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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461화 (46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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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카

여자가 나를 데려간 곳은 허름한 창고 같은 곳이었다.

양 축사 옆에 있는 작은 창고. 근데 이곳에는 사람이 머문 흔적이 있다.

한쪽에 잔뜩 쌓여있는 지푸라기들. 그 옆에 나무로 만들어진 무릎까지 오는 사람 둘 정도가 겨우 누울 마루.

그 위에 놓인 아기자기한 물건들, 낡은 책상, 헌 이불, 뭔가를 쓰고 있던 종이와 펜, 작은 사진첩 하나.

"여긴 니 방이냐?"

"네…."

잔뜩 수줍은 표정으로 땅만 바라보며 내 질문에 대답하는 여자.

혼자 사는 여자? 아니다. 생활의 필수품이 없다. 옷가지나 식기, 하물며 씻을 곳도 없는 곳.

그러니 여기서 사는 건 아닐 거다. 아마도…. 여기는 이 아가씨의 도피처.

별로 그리 좋은 곳은 아니기에 살짝 기분이 처지려고 하지만, 뭐 상관없다.

내가 뭐 언제부터 5성 호텔에서만 섹스했나?

이런 곳도 있고 그런 곳도 있는 거지. 어차피 나야 신나게 즐기고 기억만 읽으면 되니까.

적당히 주물럭거리며 기억을 읽고 색다른 맛을 즐긴 뒤 이곳을 떠나면 앞으로는 상관없어질 여자.

내 정보가 퍼질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어차피 죽으면 말이 없을 테니까.

"벗어."

내 말에 여자는 수줍어하면서도 기쁜 듯이 옷을 벗기 시작한다.

나는 좁은 마루에 걸터앉아 그런 그녀의 탈의를 지켜본다.

불과 5분 전까지만 해도 전혀 모르던 여자.

하지만 지금은 나에게 안기는 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인 것처럼 옷을 벗고 있는 모습.

점퍼를 벗고 멜빵바지를 벗자 하얀 티셔츠만 입은 그녀의 매끈한 다리가 보인다.

아. 좋네. 역시 하의 실종은 좋아.

위에는 벗지 말라고 할까? 가슴이 그렇게 큰 건 아니니 이러고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하지만 내가 타이밍이 늦었다. 여자는 이미 윗옷을 벗어버렸고 브라와 팬티 바람이 되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역시 알몸으로 해야겠네.

생판 모르는 여자의 알몸을 보면서 짜릿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데 여자의 오른쪽 옆구리 쪽에 뭔가가 보였다.

뭐지? 검댕 같은 건가?

뭐가 묻었나 보려고 하는데 내 시선을 눈치챈 여자가 부끄러운 듯이 몸을 비비 꼰다.

그리고 그렇게 움직이는 바람에 나는 옆구리에 있는 게 뭔지 알아차렸다.

"야. 그대로 왼쪽으로 반 바퀴 돌아봐."

"네?"

그러면서 반 바퀴 도는 여자.

"아니. 그쪽은 오른쪽이잖아. 반대로."

"아. 네…."

이번엔 제대로 돌았고, 그녀의 오른쪽 옆구리가 내게 똑똑히 보였다.

그래. 이건 확실하다. 멍이네.

그리고 그렇게 몸을 돌리자 허벅지 쪽에도 멍이 있는 게 보인다.

"뒤로 돌아봐."

"네?. 네."

나를 등지고 선 여자. 가느다란 허리와 움푹 들어간 기립근. 다소 훌륭한 골반. 그리고 새하얀 팬티.

충분히 꼴릴만한 상황이지만 그것보단 멍이 눈에 띄어 집중이 안 된다.

허벅지. 뒤쪽에 나 있는 커다란 멍.

옆구리와 더불어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모습.

그러고 보니 팔뚝 있는 곳에도 살짝 멍이 잡혀있는 게 보인다.

역시…. 뻔한 일인가.

