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모스크바
모스크바를 처음 본 소감은 도시가 참 이쁘다는 거다.
널찍한 평지. 큼직한 도로와 건물. 알록달록한 지붕들.
상당히 맘에 드는 곳이다. 진짜 외국에 왔다는 게 확 체감된다.
중국의 도시는 외국이라는 느낌이 전혀 안 들었다. 그 좆같은 간판만 빼면 한국이랑 크게 다른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여기 모스크바는 확실히 다르다. 생긴 것도 건물 양식도 생소하니 더 그런 거 같다.
게다가 크기는 드럽게 크다. 서울도 절대 작은 도시가 아니었는데 말이지.
어쨌든 도시 감상은 이제 끝. 나는 관광객이 아니잖아?
나는 복수자…. 아니지 복수의 인도자. 캬. 이름 멋지네. 게임 어디선가 본 거 같은 이름인데 기억은 안 나네.
암튼, 안나의 복수를 위해서 이 먼 곳까지 날아온 거다. 한가하게 구경하고 있을 시간은 없어.
이대로 안나를 부르고 싶지만,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어떤 위험이 있는지 모르잖아? 상대의 수준도 전혀 모르고?
그런 곳에 안나를 냅다 데리고 올 생각은 전혀 없다.
작은 실수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세상인데 쓸데없이 리스크를 짊어지고 갈 필요는 없지.
일단 먼저 정보 수집이 우선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지지 않는다는 말. 정말 좋은 말이야.
지금 세상에 더없이 필요한 말이잖아?
근데 사람이 없다.
휑한 도시. 유령도시가 되어버린 모스크바.
뭐, 그건 어느 정도 이해한다. 여기 남아있어 봐야 먹고 살기는 힘들겠지.
서울도 그랬잖아? 도시에 남아있는 메리트는 모두 사라질때가 됐어.
으음. 어쩐다. 정보를 얻어야 하는데 이렇게 아무것도 없으면 조금 난감한데.
일단은 교외로 빠져봐야지.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 안나의 집이 있던 곳. 뭐였더라 도시 이름이? 어디 적어놨었는데.
아. 그래. 이스트라. 모스크바의 북서쪽. 거리는…. 50킬로? 뭐 금방이네. 이제 50킬로 정도는 우습지.
그렇게 날아가는데 도시의 모양이 조금 특이하다는 걸 알았다.
중앙 쪽으로 날아오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도시…. 동심원 구조로 만들었네?
멀리서 비스듬히 봤을 때는 잘 몰랐던 구조. 나는 바로 하늘 높이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봤다.
이야. 그렇네. 원형으로 도시를 만들어놨어. 이렇게 보니 확실히 알겠네.
그럼 저 도시 중앙엔 뭐가 있지? 아. 설마 그게 있나? 그…. 뭐였지? 붉은 광장. 그래. 그거.
호기심이 생겨 바로 그쪽으로 날아가 본다.
그리고 아래에 펼쳐진 풍경.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건물 하나.
이야. 이게 그거구나. 나 저거 봤어. 테트리스 배경 아닌가?
특이한 모양의 지붕. 마치 열기구 같은 모습. 아니…. 아이스크림? 아무튼, 특이한 건물이 보인다.
지도를 보니 성 바실리 성당이라고 되어있다. 얼래. 뭐야. 성당이었어? 저렇게 생겼는데 성당이라고?
어쨌든 나름 유명한 건물을 보니 신기하다. 이제야 진짜 다른 나라에 와있다는 느낌이 확 든다.
으음. 근데 아직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게 신기하네. 분명 여기에 메테오 같은 걸 떨어뜨리고 싶은 또라이 새끼가 하나쯤은 있을 법한데.
남들이 안 부쉈으니 내가 부술까? 만약 내가 메테오 같이 한방에 건물을 전부 날릴 수 있는 스킬이 있었다면…. 부쉈을까? 모르겠다.
안 쓸 거라는 확신이 없어. 아마 썼겠지. 부쉈을 거야. 물론 그 전에 베이징에 있는 자금성이 먼저 박살 났겠지만.
