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459화 (459/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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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거리 비행

장거리 비행 이틀 차.

오늘도 아침부터 바로 비행을 시작한다.

러시아로 가는 길. 황량한 땅과 메마른 먼지들.

암석만 있는 줄 알았던 이곳에도 어느새 모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역시 사막은 모래가 있어야지.

생각해보니 모래가 없을 리가 없다. 한국으로 몰려오는 황사. 그 모래들은 다 여기서 온 것들이잖아.

거기에 짱개 새끼들이 미세먼지까지 이쁘게 토핑해주는 거고. 하여간…. 저 새끼들을 빨리 잡아 죽여야 하는데 말이지.

실제로 모래가 쌓인 사막을 보는 건 신기했다. 그림과 같은 사막. 실감이 나지 않는 모래 언덕.

스킬 없이는 정말 오고 싶지 않은 곳이다. 별로 내키지는 않는 곳이야. 진짜 삭막하네.

웃긴 건 계속해서 그 뭐야 유목민들의 텐트. 게르인가? 암튼 그런 거.

그게 계속 보인다는 거다. 신기한 사람들이야. 저들에겐 세상이 이렇게 변한 게 어떤 의미일까?

뭔가 삶의 변화가 있었을까? 스킬은 무슨 스킬을 찍었을까?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내려가서 확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모르겠다. 끝내주는 미녀가 있다면 모르지.

아니…. 이쁜 여자가 있다고 해도 별로 손대고 싶지 않을 거야.

위생상태 같은 걸 생각하면 글쎄…. 옷 벗고 달려들어도 마다할 거 같네.

어쨌든 저들은 내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타인과의 경쟁을 포기한 사람들. 세상의 변화에 관심 없는 사람들.

예전이었다면 하나하나 잡아 죽였겠지.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는 별로 못 느낀다.

이미 수많은 사람을 죽여온 내가 사람 몇 명 더 죽이는 것에 대해 죄책감 같은 걸 느낀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냥 귀찮을 뿐이다. 시간이 지체되잖아. 저런 인간들을 하나하나 다 잡아 죽이다간 어디도 못 갈 테니.

그렇게 사막을 가로지르며 오늘도 500킬로미터를 찍었다.

방향은…. 맞게 가고 있겠지? GPS가 없는 건 정말 불편하네. 스킬은 그런 스킬 없을까?

지도 생성 같은 건 하나 정도 있을법한데. 지금까지 나오지 않은 거 보면 없다고 봐야겠지?

어쨌든 현 위치를 저장하고 이제 동해 위로 순간이동 한다.

방금까지 물기 없는 삭막한 땅 위를 날아가다가 이번엔 바다 위에 떠 있으니 기분이 오묘하다.

중간이 없어. 한쪽은 바짝 말랐고 한쪽은 더없이 축축하네.

바다 위를 나는 건 정말 아무런 재미가 없다.

그래도 사막 위에서는 심심할 만하면 뭐라도 하나씩 튀어나왔다.

유목민 같은 경우는 투시가 있기에 게르 안쪽까지 훔쳐보는 게 가능했다. 뭐 볼 건 없었지만.

그리고 팍팍해 보이는 사막에는 생각보다 많은 동물이 살고 있었기에 천리안으로 그런 걸 볼 수 있었다.

이름 모를 전갈이라던가 사막을 가로지르는 뱀, 이상한 도마뱀같이 생긴 것들, 새나 가젤? 맞나? 암튼 그런 동물들까지.

게다가 낙타도 있었다. 야생 낙타인지 사람들이 죽고 자연으로 돌아간 낙타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낙타들이 제법 있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보는데 심심하진 않았다.

근데 바다는?

없다. 아무것도.

물론 저 물밑에는 엄청나게 많은 생물이 살고 있겠지. 사막이랑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생물들이 있을 거다.

근데 그건 날아가면서 볼 수가 없다. 잠수하지 않는 한 볼 수 없는 풍경.

투시로 물 밑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별로 의미가 없었다.

투시가 안 되는 건 아닌거 같은데 그저 물밑은 어둡고 캄캄할 뿐이었다.

