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487화 (48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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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노비치

이바노비치의 별장 네 곳.

한 곳은 프랑스의 니스라는 곳. 근데 프랑스라니. 세상이 이 꼬라지인데 그 먼 곳까지 가진 않았을 거 같다.

다른 한 곳은 스위스. 여기 역시 마찬가지. 국외는 조금 힘들지. 그렇지 않나?

세상이 망하기 전에는 이놈들에게 프랑스나 스위스는 그냥 옆 동네와 같은 느낌이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다른 두 개의 별장은 흑해 연안에 있었다.

하나는 크림반도에 있는 별장. 그리고 또 한 곳은 소치. 둘 다 제법 들어본 이름이다.

하나는 러우전쟁때. 하나는 동계올림픽인가? 그런 거 했던 곳일 텐데.

뭐하러 비슷한 곳에 별장이 두 개나 있나 싶었는데 두 개의 목적이 확연히 다르다.

크림반도에 있는 별장은 질펀하게 노는 용, 소치에 있는 건 가족 여행용.

그럼…. 지금은 어떨까.

프랑스와 스위스는 제외하자. 물론, 거기로 갔을 수도 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타국까지 갈 이유는 없을 거 같다.

그곳에 있는 별장에서 하룻밤 자면 한 살씩 어려진다거나 이런 게 아닌 이상 2,000킬로미터가 넘는 거기까지 갈 이유가 없다.

그러니 무시해도 되겠어. 그러면 크림반도와 소치인데.

소치는 가족 별장이다. 근데 딸은 여기 있어. 그럼 거기도 아닐 거야. 결국, 마지막 남은 곳은 크림반도.

거리를 재보니 1,200킬로미터. 국내이긴 하지만 여기도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거기까지 가는 기차가 있다고는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멀다. 과연 이놈이 그 먼 곳까지 갔을까?

내가 너무 별장에 집착하고 있는 거 같다. 별장으로 간 게 확실한 것도 아닌데 너무 별장만 신경 쓰는 거 같아.

다시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나는 지금 너무 편협하게 몰입하고 있어.

생각해보면 굳이 내가 그 녀석을 쫓아다닐 필요는 없다.

어차피 녀석의 집은 알고 있잖아? 그러니 기다리기만 하면 언젠가는 돌아올 거야.

그리고 이고르를 아는 놈이 이바노비치만 있는 건 아닐 거다. 그러니 굳이 멀리까지 돌아다닐 생각하지 말고 차분하게 녀석을 기다리자.

이곳 루블료프카에는 이바노비치의 측근 녀석들도 더 있는 거 같으니 기다리면서 그놈들도 조져보는 게 나을 거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일단은 이 위치를 저장한 뒤 벙커로 향했다.

복수가 늦어진다고 안나가 닦달하는 거 아니잖아? 그러니 차근차근 가자. 괜히 서두르면 될것도 안돼.

집으로 돌아와 내 집이 주는 따듯함과 안도감을 느끼며 씻기 위해 옷을 벗는데 문이 살그머니 열린다.

"안나? 안 잤어?"

조용히 방안으로 들어오는 안나. 내 앞에 서더니 빙긋 웃으면서 말한다.

"지금은 아침이에요."

"어? 아. 맞다. 시차."

그래. 모스크바와 한국은 시차가 나지. 잠깐…. 그럼 계산이 어떻게 되나. 이런 건 조금 헷갈리는데.

음. 모스크바가 여기보다 대략 여섯 시간 늦구나. 아. 그래. 이해했어. 귀찮네. 이거.

"그럼 이제 막 일어난거야?"

"일어난 지는 조금 됐죠. 당신 방에서 소리 나길래 와봤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내 침대에 걸터앉는다.

"그래? 암튼 난 씻고 자야겠어."

그렇게 말하고 간단하게 씻고 나오자 내 침대에 누워있는 안나.

나를 보더니 두 팔을 벌린다.

그런 안나에게 안겨 눕자 내 머리를 꼭 끌어안아 준다.

가슴에 얼굴이 파묻히니 바로 기분이 좋아진다.

역시 러시아 여자들이 아무리 이쁘다고는 하지만 안나가 최고야. 비교가 안 돼.

