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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카
죽이지 않기로 했으니 이제 이 여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본다.
코인 20만. 성장 스킬 마스터.
그다음 스킬은 뭐로 하는 게 좋을까.
이 여자는 한국으로 데려갈 생각은 없다. 데려갈 곳도 마땅찮고 말도 잘 안 통할 테니까.
뭐, 일본어야 하는 사람이야 제법 있을 테니 아주 답답할 정도로 의사소통이 안될 리는 없겠지.
적어도 안나 같은 상황은 아닐 거다.
하지만 내가 그러고 싶지 않다. 이 여자는 일본용이야. 일본에 있으면서 이곳의 정보를 파악하는 용도.
그러니까 현지처 같은 거지. 꼼꼼하고 세심하게 돌보고 싶은 생각은 없어.
역시 자력으로 생존하려면 가장 좋은 건 투명화겠지?
어느 정도 강한 녀석들은 어지간해선 탐지를 가지고 있으니 크게 의미는 없을 거다.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좆밥들과의 싸움에선 투명화만큼 좋은 게 없다.
공수 양면으로 이보다 밸런스 좋은 건 없지. 뭐…. 탐지 있는 놈 만나면? 죽어야지. 어쩔 수 없네.
근데 이 여자가 사람을 죽이는데 익숙해질 수가 있을까?
물론 내가 옆에 딱 달라붙어서 부지런히 타락시키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럴 시간이 별로 없다. 할 일이 많잖아? 여기에서 오래 죽치고 있을 수가 없어.
차라리 이 여자는 미끼로 쓰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가면. 이곳 사람들 말로 하면 카멘사마. 그놈을 낚을 미끼.
마을에 있는 놈들의 기억을 읽어본 결과 이 마을은 그 가면 놈의 보급창고 같은 거였다.
내가 청평이나 펜스를 두는 것과 비슷한 느낌. 그래. 스킬이 여러 개 있는 놈들이라도 먹어야 살 수 있으니까.
절대 변하지 않을 기본 원리.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다는 것.
능력이 있으면 쉽게 굶어 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안정적인 식량 수급 처는 중요하지.
제법 오래전부터 이곳에 오갔던 녀석. 작년까지만 해도 제법 자주 들렀다.
하지만 이제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들린다.
예전에는 트럭을 몰고 나타났던 녀석이 이제는 날아서 수납으로 식량을 가져가는 기억을 봤다.
비행에 수납이라.
여러가지로 나랑 비슷한 놈이네. 하긴 스킬을 여러 개 찍은 놈들은 다들 어느 정도는 생각하는 게 비슷하겠지.
어쨌든 그런 곳을 내가 작살내놨으니 녀석은 잔뜩 열 받을 거다.
당장 굶어 죽는다는 위협을 느끼진 않겠지만, 자기 나와바리에 누군가 손을 댔다는 걸 알면 상당히 빡치겠지.
집에서 기르는 개새끼도 자기 밥그릇을 차면 짓는 법인데 사람씩이나 돼서 가만히 있겠어?
게다가 절대 강자라는 소리까지 듣는 놈인데?
어찌 됐든 능력은 있는 놈. 그런 놈이 하루카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살아남은 여자. 마을을 전멸시킨 놈이 살린 여자.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이 여자에게 내 정보를 알아내려 하겠지?
하지만 하루카는 나를 천사님이라고 알고 있다.
물론 어디까지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아무리 그래도 진짜 천사로 알지는 않겠지…. 않겠지?
아. 쟤 눈 봐라. 눈빛에 경외 같은 게 담겨있네.
진짜 천사로 알고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조금 껄끄러울 정도네.
어쨌든 이런 하루카는 나를 쉽게 팔지는 않을 거다. 뭐, 신나서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
뭔가 이것저것 과장되어서 잔뜩 부풀려 말하겠지만.
기억 읽기는 티어8. 가면 놈이 충분히 배울 수 있는 위치.
아니면 매혹도 있다. 그거야 시작부터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스킬이고.
