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모스크바
러시아산 암내녀를 죽이지 않은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예전 같았으면 얄짤없이 죽였을 텐데. 왜 그랬을까? 왜 살려줬을까?
물론 기억 읽기와 기억 삭제 덕분에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으니 안 죽일 수 있으면 안 죽이는 게 이치에 맞긴 하다.
나에 대한 정보가 새나가는 게 싫어서 죽음으로 입을 막은 거니까. 굳이 죽이지 않아도 된다면 안 죽이는 게 맞지.
근데 사실 생각해보면 안 죽일 이유도 없다. 죽이는 게 오히려 이득이지. 미량이라도 코인을 얻을 수 있으니까.
나도 잘 모르겠다. 힘이 생기고 나니까 알량한 자비를 베푸는 건가?
그런 마음은 없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건방진 짓거리를 하는 거지. 같잖게.
어휴. 또또 속으로 이런 생각 하고 있네.
복잡한 생각은 잠시 뒤로하고 해야할 일에 집중하자.
이런 거 혼자서 생각하고 있으면 머리 아파져.
암내녀 이후 몇 명의 여자들을 찾아 기억을 더 읽었다.
다행인 건 다른 여자들은 암내가 없다. 아니 있긴 있는데 저 정도는 아니었어. 그러니까…. 참고 버틸만한 정도?
그래서 그런가 딱히 야한 생각은 안 든다.
아마 이런 여자들을 직접 처음 본 거면 호기심에라도 따먹어봤겠지만 나는 이미 익숙하잖아?
이런 여자들보다 훨씬 더 이쁜 안나가 있으니까.
총 다섯 명의 기억을 읽고 난 뒤 한가한 곳으로 가서 읽었던 기억들을 정리한다.
세상이 망한 이후의 러시아의 상황에 대해서. 근데 그다지 복잡할 게 없어서 정리할 시간이 그리 오래 필요하진 않다.
안 그래도 남자가 부족한 러시아다. 게다가 생각보다 미개한 나라인 곳.
웃긴 건 다섯 명의 여자들의 공통점은 남자들에게 맞은 경험이 있다는 거다. 신기하지.
여자를 패는 게 이렇게 자연스럽다니.
세상이 망하기 전, 전쟁 덕분에 세계 2등이라는 나라의 진면목이 여실하게 드러나 버린 러시아.
그 세계 2등의 타이틀도 천연자원과 군사력 때문에 지탱되던 곳이다.
근데 세상이 망한 다음엔?
일거에 군인들이 사라져버린 곳. 핵을 비롯한 군사력이 순식간에 제로로 변해버린 나라.
천연자원? 그딴 것 역시 살아가는 데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세계 2위의 강대국이었던 러시아는 세상이 망한 뒤 그 어느 곳보다 큰 타격을 받았다.
그냥 추운 곳에 사는 머저리들이 된 거잖아?
상남자니 뭐니 씹 마초인 척했지만 결국은 혈기를 주체 못 하는 머리 모자란 놈들.
게다가 이놈들은 세상이 망하기 전에도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깊게 고민 안 하던 놈들이다.
그런 놈들에게 스킬이라는 훌륭한 수단이 생겼다. 그런 스킬마저도 장난처럼 휘둘렀던 놈들이 부지기수.
그간의 문제를 이젠 주먹이 아닌 스킬로 해결한 러시아 놈들은 빠르게 서로를 죽고 죽였다.
남자들만.
의외로 러시아 여자들은 똑똑했다. 뭐랄까. 험난한 삶을 살아오면서 겪은 지혜? 뭐 그런 건가?
어쨌든 상남자인 척하던 남자 놈들은 지들끼리 열심히 바보짓을 해댔고, 서로를 죽였다.
그런 와중에도 차분하게 생계를 유지하던 러시아 여자들.
결국, 러시아는 남녀 비율이 상당히 차이가 나버리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안 그래도 2차 세계대전 이후로 극복이 불가능했던 남녀 비가 완전히 씹창나버린 셈.
그렇기에 러시아는 다시 조용해졌다.
혼란이 사라지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각자 흩어져서 조용히 생계를 유지한다.
기존의 남성성이 거세된, 그나마 똑똑한 남자들과 억척스럽게 살아남은 여자들.
그런 이들은 도시를 떠나 교외로 흩어져서 차분하게 농사를 지으며 살기 시작했다. 그게 지금 보는 이런 사람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다차'라고 하는 러시아 특유의 문화 때문이다.
주말이나 휴가철에 교외의 별장에서 머물며 채소를 재배하거나 하는 생활.
별장이라고 하니 상당히 고급진 느낌이지만 실상은 주말농장에 가까웠다.
내가 맨 처음 봤을 때 느낀 게 맞았네. 진짜 주말농장이 맞았어.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나라에서 교외에 토지를 무료로 할당해줬기 때문이다.
씨발. 땅덩이 넓은 놈들은 이런 짓도 가능하구나.
