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460화 (46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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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거리 비행

사흘째.

아침 일찍 부터 날기 시작하는데 뭔가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뭐지? 웬 사람이?

게다가 그 사람들은 다들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방향은 북동쪽.

몇 대의 차가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낙타를 몰고 그쪽으로 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잠깐 나는 것을 멈추고 고민한다.

이런걸 일일이 신경 쓰면서 가다 보면 엄청나게 질질 끌릴 거다. 그러니 저길 가보는 건 좋은 선택은 아냐.

하지만 궁금했다. 대체 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도로를 따라가는 거 보면 저기 뭔가 도시라도 있나?

스마트폰을 켜서 바로 지도를 확인해본다.

나의 현위치가 어딘지 정확하게 모르지만 그래도 근처에 뭐가 있는지는 알 수 있겠지.

지도를 보다 보니 가장 유력한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익숙한 이름. 울란바토르. 몽골의 수도.

그렇구나. 저들은 수도로 가는 사람들이었어.

수도라. 궁금하긴 한데.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나가는 것도 오히려 바보 같은 짓이겠지?

최대한 시간을 끌지 않고 상황만 확인하기로 마음먹는다.

괜히 이상한 일에 휘말려서 일을 벌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확인만 해보자. 확인만.

사람들이 가는 쪽으로 조금 날아가니 저 멀리 뭔가가 보인다.

건물들.

이런 사막을 가로질러온 나에겐 뭔가 특이한 경험이다. 갑자기 이런 도시가 튀어나온다고?

이건 조금 신기할 정도네.

문명의 흔적. 사람이 살아있던 도시.

아니 말이 조금 이상하네. 아직도 사람은 살고 있으니 과거형으로 말하면 안 되지. 내가 실례를 저질렀네.

근데…. 뭔가 조금 한산하다. 높은 건물도 있긴 있지만, 전체적으로 땅덩이를 쓰는 게 널널한 느낌이야.

약간 우리나라의 지방 도시 같은 느낌? 그것보다도 한산하다.

하긴, 여기 사람들은 우리나라처럼 좁은 지역에 낑겨서 살 필요가 없겠지.

아마 내가 SG 시티를 보지 않았다면 이 광경을 보고 약간 어이없음을 느꼈을 거다.

여기 역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교류하며 도시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멸망 따위는 좆 까라고 말하는 듯한 모습.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그 모습이 낯설다.

내가 하늘에 날고 있는 게 아니었다면 세상이 멸망한 게 맞는지 의심했을 정도.

어째서지?

왜 이들은 서로를 죽이고 싸우지 않지?

도시 크기를 보니 생각보다 크다. 폭이 좁고 길이가 긴 모습의 도시.

대략 청주의 두 배 정도? 그쯤 되는 거 같다. 인구 밀도도 비슷한 느낌인데.

확실히 SG 시티를 봐둔 게 도움이 된다.

너무나도 평온한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들은 왜 이리 느긋하고 여유 있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였으니까.

욕심이 없나? 천성이 착한가? 아니 그런 건 아닐 텐데.

나는 뭐 천성이 나빠서 사람들을 죽이고 다녔나? 천성이 어딨어. 성선설, 성악설 그런 건 다 별 의미 없는 말이다.

백만 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만 가지의 사람이 있는 건데 어떻게 사람을 한가지로만 획일해서 구분할 수 있겠어?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수준 정도는 알아봐야지. 시간을 조금 쓰겠지만 그 정도는 해야지.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잖아?

공중에 떠서 아래를 내려보며 적당한 타겟을 찾는다.

지금은 파티가 되어있어서 페이즈 아웃은 별로 쓰고 싶지 않다.

어차피 빠르게 기억만 읽고 마는 건데 굳이 건물 안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지.

도시 외곽, 한가한 곳에 혼자 있는 남자 하나.

빠르게 다가가 무효화를 쓰고 수면을 건다. 그리고 이 자리를 저장. 남자의 바닥에 게이트를 깔았다.

