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467화 (46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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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번째 스킬

스킬은 스킬이고 비행은 비행.

계속 날아가면서 스킬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의심의 씨앗. 뭘까? 씨앗이라면 심는 건데.

상대에게 의심의 씨앗을 심는다? 그럼? 의심이 자라나?

아무래도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이 안 든다. 목표에게 의심을 주입하는 거지. 근데…. 의심을 주입해서 뭘 어쩌자는 거지?

의심하게 만드나? 자신을? 아니면 사람을? 세상 모든 것을?

그런 거라면 약간 말이 되긴 한다.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든 놈들. 녀석들의 목표는 확실하다.

사람끼리 서로 죽이게 하는 것. 그렇다면 의심은 좋은 수단이긴 하지.

특히 여럿이 같이 있는 녀석들에겐 더더욱 좋다.

아무리 우정과 사랑, 신뢰와 믿음이 가득한 무리라고 해도 한번 의심이 생기기 시작하면 답이 없잖아?

자기 자신도 의심하는 게 사람이다. 그러니 이런 스킬은 제법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

근데…. 그냥 죽이는 게 더 쉽지 않나? 뭐하러 이렇게 힘들게 하지?

매혹과 마리오네트, 기억 조작까지 스킬로 있는데 굳이 의심의 씨앗 같은 것을 심을 필요가 있나?

티어18 스킬치고는 상당히 부실한 느낌이 든다.

아마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뭔가 더 대단한 게 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

찍어보지 않은 스킬에 대해서 추측하는 건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결국, 헛된 망상이 될 확률이 높으니까.

당장이라도 찍을 수 있는 스킬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배울 생각은 없다.

지금은 내가 원하는 스킬을 찍어야지.

기억 삭제.

기억 조작을 찍기 위한 선행 스킬. 그렇다고는 해도 이 스킬 역시 좋다.

기억 읽기를 써봤으니 알 수 있다. 여러가지로 활용도가 높은 스킬.

게다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도 있고.

['기억 삭제' 스킬을 배우는데 30만 코인이 소모됩니다. 배우시겠습니까?]

잠깐 고민했지만, 바로 예를 눌렀다.

하기로 생각한 이상 주저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 안 좋다고 하더라도 실망하거나 할 필요가 없다.

뭐가 됐든 마스터 하고 스킬 하나를 더 찍는 게 낫지.

그렇게 생긴 기억 삭제. 바로 써보고 싶지만 잠시 참는다. 오늘 비행은 마저 마무리 지어야지.

바다 위를 날면서 조금 이따가 스킬을 쓸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게 느껴진다.

새로 산 게임 소프트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같은 느낌.

빨리 집에 가서 해보고 싶은데 집이 너무 먼 상황? 대충 그런 느낌이다.

근데 어쩔 수 없지. 빨리 비행을 마치는 수밖에.

근데…. 기억 삭제면 내 기억도 삭제할 수 있지 않을까?

기억 읽기야 내 기억을 내가 읽는 건 말이 안 되니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기억 삭제는 다르잖아?

내 기억도 기억이니까…. 삭제가 되지 싶은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번 해본다. 가능하다면 숙련하는 게 상당히 편해질 테니까.

"기억 삭제!"

애석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쳇. 혼자 날아가면서 숙련하기는 글렀네.

안 써지면 어쩔 수 없지. 스킬 만든 놈들이 그렇게 정했는데 내가 투덜거려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어.

스킬에 대한 건 이제 됐어. 일단 날자.

날만큼 난 다음 가서 스킬을 써보는 거야. 궁금해도 조금 참자고.

블링크를 쓸까 하다가 이따 스킬을 얼마나 쓸지 몰라서 일단은 그냥 날았다.

심심한 바다를 바라보며 쌩으로 네 시간.

오늘의 목표 500킬로미터를 채운 나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아. 질러도 상관없네? 어차피 아무도 없는 바다 한복판이잖아?

"으아아악!"

소리를 질렀더니 조금 속이 시원해진 느낌이다. 됐어. 이제 그럼 스킬을 써보러 가자고.

바로 수원으로 순간이동 했다.

비행장. 탐지에 걸리는 두 명의 기척.

자살하거나 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이제야 살려둔 보람이 생기겠어.

페이즈 아웃을 쓰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페이즈 아웃을 쓰면 파티가 풀려버리잖아. 미리 세아에게 말하고 와야겠네.

바로 벙커로 돌아가서 이야기해준다.

내 말을 듣더니 밖으로 나가 들개들을 한번 싹 테이밍 해버리는 세아.

"됐지?"

"어. 그럼 다시 나간다."

"뭐 하는데 그렇게 바빠? 오래 걸려?"

"글쎄. 아마 오래 걸릴 거 같다. 위험한 건 아니니 너무 걱정하진 말고."

"걱정은 무슨. 나는 오빠가 죽을 거라는 생각을 못 하겠는데?"

나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는 세아.

"왜 이럼? 나도 피와 살로 이뤄진 사람이라고. 까딱 잘못하면 뒤지는 건 똑같단 말이지."