뭐가 됐든 자신만의 정보 획득 방법이 있을 거다.
이 여자를 살려두는 이상 내 정보는 어느 정도 넘어간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철저하게 정보를 제한해야겠지? 어차피 내가 내 개인정보를 질질 흘리고 다니지는 않으니까.
지금까지 해왔던 거로는 그리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을 거야.
만약 기억 읽기로 읽는다고 하여도 투명화랑 수면하고 비행 정도만 눈치챘겠지. 다른 스킬들은 쓰는 걸 자제했으니까.
아. 녀석도 기억 읽기가 있다면 내가 기억 읽기를 썼다는 의심을 할 수는 있겠네.
광역 스킬 무효화 쓰는 건 눈치 못 챌 수도 있지만 그건 녀석의 재량이고.
매혹이나 탐지가 있다고 가늠할 수는 있나? 뭐, 괜찮아. 그 정도까진 상관없어.
짐이 없는 거로 수납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까? 본인이 수납이 있으니 그런 생각까지는 할 수 있겠네.
그리고 또?
음…. 생각보다 많네. 기억 읽기는 이래서 좋아.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상황을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는 가면 그놈은 상당히 용의주도한 놈이긴 하다.
그렇게 기억을 읽었는데도 비행하고 수납 말고는 딱히 무슨 스킬을 가졌는지 쉽게 파악하기가 힘들 정도.
전투 같은 걸 하는 장면을 봤다면 좋았을 텐데. 뽑아낼 수 있는 정보의 양이 달라지잖아.
운이 좋은 것인지 신중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도 염두에 둬야겠어.
어쨌든 살아남아 있는 하루카를 바로 죽이진 않을 거다.
알고 있는 정보와 나와의 접점, 성장이라는 스킬, 이쁘장한 외모.
확신하지는 못해도 굳이 죽이진 않을 거야. 제정신 박힌 놈이라면 그렇게 생각하겠지.
제정신이 아닌 놈이면 뭐…. 어쩔 수 없지. 하루카. 미안. 고멘.
가면 놈이 식량을 가지러 오는 건 보통 월 초였다.
지금이 4월 말이니 한 일주일 내로 오겠지? 이번에 줄 식량은 있다. 마을 주민 놈들이 죽은 거지 식량이 사라진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다음부터가 문제라고 느끼겠지? 그런 녀석에게 교섭의 여지를 남겨놔야 한다. 그래야 길길이 날뛰진 않겠지.
차라리 하루카 혼자서 식량 생산이 가능하도록 하는 게 낫겠네.
그편이 생존에 훨씬 도움이 될 거다.
이제 와서 스킬을 몇 개씩 올려주기도 쉽지 않으니 아예 혼자 자생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주는 게 낫겠다.
"하루카."
"네. 천사님."
이제는 아예 천사님이라고 부르는 여자.
그냥 놔두자.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 게 본인에겐 편하겠지.
"괴력이라는 스킬이 있어. 그걸 배워라."
"네. 알겠어요. 감사해요. 천사님."
혼자서 농사를 짓고 동물을 키울 거면 차라리 괴력이 나을 거다.
공격 스킬도 되고 생활에서도 쏠쏠하게 쓸 수 있는 스킬. 게다가 버프형이라 한번 켜두면 오래 지속한다는 장점도 있다.
체력 대부분을 성장 쓰는데 할애해야 하는 하루카 특성상 이런 버프가 훨씬 나아.
"배웠어요."
"내가 왜 그 스킬을 배우라고 한지 알겠니?"
천사 소리를 들어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말투가 온화해진다.
나도 참 웃기는 놈이네.
"잘 모르겠어요."
"괴력은 말이야…."
괴력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해준다.
힘이 늘어나 생활을 하는 데 불편함이 없어질 거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상당히 좋아하는 하루카.
그래. 괴력에 성장이면 농사와 목축을 동시에 할 수 있을 거다. 보니까 여기저기 동물들도 많던데.