게이트로 빠지는 남자. 나도 넘어가서 바로 닫는다.

수원 비행장 바닥에 얌전히 누워있는 남자.

대충 빠르게 기억을 읽었다. 스킬에 대해서. 수준에 대해서. 어째서 이렇게 평화롭게 사는지에 대해서.

적당히 기억을 읽고 다시 남자의 바닥에 게이트를 깔았다.

아까 있던 자리로 돌아온 남자.

무효화가 나에게 닿지 않는 거리까지 날아 올라가 바로 무효화를 썼다.

수면에서 깬 남자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자기가 왜 쓰러졌는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저 사람은 한 10분 정도 자기가 쓰러졌다가 일어났다고만 생각하겠지.

자신의 기억이 읽힌 줄 모르고.

그런 식으로 두 명의 기억을 더 읽었다.

그리고 낸 결론. 여기는 별 볼일이 없다는 것.

이곳은 애초에 서로 싸운 적이 없었다.

세상이 멸망했던 그 날. 노인들이 죽고 그 이후로 아이가 태어난 않고 있지만…. 이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아마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든 놈이 이들을 봤다면 분통이 터졌을지도 모른다.

왜 자신들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지 궁금하겠지.

그리고 그건 나도 궁금하다. 대체 이들은 왜 서로 죽고 죽이질 않았을까?

고작 10분 정도씩 세 명의 기억을 읽어본 것만으론 그런 것까진 전부 알 수는 없었다.

어쨌든 이들은 우리와 같은 사고방식이 아니었다.

스킬이라는 편한 게 있다고? 근데 코인이 필요하다고? 그 코인은 사람을 죽여야 얻을 수 있다고? 죽여!

이게 아니다.

사람을 죽여야 얻을 수 있는 코인이라면 관두자. 하나씩 가진 스킬만으로도 충분하지. 얼마나 편해?

이런 느낌.

하. 그렇게 치열하게 사람을 쳐 죽이고 스킬을 열일곱 개나 가지고 있는 내가 민망할 정도.

뭐, 그렇다고 나 자신이 혐오스럽거나 끔찍하다는 생각은 안 했다.

그런 생각은 이미 몇 년 전에 다 했으니까. 더 하는 건 시간 낭비지.

어쨌든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지도를 봤다.

그리고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려 다시 모스크바 쪽으로 날아간다.

지금 건드릴 곳은 아니야. 언젠가는 그럴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가 저들을 순식간에 몰살하고 그 남은 코인들을 전부 회수할 수 있다면 당연히 여길 먹어치우겠지.

하지만 그건 당장 불가능하다. 그러니 깔끔하게 넘긴다.

어차피 베이징에서 이틀이면 올 수 있는 거리.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올 수 있다.

그러니 지금은 아니다. 우선순위가 낮아.

무시하고 지나가기엔 상당히 찝찝하지만,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내 갈 길을 간다.

웃기는 사람들. 욕심이 없는 거야? 아니면 분쟁을 만들고 싶지 않은 거야?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이들이다.

근데…. 참 웃기네. 세상 사람들이 다 저런 마음가짐이었다면, 이 세상을 만든 놈들은 대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그렇게 500킬로를 더 날아간 다음 다시 위치를 저장한다.

그리고 이번엔 동쪽으로 간다. 바다 위 한복판. 러시아로 가는 길보다는 훨씬 더 지루한 비행.

덕분에 이쪽은 그냥 무념무상으로 투시 스킬을 숙련하며 갈 수 있었다. 음. 아마 내일이면 투시도 마스터 할 수 있겠네.

아까 울란바토르에서 봤던 몽골 사람들이 생각난다.

진짜 희한한 사람들이네. 대체 왜 그럴까?

내가 비정상인 걸까? 아니야.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한국의 사람들은 이런 게 자연스러웠다고.

