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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르체바 저택
이글거리는 듯한 안나의 눈동자.
이 여자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평상시엔 상당히 차분한 그녀지만 지금은 확실히 텐션이 올라가 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녀가 태어난 나라, 그녀가 잃어버렸던 자신의 집.
그곳에 돌아왔으니 저렇게 의욕이 앞서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앞장세울 수는 없다.
딱 사고 치기 좋은 상태잖아? 머리에 피가 몰리면 될 일도 그르칠 수 있다. 내 눈으로 그 꼴은 못 보지.
"마침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
내 말에 눈을 반짝이는 안나. 역시 평상시와는 달라. 너무 초롱초롱하잖아.
"일단 지금은 벙커로 돌아가. 승희, 미나, 세아랑 같이."
"네?"
자기가 잘 못 들은 거로 생각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안나.
“돌아가라고. 지금은 아냐. 지금은 돌아갈 때야.”
“하…. 하지만.”
역시 내 말에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안나.
하지만 그녀가 말을 더하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 친다.
"나는 이제 막 이곳에 도착했고, 아직 주변이 어떤지 전혀 확인해보지 않았어. 뭐, 기본적인 것들은 살펴봤지만 아직 알아볼 게 많아. 그러니 준비가 다 될 때까지는 집에 가서 기다려줘. 그편이 나에겐 훨씬 나아."
안나의 표정은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대놓고 거부하거나 반항하진 않는다.
내 말이 틀린 게 아니니까. 내가 이상한 거로 억지 부리는 게 아니잖아?
"하지만…. 당신이 혼자서 고생하게 둘 수는 없어요. 그리고 여기는 제가 도움이 될 거에요. 비록 오래되긴 했지만 그래도…."
"알아. 안나 니가 살던 곳이니 도움이 되긴 하겠지. 니가 나를 돕고 싶은 마음도 이해해. 하지만 지금은 돌아가 있어. 너를 못 믿는 다거나 거추장스럽게 생각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건 알 거라고 생각해. 그렇지?"
"...네."
"나는 단지 효율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거야. 니 도움이 있으면 도움 되는 것이 있겠지. 하지만 그만큼 제약도 커. 특히 지금처럼 마음에 조급함이 들어있으면 하지 않던 실수도 하게 되어있어. 니가 예전과 다르게 힘이 생겼기에 니 손으로 해결하고 싶어하는 건 알지만…. 지금은 조금 참아. 어차피 때가 되면 너와 함께 할 테니까."
단호한 나의 말에 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세아라면 여기서 두어 번 정도 더 개겼겠지만, 안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신기하다면 신기한 여자. 나에 대한 믿음이 만땅인 그녀다.
아. 이건 내 생이 뿐일 수도 있지. 사람의 속마음은 그 누구도 모르는 거니까.
활짝 열어서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고.
하지만 안나는 믿는다. 얄랑하고 무책임한 신뢰 그런 것보다는 그녀의 기억을 읽었던 게 컸다.
자신의 마음과 자신의 기억도 속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없겠지. 만약 그게 가능하면…. 죽어줘야지.
그 정도 정성이면 죽어줄 만해.
어쨌든 안나는 내 말에 거스르지 않는다. 그건 알 수 있어.
봐봐. 결국, 포기하잖아.
"...하아. 알겠어요. 당신 말대로 할게요."
그녀의 대답에 나는 싱긋 웃어줬다.
내 미소가 그렇게 끔찍하진 않나 보다. 내가 웃자 그녀도 잔뜩 굳혔던 얼굴을 풀고 힘없이 웃는다.
"그럼…. 지금 바로 가야 하는 건 아니죠? 기왕 왔으니…. 조금 돌아봐도 괜찮을까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안나.
본인도 자기가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는 걸 깨달았나 보네. 역시, 현명한 여자야.
"물론이지. 니 집인걸."
"그래요. 하하. 내 집이죠."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한 안나. 그러더니 나와 세 여자를 바라보며 웃는 얼굴로 말한다.
"자아. 그럼…. 스타르체바 가문의 저택을 구경하시겠어요?"
