장착되어 있다.

뭐, 그게 나쁘다는 생각은 안 든다. 환경이 사람을 저렇게 만드는 거니까.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평범한 여자라도 대호 그룹 같은 곳에서 꽤 있었으면 저렇게 되는 게 당연하겠지.

"당신들을 살린 게 아니에요. 당신의 가족들이 죽는 걸 막지 못한 거죠. 안 좋은 기억이겠지만, 그때 그 복면 썼던 놈. 기억하시죠?"

"당연하죠. 나에겐 방금 일어난 일같이 생생한 기억이라고요."

아니야. 내가 만들어 넣은 지 얼마 안 되는 기억이라서 생생한 거야.

"그 녀석은 제가 잡으려고 했던 놈이었어요. 제 개인적인 복수라고나 할까? 그래서 그 녀석을 계속 쫓아다니고 있었는데 한발 늦었죠. 제 실수가 컸어요."

"왜 그 복면 쓴 놈은 여기에서 그런 짓을 한 거죠? 대체 우리에게 무슨 원한이 있길래!?"

"그건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하지만 녀석은 최치호 회장님에게 원한이 있었던 건 확실해요. 그 전부터 계속 대호 그룹을 노렸으니까."

"으음…."

무거운 신음을 내는 성연.

"그래서 저는 대호 그룹에 접촉해서 녀석의 위험성을 계속 상기시켰어요. 하지만 대호에선 최 팀장님이 죽은 다음에야 제 이야기를 심각하게 들어주셨죠."

최 팀장의 이름이 나오자 성연의 표정이 약간 진중해졌다. 최 팀장은 들어봤겠지?

이곳 벙커까지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신들의 생필품을 구해오는 사람이었다.

그 정도 측근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정도는 알겠지.

게다가 그 뒤를 이은 게 김유리 그 여자다. 성연이 그 일을 모를 리가 없다.

"하아."

한숨을 쉬고 미간을 엄지로 꾹꾹 누르는 성연.

어떻게…. 잘 먹혀들어 가는 것 같지? 근데 괜히 길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말을 많이 할수록 모순이나 거짓이 드러날 확률이 높아진다.

적당히 궁금증이 풀릴 정도만 간단하게 말해주고 빨리 화제를 돌려야 해.

"당신이 깨어났으니 이제 저 여자분도 깨어날 확률이 높겠네요. 다행이에요."

"대체 왜 우리를 이렇게 신경 쓰는 거죠? 그냥 모른 척 무시해도 될 텐데요?"

성연의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약간 아련한 표정. 음. 그럴듯한가? 그래 보여야 할 텐데.

"죄책감…. 같은 거랄까요? 게다가 죽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무시해요. 사람인데."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그러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성연.

그래. 저런 의심하는 게 당연하다.

외간 남자가 여자 둘을 돌보면서 뭔가 야한 장난질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안 할 수 없겠지.

나라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하지만 저렇게 대놓고 말하진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성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아. 이런 소리를 들을 줄은 알았지만, 역시 막상 들으니 좀 그렇네요."

내 말에 성연은 자신의 말을 살짝 후회하는 듯한 표정이 되었지만, 그녀도 자존심이 있는지 자신의 말을 취소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도도하게 나를 바라보는 여자. 크. 그래. 표정 좋네. 저런 맛이 있어야지.

"뭐, 그렇게 생각하셔도 저는 제 행동을 증명할 방법이 없어요. 그러니 좋을 대로 생각하세요. 구구절절하게 변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대신 깨어난 걸 봤으니 인제 그만 와도 될 거 같네요."

나는 웃으면서 말하고 냉랭하게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스쳐본 황당한 표정의 성연.

이렇게 삔또가 상할 줄 몰랐으려나? 아니면 알고 말한 거야?

뒤늦게 후회하는지 나를 따라 황급히 나오더니 말한다.

"미안해요!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에요!"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여기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다 막혀있어요. 그건 내가 치워줄게요. 마무리는 하고 가야 하니까. 그럼 잘 살아요."

"저…. 저기!"

그리고 나는 페이즈 아웃을 썼다.

내가 사라진 자리를 허망하게 바라보는 성연. 그러더니 자리에 쭈그려 앉는다.

좋아. 잘 된 거 같네. 일단 첫 번째 테스트는 성공했어. 기억 조작은 성공적이야.

이제 추가 확인만 남았으니 그렇게 페이즈 아웃 한 상태로 성연을 지켜본다.

한참을 제자리에서 쭈그려 앉아있던 성연은 일어나더니 힘없는 발걸음으로 다시 자신의 방에 들어간다.