물론 SG 놈들이 청주에 한 짓을 생각하면 이 광기는 제어될 수 있는 거긴 했다.

아니 제어가 아니지. 애초에 광기가 발생하지 않게 하면 되는 거였지.

하지만 그건 대기업 정도 되는 놈들이 전력을 다해서 막아낸 결과다.

저 몽골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을까? 그렇다고 하기엔 몽골인 세 명의 기억에서 따로 나온 건 없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뭐라도 떴을 텐데 말이지.

표본이 너무 적었나? 기왕 하는 거 더 많이 읽고 올 걸 그랬나?

아니다. 어차피 신경 안 쓰기로 했으니 놔두자.

이미 지나쳤는데 더 신경 쓰면 내 손해야. 그러고 싶진 않다. 필요 없는 곳에 쓸데없이 계속 신경을 쓸 필요는 없지.

바다 위에서 두어 시간 비행했을 무렵, 저 멀리에 육지가 보였다.

음. 저건 홋카이도일까? 아니면 사할린일까?

점점 다가오는 육지. 그렇게 땅이 가까워지자 바로 탐지를 돌렸다.

일단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기척. 일단 그럼 어디든 상관없는데…. 과연 여기는 어디냐?

도로에 있는 간판. 딱 봐도 일본어다. 아차. 생각해보니 아직 번역을 안 찍었네.

그것도 빨리 찍어야 하는데. 이번에 마스터 하면 꼭 그것도 찍어야지. 코인도 많으니까.

어쨌든 여기는 홋카이도가 분명하다.

최단 비행 루트를 계산해보면 홋카이도 최북단과 사할린 사이를 관통해서 지나가야 했는데…. 각도가 조금 이상했나 보네.

어쨌든 일찍 알아서 다행이다. 나중에 알았으면 정말 이상한 곳에 도착해서 어처구니없을 뻔했잖아.

바다 위를 나는 건 그게 문제다. 방향을 잡기가 어려워. 내가 무슨 별을 보고 가는 선원도 아니고 말야.

그런 홋카이도를 관통해서 지나가지만, 인기척은 없다.

확실히 일본도 우리랑 비슷하긴 하지. 이놈들도 서로를 열심히 죽였으니까.

게다가 홋카이도에 대한 정보는 야쿠자들의 기억에서 약간의 정보를 얻은 게 있다.

절대 강자 중의 하나인 가면. 그놈의 기반이 홋카이도라 그랬다.

결국, 그놈이 이쪽 사람들을 다 잡아먹었다는 소리잖아?

근데 그거 말고는 따로 정보가 없다.

하긴. 그만큼의 정보가 있는 게 어디냐.

정보를 얻는 건 어렵다. 일단 전제 자체가 마주치고 죽지 않아야 한다는 소리니까.

하여간, 여기도 일단은 그냥 지나친다.

몽골이랑 마찬가지. 지금 일본까지 동시 공략하기엔 몸이 모자라.

아. 젠장. 진짜 분신 스킬 내놓으라고! 빌어먹을 새끼들아!

그렇게 지나가는데 갑자기 저 멀리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앞으로 갈수록 기척이 많아진다. 음. 뭐지? 제법 되는데?

탐지 범위 끝에 걸린 거니 거리는 760미터일 텐데. 기척이 꽤 된다.

거의 100단위에 가까운 숫자.

으음. 무시하고 가고 싶지만, 여기도 그냥은 지나가긴 힘들겠지?

어차피 곧 네 시간이 되니까 이놈들도 기억 읽기만 하고 가자.

기억만 잠깐 읽고 오늘의 작업을 마치는 거야. 뭐, 울란바토르하고 크게 다를 건 없지.

살아있는 놈들의 정보는 중요하다. 어디 가서 쉽게 얻기 힘든 정보들이잖아?

기척들이 있는 곳은 한 작은 마을이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양들이 방목되어 한가롭게 노니면서 풀을 뜯고 있었다.