"야. 너 누구한테 맞고 사냐?"

"네? 아…. 네. 괜찮아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시끄럽고. 물어보는 것만 간단하게 대답해."

"네. 네…."

매혹에 당한 상태인데도 대답이 시원시원하지 않고 질질 끈다.

아마 원래 이런 버릇인가보다. 이건 뭐 매혹으로도 어떻게 할 순 없지.

일일이 물어보고 답할 생각을 하니 답답하다. 이럴 거면 그냥 기억을 읽는 게 빠르지.

"너. 이리와."

"네!"

내게 가까이 다가오는 여자. 나는 여자를 내 다리 사이에 뒤돌아 앉게 하고 뒤에서 가슴을 잡았다.

내 손이 닿자 크게 움찔하는 여자. 어휴. 그런 반응 보이지 마라. 지금은 기억 읽기가 먼저야.

한 30분은 잡고 기억을 읽은 것 같다.

다른 짓은 안 하고 계속 가슴을 만지고 있던 탓에 기억을 다 읽고 나니 이 여자, 하루카는 잔뜩 발정이 나서 아래로 애액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에휴. 너도 참 지랄 같구나."

크게 특별할 것 없는 사연이다.

홋카이도 태생. 지금까지 한 번도 홋카이도를 벗어나 본 적 없는 여자.

멸망한 이후 1년 뒤 부모님이 살해당하고 삼촌 부부가 거둬들인다.

물론 선의에 의해서 그런 배려를 베풀었을 리가 없다.

아니지 한 1년은 잘 대해줬으니 처음엔 삼촌 부부도 호의로 받아줬나?

아니지. 적어도 삼촌 새끼는 그렇지 않았겠지. 노리는 게 있었어.

하루카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안 그래도 이쁘장한 아이가 점점 여자가 되었고, 삼촌의 눈이 점점 음흉해졌다.

자신의 동생의 딸인데 어떻게 그런 눈을 뜰 수 있는지 나는 죽어도 모르겠지만, 세상엔 근친도 많은데 뭐. 이 정도는 애교지.

그렇게 은근하게 다가오는 삼촌의 마수. 결국, 하루카는 삼촌에게 강간당한다.

신기 한 일이다. 왜 격렬하게 반항을 하지 않을까? 내가 그런 상황이 됐다면 식칼이라도 들고 찔러버릴 텐데.

어쨌든 처음 한 번이 어려운 법이다. 한번 당한 이후로는 일상이 되어버린 삼촌의 강간.

그리고 결국 삼촌의 부인, 그러니까 하루카의 숙모가 그 사실을 알았다.

그다음 부터는 이 여자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게 된다.

아주 통속적이고 흔해 빠진 이야기.

숙부를 유혹했다느니 헤프다느니…. 뭐 그런 병신같은 이유로 하루카는 핍박받는다.

삼촌에겐 성 착취를, 숙모에겐 감정의 쓰레기통 역할을.

그리고 결국엔 손도 댔다. 허벅지와 팔뚝, 옆구리의 멍은 숙모의 짓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를 먹고 늙어가는 자신에 비해 점점 여자로서의 매력이 피어나는 하루카.

그런 그녀에게 폭력을 휘두르게 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거다. 역시 처음 한 번이 어려운 거지.

한심한 이야기. 한심한 사람들. 한심한 여자.

삼류 소설에도 잘 안 쓰는 소재.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에 하루카는 뭘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경찰도 없고 공론화시킬 SNS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다.

마을 사람들? 그들은 외면했다. 그들은 삼촌 내외의 편이었으니까.

뭐, 폐쇄된 사회에서 이런 일은 왕왕 있는 일이니까. 이것도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지.

가면. 일본의 절대 강자 중의 하나. 그놈에 대한 기억은 연관되는 게 하나 있었다.

이 여자에게까지는 정보가 잘 안 와서 정확하진 않았지만, 이 마을에 종종 그 가면이 들른다고 했다.

