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440화 (44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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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

그 검은 구체가 뭔지는 안다.

페이즈 아웃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누군가가 죽으면 15분 동안 머무르는 원혼.

자신을 죽인 사람을 향해 살벌하게 노려보며 촉수 같은 것을 내뿜는 녀석.

하지만 그놈은 이쪽 세상에선 보이지 않는 놈이다. 분명 페이즈 아웃 쪽의 세상에서만 있어야 할 놈이잖아.

근데 그게 어떻게 현세로 나왔냐 이거다. 게다가 그 촉수의 빠르기는 뭐야. 엄청난 속도였잖아.

지금 위치는 중국이니…. 이 정도 거리까진 못 쫓아올 거다.

아무리 속도가 빠르더라도 녀석이 유지되는 15분 동안 여기까지 당도할 리가 없어.

그렇게 생각하지만…. 자꾸 흠칫흠칫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지독한 살의. 나를 잡아 죽이겠다는 악의.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종류의 감각이다. 그냥 바라보고만 있어도 정신이 나갈 것 같은 느낌인데…. 그거에 어떻게 익숙해져.

어쨌든 그 검은 와이셔츠 녀석은 죽은 놈 근처에서 스킬을 썼다. 그리고 그 검은 구체가 현세로 튀어나왔어.

아무리 봐도 스킬이다. 스킬. 그리고 머리가 조금 돌아가기 시작하자 어떤 스킬일지는 대충 예상이 됐다.

심연.

아마 아까 그 스킬은 심연일 거다.

페이즈 아웃이 선행되어야 하는 스킬. 티어8에 있는 스킬.

나쁘진 않은 스킬 같다. 복수용으로는 더없이 완벽한 스킬이잖아.

문제는 조건이 더럽게 까다롭다는 점? 일단 누군가는 죽어야 쓸 수 있는 스킬이잖아? 그리 자주 쓸 수는 없겠네.

근데 야쿠자 놈들이라면…. 제법 괜찮은 스킬 같다.

녀석들은 조직원들이 많으니까.

조직원 하나가 죽으면 그놈을 죽인 녀석도 심연으로 복수해 줄 수 있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네.

그리고…. 편법이나 악용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누구든 죽으면 된다. 상대가 광역 스킬 같은 걸 써버리면 거기에 아무 사람이나 밀어 넣으면 되잖아?

그리고 바로 심연. 그럼 뭐가 됐든 간 자신을 죽인 놈을 공격하는 원혼 특성상 광역 스킬 쓴 놈을 공격하겠지.

아니…. 나를 공격할까? 사인으로 따지나? 아니면 죽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따지나?

그것까진 모르겠네. 아무튼…. 하나 찍어둬도 손해는 안 보는 스킬이야. 나는 필요 없지만.

차분하게 머리를 굴리다 보니 그나마 진정이 된다.

하아. 오늘의 나는 정말 엄청나게 꼴불견이야. 정말…. 엉망진창에 실수투성이네.

이렇게 된 원인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원인은 세 가지.

서두른 것. 방심한 것, 그리고 광역 스킬.

이렇게 서두를 일이 아니었다. 호텔에 있는 놈들을 다 잡고 거기서 끝냈어야 했다.

정보를 얻었으니 그걸 기반으로 더 차곡차곡 정보를 모아 은밀하게 일을 진행했어야 했어.

나도 모르게 기고만장해진 거다. 스킬이 아무리 많아봤자 내 밑이라고 생각한 거지.

결국은 잡 스킬만 잔뜩 들고 있으면서 말야…. 할 줄 아는 건 관음이랑 납치밖에 없는 주제에.

게다가 광역 스킬. 주제넘게 정면 대결을 한 게 실책이다.

위력이 강한 광역 스킬을 얻고 나서 그걸 써먹으려고 모습을 드러내서 싸운 게 문제야.

근데 그건 어쩔 수 없나? 우레 폭풍 같은 건 5분이나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데.

