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462화 (462/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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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카

본인이 꿈꾸던 상황이 눈앞에 닥쳤는데도 하루카는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한다.

음. 답답하네. 하긴, 답답하다고 하더라도 이게 정상일 수도 있겠지.

아직 인간성이 남아있다는 뜻이잖아? 자신을 강간한 삼촌, 자신을 구타한 숙모.

죽이고 싶은 마음은 충분할 거다. 저 정도 이유면 충분히 죽일 만하지.

하지만 생각으로는 수십, 수백 번 실행했던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걸 실제로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는 거…. 이해한다.

이해해. 이해는 하지만 답답해.

주방으로 보이는 곳으로 가서 슬쩍 둘러본다. 아. 역시 있네. 없을 리가 없지.

식칼 하나를 빼 와 하루카의 앞에 던졌다.

댕그랑

날붙이가 바닥에 부딪히며 내는 맑은소리에 화들짝 놀라는 여자.

그리고 어쩌지 못하고 그저 식칼을 바라본다.

하. 귀찮은데. 대체 어디까지 떠먹여 줘야 하는 거야?

"안 할 거야?"

"어…. 으. 하지만…."

글렀네. 이런 애는 필요 없다.

이런 상황에서도 주저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이보다 심하겠지?

불빛을 마주한 고라니 꼴이 될 거다. 아무것도 못 하고 몸이 굳은 채로 치어 죽을 거야.

"됐다. 천사는 무슨. 그런 것도 못하면서 그놈의 천사는 뭐하러 찾은 거야?"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체테를 꺼내자 갑자기 하루카가 바닥에 있는 식칼을 집었다.

그리고 자신의 삼촌에게 휘둘렀다.

"으으으으음!!!"

입이 막히고 잠까지 재워놨던 삼촌 놈은 하루카가 잡고 휘두른 식칼에 맞자마자 벌떡 깨서 비명을 지른다.

"아니…."

충동적으로 휘둘러놓고 비명과 피에 정신을 못 차리는 여자.

하아. 이거 괜찮나? 아무리 봐도 불안한데.

"야. 야. 야."

짧고 강하게 부르며 손뼉을 쳐서 여자를 집중시킨다.

얼빠진 표정에서 조금 정신을 차리는 모습.

그런 그녀를 보며 단호하고 낮게 말한다.

"휘두르는 게 아냐. 찔러. 두 손으로 손잡이를 꽉 잡고 여기를 찔러. 심장. 알겠어? 피 같은 건 신경 쓸 필요 없어. 다 없어지니까. 알아들었어!?"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

입으로 뭔가를 조용히 중얼거린다. 입 모양은 다르지만 작게 '심장…. 찌른다….'라는 소리가 들린다.

아. 그러고 보니 자연스럽게 통역이 적용되고 있는 거구나. 역시, 이 패시브가 최고야.

이게 없었으면 정보고 뭐고 아무 짓도 못 했겠지.

"자. 마지막 기회야. 제대로 해봐."

칼을 움켜쥔 하루카. 아까랑 눈빛이 다르다. 이제 좀 뭔가 쓸만한 눈이 됐네.

천사라는 단어에 상당히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음. 약간 각성의 키워드 같은 건가? 뭐, 그럴 리는 없지.

그런 마법의 단어 같은 건 없잖아? 다만 비슷한 효과는 있는 거 같다.

자신의 아픔이나 슬픔, 괴로움들을 모두 끄집어낼 수 있는 단어 같은 거지.

내 허접한 추측이긴 하지만.

"이익!"

짧은 외마디 신음과 함께 삼촌 놈의 심장에 정확하게 칼을 찔러넣는 하루카.

시도는 훌륭했다. 다만 힘이 모자랐을 뿐이지.

대신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이다. 바로 죽어버리는 것보단 더 지독하게 아플 테니까.

한 번에 죽이면 아쉽지. 고통은 느낄 수 있을 만큼 느끼게 한 다음에 죽여야지.

제대로 찔렀는데도 죽지 않아서 순간 또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학습능력은 있어 보인다.

바로 칼을 뽑은 뒤 다시 고쳐잡고 또 찌른다.

이번에도 찌르는 자세는 괜찮았는데 위치가 조금 틀어졌다. 근데 이것도 고통의 측면에서 봤을 땐 오히려 더 잘한 일이다.

죽지는 않는데 끔찍하게 아픈 곳을 찌른 셈이니까.

테이프로 틀어막힌 입으로 비명을 지르던 삼촌 놈은 이제 아무런 소리도 못 내고 있다.

축 처진 머리. 비릿한 피 냄새. 하루카는 세 번째로 식칼을 가슴팍에 찔러 넣었다.

번쩍하고 빛이 터져 나오고 삼촌 놈은 사라졌다. 비릿한 피 냄새를 모조리 가지고.

"잘했어. 봤지? 피가 모두 사라지는 거?"

"하아…. 하아…. 네…. 천사님."

약간 제정신이 아니네. 천사님이라니.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이미 나는 천사님인 건가.

"자. 이번엔 이 여자야. 잘해봐."