"피곤하죠? 어서 자요."

"그래. 그래야지. 근데 너는?"

"조금 이러고 있죠. 당신 잘 때까지."

"고맙네. 나야 좋지."

가슴에 파묻혀서 내 목소리가 조금 작게 들린다.

그렇게 눈을 감고 있으니 종일 돌아다녔던 피로가 스르륵 몰려온다.

이대로 있으면 수면을 안 걸고 잠들 수 있지 않을까? 될 거 같지? 지금 느끼는 안나의 온기라면 가능할 거 같아.

해보자. 입을 다물고 숨을 고르게 천천히 쉬는 거야. 잡생각은 비우고 지금의 행복함만 생각하자. 그리고….

처음엔 실패한 줄 알았다. 주변이 캄캄했고 나는 계속 안나를 그대로 안고 있었으니까.

근데 머리가 맑다. 눈꺼풀도 가볍고.

손을 뻗어 스마트폰을 집어 시계를 본다. 오후 네 시? 잔 거 맞네.

후후. 또 수면을 안 쓰고 잠들다니. 얼마만의 승리야.

잠과의 전투에서 오랜만에 승리해서 그런가? 기분이 좋다.

승리에 혁혁한 공을 세운 안나. 근데 얘는 잠깐만 이러고 있겠다고 그러더니 계속 이렇게 있어 준 거야?

그래서 내가 푹 잤나 보네. 고마워라. 그럼 포상을 줘야지.

입고 있는 상의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체온으로 따끈따끈한 옷 안. 그리고 얼굴에 닿는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두 개의 가슴.

안나에겐 안 좋은 냄새 비슷한 것도 안 났다. 그저 내 코에는 더없이 향기로운 몸 냄새일 뿐이다.

축복받은 여자야. 겪어보니 알 것 같다.

몸에서 냄새 안 나는 여자가 이렇게 좋은 거라니.

부드러운 가슴에 얼굴을 마구 비비니 이보다 더 좋은 아침이 있을까 싶다. 아. 여기 시간으론 아침이 아니지.

너무 내 기준으로 생각했네.

암튼, 내 움직임 때문에 잠에서 깬듯한 안나.

"그렇게 좋아요?"

가슴만큼이나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

"당연히 좋지. 근데 왜 안나가고 여기 계속 있었어?"

"글쎄요. 당신 자는 모습 보니 너무 좋아서. 근데 저도 자버렸네요."

살짝 쑥스러운 듯한 말투. 수줍어하는 그 모습이 귀엽다.

그래서 계속 얼굴을 비빈다. 가슴도 좋고 얼굴에 닿는 꼭지도 좋아. 행복해. 천국이야.

더 야한 짓은 별로 하고 싶지 않다. 지금은 그냥 이렇게 적당히 자극되는 선에서 꽁냥거리고 싶어.

"근데…. 나 궁금한 게 있어."

"뭔데요?"

가슴에 닿는 내 얼굴과 숨결에 그녀의 목소리도 달짝지근해졌다.

녹을 것 같은 목소리. 듣기 좋네.

"안나가 하는 말이 나에겐 존댓말처럼 들리거든? 러시아어에도 존댓말이 있나?"

"존댓말…. 있죠. 저도 그렇게 쓰고 있고요."

"아. 그래? 영어처럼 존댓말 같은 거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네."

"한국어처럼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에요. 그래도 분명히 있죠."

"그렇구나."

"근데 저도 제 말이 어떻게 통역돼서 전달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내 귀에는 당신이 러시아어로 말하는 것처럼 들리니까."

"아. 그런가. 이거 복잡하네."

"그래서 이젠 그냥 신경 쓰지 않기로 했어요. 뜻은 통하는 거 같으니까."

"그래. 그러면 됐지. 이렇게 대화할 수 있게 해주는 게 어디야."

"그쵸."

내 말에 동의하는 안나는 나를 꼭 끌어안았다.

가슴에 얼굴이 깊게 파묻혀 숨이 막힐 정도였지만…. 오히려 행복하다. 가슴에 숨 막혀 질식하면 그것 또한 의미 있는 죽음 아닐까?

