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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번째 스킬
내가 생각하는 가장 안전한 장소. 내 집으로 돌아와 스킬 확인을 한다.
근데 사실 생각해보면 여기도 그렇게 안전한 곳은 아닌데 말이지.
나 같은 놈이 쓰윽 지나가기만 해도 발견할 수 있는 곳이잖아? 패시브 없던 시절에야 안전한 곳이었지…. 지금은 아냐.
물론 그만큼 나도, 승미세안 네 여자도 강해졌으니 그나마 덜 위험하겠지만, 그냥 발각당하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쁘다.
슬슬 다른 곳도 알아보든가 해야지. 암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어차피 새로 생긴 스킬은 한 개 꼴랑 있을 거다. 스킬 창을 쓱쓱 내려서 새로운 스킬을 찾아본다.
일단 보이는 패시브는 다 찍는다.
스킬 반경 증가13, 스킬 지속시간 증가13, 스킬 최대수치 증가7, 스킬 한계 돌파7.
순식간에 1,660만이 날아가 버렸다. 어우. 부담스러워. 가진 코인이 4천만이나 있었으니 부담이 덜한 거지.
그렇다고 해도 1,660만이 적은 양은 아니다.
패시브 효과가 좋으니 불만 없이 찍는 거지 효과가 별로였다면 찍을 때마다 속이 좀 쓰렸을 거야.
패시브는 됐고…. 이제 스킬을 찾아본다. 의외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지난번에 나온 스킬이랑 이름이 비슷해서.
불신의 씨앗.
웃기네. 의심 다음엔 불신이야? 뭔가 비슷한 느낌인데…. 조금 더 강해졌나?
의심이 긴가민가한 거면 불신은 믿지 않는 거잖아? 음. 이러면 당연히 의심의 씨앗이 선행 스킬이겠지?
['불신의 씨앗' 스킬은 '의심의 씨앗' 스킬을 배우지 않아 배울 수 없습니다.]
역시 그렇네. 대충 이해했어. 의심 다음엔 불신. 그럼 다음도 있나? 뭐가 있지? 음…. 마땅히 생각나는 건 없네.
근데 이렇게 높은 티어에 있는 스킬이니 효과는 좋을 거다. 궁금하긴 하네.
직접 팍팍 죽이는 스킬보다 티어가 높은 이유가 뭘까? 더 큰 효과가 있다는 건가?
어쨌든 지금은 그림의 떡.
신경 쓰이긴 하지만 찍어보고 싶은 스킬은 아니니까 내가 하려던 계획대로 한다.
기억 조작. 티어15의 스킬.
기억 트리 스킬의 좋은 점은 충분히 느꼈으니 이 스킬도 실망스럽진 않을 거다.
영구 최면이잖아? 스마트폰 어플 같은 것도 필요 없다고. 게다가 풀리지도 않아.
근데 그건 조금 아쉽다. 최면은 풀리는 게 핵심인데.
근데 뭐, 어차피 그거야 매혹으로 대체 할 수 있으니 상관없고.
바로 스킬을 배운다. 30만짜리 스킬. 이제 뭐 30만 정도는 우습지. 별로 부담도 안 돼.
방금 패시브 비용으로 1,660만을 냈는데 30만 정도야 뭐…. 애교지.
바로 스킬을 배웠다. 나도 스킬 숙련 없는 스킬 좀 배우고 싶은데. 영 기회가 안 오네.
스킬 창에 올라온 기억 조작. 좋아. 배웠으면 써봐야지? 바로 밖으로 나가 수원으로 갔다.
나에겐 샘플로 쓸 수 있는 여자가 많잖아? 고성연, 최신영, 그리고 올가.
아. 올가는 샘플로 쓰면 안 되지. 걔는 함부로 기억을 건드리면 안 되니까.
일단 성연이랑 신영에게 쓸 수 있을 만큼 써서 스킬에 대한 이해도를 올리는 게 중요하다.
추상적으로 어떤 식이 될 거라는 생각만 있지 실제로 어떻게 작동되는지는 모르잖아.
수원 비행장 지하에 대호 그룹 비밀 벙커.
로비 구석에서 나타난 나는 바로 탐지를 돌린다. 웬일로 운동을 안 하고 있는 성연.
투시로 뭐 하고 있나 살펴보니 혼란스러운 얼굴로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
음. 그럴만하지.
성연 입장에서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눈을 떴는데 벙커 안에 아무도 없고 입구란 입구는 죄다 막혀있는 상황일 테니.
지금 상황이 어떤 것인지 나름대로 열심히 유추하고 있는 거겠지? 바로 성연의 방으로 들어간다.
반사를 쓰고 있으니 이렇게 마구 들이닥쳐도 상관없다.
게다가 어차피 지워질 일. 내 맘대로 해도 되잖아?
"뭐야!? 너 뭐야!?"
앙칼지게 소리치는 성연. 으음. 좋은 반응이야. 짜릿짜릿해. 조금 더 즐기고 싶지만, 지금은 새로운 스킬 테스트가 먼저다.
바로 무효화와 수면. 잠들어버린 성연을 침대로 옮긴다.