하아. 이게 무슨 짓거리냐. 실패했으면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더 잘할 생각을 해야지.

아무 의미 없는 자기 비하랑 변명이나 하고 있네. 병신같이.

더 추해질 필요는 없지.

안 죽었으면 됐다. 일이 조금 복잡해졌지만 어쨌든 안 죽었으니 괜찮다.

시계를 보니 15분은 이미 지났다. 다시 가서 상황을 봐야 하는데…. 선뜻 순간 이동하기가 겁난다.

혹시 모르니 마음의 준비는 하고 가야지.

나는 그렇게 언제든지 블링크를 써서 도망갈 수 있는 준비를 하고 부산으로 순간 이동했다.

다행히 갑자기 촉수가 날아오거나 하진 않는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천리안으로 크루즈를 살펴보지만, 딱히 보이는 것은 없다.

페이즈 아웃을 쓰고 살펴봐도 아무것도 없다. 결국, 전부 떠난 녀석들, 사라진 원혼.

다시 페이즈 아웃을 해제하고 밖으로 나와 버프들을 몸에 두른다.

후우. 그래. 비겼어. 비긴 거야. 이긴 것도 아니고 진 것도 아냐. 비긴 거지.

녀석들은 어디로 갔을까? 레테쪽으로 갔을까? 일본으로 돌아갔나?

조금 의문인 것들이 많다.

대체 왜 크루즈를 타고 왔을까? 그 많은 놈 중에 게이트 있는 놈이 한 명도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역시 가오인가? 아니지. 게이트를 타고 오는 게 솔직히 조금 더 간지나지 않나?

뭐하러 힘들게 크루즈를 타고 오는 거야? 크루즈를 자랑하고 싶었나?

이해가 안 가는 것들. 뭐, 억지로 이해할 필요는 없지. 그놈들이랑 나는 사는 세계가 다르니까.

일단은 항구의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아서 크루즈 있는 곳을 지켜봤다.

저 밑에는 제법 많은 양의 코인이 떨어져 있을 거다. 물론 물 밑에 있기에 녀석들이 주우러 오기는 힘들겠지?

그렇다고 해서 저걸 내버려 둘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은데.

기다리고 있으면 녀석들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럼 그때를 노려서 한 번 더 습격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심연이 거지 같긴 하지만…. 안 죽이면 되잖아? 번거롭고 힘들어도 하나하나 재워서 납치하고 멀리에서 한 번에 죽이면 되지.

그럼 심연은 의미 없어. 나는 즉사 시킬 수 있는 스킬 같은 건 없으니까.

그렇게 막연히 바라보고 있으니 피로가 몰려온다.

생각해보니 아까 칼빵까지 맞았었잖아? 회복 포션의 효과가 너무 좋아서 잊고 있었네.

그냥 민희의 집무실로 순간 이동했다.

시간이 꽤 늦었는데도 아직 잠들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민희.

"잘 됐어요?"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준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서 어깨에 턱을 올렸다.

"나 좀 안아줘."

"어머. 당신이 어리광부리는 건 처음 보네요."

그러면서 나를 꼭 안아주는 그녀.

아. 좋다.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야.

나보다 연장자라서 그럴까? 민희에게는 내 실패를 전부 말하는 게 부끄럽지 않다.

그녀의 말대로 어리광이겠지. 나는 지금 위로받고 싶어.

"이리 와요."

나를 데리고 방으로 가는 민희.

그리고 웃옷을 훌렁 벗었다. 눈에 가득 들어오는 가슴에 복잡했던 머릿속이 깔끔하게 비워진다.

그렇게 나를 침대에 눕히고 자신도 옆에 눕는다.

그리고 내 머리를 꼭 끌어안더니 나긋나긋하게 말한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어벙한 표정을 짓는 거예요. 말해봐요. 들어줄 테니까."

살 냄새와 살짝 남아있는 향수 냄새. 그리고 듣기 좋은 속삭임.

나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전부 주절거렸다.

