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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번째 스킬
다시 시작되는 비행.
민희의 유혹을 이겨내고 날아서 그런가? 러시아로 가는 길이 몇 배로 지겹다.
오죽 지겨우면 비행하면서 가다가 꾸벅 졸아버릴 것 같을 정도?
물론, 불면증인 내가 정말로 졸 수는 없다. 진짜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나는 좋을지도 모르지.
아니네. 졸음 비행이면 바로 황천길이잖아?
내가 죽였던 사람들이 반갑다고 나를 맞이하는 꼴은 못 보지. 그래선 안 돼.
아무튼,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들 정도로 지루하다.
풍경이 확확 바뀌고는 있지만 이젠 별 감흥이 없다.
멋진 산, 멋진 호수, 멋진 숲, 멋진 대자연…. 씨발. 멋지긴 개뿔이.
이제는 그저 지겨운 풍경.
처음에는 좋았지. 쉽게 보기 힘든 대자연, 스케일이 다른 풍경.
하지만 그것도 한 10분만 즐거웠어. 무슨 풍경이 나타나도 10분…. 아니지 10분이 뭐야.
한 두어 번 바라보면 지겨워지지.
자극적인 화면전환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에겐 이런 롱테이크의 풍경은 낯설다고.
기계적으로 투시 쓰는 걸 반복하고 나침반으로 방향을 확인한 다음 무료하게 앞으로 날아간다.
문제는 이제 나흘째. 앞으로 일주일을 더 날아가야 한다.
어으…. 돌아버리겠네.
더 빠른 방법 없나? 좋은 방법을 생각해보자.
숙련이고 나발이고 블링크를 써?
한 번에 1.5킬로미터씩 거리를 좁힐 수 있잖아?
남은 거리는 4,200킬로미터. 방향을 제대로 잡는다는 가정하에 2,800번만 블링크 하면 된다.
아. 씨발. 너무 많네. 많아. 포션 70개. 하면 이틀 만에 갈 수 있긴 한데…. 할까? 해봐?
중급 포션 70개면 21만 코인. 이 지루함을 이길 수 있다면 그 정도 코인은 얼마든지 지급할 생각이 있는데 말이지.
일단…. 투시를 오늘 마스터 할 수 있으니까 투시를 마스터한 다음엔 블링크를 쓰자.
그래. 그게 딱 좋을 거 같아. 아무리 그래도 스킬 숙련이 우선이지.
다시 마음을 비우고 모스크바 방향으로 날아간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거의 도착했는데 모스크바와 거리가 많이 벌어져 있는 것…. 그게 제일 싫다.
아. 왜 GPS는 쳐 막아놓은 거야. 거지 같은 새끼들. 네비게이션 그게 뭐가 위협이 된다고 막아놓고 지랄이냐고.
화약이나 폭탄같은 건 이해가 간다. 그래. 그게 있으면 스킬이 상당히 제한적으로 변하지.
근데 그것도 공기총이 있으니 크게 의미가 없다. 공기총은 왜 안 막은 거야? 이해를 할 수 없네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GPS는 왜 막은 것인지 이해가 안 간다. 왜 그럴까? 이유가 뭘까?
통신을 막으면서 꼽사리로 같이 막아버린 걸까? 아무래도 그게 가장 가능성이 큰 거 같은데.
통신은 대체 어떻게 막은 걸까? 분명 막아놓은 방법에 따라서 우회나 편법이 있지 않을까?
시간이 5년이 지났으면 어디선가 머리 좋은 놈들이 기가 막힌 방법으로 뭔가를 해놨을 수도 있을까?
있긴 있을 거야. 이 스킬을 만든 놈들, 세상을 이렇게 만든 놈들.
이놈들도 전지전능한 놈들은 아니야. 은근슬쩍 허당이라고.
뭔가 실수가 있을 거고 허접한 부분이 있을 거야.
문제는 내가 그런 빈틈을 찌를 정도로 똑똑한 놈이 아니라는 거지. 쳇. 제길.
그렇게 잡생각을 하며 아무 의미 없이 주변을 돌아본다.