하루카는 숨을 고르더니 비장한 눈빛으로 쓰러져 아직 잠들어 있는 숙모 년을 바라본다.

푸욱

의외로 식칼을 들어 배를 먼저 찌르는 하루카.

놀랐다. 자신을 강간한 숙부 놈은 바로 죽여놓고 왜?

배를 찔렀다고는 하지만 역시 그리 깊게 찌르진 못했다.

아무리 각오를 했더라도 심리적인 저항이라는 게 있다.

사람은 그렇지. 칼에 찔리면 아프다는 걸 아는 사람은 남을 함부로 찌를 수 없는 법이다.

공감이라는 게 있으니까. 물론 어느 정도 원한과 분노가 크면 그딴 공감 능력 따위는 조용히 찌그러지긴 하지만.

배가 찔리자 그 통증에 잠에서 깨는 숙모 년.

칼을 든 하루카를 발견하고 눈이 커진다. 고통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으며 살려달라는 눈빛을 보낸다.

그리고 하루카는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이야. 그래. 그렇지.

웃어야지. 자신의 상황. 지금의 처지. 뒤바뀐 서로의 관계.

그걸 알았으면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지. 그래. 그게 정상이야.

식칼을 거꾸로 잡은 하루카. 내가 잘 묶어놓은 숙모 년을 쓰윽 훑어보더니 이번엔 허벅지를 찔렀다.

"으으읍!!!"

크. 얼마나 입을 잘 막아놨으면 비명이 이렇게 작게 들릴까?

역시, 테이프 질은 자신 있다니까. 후후.

하루카는 허벅지를 두어 번 더 찌르고는 숙모 년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손으로 머리채를 움켜잡더니 식칼로 잘라내기 시작했다.

거친 손길.

우왁스럽게 머리채를 움켜잡고 잡히는 대로 계속해서 머리카락을 잘라낸다.

이야…. 대체 저건 뭐 하는 짓이래. 머리카락은 왜?

일본의 풍습 같은 건가? 아니면 홋카이도의 지방 미신 그런 건가?

그런 걸 잘 모르는 나는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통증에 고통스러워하는 숙모 년이 뭐라고 왁왁거리지만 하루카의 손길은 거침없었다.

그리고 머리가 반쯤 밀렸을 때야 눈치챘다.

아. 그래. 양. 얘는 양치기를 했지.

털이 이쁘게 깎여있던 양이 생각났다.

그렇구나. 얘는 지금 털을 밀고 있는 거야. 마치 양털을 밀듯이.

그런 걸 깨닫고 보니 지금의 장면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양털을 깎을 땐 저렇게 거칠고 우왁스럽게 자르진 않을 거다.

양이 아프지 않게 조심조심 신중하게 자르겠지.

하지만 지금 저 모습은 누가 봐도 아프라고 거칠게 자르는 모습이다.

아마 털도 저런 칼로 자르진 않을 거다. 전용 도구가 있겠지.

반항…. 같은 거라고 본다.

평소엔 하지 못했던 금기.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들.

그런 것을 저지르고 있는 거야. 제 딴에는 저게 최대치의 반항이겠지.

내 추측이긴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반항치고는 유치하다는 생각도.

하지만 본인은 제법 속이 풀렸나 보다.

마구잡이로 잡아 썰어놓은 탓에 숙모 년의 머리는 정말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리고 여자에게 머리카락이라는 존재가 생각보다 엄청나다는 것도 깨달았다.

머리만 저 꼴이 났을 뿐인데 한 스무 살은 더 나이가 먹은 것처럼 보이네.

게다가 식칼로 조심성 없이 잘라냈기에 머리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하루카의 손 역시 마찬가지.

배에 난 상처와 허벅지에 난 상처. 그리고 잘린 머리카락.

숙모 년의 모습은 처참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하루카는 그런 숙모 년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옆구리와 허벅지. 팔.

으음. 이것도 알겠네. 자기가 맞은 부위잖아.

그렇게 집요하게 세 군데만 계속해서 걷어차던 하루카는 결국 제 뿔에 지쳐 헥헥댄다.

그렇게 숨을 고르다 이번엔 식칼을 다시 강하게 움켜잡는다.

이제 끝내는 건가?

식칼을 거꾸로 잡고 두 팔을 크게 치켜든다.

그리고 무방비하게 노출되어있는 가슴팍을 찌른다.

"크읍…."

짧은 단말마만 남기고 숙모 년 역시 빛이 되었다.

이제 둘만 남은 집안.

코인이 빨려 들어오자 흠칫 놀라는 하루카.

"손 줘봐."

"엣?"

내 말에 깜짝 놀란다. 손을 내밀려다가 아직 손이 노래지도록 칼을 움켜잡고 있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재빨리 칼을 내던진다.

댕그랑

그리고 수줍게 손을 내민다. 역시, 이렇다니까.

아까 머리카락을 자르면서 자신의 손도 벤 것을 봤었다.

숙모 년의 피는 죽으면서 모두 사라졌기에 지금 하루카의 손에 묻어있는 피는 다 그녀의 것이다.

상점에서 포션을 하나 샀다.