좋아. 고성연은 됐고.
다시 서울로 가서 본진 벙커로 향한다. 그리고 신영을 재우고 안아 든 뒤 게이트를 열어 수원으로 넘어왔다.
알몸의 그녀를 적당히 옷을 입히고 침대에 눕혔다. 좋아. 최신영도 됐어. 그럼 이제 스킬을 써볼까?
성연의 방으로 와서 잠든 그녀에게 스킬을 쓴다.
"기억 조작."
자. 과연 어떤 방식일까? 기억을 조작한다는 것에 대해 항상 궁금했었다.
사람의 기억이란 거 그렇게 우스운 게 아닌데.
기억을 읽는 것과 지우는 것은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냥 있는 기억들을 보여주기만 하고 그걸 삭제하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이건 다르다. 있는걸 바꾸는 작업이잖아?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 없는 걸 만들어 낼 수 있는지가 가장 궁금하다.
그게 가장 중요하기도 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엄청난 거니까.
기억 읽기와 크게 다름없는 상태. 근데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일단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본다. 설명 하나 없는 스킬이지만 이런 건 이제 익숙하니까.
한참 동안 별짓을 다 해본 덕분에 작동 방법을 조금은 알아낸 거 같다.
일단 있는 기억을 조작하는 방법. 이건 그렇게 어렵지 않다.
성연을 깨웠다. 그리고 나는 손에 마체테를 든 다음 그녀를 다시 재웠다.
그녀의 기억에 남은 마체테를 든 내 모습.
그걸 총으로 바꿨다. 방식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때 유행했던 AI 프로그램 쓰는 것과 크게 다를 게 없었으니까.
마체테를 총으로 바꾸겠다는 생각만 해도 알아서 마체테가 총으로 바뀌었다. 상당히 편리한 작업.
굳이 입으로 말을 하거나 타자를 안 쳐도 되는 건 정말 좋다.
근데 총 모양이 조금 이상하다. 총 모양이 상당히 두루뭉술하네.
내 기억을 베이스로 해서 그런가? 아니면 이 여자의 기억을 베이스로 하나?
어쨌든 내가 아는 건 공기총밖에 없긴 하지. 실제 총은 만져본 적도 없잖아.
총 말고 다른 거로 바꾼다. 음…. 식칼. 좋아. 식칼로 바꾸자.
식칼로 바꾼 기억은 두루뭉술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음. 좋아. 이정도면 됐어.
이걸로 된 건가? 된 거 같지? 사물 바꾸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네. 그럼 더 복잡한 것을 해볼까?
기억 조작은 재밌긴 한데 어렵다. 일단 손 가는 게 너무 많다. 하나하나 전부 손대기엔 상당히 어렵다.
이래서 영상 편집이 어려운 건가? 아니. 이건 영상 편집보단 CG 처리하는 거라고 봐야 하냐?
암튼 해본다. 손이 많이 가는 작업. 대신 효과는 확실하지. 게다가 영 이상하면 지워버리면 되고.
몇 번을 더 깨웠다가 재우면서 테스트를 하니 이미 있는 기억을 바꾸는 건 금방 익숙해졌다.
시간이 오래 걸릴 뿐 크게 어렵지는 않다.
이제 제일 중요한 것. 없는 기억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해봐야지.
지금까지 해본 결과 기억을 새로 만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긴 하다.
다만 있는 기억을 바꾸는 것보다 훨씬 더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지.
일단 짧게 짧게 해본다.
여기 벙커에서 모두를 죽였을 때 이후를 깨끗하게 지워버린 성연의 기억.
그 하얀 캔버스에 기억을 새로 쓱쓱 그려 넣는다.
내가 가장 먼저 만들어낸 기억은 성연이 나를 보고 반하는 기억.
기억 자체를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매혹에 걸린 여자들은 많이 봤으니까.
근데 처참하게 실패했다. 사람의 기억은 역시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가 보다.
잠에서 깨자마자 나를 보고 머리를 부여잡는 성연.
그래. 내가 오바했네. 어떻게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보고 그렇게 쉽게 반하겠냐.
게다가 이 여자는 남편도 있었던 유부녀고 아이 생각이 머리에 가득한 여자다.
뜬금없이 나에게 반하는 건 말이 안 되지. 내가 멍청했어.
이번엔 조금 공을 들여서 기억을 만들어봤다. 빌드업을 조금 해서 서로 친해지는 기억을 차근차근 만들어본다.
근데 역시 안된다. 없던 호감을 갑자기 만드는 건 그리 쉽지 않다. 기억 조작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그리 쉽게는 안 되네.
결국, 상당히 양보해서 호의 정도로 타협하기로 했다.
게다가 기억을 많이 만들수록 제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단순하게, 간단하게.
최소한의 기억 조작만 하고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현실에서 친해지는 게 낫겠어.
그날의 기억. 그것만 새로 만들었다.
내가 난입해서 최씨 일가를 다 죽인 그날의 기억. 그건 이미 삭제해버렸지만, 기억 조작을 위해 새로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게 있는 데다가 지난번에 성연의 기억도 봤으니까.