천리안을 쓰고 있기에 내 시야 거리는 엄청나다.
지난번에 서울에서 테스트 해본 거로 미루어 봤을 땐 20킬로미터 정도는 우습게 볼 수 있었잖아?
탐지도 그만큼이 되면 좋을 텐데. 스킬 반경 증가 패시브가 계속 늘어난다면 언젠가는 그렇게 멀리까지 탐지도 가능하겠지.
습관적으로 주변을 둘러보긴 하지만, 그렇다고 주변에 뭔가 보이는 것은 없다.
보이는 것은 그저 산. 산. 산. 젠장. 여기는 뭐 호수나 이런 것도 없네.
짜증나게 산밖에 없어.
볼게 없으니 녹음이 우거진 산이라도 바라보면서 간다.
그래도 잘 살펴보면 야생동물들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있다. 그래. 이런 거라도 봐야지. 그래야 이 지독한 지루함을 이겨내지.
간혹가다 정말 뜬금없는 곳에 마을 같은 게 하나씩 튀어나온다.
대체 왜 이런 곳에 마을이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렇게 문명을 발견하면 살짝 두근거리는 마음이 된다.
보물상자를 마주한 모험가의 기분.
물론 그 보물상자가 비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게 문제지만.
인적이 아예 없는 마을.
어. 21세기가 맞나 싶을 정도의 마을이다. 확실히 여기가 러시아는 맞나보네.
저 거지 같은 키릴 문자가 여기저기 쓰여 있는 거 보면.
상당히 낡은 건물들, 보수가 제대로 되지 않은 길, 비바람에 닳고 자연에 침범당한 도시.
아니…. 도시라고 하기엔 조금 작네. 마을? 그정도로 할까?
상당히 열악해 보이는 마을. 세상이 망하기 전의 마을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는 곳이다.
한 90년대쯤에서 멈춘 마을 같은 느낌? 진짜…. 이런 곳에서도 잘도 살았네.
하긴 우리나라 시골은 뭐 이것보다 심한 곳도 많으니.
누군가의 삶의 흔적을 훑어보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다.
사람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시절에야 샅샅이 뒤지며 인기척을 찾아봤겠지만, 탐지가 생긴 이후로는 그렇게 꼼꼼하게 살핀 적은 없다.
스킬 한 번에 확인이 되니까. 탐지는 진짜 좋은 스킬이야. 탐지가 없었으면 아직도 정말 피곤한 삶을 살았겠지.
굳이 오래 지켜볼 필요는 없다. 바로 다시 가던 길을 이어간다.
잠깐 지루함을 달래보기 위해 딴짓했으면 됐지. 하던 건 계속 해야 하잖아?
그래도 투시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힘내보자.
아마 러시아 비행을 마무리 지으면 투시를 마스터 할 수 있을 거 같다. 대충 시간대가 그렇네.
다시 비행. 확실히 추운 나라로 가는 느낌이 난다.
4월말인데도 쌀쌀한 공기. 하이바에 점퍼를 입고 날아야 하는 온도.
그래도 침낭까진 안 입어도 돼서 다행이다. 어차피 남들에게 보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귀찮아. 번거롭고.
그렇게 4시간. 깔끔하게 비행을 마칠 무렵, 투시를 마스터 했다.
몇 개였지. 열일곱 개던가? 그래. 하도 많아서 이젠 조금씩 헷갈릴 지경이다.
벌써 열일곱 개 마스터라니. 뭐가 이렇게 많지? 어느새 스킬을 엄청 찍었네. 징그럽게.
수면, 탐지, 매혹, 반사, 광역 스킬 무효화. 일단 다섯 개.
비행, 페이즈 아웃, 수납, 회귀, 블링크. 열 개.
순간이동, 게이트, 파티, 기억 읽기, 천리안. 열다섯 개.
그리고 투시. 얼래. 왜 열여섯 개지? 뭐가 빠졌지? 어…. 어…. 아. 그래 투명화.
열일곱 개 맞네. 하긴, 틀릴 리가 없지.