그렇게 한참을 안나와 장난치다 다시 나갈 준비를 했다.

"다녀올게."

"조심히 다녀와요."

손을 흔들며 배웅해주는 안나를 두고 바로 러시아로 순간 이동했다.

사방이 환한 아침이라 눈이 부신다. 게다가 지금 나는 공중에 있어서 더 그렇다.

아마 한국에서 밖에 있다가 여기로 왔으면 되게 이상했겠네. 거긴 지금 슬슬 해가 넘어가고 있을 테니까.

암튼 바로 탐지를 돌려본다. 여전히 지상에 잡히는 많은 기척.

천리안과 투시를 켜고 이바노비치의 저택들 둘러본다.

내가 돌아간 다음 간밤에 뭐 별일은 없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저택들 둘러보는데…. 얼래? 이게 뭐야?

저택에 아는 얼굴이 있다. 이바노비치. 그놈이다.

어머나? 이게 웬 횡재야? 왜 니가 거기 있어?

아. 그래. 니놈 집이니까 니가 거기 있는 건 당연한 거지. 그래. 내가 이상한 소리를 했네.

아무튼 개이득이다. 먹잇감이 알아서 나타나 주다니. 크. 괜히 별장이니 뭐니 이런 곳에 가본다고 했으면 뻘짓할 뻔했네.

좋아. 녀석이 저기 있으니 이제 어떻게 침투할지만 생각해보자.

너무 아침이라 침투하기가 쉽지는 않을 거 같은데…. 뭐 알게 뭐냐. 나는 저놈만 납치하면 되는걸.

무슨 방법을 쓰든 이고르에 대한 정보만 얻으면 된다. 그 정도 빈틈을 노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겠지.

어차피 녀석도 누가 자기를 노린다는 생각 같은 건 안 할 테니까.

근데 녀석의 표정이 굉장히 심각하다. 뭐지? 똥 싸는 게 시원찮은가?

아니면 간밤에 밤마실 나갔던 게 영 맘에 안 들었나?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저 녀석이 왜 저렇게 똥 씹은 표정인지 알 수가 없다.

아. 왜 도청 스킬은 없냐고. 기왕 인권 침해를 하기로 했으면 본격적으로 하지. 왜 이렇게 어설픈 거야.

그렇게 지켜보고 있는데 경호원 하나가 이바노비치가 있는 방의 문을 노크했다.

문 쪽을 바라보고 뭐라고 외치는 이바노비치. 경호원은 문 안으로 들어가 깍듯한 자세로 뭔가를 말한다.

표정이 확 바뀌는 녀석. 그러더니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다.

경호원이 앞장섰고, 가면서 다른 경호원에게 손짓하자 갑자기 분주해지는 녀석들.

금방 차가 준비되고 녀석은 바로 차에 탔다.

앞자리에 경호원이 하나 탔고, 다른 녀석들이 뒤에 준비된 차에 탄 뒤 그대로 출발한다.

어딜 저렇게 급하게 가지?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암튼 나야 고맙다. 알아서 밖으로 나가주면 노리기가 더 쉬워지지.

운전기사 하나, 옆에 탄 경호원, 이바노비치, 뒤에 따라오는 차에 탄 경호원 여섯.

합이 아홉. 음. 뭐 무난하네. 게다가 차로 이동이라니. 고맙게.

스킬 같은 건 없나? 게이트 같은 걸 쓸 수 있는 놈은 없나 보지?

하긴 경호원들 실력은 그정도로 높진 않지. 게이트는 티어9 스킬이잖아? 저 경호원들은 티어6이나 7정도 되는 놈들이고.

아. 조금 더 높을 수는 있겠네. 아무래도 저놈이 데리고 다니는 놈들의 수준은 막심보단 더 낫겠지.

자. 저놈들을 어떻게 납치해볼까.

차를 타고 가는 이상 쓸 수 있는 옵션은 많다. 일단 뒤에 있는 경호원들은 별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게이트 한방이면 뚝딱이잖아? 미국 가다가 저장해둔 태평양 한복판에 빠트려주면 끝이니까.

아. 아니다. 안돼. 그럼 코인 회수가 힘들어. 다른 방법을 쓰자.