혼자 사는 데는 크게 문제없겠지. 그래. 일단 그거면 됐다. 그거면 됐고….
"이제 이곳엔 너 혼자만 살게 될 거야. 괜찮은 곳을 하나 골라서 동물들을 모으고 농사랑 병행하면서 살 수 있겠니?"
"천사님은…. 어디로 가시나요?"
"네 곁에서 조금 더 돌봐주고 싶지만, 그렇게 오래 있을 수는 없어. 대신 종종 찾아오겠다고 약속하마."
어우. 내 말투. 내가 하는데도 조금 닭살 돋는다. 이 정도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런 게 잘 먹히는 여자니까…. 눈높이를 맞춰줘야지.
"알겠어요…. 어쩔 수 없죠…."
"그리고."
"네?"
"다음 달 초에 이곳으로 가면 쓴 남자가 올 거야."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이는 하루카.
"카멘사마 말인가요?"
"그래. 그가 와서 뭔가를 물어보면 숨기지 말고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하렴."
"네? 어떤 걸…."
"전부다. 나에 관한 이야기도 상관없단다. 무엇을 물어보든 솔직하게 아는 대로 이야기해."
"솔직하게…. 네."
이게 이 여자애를 살리는 방법이다. 거스를 필요 없다. 이제 스킬 두 개 있는 여자애로 뭔가를 하기는 힘들다.
차라리 가면 놈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그 녀석과 접점을 만드는 게 차라리 낫다.
그래야 정보를 더 캐낼 수 있겠지. 가면 그놈이 어떤 놈인지도 알 수 있을 거고.
어차피 한번 마주치면 바로 알 수 있는 정보들이 알려지는 건 그다지 문제가 안 된다.
오히려 그런 능력자가 주변에서 보고 있을 수 있다고 의심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지.
어쨌든 대충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이 여자를 안지 못한 건 조금 아쉽긴 하지만, 굉장히 아깝고 그런 건 아니잖아?
그런 기회야 나중에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역시 남자는 발정만 나지 않으면 현명한 사고가 가능하다니까.
"그럼 이만 돌아가야 할 시간이구나."
내 말에 굉장히 아쉬워하는 하루카.
그런 그녀를 두고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나의 모습을 따라 치켜 올려지는 고개. 그렇게 어느 정도 하늘에 떠오르자 투명화를 썼다.
갑자기 사라진 나의 모습에 당황하는 모습.
투명화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도 연출 때문에 그런가? 진짜 사라진 것처럼 보이나 보다.
뭐, 지금은 정신없을 테니 저럴 수 있지. 나중에 찬찬히 생각해보면 별거 아니라고 느낄 수도 있을 거고.
그렇게 싸구려 연극은 끝났다.
졸지에 가면 녀석에 대해 정보의 실마리를 얻게 되긴 했지만…. 솔직히 큰 기대는 안 한다.
이정도 어설픈 작업으로 절대 강자씩이나 되는 녀석의 정보를 쉽게 얻어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조금 욕심이 과하지.
하지만 나에겐 절대 손해 보는 짓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마음껏 이런 짓을 하는 거지.
그렇게 공중에 서서 잠시 지켜본다.
아직도 내 쪽을 두어 번 더 바라보다가 자신의 집 쪽으로 걸어가는 하루카.
과연 그녀는 오늘 밤에 어떻게 잠이 들까?
기분 좋게 꿀잠 잘까? 아니면 자신이 봤던 학살을 생각하며 악몽을 꿀까?
음. 조금 더 지켜봐도 되겠지? 어차피 오늘은 이대로 돌아가서 바로 잘 거니까.
집으로 돌아간 하루카는 가장 먼저 양들을 불러 모았다.
평소보다 많이 늦은 시간. 서둘러서 양들을 축사 안으로 모으는 그녀.
상당히 능숙한 모습. 보고 있는데 심심하질 않다.