사실과 거의 비슷하게 다시 기억을 새로 만든다. 다만 침입자는 내가 아니다. 대충 복면 쓴 남자로 만들었다.
내 역할은 그 복면 쓴 괴한을 막는 역할. 그리고 마지막에 성연이 괴한의 알 수 없는 일격에 기절하는 기억으로 만들었다.
좋아. 공들여서 만든 기억이니 제발 문제없이 돼라.
시계를 보니 벌써 저녁이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정말 오래 걸리네.
오래 걸린 만큼 잘 됐으면 좋겠다. 자. 이제 깨워볼까?
나는 바로 페이즈 아웃을 썼다.
잠에서 깨어나는 성연.
페이즈 아웃 세상에서 그녀를 보는 내 심정은 약간 그거 같다.
자신이 만든 발명품에 전원을 넣는 매드 사이언티스트?
페이즈 아웃 세상에서 혼자 '제발 머리 아프다고 하지만 마라'라고 중얼거린다.
눈을 뜨더니 몸을 살짝 일으킨다. 그러면서 머리를 부여잡는다.
아. 실패인가? 씨발. 진짜 쉽지 않네.
근데 반응이 조금 다르다. 실패했다면 머리가 아파서 몸을 잔뜩 웅크릴 정도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성연은 그저 손으로 머리를 짚는 수준이다.
됐나? 된 건가? 제발 괜찮아져라! 자체 수복하란 말이야! 뇌야! 너는 할 수 있어!
그렇게 머리를 짚은 성연은 다시 손을 내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다행히 머리 아픈 건 넘어가나 보다. 오오. 그렇다면 일단 반은 성공이지!
이정도면 됐다. 어쨌든 스킬이 먹혔다는 말이니까.
완전히 깨어난 성연. 그리고 가만히 앉아 뭔가를 생각한다.
아마 자신의 상황을 곱씹는 거겠지?
그렇게 잠깐 앉아있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방안을 둘러보고 조심스럽게 방 밖으로 나갔다.
벽을 통과해서 그녀를 따라간다.
두리번거리던 성연은 최 회장의 방으로 다가가더니 방에 노크했다.
뭐 하는 거야? 죽은 거 알잖아?
당연히 아무런 반응이 없을 거다. 그런데도 잠자코 기다리던 그녀는 살며시 방문을 열어본다.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차례차례 방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신영의 방. 거기 들어간 성연은 잠들어있는 신영을 보더니 흠칫 놀란다.
가까이 다가가 신영을 살펴보는 그녀.
마스터 수면으로 잠들어 있기에 쉽게 깨우지는 못할 테지만…. 깨우면 안 되는데?
아직 신영이는 기억 조작 안 했다고.
그렇게 한참 신영을 살펴본 성연은 한숨을 푹 쉬더니 밖으로 나왔다.
휴. 다행이네. 그냥 넘어가서.
그리고 계속 벙커 안을 돌아본다.
위층으로 올라가 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밖으로 나가는 엘리베이터로 가본다.
당연히 작동이 안 되지. 될 리가 있나.
그러더니 이번엔 비상구로 가본다.
거기 역시 흙으로 막아놨기에 열릴 리가 없다.
한참 여기저기 확인해본 그녀는 결국 로비에 있는 인공정원으로 나왔다.
힘없이 의자에 앉은 그녀. 혼란스러운지 멍하니 앉아 정원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있다.
저건 신영이가 하던 짓인데. 저 여자가 저러고 있네.
가만히 그렇게 있던 여자는 벌떡 일어나더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는 그녀. 자신의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다.
이야. 이런 상황에서도 운동한다고? 대단한데? 일단 고민할 일이 있으면 운동부터 하는 건가?
어쨌든 됐다. 기억 조작은 잘 써진 거 같다. 머리 안 아프면 됐지. 물론 제대로 스킬이 써졌는지는 이제 확인해 봐야 하지만.
운동하는 그녀를 두고 조금 기다린다.
자연스러움이 중요해. 지금부터는 모든 것 하나하나가 호감도작이다.
잘못 끼워진 단추. 그걸 제대로 끼울 수 있게 되었잖아? 물론 기만에 가까운 짓이지만…. 뭐. 죽이는 것보단 낫겠지.
성연이 운동을 마치고 샤워를 끝낼 때까지 기다린다. 오늘은 화장 안 하네. 머리가 복잡해서 그런가?
구석 자리에서 페이즈 아웃을 풀고 시간을 확인한다. 저녁 9시 정각. 딱 좋네. 이제 나가보자.
연기를 해야 하는데…. 잘 할 수 있을까? 그래도 발연기만 안 하면 되겠지. 자연스럽게 하자. 자연스럽게.
다급하게 뛰어서 성연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갑자기 열린 문에 깜짝 놀라는 성연. 그리고 나를 보더니 놀란 눈이 된다.
하지만 이전에 나를 봤던 경멸의 표정이 아니다. 순수한 놀람. 그리고 미약하게 섞여 있는 반가움과 호의.
"일어났어요!? 맙소사! 어떻게 된 거예요!?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