근데 이건 다들 비슷한 생각하지 않나? 나만 특이한 건 아닌 거 같은데.
그렇게 나 자신을 합리화하며 주변을 더 돌아본다.
특이한 건물과 넓은 광장. 음. 여기가 붉은 광장인가 그건가 보네.
간판을 읽을 수 있게 되었기에 마치 관광객이 된 것처럼 여기저기를 살펴본다. 그리고 익숙한 이름이 보인다.
크렘린궁? 오. 여기도 유명하지. 내가 이름을 알면 유명한 거야.
하지만 크렘린궁은 반쯤 박살 나 있다. 아니. 반쯤 박살 난 것인지는 자세히 모르겠다. 나는 원래의 모습을 모르니까.
어쨌든 흉물스럽게 변한 건물. 으음. 누가 이렇게 해놨을까? 하긴, 러시아라면 여기저기 원한이 많았겠지.
그러고 보니 붉은 광장도 여기저기 박살 난 곳이 몇 군데 있다.
저긴 뭔데 왜 박살 냈지? 여기서 한바탕 치고받고 한 건가?
근데 저건 전투로 부서진 느낌이 아니다. 누가 저기만 철저하게 박살 낸 느낌.
가까이 다가 가보니 이유를 알았다. 레닌의 묘라고 되어있는 곳. 아. 그래. 그럼 이해한다.
이게 그거구나? 레닌 시체가 유리관 안에 들어있는 거기?
웃기네. 이렇게 공격을 당했는데 저 성당은 안 부서진 게 용해. 운이 좋네?
하긴…. 러시아와 레닌에 원한 있는 사람은 있어도 성당에 원한이 있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
아니다. 종교만큼 적이 많은 단체가 없는데. 러시아 종교가 뭐였지? 러시아 정교회던가?
관광하러 온 게 아니라면서 신나게 구경하고 있는 내가 너무 웃긴다. 복수의 인도자 어쩌고 했던 게 부끄러울 정도네.
너무 본격적으로 구경만 하고 있잖아? 나도 진짜 웃긴 새끼라니까.
그렇게 바로 하늘로 날아올라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도심을 벗어나 구불구불한 강을 따라가는 길.
도시를 관통하고 있는 강. 특이하네. 무슨 뱀같이 생겼어. 뭔 강이 이렇게 굽어 있냐.
강 이름도 모스크바강이네. 진짜 성의 없다. 진짜.
그렇게 강을 따라서 가는데….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오. 나이쓰. 역시 도심을 벗어나니 바로 사람이 나오는구먼.
기척은 제법 많다. 한 스무명 정도? 좋아. 어디 한번 보자. 러시아 원주민들은 뭐 하고 사는지 한번 보자고.
약간 우리나라의 펜션 같은 느낌이다. 아니. 주말농장? 뭐 그런 느낌.
주변에 광대한 땅은 다 농사짓는 땅인가 보다. 이놈들은 주식이 밀이니 밀밭인가? 아마 그렇겠지?
밀 농사는 비닐하우스가 안되나? 그럼 얘들은 그냥 농사를 짓는 건가? 신기하네. 그래도 식량 커버가 되나?
뭐, 그런 것까진 내가 알 필요 없지. 알아서 잘 먹고 잘살았을 거야. 그러니 지금까지 살았겠지.
천리안과 투시로 마땅한 타겟을 살펴본다. 누구든 혼자 있기만 하면 된다. 기왕이면 젊은 여자로.
어쨌든 기억 읽기를 하려면 손은 대야 하니 젊은 여자가 좋지. 게다가 러시아 여자잖아?
아직 살아남아 있으면 나름 이쁜 축에 속하겠지?
한참을 둘러보다가 괜찮은 타겟을 찾았다.
나이는…. 짐작이 안 간다. 서양 애들은 외모만 보고 몇 살인지 도통 알 수가 없어.
어쨌든 방 안에 혼자 있는 여자. 재봉틀로 뭔가를 만들고 있다.