아마 허공에서 포션을 만들어내는 나의 모습은 그녀에게 있어선 마법 같은 일로 보일 거다.

그리고 그런 포션을 손에 살짝 부어 문질러주자 가볍게 났던 생채기들은 그대로 깨끗하게 나았다.

묻어있던 피도 씻겨나가고 깨끗한 상태로 돌아온 자신의 손을 보며 신기하다는 듯 나를 보는 하루카.

이런 건 진짜 별거 아닌데…. 이 여자의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이겠지?

이거이거…. 성철 천사설에 박차를 가하겠구먼.

"후련하냐?"

"네? 네…. 어…. 그런 거 같아요."

독기어렸던 모습은 숙모 년이 죽으면서 함께 사라졌나 보다. 다시 조금 얼빵한 모습의 여자가 되었다.

하아. 아직도 이 여자에 대해서 정확하게 판단을 못 내리겠다.

살려놓아야 하나? 내가 시키는 걸 잘 할 수 있을까?

"아직 끝난 게 아냐. 너의 고통을 외면하고 네 삼촌 놈과 숙모 년의 편을 들었던 마을 사람도 있으니까."

내 말에 살짝 흠칫하는 하루카.

음…. 마을 사람들에겐 별로 원한이 없나?

은근슬쩍 묻어가서 사람 죽이는 법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쩝. 그건 무리겠지. 그냥 참관만 시켜야겠다.

이 여자 하는 짓 보면 다 죽이는 데 한참 걸릴 거야. 그렇게 꾸물거리고 싶진 않아.

"따라와."

한마디 말을 하고 바로 바깥으로 나갔다.

쭐레줄레 나를 따라오는 여자.

가면서 바로 하루카에게 물어본다.

"두 명 죽이고 코인 얼마나 나왔니?

"삼천…. 사백이십이요."

"넌 원래는 오백 있었고?"

"아뇨…. 천 오백…."

"천 오백? 아. 맞다. 니 부모님?"

"네…."

음…. 그럼 둘이 천구백 정도? 으음. 이게 마을 사람들 평균일까?

적어도 백 명은 넘어 보이는데. 그럼 십만도 안 되겠네.

좋아. 결정했다. 마을 놈들을 다 죽이고 이십만이 넘으면 이 여자를 살리주자.

못 넘으면? 그냥 죽이는 거지. 쓸만한 스킬 하나 없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냐.

적어도 투명화 정도는 배워야지.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성장 스킬은 마스터라는 거다.

코인만 있으면 바로 다음 스킬을 쓸 수 있다는 거니까.

게다가 성장은 그나마 쓸만하잖아?. 어디에서도 먹고 사는 건 지장 없을 거야.

그렇게 마을 놈들을 하나씩 죽이기 시작했다.

하늘에 떠 있는 놈들이 아니면 그리 어려울 게 없다. 굳이 페이즈 아웃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

마을의 수준은 기억 읽기로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대충 캐슬의 농노였던 놈들 수준?

공격 스킬도 몇 개 없는 놈들이다. 스킬 두 개 있는 놈도 없는 놈들.

혹시나 반사가 있을 수 있어서 무효화는 쓴다. 아무리 개허접이라도 조심할 건 조심해야지.

탐지로 위치를 잡고 바로 쳐들어간다.

가서 광역 스킬 무효화에 수면. 가면에 대해 기억을 읽고 마체테.

단순하고 단조로운 작업. 하지만 숫자가 너무 많다. 다 쳐 죽이고 난 다음엔 어느새 자정이 넘는 시간이 되었다.

"아 힘드네."

하루카를 바짝 붙여놓고 마을 놈들을 죽여서 그런가 이 여자는 반쯤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인다.

무수한 죽음을 눈앞에서 마주하게 됐으니 솔직히 정상은 아니겠지.

강제 렙업 치고는 너무 거칠었나? 뭐. 못 버티면 어쩔 수 없고.

마지막 놈을 잡아 죽이고 탐지를 돌린다. 반경 760미터 안에는 하루카 말고 아무도 없는 기척.

아. 개운해. 역시 이게 깔끔하지.

그렇게 있는데 하루카가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음…. 조금 더 그럴듯하고 멋지게 죽이는 방법이 있었으면 좋았을걸. 너무 무식했네.

"너 코인 얼마 있냐?"

이제 운명을 결정할 시간. 과연 이 여자는 살 수 있을까?

"에…. 코…. 코인요?"

"어. 코인."

"이십 일만…."

"오…."

운이 좋네. 목숨을 건졌어.

뭐, 기억 읽기를 하면서 중간쯤부터는 어느 정도 이십만이 넘을 거 같다고 예상하긴 했지만.

녀석들은 그리 깨끗한 놈들이 아니었다.

하긴, 이렇게 된 세상에 깨끗한 놈이 어딨겠냐.

게다가 내가 남들보고 깨끗하니 어쩌니 따지는 것도 웃기네.

"축하해. 그럼…. 넌 이제 다시 태어난 거야."

"네?"

얼빠진 여자의 표정. 하긴, 대체 내가 무슨 소리를 하나 싶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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