하긴 여기도 공산 국가였지. 그러니까 이런 게 가능하지.
어쨌든 러시아의 상황은 그렇다.
죽을 놈들은 이미 적당히 죽었고 살아남은 녀석들만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곳.
게다가 거기에 마피아 같은 걸 끼얹는다.
마피아. 이름만 들으면 정말 그럴듯하지만…. 결국 이놈들은 조폭이나 다름없는 놈들.
하는 짓도 비슷했다. 모스크바 교외를 돌아다니면서 보호를 명목으로 식량을 뜯어갔다.
하여간…. 다들 그놈이 그놈이야. 창의적인 놈들이 없어.
어쨌든 나야 편하다. 이고르 그놈도 하는 짓은 비슷하니 마피아 이놈들만 쳐 죽이다 보면 정보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지들끼리는 커넥션같은 게 있겠지. 맨땅에서 삽질하는 것보단 뭐라도 찔러볼 게 있는 건 좋잖아?
그렇게 정보를 준 녀석들을 뒤로하고 다시 이스트라를 향해 간다.
첫 번째 마을…. 아니 마을이라고 하긴 그렇고 사람들이 살던 곳을 지나니 그 후로도 몇 개의 그런 거주지가 보였다.
대체로 비슷비슷하네. 다 이런 식인가 봐. 소규모로 모여 살면서 농사를 베이스로 동물을 키우고 사는 생활.
하긴, 나라가 바뀌었다고 기본 메카니즘이 달라지진 않겠지. 농경과 목축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생활이니까.
도시에서의 삶이 의미 없어진 지금은 과거로 회귀하는 게 맞다.
병원도 필요 없고 학교도 의미 없잖아? 그러니 저렇게 사는 게 가장 효율적이긴 해. 최소한의 방어만 가능하다면.
어차피 여기 사람들은 마피아 덕분에 쓸데없이 서로를 공격하거나 하진 않는 거 같으니까 말이지.
그렇게 얼마 더 가서 드디어 이스트라에 도착했다.
간판에 보이는 이스트라라는 단어. 캬. 역시 통역이랑 번역은 최고야. 몇 번을 칭찬해도 부족함이 없어.
영어조차 제대로 못 하던 내가 이젠 러시아 간판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읽고 있잖아?
어쨌든 도착은 했는데…. 여기서 어떻게 가야 할지는 모르겠다.
주소라도 알면 좋겠는데, 아니지. 주소를 알아도 찾아갈 수 있을까? 쉽지 않을 텐데.
생각해보니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그냥 안나를 부르면 되잖아? 어차피 큰 위험은 없어 보이니까.
바로 이 위치를 저장하고 벙커로 순간 이동했다. 그리고 바로 밖으로 올라가 테이밍 숙련을 하고 있던 안나를 찾는다.
"안나."
"어? 일찍 왔네요?"
나를 보며 해맑게 웃는 안나. 나는 그런 안나에게 다가가서 꼭 끌어안았다.
"뭐에요? 무슨 일 있어요?"
내 행동에 순간 놀랐다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나를 꼭 안아주는 안나.
어….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나는 그냥 냄새를 맡아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암내는커녕 향긋한 향기가 나는 몸. 역시, 훌륭해. 근데 냄새 맡기 위해 안았다고 하면 안 되는 분위기네.
잠깐을 그렇게 안고 있다가 떨어지고 안나를 바라본다.
걱정과 호기심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모습.
"가자. 같이 갈 곳이 있어."
"네? 갑자기 어딜요?"
"어디긴. 이스트라지."
이스트라라는 말에 안나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린다.
이정도로 동요하는 안나는 처음 보는 거 같다. 워낙 심한 일을 많이 당했기에 어지간한 일은 가벼운 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여자.
그런 안나 마음이 요동치는 게 보인다.
고작 단어 하나가 만들어 낸 물결치고는 그 파문이 상당히 커서 그런가? 그녀의 눈동자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잖아?
"이스트라…. 요?"
"어. 가자."
그렇게 말하고 바로 게이트를 열었다.
내가 게이트를 열자 승희와 미나, 세아도 슬금슬금 이쪽으로 다가와 물어본다.
"뭐에요? 어디 가요?"
"안나랑 어디 가는 거예요?"
"어디 가는 데?"
아직 아무말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 안나. 그런 안나를 힐끔 보고 승희와 미나, 세아에게 설명해준다.
이스트라. 안나가 살고 있던 곳이라고 말하니 세 여자의 표정이 '확' 하고 변한다.
"세상에! 안나!"
"어머나."
"어어…. 진짜? 도착 한 거야?"
세 여자에게 떠밀리다시피 게이트로 들어가는 안나. 그렇게 모두 게이트를 넘어갔고, 나도 넘어간다.
게이트를 닫고 안나를 바라보니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그녀가 보인다.
약간 생각했던 거랑 다른 표정인데? 하긴 그렇지?