바로 블링크, 탐지로 주변을 살피고 다른 사람들과 거리가 꽤 되는 것을 확인한다.
좋아. 그러면 바로 페이즈 아웃.
방안으로 침투해서 해제와 동시에 무효화와 매혹을 건다.
음. 근데 뭐 이러냐. 겉보기엔 깨끗한 집 같은데 냄새는 좀 별로네.
"잠깐 멈춰봐."
내 목소리가 들리자 재빨리 고개를 돌리는 여자. 그리고 나를 보더니 활짝 웃는다.
으음. 뭐 나쁘진 않은 외모네. 몸매도 괜찮고. 근데 막 개쩔게 이쁘다는 느낌은 아니다. 그냥 인기 많아 보인다…. 정도?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세요?"
의자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더니 사근거리며 말하는 여자.
으음. 이건 또 특이하네. 보통 매혹 걸면 내가 말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는 게 보통인데.
러시아 여자라 그런가? 하긴 뭐 그런 게 어느 정도는 반영이 되겠지.
"으음. 침대 없나? 소파나?"
일하는 방인지 침대나 소파가 없다. 벽을 뚫고 옆방을 봐도 안보인다. 뭐 구조가 이래?
"1층으로 내려가야 해요."
"아. 그래? 그럼 됐다. 앉아서 하지 뭐."
방금까지 여자가 앉아있던 의자에 앉아 여자보고 내 무릎에 앉으라고 했다.
굉장히 기뻐하며 냉큼 무릎에 앉는 여자. 그런 여자의 옷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만지려는데…. 갑자기 뭔가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냄새. 뭐지? 이 냄새는?
시큼한 냄새? 아니다. 이건 그거야. 유통기한 지난 치킨 무 국물을 청소 안 한 싱크대 하수구에 버렸을 때의 냄새.
머리가 핑 돌고 코가 뻥 뚫리는 게 느껴진다. 와. 씨발. 이건 뭐지?
"야. 일어나."
내 말에 재깍 일어나 어정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여자.
내 말투에서 뭔가 심상찮음을 느꼈나 보다. 하긴 지금 내 표정은 아마 볼만할 거야. 어우. 씨발. 헛구역질이 나오려고 하네.
"더 뒤로 가. 저기 벽 끝으로 가."
여자가 멀어지자 그나마 좀 나아졌다. 어우. 근데 아직도 머리가 띵한 거 같은데.
아까 페이즈 아웃을 해제했을 때 느꼈던 냄새. 그게 뭔지 알 거 같다. 이 씨발…. 이년의 암내였어.
암내가 방 안에 가득 차서 이런 냄새가 나는 거야? 미쳤네 진짜.
손으로 이마를 꾹꾹 누르며 잠시 고민한다.
기왕 이렇게 온 거 기억 읽기는 해야지. 근데 이 거지 같은 냄새 때문에 저 여자에게 다가갈 용기가 안 난다.
그냥 죽여버리고 다른 여자를 찾을까? 근데 그 여자도 이 지랄이면 어쩌지?
냄새가 정말 지독하긴 했나 보다. 갑자기 여자가 무서워질 정도니.
그런 나를 눈치 보며 몸을 사리고 있는 여자. 하. 진짜 골때리네.
암내가 지독해서 죽였다는 것도 존나 웃기잖아? 씨발. 한국에서 살 때는 절대 느껴본 적 없는 일인데.
살다 살다 이런 일을 겪네.
외국 여자들이 아무리 이뻐도 썩은 치즈에 담가놓고 숙성시킨 냄새가 나면 답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씨발. 이쁜 여자가 냄새나봐야 뭐 얼마나 난다고 유난을 떠냐고 생각했던 나다.
그래서 안 할 거야? 기회 되면 존나 감사합니다 하고 절한 다음 먹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잖아?
다른 녀석들이 햇반 드립을 치면서 한 그릇 뚝딱 이런 말 하는 걸 킬킬거리면서 봤단 말이지.
근데 그 말 철회다. 아니…. 이건 그냥 냄새가 아니잖아. 생화학테러라고.