어…. 여기 일본 맞나? 느낌이 일본이랑은 조금 다른데?

내가 아는 이미지의 일본이랑은 조금 다르다.

일단 저 양이 조금 이질적이다. 일본에 양이라고? 쉽게 연상이 잘 안 되는데?

홋카이도라 그런가?

그렇게 신기한 마음에 양을 바라봤다. 어. 내가 양을 보는 게 처음인가? 아닌가?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털이 북슬북슬하게 나 있는 녀석들. 근데 몇 마리는 털이 없다.

게임으로 양털 수집을 해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본건 처음인 거 같아 웃긴다. 진짜 털을 깎으니 저렇게 크기가 확 줄어드네.

암튼, 양은 됐고.

이제 사람을 찾아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양들이 있는 쪽으로 기척 하나가 다가온다.

천리안을 쓰고 있기에 기척 쪽을 바라봤다.

여자. 아니, 소녀? 덧니가 나 있는 이쁘장한 여자. 아니 소녀.

아이씨. 나이가 가늠이 안 되네. 그냥 아가씨라고 해주자.

어쨌든 상당히 이쁘장한 모습이다.

하얀색 긴팔 티셔츠에 검은 멜빵바지. 위로 틀어 묶은 포니테일. 가벼운 점퍼.

손에는 기다란 막대기를 하나 들고 있는데…. 그걸 보니 대충 양치기 같은 느낌이 난다.

뭐, 이런 곳에 저런 걸 들고 오는 건 양들 때문에 오는 게 맞을 테니 양치기는 맞으려나.

이쁘장하다고는 하나 그렇게 막 세상이 눈부실 정도의 미모도 아니고 가슴이 엄청 큰 것도 아니다.

하지만 뭐랄까? 매력적인 모습이다. 저렇게 몸매가 전혀 안 드러나는 멜빵바지를 입었는데도 그런 느낌이 들다니. 신기하단 말이지.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건 저 외모와는 다른 우울한 분위기.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생기가 없는 느낌인데.

대충 예상되는 상황은 있지만…. 어쨌든 확인해 봐야겠지?

잠깐 고민을 해본다.

그래. 어차피 기억 읽기를 하면 젊고 이쁘장한 여자가 좋지.

근데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다. 재워서 기억만 읽을 것이냐. 아니면 그 이상까지 할 것이냐.

사실, 답은 나왔지. 뭐하러 기억만 읽어? 내가 고자도 아니고.

일단 탐지. 주변에 기척은 많이 느껴지지만, 이 근처에는 아무도 없다. 좋아. 됐고.

하늘에서 무효화를 걸고 바로 매혹을 걸었다.

그런 다음 여자의 앞에서 투명화를 풀었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우울한 표정에서 바로 수줍은 미소를 짓는 여자.

아. 웃으니까 훨씬 낫네. 세배는 더 이뻐 보이네.

"뭐 하고 있어?"

"양…. 데리러 가고 있는 데요."

차마 나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말하는 모습. 왜 이리 부끄러워하는 거야? 웃기네.

"뭐 물어볼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네. 얼마든지요…."

두 손을 맞잡고 꼼지락거리면서 말끝을 흐린다.

되게 왈가닥처럼 생겼는데 수줍어하니 조금 신선한 느낌이네.

"혹시 어디 조용하고 한적한 곳 없나? 그러니까…. 둘만 있을 곳?"

어차피 매혹에 걸렸으니 뭔가를 말하면 다 들어줄 테지만, 그래도 제법 상식적으로 대화를 이어간다.

뭐,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거라면…. 저를 따라 오시겠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푹 숙이더니 성큼성큼 앞장서서 간다.

으음. 뒤에서 보니까 훨씬 괜찮네.

포니테일 덕분에 환하게 드러난 목덜미가 맘에 들어.

기억 읽기 할 사람은 잘 고른 거 같아. 운이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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