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458화 (458/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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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거리 비행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샌가 침대에서 민희와 뒹굴고 있었다.

손 한가득 들어오는 가슴을 움켜잡고 열심히 허리를 놀린다.

야한 신음과 살 부딪히는 소리. 순식간에 타오르는 불꽃 같은 섹스.

그래. 민희가 팔짱을 껴올 때부터 이렇게 될 예정이었지. 내 주제에 뭘 고민하냐.

아니. 이건 비단 나만 그런 건 아닐 거다. 남자라면 당연하겠지.

둘만 있는 방. 젊은 남녀. 방해꾼 없음. 대놓고 유혹하는 여자와 혈기왕성한 남자.

이러고 하지 않으면 이상한 거야. 그렇지. 나는 정상이야. 아무렴.

민희는 섹스할 때 결코 섹스 당하는 여자가 아니다.

가만히 누워서 남자에게 몸을 맡기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는 말.

자기가 원하는 것을 확실하게 말하고 본인과 상대가 서로 만족하기 위해 애쓴다.

그렇기에 민희와 섹스할 때는 뭐라고 해야 하나. 조금 편하다.

뭘 어떻게 할까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만 하면 된다.

아마 그래서 그녀와의 섹스가 즐거운 거 같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다.

혼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고 만족하게 해주려는 건 솔직히 피곤하잖아.

차라리 이렇게 대놓고 요청하면 편하다. 이건 나만 그런 건 아닐거야. 다들 마찬가지겠지.

"가슴…. 하윽. 빨아줘요. 거칠게."

그래. 이런 거 말이지. 가슴을 빨아달라고? 이런 요청이라면 밤새도록 할 수 있어.

오히려 내가 감사할 정도야.

탄력 있는 그녀의 가슴을 입으로 마음껏 빨면서 서로 만족감을 느낀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걸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민희의 야한 신음이 귀를 즐겁게 한다.

혀를 움직이거나 입술로 꼭지를 깨물거나 꼭지를 입천장과 혀로 쪽쪽 빨 때마다 다르게 나오는 반응들.

즐겁고 재밌다. 이 여자는 섹스가 즐겁고 재밌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한바탕 서로의 욕정을 활활 태운 후 침대에 널브러져서 호흡을 고른다.

요염한 자세로 엎드려있는 민희. 유혹하는 듯한 허리라인과 엉덩이.

그리고 고혹스러운 자세로 수납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모습.

"이런 세상에서 잘도 구하네."

"담배요?"

가느다란 담배 한 개비를 손가락에 끼우고 야릇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참 매력적이다.

그거 말고 다르게 표현할 방법은 없다. 쯧. 내 표현력이 형편없는 게 안타까울 정도네.

"어."

"담배 생성 스킬이 있으니까요."

"그 스킬 있는 사람이 있어? 아. 하긴 캐슬도 사람은 많으니 하나 정도 있어도 이상하지 않구나."

"여섯 명 있어요. 캐슬에는."

"여섯 명? 제법 있네.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왔데."

"어설픈 공격 스킬을 들고 있는 사람보단 생존율이 높죠. 죽여봐야 500코인이지만 살려놓으면 담배를 무제한으로 얻어낼 수 있으니까요."

"상대가 흡연자라면 그렇겠지. 나 같은 비흡연자면 뭐, 그냥 코인이야."

"어쨌든 생존 확률이 더 높은 건 사실이니까요."

"몰라. 나한테는 똑같아."

그러면서 민희의 등을 손가락으로 쓱 그어 내려갔다.

날개뼈 있는 곳에서 시작해서 음푹 들어간 허리를 지나 엉덩이까지.

내 그런 손짓에 그녀는 빙긋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장난기와 요염함이 반반씩 섞인 눈.

가만히 보고 있으면 다시 덮쳐야 할 것 같은 느낌.

하지만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마음 같아선 여기서 더 뒹굴고 싶지만 할 게 많다. 이 정도 딴짓했으면 됐지.

"어머. 가려고요?"

"왜? 아쉬워?"

"당연히 아쉽지 않겠어요?"

그러면서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몸을 돌려 눕는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나신. 가릴 생각 없이 나를 유혹하는 듯한 몸짓.

옷을 입으려고 줍다가 그런 민희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캬. 진짜 무서운 여자야. 은근히 이런 거 좋아한다니까?

다시 옷을 주워 입기 시작하자 민희는 빙긋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내가 옷을 다 입을 때까지도 가만히 누워 나를 지긋하게 바라보는 여자.

옷을 다 입고 간다고 말하려 하는데 민희가 먼저 입을 연다.

"키스해 주고 가요."

음. 이건 거절할 수 없지. 침대에 누워있는 민희에게 다가가 키스하려고 고개를 숙이자 그녀의 팔이 내 목을 와락 낚아챈다.

민희의 힘 정도로 나를 뭐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이 여자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그저 진한 키스. 나에게 매달릴 정도의 짙은 키스.

잠깐의 키스가 끝나고 민희는 웃으며 말한다.

"근데 정말 어디 가는 거예요?"