그렇게 말한 그녀를 따라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된 저택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겉으로 봤을 때도 그럴듯한 대저택이었던 곳. 역시 그럴 만했다. 이곳은 생각보다 오래되고 유서가 깊은 곳이었다.
최소 300년은 된 건물이라는 저택. 어쩐지 느낌 있더라니.
겉만 그렇게 화려한 곳은 아니었다. 집안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잘 살았던 흔적들이 안나를 다시 보게 만들 정도다.
이미 다 망가지고 부서지고 더럽혀진 것들이지만 그래도 그런 것들 사이에서 안나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도 굉장히 특이한 경험이다.
"여기가…. 제 방이었던 곳이에요."
2층으로 우리를 이끈 안나가 문을 열며 말하자 잔뜩 녹슨 경첩이 끼이이익하고 대답하며 열린다.
"이야. 안나 정말 잘살았구나?"
지금까지 계속 봐왔지만, 안나의 방이었던 곳을 보니 확 체감되는지 승희가 감탄을 하며 방 안으로 들어간다.
"공주님 방 같네. 캐노피 침대라니."
미나 신기하다는 듯 방 안으로 들어가며 침대 쪽을 바라본다.
안나의 방은 누가 잔뜩 뒤진 듯 어질러져 있긴 해도 다른 곳에 비해 그다지 엉망진창이 되진 않았다.
아마 여기는 유리창이 깨지지 않아서 그런지 그나마 괜찮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먼지는 잔뜩 쌓여있지만.
각자 신기한 듯 방을 살펴보는 여자들. 나는 그런 그녀들을 보다가 방 한가운데 있는 무언가를 봤다.
덮개에 씌워져 있는 무언가. 근데 뭔지 알 거 같다. 이건 그거다. 피아노.
그쪽으로 다가가니 안나가 내 뒤를 따라온다. 바로 덮개를 잡아 스윽 당기니 먼지가 조금 날리며 덮개가 스르륵 벗겨진다.
새까만 그랜드 피아노.
분명 관리 안 되고 방치되어있었을 텐데 덮개로 덮여있었기에 반짝이는 광채를 유지하고 있다.
겉보기로는 전혀 이상이 없어 보이는 물건. 상당히 좋아 보인다. 악기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보더라도 되게 좋아 보여.
그런 피아노로 다가온 안나. 몸통 커버를 열더니 건반 커버도 열고 길고 가느다란 손으로 건반 하나를 눌러본다.
띵
생각보다 커다란 소리에 방을 둘러보던 승희와 미나, 세아가 모두 이쪽을 바라본다.
띵 딩
이번엔 건반 두 개.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다가오는 여자들.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마치 처음 피아노를 쳐보는 어린아이가 건반을 눌러보는 것처럼 도부터 도까지 건반을 눌러본다.
맑고 청아한 피아노 건반 소리. 안나의 입가에 피어오르는 미소.
"오..."
세아가 짧게 감탄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엔 안나가 양손으로 짧게 연주를 했으니까.
크고 울림 있는 소리. 짧은 연주였지만 그 소리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안나의 미소는 더 크고 화사해졌고 이제는 아예 피아노 의자를 꺼내서 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제대로 치기 시작하는 안나.
안나의 피아노 연주는 지난번에도 들어본 적 있다.
벙커 위에 있는 집. 거기에 있는 피아노로 했던 연주.
근데 그때랑은 느낌이 다르다. 막귀인 내가 들어도 이 연주는 뭔가가 느껴질 정도다.
건반에서 나온 음이 영혼을 흔드는 느낌? 이야. 내가 이런 표현도 할 수 있네.
근데 그건 나만 그런 게 아닌가 보다. 승희와 미나, 세아도 지그시 눈을 감고 안나의 연주에 빨려 들어간 듯이 심취한 모습.
악기란 건 참 신기해. 어떻게 이렇게 되지?
그저 소리를 섞어 놓은 것뿐인데. 단지 소리를 이어놓은 것만으로도 어떻게 이렇게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거야?