아직 보호막이랑 데미지 감소, 거기에 제대로 된 공격 스킬도 없는데 희한한 보조 스킬들만 잔뜩 있다.
물론, 전부 다 뭐 하나 부족한 스킬은 없다. 고르고 고른 스킬들. 가장 효과가 좋았던 스킬들이었으니까.
문제는 아직 배워야 할 스킬들이 많다는 거다. 어우 지겨워. 어느 세월에 다 배우냐.
나도 우레 폭풍 같은 숙련이 스킵 되는 스킬을 배웠으면 좋겠는데…. 그럴 일이 없네.
이렇게 보조 스킬만 잔뜩 배우는 것도 웃기긴 하다.
완전 서포트 특화잖아. 좋게 말해서 그런 거지 나쁘게 말하면 잡캐고.
어쨌든 나는 잡캐의 노선을 바꿀 생각은 없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 정당한 대결 따위를 할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아남을 거다. 지금 이런 식으로. 계속 쭉.
위치를 저장하고 이번엔 홋카이도로 넘어갔다.
새 스킬이 궁금하긴 하지만,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잖아?
새로운 스킬은 바다 위에서 천천히 보자. 지금은 일단 하루카 부터 확인하고.
공중에서 탐지를 돌리니 한 개의 기척이 잡혔고 천리안과 투시로 바로 확인해본다.
자신이 살았던 집을 태운 그녀는 제법 큰 집에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고급스럽거나 휘황찬란한 건물은 아니다.
아마 홋카이도 전통 가옥인듯한 집. 그런 곳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는 하루카.
음. 죽었나? 그런 생각을 했다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죽으면 사라지는 곳에서 죽었나라니. 나도 참. 병신같은 생각을.
고르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 그 속도를 보니 자는 건 아닌듯하다.
그냥 눈을 감고 누워있는 거 같은데……. 뭐 하는 거지? 자유를 만끽하는 중인가?
어쨌든 무사히 있으면 됐다. 하루에 한 번씩만 확인해 주면 되겠지.
그 가면 녀석이 오려면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음. 뭔가 술술 잘 풀렸으면 좋겠는데.
그런 하루카를 뒤로하고 다시 동쪽을 향해 간다.
얼마 있지 않아 나타난 바다. 이제 다시 육지가 보인다면…. 그건 미국이겠지?
아니다. 중간중간에 섬이 있으니까 꼭 그런 건 아니네.
그렇게 방향을 고정하고 날아가며 이제 스킬을 살펴본다.
바람이 거세서 종이가 미친 듯이 펄럭거리기에 스킬표는 그냥 집어넣었다.
어차피 이젠 안 봐도 외울 수 있으니까. 뭐가 새로 생겼는지야 바로 알 수 있지.
스킬창을 살펴보며 하나하나 확인해본다.
스킬 반경 증가12, 스킬 지속 시간 증가10.
이 두 패시브는 계속 나오네. 대체 언제까지 나올 셈이지?
뭐, 나야 계속 나오면 좋다. 탐지 범위가 넓어지는 것은 좋지. 무조건 좋은 일이야.
생각해보면 이 패시브는 계속 나오는 게 맞다. 그게 고티어를 달성한 유리함의 척도니까.
어쨌든 바로 찍었다. 패시브 하나에 120만 코인. 훗. 지난번에 못 찍은 스킬 지속시간 10을 찍으니 바로 11이 나왔다.
역시마저 찍어준다. 바로 나오는 12. 또 찍는다. 후…. 드디어 밀린 걸 따라잡았네.
그리고 다음 패시브. 스킬 최대 수치 증가6이랑 스킬 한계 돌파6.
두 개 합쳐서 1,200만. 염병. 찍을 때마다 느껴진다. 이거 생각한 새끼들은 미친놈이야.
어쨌든 찍었다. 찍자마자 날아가고 있는 비행 속도가 조금 빨라지는 느낌이 난다.
물론 주변이 모두 망망대해라 체감만 그렇게 느껴졌다. 정말 속도가 빨라졌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어.