"음? 말했잖아. 미국이라고."

"...진짜로?"

"어. 미국까지 날아갈 거야."

"농담 아니고요?"

"내가 뭐하러 농담을 하겠어."

"거리가 장난이 아닐 텐데."

"어. 장난 아니지. 만천 킬로미터 정도 되던데. 지도로 거리 찍어보니까."

"지도요?"

나는 스마트폰 앱을 켜서 보여줬다.

보면서 눈빛에 호기심을 띄우는 민희.

"지도가 돼요?"

"오프라인 지도는 돼. GPS가 안돼서 현위치는 확인 못 하지만."

"아하…. 맞아요. 나도 사과폰일 때 그렇게 써본 적 있는 거 같아."

"왜 과거형이야?"

"잃어버렸으니까요."

"아. 그렇구나."

그러면서 지도를 바라보는 민희. 그러다가 나를 보고 이상하다는 듯 말한다.

"근데…. 정말 이 루트로 가게요?"

"어? 왜?"

"이러면…. 북극 위를 날아가야 할 텐데?"

"엥?"

지도를 보니 그런 건 나와 있지 않았지만…. 머리를 굴려서 세계지도를 생각해본다.

여기 베링해협 위쪽. 그냥 단순히 북극해라고 쓰여 있는 곳. 얼래? 생각해보니 그렇네.

지구는 둥글잖아? 결국은 북극 위를 날아가게 돼 있어.

"아."

"너무 무모한 거 아니에요?"

"그러네. 북극이라니. 그 생각을 못 했어."

"지도에 나와 있는 게 전부는 아니니까요."

"으음. 내가 너무 생각을 대충 하고 나왔네. 그럼 경로를 다시 짜야겠어…."

그렇게 지도를 들여다보는데 민희가 나에게 말한다.

"차라리 이렇게 가요."

그러면서 경로를 바꾼다.

"이런. 이것도 별로 제정신인 루트는 아니네요."

"미국 서부에 도착하는 거야?"

"네. 차라리 이게 나을 거에요. 당신이 추위를 못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죠."

"으음. 추위라. 그건 싫지. 이번 겨울에 하늘 날아다니면서 얼어 뒤지는 줄 알았거든."

"난 안 할 거예요. 겨울에 추운 하늘을 날아가라니. 비행을 배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네요."

"살려면 지상에서 떨어져야 해. 민희 니가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지도를 본다. 으음…. 그런가? 차라리 이게 낫나.

동해를 가로질러 일본의 홋카이도와 사할린 사이를 통과해 캄차카 반도 끝과 알류샨 열도를 지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는 루트.

"나쁘지 않네. 대신 이러면 미국을 횡단해야 하지만. 서부에서 동부로."

"북극보단 나을걸요?"

"그치. 한 이십만 배 정도는 나은 거 같다."

그러면서 계속 지도를 살펴본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낫지. 이렇게 가면 미국 내부의 동향도 확인할 수 있고 좋겠네.

문제는 내가 미국을 횡단하면서 그냥 쓱 지나갈 수 있냐가 관건인데.

으음…. 그거야 내가 하기에 따라 달린 거니까 크게 문제는 없겠네. 그래. 이러는 게 낫겠다.

"민희 너 아니었으면 가다가 고생할 뻔했네. 역시 똑똑한 사람이랑 친해야 한다니까."

내 말에 씨익 웃는 여자. 참 이쁘단 말이지. 저런 모습은.

스마트폰을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민희 역시 침대에서 일어난다.

아직도 옷을 입지 않은 알몸의 여자.

그 여자는 매력적인 몸매를 살랑거리며 나에게 딱 달라붙고 조용히 속삭인다.

"잘 다녀와요."

그저 흔한 인사말이지만 뭔가 주문에 걸리는 느낌이다.

꼭 다시 와야 할 것 같은 주박 같은 것. 근데 그럴 필요가 있나? 어차피 내가 좋아서 오는 건데.

그렇게 힘든 작별을 끝내고 밖으로 나와 의정부의 하늘로 솟아오른다.

언제나 작별은 힘들어. 왜 이렇게 힘든지 몰라.

펜스의 정 부장이나 청평의 승규 형이 나보고 뭐라고 하는 게 다 이유가 있다.

사람과 만남이 어색해서 그런가? 자리를 떠야 할 타이밍을 잘 못 잡겠단 말이지.

게다가 그건 여자들이랑은 더 심하다.

지금 같은 상황도 그래.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떠나는 건지 잘 모르겠단 말이야.

뭐, 나중이 되면 익숙해지겠지. 어쩌겠어. 사람은 배우면서 사는 거지.

어쨌든 출발이 좋다. 엄청나게 뻘짓할 뻔한 걸 피했잖아?

의정부로 오길 잘했네. 민희에게 들린 건 정말 잘한 일이야. 안 그랬으면 어휴. 개지랄 염병을 떨뻔했어.

바로 비행을 시작한다. 방향은 북동쪽. 비행 속도는 최고 속도로.