침대에 앉아 멍하니 있는 여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의 경솔했던 발언을 후회하고 있을까? 아무래도 상태를 봐선 그런 거 같지?

어쨌든 계속 지켜본다. 두번째 테스트를 하려면 저 여자가 자야 해. 언제 잘지는 모르겠지만 기다린다.

으음. 오래 걸릴까? 그렇겠지?

그럼 그동안 스킬 숙련이나 하고 오자.

러시아로 잠깐 넘어가 다시 기억 조작 숙련을 했다.

아. 시차 적응 안 되네. 그냥 한국에서 할 걸 그랬나?

아니다. 어차피 어디에서 하든 상관없지. 오히려 뒤끝 없는 이쪽이 더 좋다. 아무렇게나 막 해도 괜찮으니까.

한 세 시간 정도. 스킬 숙련을 했다.

기억 조작 스킬. 상당히 좋다.

일단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호의를 가지게 하는 건 상당히 쉬워졌다.

매혹과는 또 다른 편리함. 무엇보다 이건 남자에게도 쓸 수 있다.

물론 남자의 호감 같은 건 별로 받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제법 유능하다.

그 덕에 지금 이렇게 그럴듯한 저녁을 얻어먹고 있잖아?

세상이 망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저녁이다.

휘황찬란하다고 할 정도의 응접실. 막눈인 내가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구들. 호화로운 식기. 그리고 음식.

루블료프카의 약간 교외에 있는 한 저택. 나는 이 집의 손님이 되었다.

이 집 주인인 티무르라는 남자. 지금 나는 그가 신세를 졌던 은사의 아들이다.

그의 기억에는 어릴 적부터 많은 도움을 줬던 동양인 은사가 있었다.

기억을 뒤지다가 나온 쓸만한 소스. 그렇기에 지금처럼 써먹고 있는 것.

갑작스럽게 찾아왔지만 이렇게 극진하게 나를 대접해주는 남자. 게다가 그의 부인과 아들도 나에게 친절하게 굴었다.

하. 이렇게 뜬금없이 러시아 가족에게 환대를 받게 된다니. 기억 조작 정말…. 개사기 스킬이네.

저녁 식사는 세상이 망하고 나서 먹은 것 중에 최고였다. 아니지. 어떻게 보면 살면서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을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모두를 재웠다.

그리고 방금까지 있던 일을 조작했다. 내 얼굴, 내 목소리, 다 엄한 사람으로 바꿔 놓는다.

그리 꼼꼼하게 기억을 바꾸진 않았다. 어차피 나라고 특정할 수만 없으면 되니까.

기억 조작을 마치고 다시 루블료프카 상공에 떠올랐다.

음. 정말 말도 안 되는 스킬이야. 만족스럽네.

괜히 사소한 곳에서 덜미를 잡히지 않으려면 신중하게, 꼼꼼하게 쓸 필요는 있다.

일단 사람 많은 곳에서는 못 쓰지. 그 많은 사람의 기억을 일일이 조작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소규모에 짧은 기억이라면 거의 무적이다. 하다못해 힘들면 그냥 지워버리면 되잖아?

정말 개사기야. 좋다는 말 밖에 안나와.

이렇게 좋은 스킬을 얻었으니 고작 여자 하나 기억을 헤집기 위해서 쓰는 건 아깝다.

여러모로 쓰일 방법이 있을 거다. 그런 거에 대해서 연구해봐야지.

근데…. 이것도 과연 승미세안 네 여자에게 말했을 때 이해해 줄까?

매혹. 그리고 기억 조작.

둘 다 말도 안 되는 스킬이다. 상대를 믿을 수 없게 만드는 스킬.

과연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느냐가 문제인데.

이번 안나의 일이 끝나면 솔직하게 이야기해야겠다.

이런 건 오래 안고 있을수록 좋을 게 없어. 만약 관계가 안 좋아진다고 하더라도 그건 어쩔 수 없다.

나는 그녀들의 의사를 존중할 수밖에 없어.

아. 맛있는 밥 잘 먹고 또 우중충한 생각 하고 있네. 고민은 나중에 하자. 지금은 할 일이 있잖아?

다시 수원으로 순간이동 했다. 로비 구석. 그 사각에서 조용히 투시로 성연의 방을 바라본다.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침대에 누워있는 성연.

자나? 어디 보자….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녀의 가슴. 횟수를 세어보니 상당히 느리다.

자나 보네. 좋아 좋아. 그럼 어디 두번째 테스트를 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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