그래. 빛이 없으면 투시를 해도 안쪽을 볼 수는 없겠지. 그건 어쩔 수 없지.

아무튼, 내가 볼 수 있는 건 수면에 반사된 햇볕뿐이다. 그것도 너무 눈부셔서 눈이 멀어버릴 거 같은 빛.

와. 이거 얼굴 다 타겠네. 이정도 빛 반사면 미국 도착할 때쯤엔 장난 아니겠어.

다행히 수납 안에 자외선 차단제가 있기에 정말 치덕치덕 처발랐다.

어차피 회귀 한방이면 새것이 될 테니 아낄 필요 없잖아?

내 피부는 소중하다고. 자외선 차단제의 꾸덕꾸덕한 찝찝함보단 차라리 이게 낫지.

아직 여름이 되기 전에 미국행을 결정한 건 그나마 잘한 거 같다.

아무리 바람이 시원하다고 해도 햇볕이 더 뜨거워지면 힘들었을 거야. 참 쉽지 않네.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고.

날씨 면역 같은 스킬은 왜 없는 걸까? 솔직히 이정도 탈인간화했으면 그런 스킬들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 스킬 시스템이란 건 생각할수록 웃긴 거 같다.

평범한 인간에게 너무 커다란 무기를 쥐여준 꼴이야. 그러니까 그런 거지. 사마귀한테 진짜 낫을 달아준 느낌?

누군가를 죽이는 건 너무 쉽다.

하지만 다른 이의 공격을 방어하는 건 너무 어렵다.

특히나 육체의 한계는 너무나 취약하다. 날아오는 스킬을 스킬로 막아내지 못하면 그대로 죽어버리는 개복치 같은 시스템.

스킬을 맞고 한 번에 안 죽었다면 뭔가 구도가 달라졌겠지?

뭐, 그렇게 됐다고 해도 나는 수면을 골랐겠지만.

바다 위를 나는 건 이게 문제인 거 같다.

볼 게 없으니 잡생각이 많아진다는 것. 그래도 이런 생각이라도 하면서 가야 덜 심심하지.

안 그러면 계속 후회만 했을 거야.

내가 왜 이걸 할 생각을 했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런 짓을 하고 있지? 이러면서.

그렇게 바다 위를 날아가는 것도 네 시간이 지났다.

하루에 양쪽으로 500킬로미터씩. 조금씩 조금씩 무식한 방법으로 맵을 밝힌다.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야.

이런 짓을 한 사람이 또 있을까? 물론 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많으니 없진 않을 거다.

근데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필요한 게 너무 많다.

일단 순간이동. 이게 없으면 말이 안 된다. 마지막 갔던 위치를 저장하고 돌아올 수 있다는 건 엄청난 메리트니까.

어차피 순간이동은 티어5의 스킬. 그래. 이건 뭐 어렵지 않을 거야.

근데 문제는 비행이다.

지금 한계 돌파 패시브를 찍고 난 다음 시속 125킬로미터로 가도 이렇게 답답한데, 한계 돌파 없이 시속 50킬로의 속도로 가라고 하면…. 그게 가능할까?

뭐, 가능은 하겠지. 하겠는데…. 하는 놈은 없을 거 같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

그정도로 미친놈이…. 과연 아직 살아있을까?

어쨌든 집으로 돌아온다.

투시 숙련을 하면서 적당히 포션을 먹었기에 조금 알딸딸한 기분.

아침에 나갔는데 집에 돌아오니 벌써 해가 슬슬 지려고 한다. 이거 참…. 되게 손해 보는 느낌이네. 투덜투덜투덜투덜.

"왔어요…?"

나를 발견한 승희가 힘없이 다가와 풀썩 안긴다.

"숙련 열심히 했나 보네. 상태가 말이 아니야."

"그래도 다행인 건 이것도 하다 보니 그나마 익숙해지긴 하네요…."

"그렇지. 사람은 적응의 생물이거든. 그럼 오늘 숙련은 더 못하나?"

"네…. 나는 이제 무리."

"그래? 그럼 물고기 테이밍 해서 풀러 가자."

"으으. 인정사정없네. 그래요. 가요."

