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470화 (470/703)

메모리

먼저 집으로 돌아가 파티를 푼다고 말하고 다시 수원으로 순간 이동했다.

음. 진짜 번거롭네. 다음부턴 파티 해제되면 알아서 테이밍한 동물들 거둬들이라고 해야겠다.

이걸 굳이 일일이 가서 말해주는 것도 웃기잖아.

통신 스킬을 얻으면 편하긴 할 텐데. 단지 그거 하나 얻자고 스킬을 소환과 전송까지 찍는 건 낭비가 너무 심해.

그게 무슨 활용법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능숙하게 신영을 재우고 성연을 매혹한다.

기억을 제법 지워놨는데도 여지없이 운동을 하는 성연.

머리가 복잡하든 어떻든 간에 몸은 계속 움직여야 직성이 풀리나 보다.

운동하는 거 보면…. 아마 나보다 더 체력이 좋지 않을까? 사실 내 운동 능력은 똥망이니까.

근데 웃긴 건 아무리 저렇게 운동을 열심히 하더라도 신체 능력 차이는 어떻게 할 수 없다.

저 여자가 아무리 용을 써도 나를 힘으로 이길 수는 없잖아? 그런 걸 보면 참 불공평한 세상이야.

아니다. 그건 세상이 망하기 전에도 똑같았지.

오히려 이렇게 망해버린 세상이 더 공평할지도 모르겠다. 스킬이면 뭐든지 가능하니까.

씻으러 들어간 성연. 침대에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다.

분위기 참 묘하네. 욕실에서 들리는 물소리가 상당히 야하다.

어휴. 이젠 별게 다 야하네. 아주 뇌가 여자로 절여져 있어.

근데 솔직히 그런 생각이 자꾸 든다.

세상이 망하기 전이라고 했다면 내가 이런 상황을 마주할 수 있었을까?

느긋하게 침대에 앉아서 여자가 샤워하는 소리를 듣는 상황이 있을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좀 자신 없는데.

만약 이런 상황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절대 느긋하지는 못했을 거다. 아마 겁나 떨렸겠지.

심장이 두근두근 했을 거야. 아닌가? 처음에만 그렇고 나중엔 느긋해질 수 있었겠지?

뭐…. 이제는 알 수 없지.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올 수는 없을 테니까.

물소리가 그쳤다.

샤워가 끝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기다리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다.

하여간…. 여자들은 뭐든지 느려. 아니 느리다기보단 챙기는 게 너무 많아.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려봤지만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남자보단 머리도 길고 여기저기 바르는 것도 많으니 어쩔 수 없을 거다.

남자들이나 수건으로 대충 쓱쓱 닦고 끝내는 거지.

욕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성연이 내가 있는 쪽으로 나왔다.

몸에 두른 커다란 타올, 머리에 두른 수건. 어제도 봤던 모습이지만 역시나 보기 좋아.

"오래 기다리셨죠?"

웃으면서 나에게 미소짓는 여자. 기억을 잔뜩 지워놨는데 크게 문제는 없나 보다.

아니면 매혹이 그런 자잘한 이상함 따위는 다 덮어버리는지도 모르지.

"거기 서봐."

"네?"

"거기 멈춰 서보라고."

"네."

욕실 문이 열려있어서 그런가? 수증기 때문에 방이 촉촉한 느낌이다.

아니면 저 여자 때문인지도 모르지. 방금 샤워를 하고 나와서 물기를 잔뜩 머금은 모습이잖아.

"그거 몸에 두른 타올 풀어서 앞을 열어봐."

"이렇게요?"

몸에 감아둔 수건을 풀어 양손으로 활짝 열어 재낀 성연.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살짝 11자로 생겨있는 복근, 훌륭한 골반, 매력적인 허벅지.

보고 있으니 눈이 즐겁다. 매혹이 걸려있기에 부끄러움 따위는 전혀 모르는 얼굴.

근데 매혹은 질렸어. 나를 향한 저 맹목적인 애정은 스킬로 만들어진 가짜잖아.

그런 애정은 필요 없다. 이미 볼 만큼 봤어. 재미없지.

무효화를 쓰고 바로 반사를 걸었다.

매혹이 풀리자 나를 바라보는 눈빛부터 달라진다.

바로 전까지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눈빛이 멸시와 혐오로 바로 바뀌는 모습.

하지만 거기에 혼란스러움이 섞여 있다. 아마도 내가 기억을 마구잡이로 지워놓은 탓이겠지?

그래도 아직 미국에 보내준다는 기억은 지우지 않았다.

다시 설명하기 귀찮잖아. 그건 마지막에 지워야지. 다른 기억들을 다 지우고 나면.

두 손으로 수건 양쪽 끝을 잡아 벌리고 있던 성연은 천천히 다시 수건으로 몸을 가렸다.

저 여자는 이런 상황이 되더라도 서두르거나 허둥대지 않는다.

뭐랄까. 기품이 있다고 해야 하나?

이미 볼 거 다 봤는데 황급히 가린다고 해서 뭐 달라질 것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거다.