중간에 투시를 마스터 하면 속도를 더 높일 수 있는데 말이지.

지금이 시속 125킬로미터. 한계 돌파 패시브를 또 찍으면 다음엔 시속 155킬로미터.

무려 30킬로나 늘어난다.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야. 그러니 빨리 마스터 해야겠네.

거리가 어느 정도 짧았으면 블링크를 써서 갔을 텐데.

지금은 천리안이 마스터라서 블링크를 최대 거리로 쓸 수 있다.

시야가 확보 되니까 가능한 일. 지금 내 블링크는 이론상으로 1.5킬로미터까지 가능하다.

샌프란시스코까지 약 9,000킬로. 블링크 6,000번.

이거 웃기네. 스킬 한번 마스터 할 비용을 쓰면 블링크로 순식간에 갈 수 있는 거잖아?

결국, 이것도 돈 지랄이 가능하단 이야기.

문제는 코인이 아니다. 하루에 마실 수 있는 물약 양이 정해져 있다는 게 문제지.

투시 숙련이냐 블링크로 순식간에 가느냐.

결국, 그 선택인데…. 그렇다면 당연히 투시 숙련이다.

내가 미국에 빨리 가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고성연의 아들이야 뭐…. 내가 조금 더 빨리 간다고 해서 그사이에 살아있어야 할 놈이 죽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물론, 아직 살아있을 확률은 상당히 낮지만.

이미 5년이나 지났잖아. 5일도 장담 못 하는데 5년이라니. 어휴.

어쨌든 투시를 숙련하며 비행한다.

비행한 지 한 시간. 눈앞에 커다란 산이 나온다.

아. 이건 금강산이네. 딱 봐도 알겠다. 이게 그 일만이천 봉의 금강산이구나.

근데 사실 난 별 감흥이 없다. 어차피 산에 관심이 없으니까.

내게 있어서 산은 왜 올라가는지 모르는 곳이다.

왜 다시 내려올 곳을 올라가는 거야?

금강산을 벗어나자 탁 트인 바다가 나온다.

동해. 아마 이제부터는 바닥에 육지가 없을 거야.

물론 중간중간에 섬이나 반도 끝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앞으로는 계속해서 바다만 보게 되겠지.

러시아는 사막을 가로질러가고 미국은 바다를 가로질러가네.

이것 참…. 극과 극이구먼.

그렇게 날아가면서 정말 온갖 잡생각을 다 했다.

가장 많이 한 생각은 그거다.

'내가 왜 이 지랄을 하고 있는가.'

안나의 복수야…. 뭐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안나는 이제 소중한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런 그녀의 복수를 해주는 것은 중요하지. 나에게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니고.

근데 미국. 고성연. 솔직히 이건 동시에 이렇게 할 필요가 없는데 말이지.

게다가 그 여자를 살려놓는 것도 사실 웃긴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여자들을 픽픽 죽였으면서, 인제 와서 왜?

기억 읽기가 너무 깊었어. 너무 이입을 많이 했어.

게다가 아들을 생각하는 그 마음. 그게 너무 컸다.

웃기는 일이지. 자식에 대한 건 제대로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어쩌다 보니 기억 읽기로 부모의 마음을 알아버렸으니.

나는 앞으로 절대 못 느낄 경험인데 말야.

웃기는 생각이지만, 나는 고성연의 아들이 살아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가 천신만고 끝에 미국까지 가서 살아있는 자기 아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정말 희박하고 가망 없는 이야기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절망적인 세상에서 그런 미담 하나 정도는 있어도 되잖아? 기적 같은 재회, 운명을 극복한 만남 같은 거 말이지.

5년 전에 죽었을 확률이 높은 그 고성연의 아들은 나이가 일곱 살이었지.

만에 하나 지금 살아있으면 열두 살이다. 으음. 열두 살이면 어느 정도 되지? 초등학교 5학년인가?

어우. 존나 꼴보기 싫을 나이네. 생각만 해도 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기분이야.

남자 애새끼라니. 어우. 진짜.

남자는 성인이 되기 전까진 인간이 아니다. 인간 비슷한 수컷이지.

물론 성인이 됐다고 다 인간이 되진 않는 것도 사실이다. 반 정도는 인간인 척하는 짐승 새끼가 되지.

아무튼…. 이런 것도 다 살아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지만.

시체가 사라져버리는 특성상 죽어버렸다면 어디서 죽었는지도 알아낼 방법이 없다.

그러니 솔직히 기대는 할 수 없다. 고성연이라고 해도 뾰족한 방법은 없겠지.

그냥 한풀이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이 만족할 때까지 찾아보라고 하는 것.

물론…. 만족이나 포기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결국, 나는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하는 걸지도 몰라. 차라리 죽이는 게 더 죄를 덜 짓는 느낌이야.

어쨌든 그렇게 잡생각을 하며 네 시간을 날았다.

하루 여덟 시간의 비행. 하. 쉽지 않네. 그래도 날마다 해야지.

그래도 스킬 숙련하면서 갈 수는 있으니까.

이렇게 가다 보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닿을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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