"안나야! 미나야! 세아야!"

모두를 불러 우한으로 가는 게이트를 탄다.

밤에는 물고기들도 잘 안 움직이려 하기에 크게 수익은 없다.

대신 오전 8시간 동안 세아의 물고기 네 마리가 열심히 코인을 주워서 얻은 40만.

이제 승희의 물고기 세 마리와 함께 또 밤늦게까지 파밍을 할 차례.

진짜…. 40만이면 엄청난 코인 양인데. 이젠 그 정도론 감흥이 없다는 게 슬프네.

눈이 너무 높아져 버렸어. 스킬 하나 배울 때마다 코인이 천만씩 깨지기 시작하니까 이젠 몇십만 정도는 정말 우스워진단 말이지.

40만이면 스킬 몇 개 없는 사람들에겐 스킬 하나를 배우고도 포션을 어지간히 먹을 수 있는 금액인데.

안나가 코인 탐지를 켜고 앞장서고 그 뒤를 나머지가 뒤따른다.

자잘한 코인들은 어느 정도 지나치고 오전동안 물고기들이 아직 오지 않은 곳까지 이동한 다음 위치를 저장한다.

그리고 다시 물고기 테이밍. 세아의 네 마리와 승희의 세 마리.

코인을 줍기 시작하는 물고기들을 놔두고 다시 벙커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소파에 파묻히는 승희. 그래도 방으로 들어가진 않네.

미나는 주방으로 저녁 준비를 하러 간다고 들어가고 세아와 안나는 밖으로 나간다.

"너흰 어디가?"

"우리? 대련."

"대련? 아."

"서로 데미지를 줄 수 없으니까 대련하기 좋아."

"으음. 그래?"

그러면서 벙커 밖으로 나가는 둘.

승희를 한번 슬쩍 봤더니 나보고 자기는 괜찮다고 손을 휘휘 젓는다.

짜식. 묘하게 눈치 빠르네. 딱히 말도 안 했는데 말이지.

밖으로 나가서 세아와 안나의 대결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별다른 자세 없이 바로 시작한 둘의 대련.

예전에도 몇 번 봤지만, 둘 사이의 대련은 그때와는 훨씬 다르게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지금의 대결은 보호막을 부수려는 세아와 보호막에 닿기만 해도 이기는 안나의 대결이라 그런지 확실히 안나가 유리하다.

공중에 떠서 블링크로 여기저기 움직이는 두 사람.

막 정신없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한쪽이 블링크를 쓰면 다른 한쪽도 블링크로 도망갈 수 있으니까.

근데 이젠 움직임이 조금 바뀌었다. 블링크보단 비행으로 무빙하는 느낌?

하긴 그게 체력 관리에는 훨씬 유리하지. 비행은 한번 써놓으면 생각만으로 몸을 움직일 수 있으니까.

블링크로 날아와 세아의 보호막에 주먹을 내지르는 안나.

자세는…. 뭐 솔직히 조금 엉성하다. 그건 안나뿐만 아니라 세아도 마찬가지.

둘 다 제대로 격투기를 배운 사람들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주먹에 실린 스킬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자세는 크게 중요하지 않지. 어쨌든 맞기만 하면 되니까.

안나의 주먹이 보호막을 치기 직전에 세아가 빠르게 뒤로 물러난다.

보호막에 맞지 않으면 번개 주먹은 보호막 안쪽에 번개를 뿌릴 수 없다. 그렇기에 세아는 딱 그만큼만 움직이면 된다.

안나의 팔길이만큼. 아니 그것도 필요 없지. 한 뼘만 멀어져도 어차피 상관없으니까.

하지만, 안나 역시 그렇게 헛스윙을 하고 바로 그대로 세아의 뒤로 블링크 한다.

이번엔 세아도 블링크.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나타나더니 안나의 움직임을 주시한다.

그러더니 다시 블링크. 안나의 뒤쪽 사각으로 나타났다 싶더니 다시 앞으로 블링크를 해서 주먹을 휘두른다.

카창!

보호막이 깨지는 소리. 그리고 세아의 주먹이 안나에게 닿았다.