이유까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럴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어쨌든 기왕 여기에 왔고 이만큼까지 했으면 정보를 마저 얻어야겠지?

이대로 끝낼 수는 없잖아? 어떻게든 마무리는 해야지.

게다가 이 여자는 소재가 좋다. 내가 좋아하는 소재. 복수.

상대방의 마음을 쉽게 여는 방법. 적어도 이걸로 실패한 적은 없으니까. 승률이 높지.

내 앞에 앉은 하루카. 그 여린 어깨를 잠시 바라본다.

음. 다행히 아직 그렇게 엇나간 출발은 아니야. 이 정도면 충분히 시도할 수 있을 것 같네.

바로 무효화를 썼다.

그리고 느긋하게 반사를 걸었다. 사실 걸 필요도 없다. 하루카의 스킬은 성장이니까.

나에게 뭔가 해를 끼칠 수 없는 방법이 전혀 없는 여자.

매혹이 풀리자마자 후다닥 일어나 자신의 몸을 가리며 나를 두려운 듯 바라보는 하루카.

앙칼진 비명이나 싸대기를 날리려는 시도 따위는 없다.

그저 알 수 없는 상황에 마주쳐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힘없는 여자 하나가 있을 뿐.

"야. 일단 옷부터 입어라."

아직 순서가 아니다. 섹스 같은 것은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어차피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마지막에 강제로라도 할 수 있다.

그러니 서두를 필요는 없다. 뭐하러 그래. 느긋하게 하면 된다. 느긋하게.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주섬주섬 옷을 입는 여자.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불안한 눈빛은 요동치듯이 떨린다.

잔뜩 겁을 먹은 초식동물의 눈.

독기가 전혀 없다. 이래서야 복수를 할 수 있긴 있을까?

제 딴에는 서두른다고 했지만 옷 입는 모습은 내가 봤을 땐 느릿느릿해서 답답할 정도였다.

뭐…. 이쁘니까 봐준다. 저 정도 이쁘장하면 이 정도 꾸물거림은 이해해 줘야지.

결국, 옷을 다 입은 하루카. 그리고 불안한 눈빛은 여전하다.

뱀 앞에 선 쥐새끼 같은 모습.

내가 왁! 하고 소리 지르면 아이쿠! 하면서 바닥에 주저앉을 것 같은 유약한 모습.

세상이 망하기 전에는 이런 모습이 아니던데.

싱그럽고 생기발랄한 농촌의 건강한 여자아이 같은 모습이었다고.

그 삼촌이라는 새끼도 참 대단하네. 가스라이팅을 참 잘했어. 애를 음침하고 소심하게 만들어놨잖아.

"너. 니 삼촌하고 숙모 죽일 수 있는데. 죽일래?"

단도직입적으로 말한 나의 말에 하루카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못 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음. 이 여자 괜찮은 거야? 생활에 지장이 있어 보이지는 않던데.

"천사님…. 이세요?"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갑자기 천사가 왜 나와.

"천사님…. 맞구나. 내 편지가 닿았구나…. 드디어 와주셨구나…. 흑."

그러더니 눈물을 흘린다.

뭐지?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야.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물어보는 멍청한 소리는 하지 않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하루카에게 다가간다.

울먹이는 표정을 하는 그녀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댄다. 가만히 온기를 느끼는 듯한 모습.

그리고 나는 재빨리 기억 읽기를 썼다. 천사라니 대체 무슨 개소리야.

잠깐의 짧은 기억 읽기. 대충 맥락만 이해하면 된다.

그리고 어느새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면서 기억 읽기를 마쳤다.

아. 이해했어. 천사라니. 하. 이 여자도 진짜. 답답하네.

천사는 그런 거다.

자신의 암울한 처지를 단번에 극복시켜줄 가상의 존재.

불안전한 청소년기를 보내고 멸망과 학대로 일상이 파괴된 연약한 소녀가 만들어낸 망상의 산물.