"애초에 그렇게 죽을 상황을 안 만들잖아."

"어. 그렇긴 하지. 그렇다고 안 죽는 건 아니니까."

"됐어. 빨리 다녀오기나 해."

"어. 그래. 근데 다들 뭐하냐?"

"몰라. 집 위로 올라가던데."

"집 위에? 뭐, 암튼 알았다. 다녀온다."

바로 다시 수원으로 순간이동. 계속해서 뜨던 메시지가 안 뜨게 되니 허전한 느낌이다.

지루한 비행에서 그나마 덜 느끼게 해준 메시지였는데 말이지.

바로 페이즈 아웃을 쓰고 비행장 아래의 벙커로 내려갔다.

오늘은 의외로 인공정원에 나와 있지 않은 최신영.

투시로 방을 바라보니 책상 앞에 앉아서 뭔가를 쓰고 있다.

흐음. 뭔가 취미가 바뀌었나? 멍때리는 건 그만 뒀나 봐?

고성연은 역시나 운동을 하고 있다. 뭐, 저 여자야 저러고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

바로 페이즈 아웃을 쓰고 최신영의 방으로 들어가서 바로 해제한다.

그리고 바로 무효화와 수면. 뭔가를 쓰던 자세 그대로 책상에 슬그머니 머리를 박는 최신영.

그런 그녀를 두고 바로 나와서 고성연의 방으로 간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 무효화와 매혹을 걸자 러닝머신을 뛰던 그대로 나를 보며 웃는 여자.

"운동 그만하고 샤워해."

"네."

두말하지 않고 내 말을 따르는 고성연.

씻을 동안 잠시 침대에 앉아 어떻게 스킬을 쓸지 생각해본다.

어차피 이미 생각해둔 게 있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확인해보며 느긋하게 기다린다. 근데…. 아. 이 여자 되게 오래 씻네.

한참을 기다리니 머리에 수건을 감고 몸에 샤워타올을 두른 고성연이 나왔다.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네. 근데 기다린 보람이 있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성연.

그 촉촉함과 상기되어있는 볼을 보고 있으니 기다린 시간이 아깝지 않다.

게다가 저 복장. 수건을 한 장 두르고 있는 게 벗은 것보다 야하다니. 참 신기한 일이야.

"성연."

"네."

"이제부터 내가 이렇게 손가락 하나를 들면 손뼉을 치는 거야. 알았어?"

"네."

그렇게 말하고 나는 들었던 손가락을 접었다가 다시 들었다.

바로 손뼉을 치는 성연.

좋아. 역시 매혹에 걸려서 그런지 말은 잘 듣네.

다시 손가락을 접고 잠시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성연을 바라보기만 했다.

내 시선을 의아하게 느끼면서도 가만히 서서 나만 바라보고 있는 여자.

내가 다시 손가락 하나를 들자 바로 손뼉을 친다.

됐어. 이건 확실하고.

"이리 와봐."

"네."

내 무릎을 가리키며 말하자 기쁜 듯 다가와 내 무릎에 앉는 성연.

살짝 젖어있는 수건을 풀자 탄력 있는 몸매가 드러난다.

30대라고는 믿기지 않는 몸매. 게다가 막 씻고 나와서 그런가? 닭살이 살짝 돋아있는 피부.

가슴을 만지자 바로 몸이 반응하는 게 보인다.

살짝 솟아오른 젖꼭지. 아이를 하나 키운 애 엄마 몸매라고는 믿기지 않는단 말이지.

"가만히 있어. 기억 삭제."

가슴을 만지며 바로 스킬을 쓴다.

역시 생각했던 것과 비슷했다. 기억 읽기랑 같은 방식.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내가 이 기억들을 지울 수 있게 된 거겠지.

나는 조금 전에 있었던 기억을 살폈다. 내가 손가락을 들면 손뼉을 치라고 했던 그 기억.

그것만 지웠다. 제대로 지워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운 거 같다. 스킬 숙련도가 올라있었으니까.

이제…. 확인해보면 되겠지?

나는 바로 손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그걸 보고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는 성연.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

"네? 손가락…. 들고 있는 거요?"

"어. 내가 아까 말했을 텐데. 이거 뜻에 대해서?"

"어…. 죄송해요. 정말 모르겠어요. 다시 한 번만 말해주시면 안 될까요?"

매혹에 걸린 여자니 거짓을 말하거나 모른척하지는 못한다.

기억이 지워진 게 확실한 거 같네.

혹시 모르니 같은 방식으로 몇 번을 더 테스트해봤다.

내가 손뼉을 치면 똑같이 손뼉을 치라고 하던가 내 특정한 말에 반응하게 하거나 그런 것들.

몇 번을 더 테스트해본 결과 기억 읽기는 내 생각대로 잘 적용된다는 걸 확신했다.

대충 예상했던 동작 방식이라 쓰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다. 그래 이정도면 됐지. 그럼 어디 다음 걸 테스트해볼까.

기억 삭제를 쓴 성연에게 광역 스킬 무효화를 썼다.