하지만 그사이에 안나는 세아를 두번 맞췄다. 어. 두번 맞지? 그렇게 보였는데.

"으. 손해 봤네. 안나도 정말 방법이 너무 과격해. 노린 거지?"

"물론이지."

"으. 1대 2네. 괜찮아. 아직 세대 남았어."

아…. 그렇네. 쟤들은 데미지 감소가 있다.

공중에 떠 있으면 광역 스킬 무효화에 당하지 않을 테니 쟤들은 한 번에 죽을 염려를 안 해도 된다.

그러니 지금의 안나처럼 저런 움직임이 가능한 거다. 일부러 한번 맞아주면서 자신은 두 대를 때리는 방식.

나는 애초에 할 수 없는 방법이네. 내 사고방식에도 안 맞고.

그리고…. 저건 문제가 많아.

"잠깐만! 둘 다 와봐!"

내가 외쳐서 부르자 안나와 세아가 바로 내 앞으로 날아온다.

"왜?"

"왜요?"

의아한 표정의 두 사람.

"방금 둘이 하는 걸 봐서 그런데. 안나. 너 일부러 한 대 맞아주면서 두 대 때린 거야?"

"네."

"근데 왜 그러는 거야? 데미지 감소를 믿고?"

"네. 80퍼센트 감소라면서요?"

"어. 그렇지. 그렇긴 한데…. 둘 다 뭔가를 잘못 알고 있는 거 같아서."

"음?"

"네?"

"봐봐. 데미지 감소가 데미지를 80퍼센트 줄여준다고 했지? 근데 너희는 지금 데미지 100 들어오는 걸 가정하고 그게 20으로 줄어들어서 다섯 번 맞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거잖아?"

"응."

"네."

"그게 아니지. 왜 데미지를 100으로 가정하는 거야? 세아의 주먹은 100이 아냐. 직접 맞으면 1,000은 우스울걸? 산샤댐도 박살 낸 주먹인데. 아무튼. 데미지 1,000은 80퍼센트 감소 당해도 데미지가 200이라고. 우리의 체력이 100이라고 가정하는 것도 이상하고 공격이 100이라고 가정하는 것도 이상해. 그러니까 내 말은…. 그렇게 일부러 맞아주는 방식은 아예 하면 안 된다는 거야."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아예 안 맞는 걸 기본으로 해야 해. 그러니 안나 너 같은 방식은 상당히 위험해. 안 했으면 좋겠어."

"그럼 승부가 나지 않는 것요?"

"살아있는 게 이기는 거야."

내 말에 안나가 입을 닫는다. 세아 역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내심 수긍하는 눈치.

안나 역시 잠시 생각하더니 나를 보고 말한다.

"알겠어요. 당신이 하라고 하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깔끔하게 수긍하는 안나. 별다른 고민이나 이의는 없다는 듯한 저 모습.

그러더니 나를 보고 빙긋 웃는다. 예의 그 익숙했던 안나 특유의 미소.

그런 미소를 보니 뭐라고 더 말할 게 없어졌다.

으. 반칙이네. 정말로.

"다시 할까?"

"그래. 그럼 이제 무조건 먼저 닿으면 패배."

"응."

그러더니 다시 둘이 하늘로 몸을 띄운다.

그리고 바로 시작되는 대련.

나는 그런 그녀들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세아나 안나가 상대방과 저렇게 직접 부딪히는 일은 없어야 한다.

아무리 우월한 상황이라도 무슨 변수가 어떻게 생길지 모르는 게 싸움인데.

우리는 힘자랑을 하거나 상대를 굴복시키는 싸움을 하는 게 아니다.

그저 죽이는 것.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이는 게 최고인 상황.

내 계획에는 저렇게 상대와 투닥거리면서 쌈박질하는 건 있을 수 없다.

있다고 해도 최소한으로 줄여야지. 정말 피할 수 없을 때, 혹은 완벽하게 이길 수 있을 때나 하는 거고.

어쨌든 저렇게 연습을 해두는 것을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뭐가 됐든 안 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알아서 스스로 저런 열정을 보이는 데 그게 필요 없다는 식으로 하지 말라고 하는 게 더 웃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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