어쨌든 이제 비행 속도는 시속 155킬로미터가 되었다.
이야. 점점 미친 속도가 되어가네.
잠깐만. 시속 50킬로미터의 비행이 155킬로미터가 되었다.
그럼…. 가속화는?
마스터 시 시속 200킬로미터의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가속화다. 근데 그게 한계 돌파 빨을 받으면?
오메. 씨발…. 바로 계산해본다. 어. 그러니까…. 620킬로미터. 맞나?
그러니까 사람이 시속 620킬로미터로 달릴 수 있다는 이야기지?
미쳤네. 거의 음속의 반이잖아? KTX의 두 배라고?
그거…. 제대로 달릴 수는 있는 거야? 방향전환은 되고? 까딱 잘못하면 그냥 뒤지는 거 아냐?
물론 속도 조절이 됐던 거 같긴 한데. 인간의 반응 속도로 그걸 커버할 수는 있는 건가?
갑자기 급 호기심이 생겼다.
시속 620킬로라니. 게다가 패시브가 올라갈수록 속도가 더 빨라진다.
와. 나쁘지 않네. 그 뭐냐. 미국의 고속도로? 거기가 끝도 없이 일직선이라던데.
막 전방 720킬로미터 앞에서 우회전입니다. 이렇게 뜬다고 하는 곳이잖아?
그런 데서 쓰면 딱 맞겠네. 물론, 하고 싶진 않지만.
돌부리라도 하나 잘못 밟으면 그냥 뒤지는 거잖아? 아. 비행도 같이 쓰면 되려나? 그럼 넘어지진 않겠지.
결국은 장애물만 없으면 엄청난 기동력을 보일 수 있다는 소린데.
으음….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생각이 넘어갔네. 뭐…. 가속화를 찍을 일은 없으니 더는 신경 쓰지 말자.
암튼 이제 패시브는 됐고…. 아니다. 번역. 이거 찍어야지.
이번에도 안 찍고 넘어가면 조류 대가리라는 걸 증명하는 일이잖아? 바로 찍자.
가격도 50만이고 통역이 패시브였는데 설마 번역이 패시브가 아니진 않겠지.
['번역' 스킬을 배우는데 50만 코인이 소모됩니다. 배우시겠습니까?]
당연히 예스. 그리고 아직 반짝거리는 스킬 선택 버튼.
후우. 다행이야. 역시 패시브가 맞았어. 자. 이제 문맹 탈출이다.
전 세계의 어떤 언어든 읽을 수 있게 되었어. 이제 그 좆같은 짱개 글자나 씨발 감도 안 잡히는 키릴 문자도 읽을 수 있어.
근데…. 이거 어느 문자든 다 번역이 되는 건가?
그럼 설마 보이니치 문서 같은 것도 읽을 수 있으려나?
그 누구도 해독하지 못했던 미상의 언어로 된 문서. 번역이라면 그게 가능한가?
으음…. 근데 그게 어딨는지 모르겠네. 그게 문제야. 암튼….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새로운 스킬이 뭔지를 볼 차례야.
새로운 스킬은 딱 하나. 이 새끼들. 왜 계속 스킬이 한 개씩만 나오지?
어느 순간부터 한 개씩만 나오네. 뭐가 다른 비밀이 있나?
새로 나온 스킬은 '의심의 씨앗'이라는 스킬.
캬. 이렇게 스킬 이름만으로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스킬은 또 오랜만이네.
의심의 씨앗이라. 그럼 선행 스킬로 성장 같은 게 있으려나?
의심? 음. 정신을 조종하는 건가? 매혹 트리도 들어갈까? 아무튼, 그런 느낌인데.
뭐, 바로 확인해보면 되겠지. 눌러보면 되니까.
['의심의 씨앗' 스킬을 배우는데 30만 코인이 소모됩니다. 배우시겠습니까?]
얼래? 뭐야. 선행 스킬이 없어? 바로 배워진다고?
티어18 스킬인데 선행이 없어? 와우. 씨발. 이거 존나 파격적이네.
흥미진진한데? 이거 생각해볼 거리가 많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