삭제된 기억은 어떻게 되는가?

완전히 Shift Delete 되는 걸까? 아니면 휴지통으로 가는 걸까?

만약 기억 삭제가 기억을 휴지통으로 보내는 거라면 광역 스킬 무효화는 그런 기억 삭제마저 무효화시킬 수도 있을 거다.

그럼 다시 기억은 돌아오겠지? 그걸 테스트 해봐야 한다.

몇 번을 그렇게 무효화를 쓰고 매혹하면서 확인해봤고,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삭제된 기억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아니 돌아오게 하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광역 스킬 무효화로는 기억이 다시 돌아오거나 하진 않는다.

됐어. 그럼 뭐 크게 문제없지. 마음 놓고 저지를 수 있겠네.

"침대에 누워봐."

"네."

머리를 다 말리지 않아 수건을 두르고 있지만 바로 눕는 성연.

그런 그녀에게 수면을 걸었다.

바로 잠들어버린 여자 옆에 앉아 가슴에 손을 대고 기억 삭제를 쓰기 시작한다.

그녀의 기억에서 나와 만났던 모든 기억들. 그걸 하나씩 다 지우기 시작했다. 꼼꼼하게.

이 여자에게 내 이름을 알려준 적도 없다. 솔직히 이야기한 적도 별로 없다. 뭐, 그건 최신영도 마찬가지.

그래도 기억은 생각보다 제법 많았다. 잠깐잠깐 들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제법 왔었으니까.

게다가 기억이라는 것은 나를 봤을 때의 기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여자가 나에 대한 생각 같은 것을 한 것도 있으니까.

많고 많은 기억. 지울게. 넘쳐나기에 기억 읽기 숙련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

다행인 건 기억 읽기처럼 그 기억들을 전부 보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

그냥 내가 나오는 기억이면 그 기억 자체를 몽땅 지워버리면 된다.

역시 몽땅 지워버리는 건 편해. 어설프게 남기는 건 어려울지 몰라도 그냥 팍팍 지워버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잖아?

신나게 기억을 지운다. 문제는 이게 하루에 안 지워질 양 같다는 점?

생각보다 나에 대한 기억이 많다. 특히 아들 이야기를 했을 때, 미국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후의 기억이 많다.

나에 대한 의심과 기대. 그동안 꾹꾹 눌러놨던 아들에 대한 생각. 자신이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걱정과 우려.

일단 지운다. 어지간한 기억은 다 지워버린다.

될 수 있는 한 계속 지워버린다. 나에 대한 연상이나 막연한 감정까지도 전부 없어질 정도로.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포션을 40개가량 먹어가면서 기억 삭제를 썼다.

포션이 40개면 스킬 1,600번 분량이다.

앉은 자리에서 바로 스킬 고급이 되어버릴 정도.

아직 조금 더 무리해서 쓰면 포션 열 개 정도는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디 해보자고. 기왕이면 빨리빨리 하는 게 좋지.

그렇게 포션 50개 분량의 기억 삭제를 마치자 시간은 어느새 자정이 되었다.

아직 반도 다 지우지 못한 거 같은데…. 이거 생각보다 오래 걸리겠어.

아직 자는 그녀를 두고 비틀거리면서 일어난다.

후우. 오랜만에 조금 과격하게 먹었더니 살짝 핑 도네.

최근엔 이정도까지 먹은 적은 없었는데 말이지.

문제는 이러고 가면 내일은 어떻냐는 건데.

자신이 왜 이러고 있는지도 기억이 안 날 거다. 그리고 온갖 상상을 해대겠지?

만약 거기에 내 생각을 더 하게 되면 그것도 더 지워야 한다. 아니 어쩌면 내일 하루의 기억을 몽땅 지워야 할지도 몰라.

뭐, 어쩔 수 없지. 이렇게라도 되는 게 어디야.

어차피 처음 한 번으로 완벽하게 기억들을 다 지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다.

분명 많은 시행착오가 있을 거다. 하지만 괜찮다. 여차하면 싹 지워버리면 되니까.

기억 삭제가 내가 생각한 만큼의 성능을 내고 있으니 크게 문제는 없어.

크게 걱정은 안 해. 뭐가 됐든 내가 손해 볼 건 없으니까.

진짜 일이 엉망으로 틀어진다면 결국엔 죽이면 된다. 아들이고 뭐고 내가 알 바 아니지.

물론 죽이는 일은 거의 없을 거 같긴 하지만.

그렇게 잠들어있는 성연을 잠시 바라본다.

과연, 내가 생각한 대로 이 여자를 주무를 수 있을까?

기억 삭제. 처음 잘못 꿰어진 단추를 제대로 끼울 수 있는 스킬.

부디 잘 됐으면 좋겠다. 그래야 앞으로 행동하는 게 조금 편해지지.

바로 집으로 순간이동 한다.

일단은 가서 좀 자야겠어. 몸이 천근만근 무겁네.

이놈의 포션 후유증은 대체 언제쯤 좋아지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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