어디 덤프트럭 같은 거 없나? 수납으로 담아와서 깔끔하게 드랍 시키면 뭐…. 한방이지.

근데 장소가 좀 그렇다. 지금 녀석들은 도시 한복판을 가로질러 가고 있으니까.

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몰래 쓱싹하기가 힘들다. 이런 건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해야지.

어차피 녀석들이 어딜 저렇게 급하게 가는지도 궁금하니 일단은 지켜본다.

혹시 모르니 주변을 뒤져서 덤프트럭 하나는 수납에 넣어놓자 언제라도 떨어뜨릴 수 있게.

경호원 녀석들을 언제든지 이세계로 보낼 준비는 해야지. 트럭 한 방이면 너희도 갈 수 있어!

그렇게 이바노비치가 탄 차를 따라가는데…. 어딘가 익숙한 기분이 든다.

뭐지? 왜 익숙하지?

잘 살펴보니 여기는 거기다. 막심의 주택 근처.

얼래? 왜 이쪽으로 가지? 이 근처에 볼일 있나?

주변을 살펴 막심의 저택이 있던 곳을 찾아봤다. 대충 이쯤이었던 거 같은데. 아. 저기다.

그리고 나는 어처구니없는 것을 발견했다.

분명 비어있어야 할 막심의 저택. 어제 내가 다 죽였잖아? 거기 있던 카밀라는 물건을 들고 도망갔고?

근데 그 여자가 엉망이 된 얼굴로 몸이 묶인 채 막심의 방에 무릎 꿇려 있었다.

그걸 지켜보고 있는 네 명의 남자.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저 여자 왜 저기 저러고 있어?

저택 입구 앞에는 어제 카밀라가 타고 갔던 막심의 차도 있다.

잡힌 거야? 벌써? 분명 고속도로 같은 걸 타고 도망가는 것까지 확인했는데?

아니, 어떻게 잡힐 수가 있지? 도망간 지 얼마나 됐다고? 해봐야 한 여덟 시간? 아홉 시간? 그 정도밖에 안 지났다.

아무리 도망가는게 어설프다고 하더라도 그 시간 만에 잡힐 수가 있나? 지금은 CCTV나 뭐 이런 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와. 씨발. 러시아 놈들 능력 좋네. 어떻게 잡아 왔지?

하긴 생각해보니 구소련의 KGB가 있던 나라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능력이 좋겠지.

맨날 스킬로만 사람을 판단하니까 원래 사람들이 살던 가락을 자꾸 무시하는 거 같다. 원래도 스킬 없이 잘 살았던 사람들인데.

어쨌든 이바노비치 저놈은 막심의 저택으로 가는 거 같다. 방향이 그래.

상당히 아끼는 녀석이었나 보지? 직접 저렇게 갈 정도면?

기억에서 봤을 땐 그저 돈줄이라 잘해주는 것처럼 보였는데. 내가 제대로 안 봤나 봐.

어쨌든 이바노비치는 막심의 저택에 도착했고, 바로 차에서 나와 집 안으로 들어간다.

카밀라가 잡혀있는 방까지 주저 없이 성큼성큼 들어가는 녀석.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무릎 꿇고 있는 여자를 발견하더니 그대로 가서 발로 후려 찼다.

얼굴을 차이고 나동그라지는 카밀라.

휘유. 화끈하네.

보통은 드럽게 똥폼잡고 앉은 다음 부하들을 시키지 않나?

저 양반도 성격 좀 괄괄한 편인가 봐.

쓰러진 카밀라가 몸을 일으키자 거칠게 턱을 붙잡고 뭐라고 뭐라고 외치는 이바노비치.

자. 이 상황을 어쩐다.

이바노비치와 같은 차에 타고 온 경호원 하나. 원래 방 안에 있던 남자 넷.

막심이 데려온 경호원 여섯 중 두 명은 문밖에 서 있고 남은 네 명은 저택 주변을 살펴보고 있다.

운전기사 녀석은 차에 남아있고…. 좋아. 일단 상황은 그런데.

다들 땅에 있으니 크게 어려울 건 없다. 근데 다들 너무 흩어져있네. 그래도 지금이 기회니까 일단은 잡아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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