그렇기에 저렇게 침착할 수 있는 거겠지. 조용히 분노와 증오를 속으로 삼키면서 말야.

"다시 열어."

내가 조용히 말하자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조금 더 매서워진다.

아. 오싹오싹하네. 저 경멸하는 눈빛. 그래. 차라리 이게 낫다. 나를 향한 가짜 애정보다는 진짜 분노가 훨씬 편해.

"미국. 가야지?"

얼굴에 떠오르는 체념의 빛. 살짝 떨리는 눈동자. 잘근 입술을 씹는 모습.

목욕 타올을 잡은 두 손이 천천히 열린다.

다시 드러나는 알몸. 몸은 아까와 전혀 달라진 게 없다.

하지만 이 분위기. 이 상황. 그게 다르다. 미칠 듯이 자극적인 상황이잖아?

이런저런 것들을 많이 겪어 이제는 어설픈 자극으로는 별로 기별도 안 간다.

그렇기에 적어도 이 정도 쓰레기 짓은 해야 짜릿한 느낌이 든다.

확실히 나는 대가리가 망가지고 있는 거 같아.

전두엽이 마비돼가고 있는 느낌이랄까?

약쟁이들이 이렇다던데. 마약 같은 걸 쓰다 보면 결국 내성이 생겨서 나중에는 치사량의 마약을 흡입해야 효과가 나온다고 하잖아?

비슷한 느낌인 거 같다. 정말 답이 없네. 이런 건 질병 해제로도 치료가 안될 텐데.

"가까이 와."

마지못해 다가오는 성연.

이 여자는 정말 아들을 찾기 위해 이런 짓도 마다하지 않고 내 말을 따르는 걸까?

그런 걸 생각하면 어머니의 모정이란 건 정말 대단한 거 같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자식을 위해 나같은 쓰레기 같은 놈의 말을 들어야 한다니.

나도 아이가 있었으면 이 기분을 느낄 수 있었을까? 물론…. 이것도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침대에 걸터앉은 내 앞에 서 있는 성연. 그런 그녀의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손으로 감싸자 무게감이 확 느껴지는 가슴. 살짝 닭살이 돋아 오돌토돌한 피부. 적당한 습기.

자신의 몸에 벌레가 닿은 듯한 표정을 짓는 성연.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하지만 나는 그런 성연의 사정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이 일 역시 지워질 기억이니까.

느긋하게 가슴을 만지작거린다.

집요하게 꼭지를 피해 가슴만 만지작거리는 나의 손.

그녀의 기분이 어떻든 몸의 반응은 어쩔 수 없다. 지속적인 자극이 누적되면 어쩔 수 없이 반응해버리는 게 몸이니까.

가슴을 만지는 나의 손 때문에 볼록 솟은 젖꼭지. 아직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성연.

꼭지를 엄지와 검지로 살짝 잡자 성연의 몸이 움찔하고 반응한다.

그리고 끔찍하다는 듯한 표정. 이런 나의 손길에 반응했다는 게 용납 안 된다는 듯한 모습.

근데 어쩔 수 없어. 속으로 애국가를 부른다고 해도 이건 못 참을 거야.

"다리 좀 벌려볼래?"

내 말에 눈을 뜨고 나를 노려본다. 만약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으면 나는 방금 한 일곱 번은 죽었을 거야.

"싫으면 관두고."

나야 아쉬울 것이 전혀 없는 상황.

성연의 손이 꽉 쥐어지는 게 보였고 정말 하기 싫은 표정으로 다리를 살짝 벌렸다.

"더."

다시 눈을 질끈 감고 다리를 벌리는 성연.

비교적 옅은 색의 음모 사이로 손을 쓱 집어넣었다.

손끝에 닿는 성연의 보지. 그 주름 사이를 손가락으로 살살 헤집는다.

한참 가슴을 만져놔서 그런지 약간 미끈거리는 보지. 그래. 이걸 보이기 싫었겠지.

나는 성연이 보란 듯이 손끝에 묻은 미끈거리는 액체를 손가락으로 비빈다.

끈적한 애액이 손끝에서 가늘게 붙었다 떨어진다.

내가 뭘 하나 싶어서 가늘게 눈을 뜨고 나를 봤다가 혐오하는 표정이 더 짙어지는 여자.

"입술 좀 그만 깨물어. 피 나겠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저 놀리는 거로 들리겠지? 성연의 표정을 보니 확실히 그렇다.

수치심과 분노, 각오와 인내가 잔뜩 뒤섞인 얼굴.

그런 그녀의 보지 속으로 손가락을 쑤욱 집어넣었다.

아이를 낳은 몸인데도 그런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하는 안쪽.

자신의 몸 안에 들어온 내 손가락의 감각을 느끼지 않겠다는 듯 결연한 표정을 짓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가?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안쪽을 헤집는다.

노력은 가상하지만, 몸이 이리저리 움찔거리는 건 막을 수 없는 성연. 그렇게 한참 손장난을 치다가 그대로 손을 뺐다.