끝나지 않기 바라고 있던 연주가 끝났을 때는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그건 다른 세 여자도 마찬가지. 안나의 연주를 처음 들은 것도 아닌데 다들 감동한 표정으로 진심을 담은 손뼉을 친다.
그런 우리들의 반응에 부끄러운 듯 얼굴을 살짝 붉히는 안나.
"아이…. 그렇게 칭찬받을 정도는 아닌걸요."
"무슨 소리야. 이렇게 잘해놓고선."
"실수 잦았어요. 게다가 건반 몇 개는 음도 조금 이상하고요."
"걱정 마. 우리는 그런 거 못 알아채. 그치? 아 미나는 알아챘나?"
"아니요. 저도 몰라요. 제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도 넌 가수였잖아."
"가수는 가순데…. 피아노 치거나 작곡을 하는 수준은 아니니까요."
손을 절레절레 흔들면서 겸손한 척하는 미나.
그러는 동안에도 안나는 자신의 피아노를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인다.
"썽철."
"응?"
"이거 피아노. 가져갈 수 있어요?"
"이거? 물론이지. 얼마든지."
"고마워요. 그 외에도 가져가고 싶은 건 더 가져가고 싶어요."
"그래. 뭐 원한다면 이 방 안에 있는 거 통째로 가져갈 수도 있어."
"아….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며 피아노에서 일어나는 안나.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두 손을 쫙피고 말했다.
“다들 뒤로 좀 물러나볼래?”
순순히 말을 듣는 네 여자. 전부 뒤로 두어걸음씩 물러난다.
"자. 피아노가 사라지는 마술!"
아까 떨어진 피아노 덮개를 펄럭하고 펴서 피아노 위에 덮는다.
아직 남아있는 먼지에 네 여자가 눈을 찌푸리며 코를 막는 모습.
"핫. 핫!"
덮개가 피아노를 덮자마자 바닥에 수납을 열어 피아노를 삼켰다.
그대로 피아노가 사라지고 덮개만 펄럭거리며 바닥에 떨어진다.
"콜록콜록. 오. 그럴듯한데? 나도 저런 거 연습해봐야겠다."
손을 휘휘 저어 먼지를 걷어내면서 세아가 흥미롭다는 듯 관심을 보인다.
확실히 수납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정말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일이긴 하지.
물론 우리는 다 알고 있으니 별 반응은 없지만.
세아가 저런 반응이라도 보여준 게 고맙네.
그렇게 방 안을 조금 더 살펴본다.
안나는 자신의 책상과 옷장을 살피며 뭔가를 찾기 시작했고, 승희와 미나, 세아는 그런 안나의 옆에서 다른 물건들을 보며 재잘거린다.
그러다가 옷장 안에서 뭔가를 꺼낸 안나. 여자들이 감탄을 지른다.
궁금증이 생겨 슬쩍 가서 안나의 등 뒤에서 바라보니 뭔가가 잔뜩 있었다.
확실히 여자들이 눈이 돌아갈 만한 물건들이긴 하네.
보석함? 뭐 그런 느낌인 거 같은데 그냥 봐도 귀하게 보이는 물건들이 제법 있다.
"그런 게 어디 있었데? 방안은 이미 누군가 다 뒤진 거 같았는데."
"제 비밀장소에요. 다행히 거긴 아무도 못 뒤졌네요."
"비밀장소? 그런 것도 있어?"
"그럼요. 저기 옷장 안에 이중 구조로 되어있는 비밀 서랍이 있거든요."
"이야. 그런 것도 있어? 신기하네."
아무리 봐도 진짜 보석인 거 같은 액세서리들. 뭔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거울. 빗. 시계. 기타등등.
안나가 확실히 잘 살긴 했나 보다. 이 집에서 나왔을 때가 열다섯인데 그런 애한테 저런 물건이 있을 정도라니.
하긴, 이 집을 보면 저 정도는 당연하겠지. 근데 아직도 매칭이 잘 안 된단 말야. 안나가 부잣집 딸래미였다는 게.