승희, 미나, 세아, 안나는 이름이나 성별은 이야기하지 않고 그냥 적당히 말했지만…. 똑똑한 여자니까 이미 다 알아챘겠지.

어쨌든 그렇게 이야기를 다 할 때쯤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들었다.

잠을 자고 눈을 떴을 때 낯선 천장이 보인다면 당혹감을 느낄 거다.

그건 나만 그런 게 아니겠지. 누구나 그럴 거다. 하지만 나만큼 당황해하지는 않을 거다.

잠에 대해서는 깐깐한 나다. 아니, 내가 깐깐해지고 싶어서 깐깐한 게 아니고 내가 잠에 고통당하는 거지.

어쨌든 그런 나이기에 낯선 곳에서 스르륵 잠들고 하는 것은 나에겐 판타지 같은 일이다.

근데 그런 일이 또 벌어졌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벌어진 일.

여기가 민희의 방이란 건 바로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더욱 놀라웠다. 내가 민희의 곁에서도 자연스럽게 잘 수 있었다는 게.

이제 막 동이 트는 듯한 바깥. 저게 지금 떠오른 해라면…. 내가 하루 이상을 꼬박 잔 게 아닌 이상 잔 건 고작 몇 시간뿐이다.

근데도 몸이 가볍다. 머리도 개운해지고 정신도 또렷하다.

그리고, 옆에 누워서 자는 여자. 정민희.

이불로 살짝 가려진 상반신.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아 슬쩍 보이는 가슴.

살그머니 이불을 치웠다. 누워있어도 존재감을 강하게 주장하는 가슴의 모습이 참 이쁘다.

그런 그녀의 얼굴과 가슴을 멍하니 바라본다.

아침 해가 밝아오면서 그녀의 모습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한다.

태양의 색을 닮기 시작하는 몸. 가슴. 목 언저리.

아. 이대로 조금 더 있으면 햇빛에 눈이 부시겠네.

몸을 조금 기울여서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어 줬다.

좋아. 이러면 햇살에 눈 부셔서 깨거나 하진 않겠지. 이제 좀 마음이 놓이네.

그러면서 다시 민희를 바라본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그녀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매력적인 여자. 관능적인 여자. 말하는 것, 숨 쉬는 것조차 고혹적인 여자.

지금 내 심정은 딱 그런 거다. 어느 지체 높은 귀족가 부인을 바라보는 평민 남자 같은 느낌?

왜 이런 여자가 나와 이러고 있지?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가 해놓은 삽질을 그녀에게 고해성사하듯 주절거렸는데.

지금은 그저 그녀의 벗은 상반신을 넋을 잃고 보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웃긴다.

단순한 새끼. 하긴, 어떤 남자가 이런 상황에서 시선을 돌릴 수 있겠느냐마는.

나는 그녀에게 어떤 사람일까?

그녀는 나에게 어떤 사람일까?

죽이기 아까운 여자에서 매력적인 여자로. 매력적인 여자에서 신경 써주고 싶은 여자로.

그리고 그녀는 이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어버렸다.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욕심. 안 그래도 독점하고 있지만…. 더 독점하고 싶다.

그러니까…. 내곁에 두고 싶다. 넷도 했는데 다섯이 안 될까?

하지만 조금 어렵다. 단지 내 욕심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여기저기 걸릴 것들이 너무 많다. 승희, 미나, 세아, 안나의 생각도 들어봐야 하잖아.

그리고 그녀는 지금 캐슬을 관리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녀의 생각도 전혀 모른다.

그저 내 머릿속에서만 이뤄지는 망상. 게다가 무조건 같이 둔다고 해서 마냥 좋을 리도 없는데.

혼자 그런 생각을 하다가 머릿속을 깔끔하게 비웠다.

그런 생각은 나중에 하자. 굳이 지금 그런 걸 생각할 필요가 없어.

지금은 그냥 민희를 자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깨우기도 아까운 모습이잖아.