장난은 그만 치고 이제 스킬 숙련해야지. 충분히 즐길 만큼 즐겼잖아?

나는 이 여자랑 섹스하고 싶은 생각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건 언제든지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바로 무효화와 매혹. 나를 보는 얼굴이 화사한 표정으로 바뀐다.

눈동자에 하트가 들어있는 듯한 모습. 쯧. 차라리 아까 표정이 더 낫다. 확실히 그래.

"누워."

"네."

내 말에 바로 침대에 눕는다. 야한 짓을 잔뜩 바라는 듯한 교태 넘치는 몸짓.

하지만 나는 수면을 걸었다.

그대로 잠들어버리는 여자. 그런 그녀의 가슴을 만지면서 기억 삭제를 시작한다.

조금 전의 기억. 그것부터 지웠다.

참 허무하지? 이렇게 기억을 지워버리면 방금 느꼈었던 그 증오와 분노는 어디로 사라질까?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누군가에게 기억 읽기와 기억 삭제를 당한다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겠지?

근데 기억 읽기는 고작 티어8 스킬이다. 누구에게라도 당할 수 있다는 이야기.

절대로 누군가가 내 몸을 만지게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내 기억을 읽어서 내 벙커 같은 게 드러난다면 거기 있는 내 여자들이 위험해지니까.

남자인 나는 고문당하다가 죽는 게 끝이겠지만, 그녀들은 아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게 해서는 안 되겠지.

물론 그녀들도 이제 많이 강해졌기에 쉽게 당하지는 않겠지만, 나를 제압할 수 있는 놈이 있다면 네 여자를 상대하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겠지.

티어가 높을수록 무조건 유리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런 일은 아예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해.

열심히 기억을 읽으면서 나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운다.

잘하면 오늘 다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기억이 점점 그날 근처로 가고 있어.

내가 벙커에 있는 모두를 쳐 죽였던 그 날. 성연이 나를 본 건 그날이 처음이니까.

그날까지만 가면 더는 지울 기억이 없겠지.

지우고 지우고 지운다.

기억이라는 게 이렇게 쉽게 지워진다는 게 정말 신기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인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냐?

무슨 블랙박스 영상을 지우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걸 스킬로 지울 수 있다는 게 너무 어이없다.

물론 손에서 불덩이가 나가고 번개를 떨어뜨리고 역병을 만들어 내는 것도 어처구니없지만, 나는 이런 스킬이 더욱 무섭다.

결국, 이 모든 세상은 통제가 가능하단 말이잖아.

스킬로 지울 수 있다는 건 이 스킬을 만들 수 있는 놈들에겐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거다.

스킬을 만들고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든 놈들. 그놈들이 지겨워지면 그냥 말 한마디로 모두 죽어버릴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지금 내가 이 지랄을 떠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다.

그들의 눈요기를 위해서 몸부림치는 벌레의 꿈틀거림일 뿐인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냥 생각을 멈췄다.

이런 걸 따져봐야 아무 의미 없다. 만들어진 세상이든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세상이든 나는 내 의지로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거다.

비록 그 의지라는 것도 누군가에게 유도됐을 수 있지만 그런 건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으니까. 이미 그런 건 더 생각 안 하기로 속으로 결심했으니까.

포션을 30병 정도 들이마셨을 무렵, 드디어 성연의 기억에서 그날이 나왔다.

그녀의 기억으로 바라보는 내 모습은…. 정말 개새끼 같다.

와. 진짜 심하긴 하네. 내가 한 짓이긴 하지만 정말 역겹긴 해.

근데 뭐, 이런 일이 한두 번이어야지. 그냥 내 평범한 일상인걸.

어쨌든 이 기억만 지우면 되잖아? 그렇게 기억을 지웠다.

이제 이 여자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야. 그럼…. 어디 확인해볼까?

무효화를 걸고 바로 매혹을 걸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나를 보고 미소짓는 성연. 그런 그녀를 보고 바로 물어봤다.

"내가 누군지 아냐?"

"아니요. 아니. 근데…. 아."

그러면서 머리를 움켜잡고 몸을 웅크리는 성연.

뭐지? 왜 이래?

속으로는 상당히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그냥 지켜봤다.

"으…. 아…."

"왜 그래?"

내가 물어보자 나를 힐끔 바라보는 성연.

"머리가…. 아윽."

어떻게든 내 질문에 대답하려 하지만 머리가 아픈 듯 제대로 대답을 못 한다.

기억 삭제가 뭔가 잘못됐나? 어제는 괜찮았던 거 같은데.

일단 뭐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기에 바로 수면을 걸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면서도 잠이 들어버리는 여자. 분명 잠이 들었는데도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보인다.

"젠장. 뭘 잘못한 거야?"

혼자 중얼거려봤지만 대답해 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아. 귀찮네. 뭔가를 잘못 건드린 거 같긴 한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잖아?

씨발. 이래서야 스킬 쓰는 의미가 없네. 이걸 어떻게 하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