그렇게 양들을 모두 축사에 넣고 문을 잠근 뒤, 자신의 집 쪽을 한번 바라보고 한숨을 쉰다.
그래. 평소 같았으면 발걸음을 떼기 싫었겠지.
자신을 강간한 삼촌과 구타하는 숙모가 있는 집.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들어가야 하는 곳.
근데 오늘은 다르다. 아무도 없는 집. 갑자기 맞이하게 된 자유.
과연 하루카는 저 집에 어떤 마음으로 들어갈까? 홀가분한 느낌을 받을까?
복수의 달콤함을 느끼면서 들어갈까?
그렇게 잠시 서 있던 하루카. 몸을 돌려 창고 쪽으로 걸어간다.
얼래? 바로 안 들어가나? 뭐라도 가져가나?
창고 안으로 들어간 그녀를 투시와 천리안을 써서 지켜본다.
자신의 아지트로 가는 줄 알았는데 창고의 구석으로 걸어가더니 통 하나를 든다.
저건…. 아무리 봐도 기름통인데.
그렇게 기름통을 가볍게 들고나오는 모습.
아. 괴력을 썼구나? 상당히 무거워 보이는데 가볍게 들길래 깜짝 놀랐네.
바로 집까지 온 하루카는 기름을 집에다 뿌리기 시작했다.
한 통을 전부 다 뿌린 그녀는 망설임 없이 불을 붙인다.
화르르륵
순식간에 불이 붙는 집.
그걸 바라보고 있는 하루카.
그래. 내가 단순했네. 왜 저 집에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을까.
저 집은 하루카의 집이 아니다. 그저 몸을 의탁하고 있었던 곳.
게다가 좋은 기억이라곤 없는 곳이잖아? 강간과 구타를 당한 곳인데 저길 들어갈 필요가 없지.
그 이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들어가야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복수를 이루고 자유를 만끽하게 된 여자.
그녀는 좋지 않았던 과거를 불태워버리기로 했나 보네.
나무로 만들어진 집이라 그런지 기름의 도움을 받은 불길은 기세 좋게 집을 태운다.
그리고 하루카는 그런 불타는 집을 바라보면서 웃고 있다.
어두운 밤, 충천하는 화광이 그녀의 얼굴을 비춘다.
그저 잔잔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지만 불길이 일렁이며 그녀의 표정을 시시각각 기묘하게 만들어준다.
어떻게 보면 시원해 보이는 표정. 또 어떻게 보면 화가 난 것 같은 표정.
그녀의 표정은 변함이 없는데, 활활 타고 있는 집의 불길이 그녀를 모습을 다르게 보여준다니…. 상당히 의미심장한 모습이네.
한참 동안 불타는 집을 바라보고 있던 하루카.
그러더니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양축사의 창고로 뛰어간다.
그녀가 가지고 나온 것은 많은 편지.
아련한 표정으로 편지를 바라보던 그녀는 하나씩 편지를 불타는 집에 던지기 시작했다.
저 편지는 그거네. 천사님에게 썼던 편지.
그래. 이젠 필요 없지. 천사님이 직접 나타나 줬으니까.
더는 편지 같은 걸 쓸 필요 없는 거다. 그리고 정리하는 거야.
불타는 집, 불타는 편지.
자신의 과거를 모두 불살라버리는 모습.
그렇게 자신이 들고 있던 편지를 모두 불길 속으로 던져버린 그녀는 비로소 홀가분한 표정이 되었다.
한결 보기 좋은 모습이 된 그녀. 그리고는 몸을 돌려 양축사에 있는 자신의 피난처로 돌아간다.
어…. 저 불타는 집은 그냥 저렇게 두는 거야? 옆으로 번지면 어쩌려고?
괜히 내가 전전긍긍해지려 하네. 근데…. 그냥 놔뒀다.
됐다. 뭐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그런 것까지 내가 일일이 봐줄 필요는 없잖아.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이곳을 저장하고 바로 집으로 순간 이동했다.
활활 타는 집의 열기를 느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