"니가 살던 집 앞에서 딱 열었으면 좋았을 텐데. 찾아갈 엄두가 안 나서 말야."
"아니…. 에요. 약간 헷갈리긴 하는데…. 어딘지 알 거 같아요."
그러더니 앞장서서 가기 시작한다.
그런 그녀에게 파티 초대를 주고 승희와 미나, 세아에게도 파티를 걸었다.
그리고 모두 다 투명화와 비행을 쓰고 안나를 따라간다.
처음엔 약간 헷갈리는지 헤매더니 어느 순간부터 주저 없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안나.
이스트라 시내인 곳을 지나 교외로 빠지는 길. 길을 따라 낮게 날아간다.
어느새 좁아진 길, 양옆으로 우뚝 솟아있는 이름 모를 가로수. 호젓한 버스 정류장.
그렇게 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가 엄청나게 커다란 나무 앞에서 멈춰섰다.
지금은 이파리가 막 나기 시작한 나무. 하지만 앙상한 가지만으로도 이 나무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아마 한여름에 이파리가 무성하게 자라면 얼마나 웅장하게 보일지 기대가 될 정도.
그런 나무를 바라보면서 잠시 멈칫하던 안나는 바로 꺾어서 길옆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때는 잘 포장되어 있었을 길.
지금은 여기저기 갈라지고 막 피어나는 식물들로 인해 너저분해 보이지만 예전에는 상당히 이뻤을 거 같다.
그런 길을 따라 쭉 들어가니 커다란 저택 하나가 나왔다.
마치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대저택.
고풍스러움과 웅장함, 그리고 멋스러움을 간직했을 그 저택은 오랜 시간 방치되어있어서 그런지 상당히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커다란 철문을 지나 들어가니 먼저 보이는 분수대. 그 분수대를 돌아 들어가니 화려한 저택 입구가 보였다.
그런 저택으로 홀리듯이 들어가는 안나.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알기에 그냥 놔뒀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 반쯤 부서진 입구를 지나쳐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 방치되어있었고 여기저기 약탈을 당한 흔적이 보이기에 상당히 엉망진창인 내부.
하지만 그런 것들을 감안하고 봐도 여긴 상당히 고급스러운 곳이다.
로맨스 판타지에서나 나올 법한 귀족의 저택? 그런 느낌이야.
일단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난간이 대리석이잖아?
"예브게니. 디아나."
갑자기 입을 여는 안나.
"미하일, 다닐, 이반나, 크세니아…."
안나가 중얼거리는 건 아마도 사람 이름 같다.
누구의 이름일까? 그래도 예브게니와 디아나라는 이름은 안다.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
뒤에 이름은 누군지 모르겠다. 아마도 이 저택에서 같이 살았던 사람들의 이름이겠지.
그렇게 이름을 읊조리더니 안나. 그러더니 그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돌아왔어요. 내가."
그녀의 볼을 따라 흐르는 눈물 한 방울.
그런 눈물이 턱 끝에서 방울지더니 바닥으로 떨어진다.
마치 슬로비디오를 보는 듯한 상황. 애처로운 그녀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옆을 보니 승희와 미나는 이미 눈시울이 붉게 변해 울고 있다.
세아 역시 눈이 빨갛게 변해있으면서도 마치 안 울 거라는 듯 이를 악물고 있고.
잠시 그렇게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안나.
그 모습은 마치 성화와 같다. 신을 향해 기도하는 성녀 같은 느낌?
그렇게 기도를 마치고 일어난 안나.
어떻게 위로를 할까 속으로 걱정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그녀는 웃고 있었다.
"고마워요."
"어?"
"고맙다고요. 여기로 다시 데려다줘서. 그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워요. 정말로."
그러더니 두 팔을 벌려 나를 안아준다.
평소에는 내가 안았는데…. 이렇게 안기는 것도 좋네. 자주 안아달라고 해야겠어.
"아직 복수는 못 했는걸. 복수한 다음에 고맙다는 소리를 들어야지."
내가 너스레를 떨자 안나는 당치 않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고 말한다.
"아니에요. 복수는 복수고 돌아오는 건 돌아오는 거죠.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바라고 있었는지 모를 거예요. 폐허가 돼 있을 것도 알았고 엉망진창이 되어있을 것도 알았죠. 근데도 항상 나는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었어요. 열다섯, 그렇게 집을 떠나게 된 이후로 계속."
나를 안아주고 조용히 속삭이는 안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의욕이 넘치는 것 같았다.
목소리에 실린 단호함. 그리고 굳은 의지.
안 그래도 단단한 마음을 가진 안나다.
그런 그녀가 이곳에 온 다음 각오가 더욱 단단해진 것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
"모두 당신 덕분이에요. 썽철.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나도 같이 움직일 수 있어요?"
차분한 모습이긴 하지만 상당히 서두르는 안나.
으. 큰일이네. 이렇게까지 해놓고 벙커로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하면 과연 말을 들어주려나?
아무래도 혼자 다니는 게 편한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