그렇게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탐지를 돌렸다.

따로 의도한 것은 아니고, 그냥 습관처럼 돌리는 탐지였다.

그리고 나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민희야. 일어나 봐."

서둘러 민희를 깨운다. 내가 깨우자 바로 벌떡 일어나는 그녀.

"뭐에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나 약간 미안한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다.

"캐슬에서 이 시간에 밖에 사람이 있어야 할 일이 있나?"

"밖…. 이요? 아뇨."

"그렇지? 그럼…. 저놈들은 뭐지. 잠시 있어 봐. 금방 나갔다가 올게."

내 말에 황급히 옷을 입는 민희. 햇살이 반 정도 약해진 기분이다.

제길. 나의 소중한 시간을 어떤 새끼들이 방해하는 거지? 별일 아니기만 해봐라. 별일로 만들어주마.

페이즈 아웃. 벽을 통과한 뒤 해제. 바로 비행, 투명화. 반사. 그리고 블링크.

하늘 위로 올라가 천리안을 썼다. 이젠 천리안 덕분에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뭐든지 훤히 볼 수 있어.

거리상으로는 한참 떨어진 곳. 거의 500미터가 넘는 정도?.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곳이다.

그런 곳에 모여있는 인간들. 7층 정도 되는 건물 안쪽에서 이쪽을 쌍안경으로 살피고 있는 놈들.

아무리 봐도 좋은 의도로 저러고 있는 게 아니다.

저렇게 먼 거리에서 이쪽을 훔쳐보고 있는데 그게 좋은 의도일 리가 없다.

녀석들의 패착은 내 탐지 사정거리가 이렇게 넓을지 몰랐다는 거겠지.

패시브를 다 찍었을 경우 티어10이면 탐지 거리가 200미터고 티어11이면 250미터다.

500미터 정도 되면 안심이라는 생각을 했겠지? 방심했구먼. 어제의 나처럼.

바로 블링크를 해서 페이즈 아웃을 썼다.

녀석들이 있는 건물 바로 위에 도착한 나는 바로 천장을 통과해 내려가 녀석들이 어떤 놈인지 확인했다.

봐도 뭘 알까 싶었는데, 아는 얼굴 둘이 보였다. 그래. 이놈들이 누군지 알겠다.

이놈들은 그 레테의 재벌 3세. 그놈의 경호원들.

분명 기억에는 크루즈로 염탐시켰던 놈들인데…. 왜 여기 와서 캐슬을 훔쳐보고 있는 거지?

잠시 거리를 벌리고 곰곰이 생각해본다.

왜 이놈들이 여기 있을까? 그것도 뜬금없이 캐슬에.

그리고…. 그걸 유추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재벌 3세. 그놈을 여기로 데려와서 그런 거구나.

아마…. 그놈의 몸에도 발신기 같은 게 달려있었던 거 같다.

서민준이도 그런 걸 달고 있잖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야.

녀석을 이쪽으로 데려왔던 게 문제였네.

자기들의 경호 대상을 찾아 여기까지 온 건가? 밤새 부산에서 여기까지?

상쾌했던 기분이 확 나빠졌다.

이놈들이 여기 왔다는 건, 레테의 모든 놈이 이 위치를 알고 있다는 말과 똑같다.

물론 이놈들이 독단으로 움직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차기 후계자 놈이 걸려있는 문제인데 그렇게 허술할 리가 없지.

귀찮아졌네.

이놈들을 다 잡아 죽이는 게 끝이 아니라는 소리잖아.

아니, 어차피 잘됐다. 레테 놈들도 결국은 치워야 할 상대였으니 이번 기회에 끝내면 되겠지.

이번엔 신중하게 하자. 저놈들도 스킬 여덟 개씩 있는 놈들이니 방심하면 안 된다.

게다가 여기는 캐슬 앞. 지켜야 할 사람들이 많다.

이런 건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 어쩔 수 없지 내가 뿌린 씨앗인걸. 내가 해결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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