안나가 꺼낸 물건들을 이쁘다고 꺅꺅거리며 구경하는 세 여자.
솔직히 그런 쪽에는 별 관심이 없기에 나는 방안을 슬금슬금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근데 아무리 엉망진창인 방이더라도 어떻게 보면 여긴 여자애 방인데, 이렇게 막 둘러봐도 되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책장 쪽을 살펴보는데 바닥에 뭔가가 떨어져있는 것이 보였다.
저건…. 사진인가본데?
사진 특유의 뒷면. 나는 손을 뻗어서 사진을 집어보았다.
사진 두 장. 한 장은 가족사진이었다. 가운데 안나로 보이는 여자아이. 그 옆에 남자아이. 양쪽의 부모님들.
아. 역시 안나의 어머니도 이뻤네.
미모가 남달라. 그러니 안나 같은 딸을 낳았겠지만.
두번째 사진은 어린 안나였다. 근데 몇 살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어리긴 어린데 나이 가늠이 쉽지 않네.
대략 초등학생 나잇대의 사진인 거 같은데…. 미친 듯이 귀여운 사진이다.
머리에 약간 큰 밀짚모자를 쓰고 세상 해맑게 웃고 있는 얼굴.
와. 이건 좀 심장 폭행인데? 돌았네. 어떻게 이런 귀여움이 있지?
"야야. 이것 봐라."
나는 내가 발견한 사진을 모두에게 보여줬다.
승희와 미나, 세아는 사진을 보더니 사랑에 빠진 눈이 되며 꺅꺅거린다.
다들 귀엽다고 난리를 피우는 통에 안나가 허둥거리며 얼굴을 붉힌다. 이야. 안나의 저런 모습도 보네.
자신이 살던 곳에 와서 그런가? 확실히 평상시의 안나보다 조금 흐트러진 모습이 있어.
서로 가지겠다고 아등바등하다가 사진을 찢어먹을 뻔했지만, 결국은 내가 다시 가져갔다.
순순히 안 내놓는 세아였지만 결국은 내가 가위바위보에서 이겼다.
근데 쟤는 왜 안나 사진을 저렇게 탐내는 거야. 웃긴 녀석.
그렇게 잠깐 소동이 지나고 가족사진을 안나에게 슬쩍 건네줬다.
의아한 표정으로 사진을 받아 보더니 잠시 멈칫하는 안나.
"아…. 고마워요. 진짜 고마워요."
순식간에 목소리가 촉촉해진다. 다행히 눈물까진 흘리지 않았지만, 그 직전까진 갔나 보다.
눈시울이 금세 붉어지네.
그렇게 구경을 마저 하다가 필요한 물건들을 모두 챙겼고 그건 내가 수납에 넣어 벙커로 가져왔다.
피아노는 위에 있는 집 거실 한가운데에 일단 놨다. 거기 말고는 놓을 곳이 없으니까.
정리가 끝나자 나에게 다가와 내 두 손을 꼬옥 잡는 안나.
"무리하지 마요. 천천히 해도 돼요. 복수…. 물론 중요하지만 나는 당신이 더 중요해요."
안나의 진심 어린 모습. 왠지 그런 모습을 보니 짠하다.
그런 모습에 오히려 빨리 이고르 그놈을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부디 꼭 살아있길 바라는 마음도 강하게 들고.
"알았어. 그럼…. 다녀올게."
"네. 절대 무리하지 마요. 절대로. 꼭이에요."
"알았어. 걱정 마."
그렇게 다시 나만 러시아로 돌아왔다.
저렇게까지 말하면…. 이상하게 청개구리가 되고 싶어지잖아?
무리하지 말라고 강조를 몇 번이나 하는 거야? 그러면 그럴수록 무리하고 싶어진다고.
마지막으로 저장해놓은 게 안나의 집이기에 그곳을 나와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일단 마피아 놈들부터 조져봐야겠지?
이고르야.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살아있어라. 부탁이다.
부디 건강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 주길 바란다. 꼭이다.
그래야 안나가 니놈을 건강하지 못하게 만들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