잘 알지도 못하고 떠들었던 나에 대해서 반성한다. 내가 실수했어. 이건 장난으로라도 맡을 만한 게 아니야.
그리고 이런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안나는 정말 축복받은 존재란 걸 알았다.
그래. 안나가 이 정도로 암내가 났으면 그런 일도 못 했겠지. 아마 오래전에 죽지 않았을까?
그나저나…. 냄새. 이걸 어쩌지.
그렇게 여자를 노려보며 고민하다 수납에 좋은 게 있다는 걸 생각해냈다.
방독면. 그걸 꺼내서 쓰자 여자의 인상이 조금 찌푸려진다. 매혹에 걸렸는데 저 정도 반응이라니.
아마 본인도 이거에 스트레스를 받나 보지? 아니…. 받아야지. 이런걸 모른 척하고 살면 씨발 양심 없지.
"여기 앉아. 재봉틀 바라보고."
방독면을 쓴 내가 딱딱하게 말하자 여자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내 말을 들으며 재봉틀 앞에 섰다.
그런 여자에게 수면을 건다. 재봉틀이 놓인 책상에 쓰러지는 여자.
방독면을 쓴 나는 훅훅거리며 여자에게 다가갔다.
분명 냄새는 필터링 됐을 텐데, 가까이 다가가자 냄새가 나는 착각이 든다.
씨발. 방독면까지 뚫는 냄새라면 그냥 죽이는 게 맞지. 세계 평화를 위해서.
그렇게 조금 떨어져서 기억 읽기를 시작했다.
최대한 가까이 안 붙으려고 손끝만 겨우 등에 대고 기억 읽기를 하는 내 모습을 다른 누가 봤다면 저게 무슨 짓이냐고 웃었을 거다.
나도 내가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진짜…. 어이없어.
재빨리 대충 알아볼 만한 것만 빠르게 읽어본다.
근데 자꾸 마음이 조급해지는 건 나도 막을 수가 없다. 당장이라도 방독면이 뚫릴 것 같은 불안감.
살면서 이렇게 초조해 본적이 있었던가? 정말 웃기네. 어처구니없게.
적당히 기억 읽기를 마치고 손을 뗐다. 나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선 뒤 방독면 안에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 여자가 이 시간에 여기서 혼자 있는 이유를 알았다. 그녀의 유난히 심한 액취증. 그래서 혼자 있던 거다.
이 여자라고 혼자 있고 싶어서 혼자 있는 게 아니었어.
그런 걸 보고나니 괜히 연민의 감정이 든다.
아니…. 여지껏 그렇게 사연 같은 거 신경 안 쓰고 픽픽 죽여왔으면서 고작 암내까지고 불쌍한 마음이 들다니.
나도 정말 제정신이 아닌거 같아. 어처구니가 없네.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이 여자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거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게 정말 연민인지, 아니면 동정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 여자를 안 죽이고 떠날 방법이 있기에 이 기구하고 어이없는 여자의 생은 조금 더 이어지도록 둔다.
기억 삭제로 내가 등장하기 직전부터 아예 기억을 싹 지웠다.
그리 오래 있던 건 아니기에 그냥 남김없이 싹 지우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기억 삭제가 끝나고 바로 페이즈 아웃을 쓴다.
수면이 풀리면서 빼꼼 눈을 뜨는 여자.
재봉틀을 돌리다가 졸았다는 사실에 상당히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세수하고 다시 재봉틀 앞에 앉는다.
그런 여자를 끝까지 바라본 나는 그대로 바깥으로 벽을 뚫고 나왔다. 그리고 해제. 바로 블링크.
하늘 위에서 방독면을 벗어 수납 안에 넣고 신선한 공기를 폐부에 잔뜩 집어넣는다.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오를 정도로 숨을 몰아쉰 나는 그제야 조금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 진짜. 별 웃긴 경험을 다 하네. 러시아에 와서 제일 먼저 당한 공격이 암내 공격이라니.
진짜 웃긴 나라야. 어이없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