하루카는 삼촌에게 당하고 난 뒷면 항상 처참한 마음으로 아래만 간신히 씻은 뒤 이곳에 와서 편지를 썼다.

그리고 숙모에게 맞기 시작한 뒤부터는 편지 쓰는 양이 많아졌다.

음침한 편지. 저주의 편지.

그들을 벌해달라고 요청하는 수취인이 없는 편지.

그렇게라도 해소하고 싶었던 거다.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간절하게.

그렇게나마 빌었던 거다. 누가 자신을 좀 도와달라고.

그렇다고 해도…. 천사라니. 센스 하고는.

"나는 천사가 아냐. 하지만 천사보다 훨씬 유능하지. 니 편지. 니가 했던 그 저주의 말들. 전부 이뤄줄 수 있어. 어때? 할래?"

내 말을 들은 하루카는 손으로 자신의 눈물을 닦았다.

아직 눈물범벅이 돼 있는 눈. 하지만 그 눈빛은 아까랑 달랐다.

결의. 그리고 의지.

그래. 저 정도 눈빛이면 할 수 있겠네. 뭐, 어렵지 않지.

"대답은?"

"할게요. 하겠어요."

"좋아. 그럼 바로 가자."

몸을 돌려 창고 바깥으로 나갔다.

목초지를 가르면 나오는 집 한 채. 그리고 거기 있는 기척 둘.

저게 하루카의 삼촌과 숙모일거다. 아니, 강간범과 폭행범이겠지?

비행을 쓰고 있기에 둥실 떠서 이동하는 나를 보고 입을 헤벌리는 하루카.

아. 천사 따위 아니라고 했는데…. 그냥 걸을 걸 그랬나? 되게 부담스럽게 쳐다보네.

다들 스킬 하나만 있는 연놈들. 삼촌은 마비. 숙모는 질병 해제.

하루카를 처음 강간할 때도 마비를 써서 꼼짝 못 하게 한 다음 강간했다.

으음. 그럼 나는 어떻게 해줄까.

음. 그렇게 생각해봐도 마땅히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네.

역시 가진 건 수면 뿐이라 내 방식대로 하는 수밖에.

허접한 집 문을 발로 차고 안으로 들어가 집 안에 있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에게 바로 무효화와 수면을 건다.

아주 간단하게 쓰러져버리는 두 남녀. 그리고 눈이 커지는 하루카.

수납에서 테이프를 꺼내 팔다리를 묶는다. 그러면서 기억 읽기를 한다.

연놈들의 스킬은 변동 없다. 마비와 질병 해제.

입은 안 막아도 되겠네. 그편이 좀 더 처절하겠지?

죽이기 전에 기억 읽기를 마저 해본다. 가면 놈에 대해서. 음. 이놈들도 아는 게 별로 없네.

역시 마을의 다른 놈들을 다 뒤져봐야겠구나.

"자. 선물."

잘 테이프 질 해놓은 삼촌과 숙모. 청테이프로 이쁘게 리본까지 만들어서 이마에 하나씩 붙여줬다.

그런 나의 모습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하루카.

아마 이렇게 빠르게 뭔가 해결될 거란 생각은 못 했나 보다.

얼이 빠진 것처럼 나와 삼촌 내외를 번갈아 보는 모습.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왜? 리본이 맘에 안 들어?"

"에…? 아…. 아뇨."

"이제 마음대로 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죽여도 되고 고문해도 되고 발로 차도 되고…. 날붙이 같은 게 있으면 푹푹 찔러도 되지. 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거야."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하루카.

얼빠진 눈빛 안쪽에서 조용하게 타오르는 불꽃이 보인다.

그 기이한 열기. 그래. 저 눈빛은 많이 봐서 알지.

끔찍한 기억을 파묻을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

물론 자신이 당했던 일들은 평생 기억나겠지만, 그 느낌이 다를 거다.

복수하지 못한 과거와 복수한 과거는 그 질감이 다르지.

다들 그렇잖아. 나도 그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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