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424화 (424/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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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그렇게 어떻게든 비슷하게 만든 꽃다발.

여전히 볼품없긴 했지만, 그나마 꽃다발 비슷한 모습은 됐다.

이제 여기에다가 포장지 같은 거 하나만 두르면 되겠지? 될 거야. 될 거라고 해줘.

빠르게 근처를 돌아봤다. 꽃집은 어디에나 있어서 다행이야.

꽃집 안쪽은 뭔가 죽은 식물이 가득한 기괴한 장소였지만 나는 그런걸 신경 쓸 여력은 없다.

작업대 옆에 놓여있는 파스텔 톤의 포장지. 그리고 리본.

그래. 이거면 되겠네. 그러니까…. 이걸 이래이래 하고 요래하면….

완성! 아. 이런 걸 보고 완성이란 말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완성했다.

꽃다발 비슷한 무언가. 돈을 받고 이렇게 팔았다면 당장 내 면상에 날아왔겠지.

됐어. 나는 최선을 다했어. 부디 이걸로 화가 더 커지지만 않았으면 좋으련만.

일단 수납에 넣고…. 다시 캐슬로 간다.

그리고 아까와 똑같이 옥상에서 페이즈 아웃을 써서 민희의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서 무언가를 보고 있는 민희.

페이즈 아웃을 해제하려고 하니 뭔가 가슴이 두근거린다.

늦은 것에 대한 미안함, 그간 무관심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 다시 봐서 좋은 기쁨.

사춘기 소년도 아닌데 가슴이 두근거리다니. 참나. 나도 웃긴다. 정말로.

페이즈 아웃을 해제했다.

"크흠."

무안해서 겨우 헛기침으로 그녀의 시선을 끌어본다.

내 헛기침 소리에 번쩍 고개를 드는 민희. 그러더니 의자가 넘어져라 벌떡 일어나더니 나에게 와서 안긴다.

잔뜩 한소리를 들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얼떨결에 그녀를 받아 안았다.

"대체 뭐하다가 이렇게 늦게 온 거예요. 걱정했잖아요! 진짜로!"

살짝 떨리는 목소리. 아이고. 내가 정말 잘못한 게 맞네.

"어디 다치거나 안 좋은 건 아닌거죠? 무사한 거죠?"

내 몸을 이리저리 살피며 잔뜩 걱정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민희.

이런 여자한테 잔뜩 혼날 걸 생각하다니. 나도 참…. 생각이 짧았네.

"괜찮아. 미안. 늦어서."

민희는 그렇게 내 말을 듣더니 한숨을 푸우 하고 내쉰다.

그리고 잔뜩 걱정하던 표정은 약간 새초롬하게 변한다.

"무사하면 됐어요. 그건 그거고…. 자. 이제 말해봐요. 대체 무엇을 하느라 이렇게 늦었나."

...혼나긴 하는구나. 그래. 뭐…. 혼나도 싸긴 하지.

"아니. 그게…. 어. 이걸 만들다 늦었네. 수납."

수납을 열어 아까 만든 꽃다발을 건네줬다.

내가 내민 꽃다발을 받아들더니 어처구니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민희.

에고. 안 먹히나. 하긴…. 이런 거로 은근슬쩍 넘어갈 거라고 생각한 게 너무 얄팍하긴 했지.

"하. 나 참. 이런 거로 그냥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더니 몸을 획 돌려서 캐비닛 쪽으로 향한다.

여기저기 캐비닛을 열어보며 뭔가를 찾는 모습.

그러면서도 내가 준 꽃다발은 놓지 않는다. 그렇게 뭔가를 찾던 그녀는 결국 손에 병 하나를 찾아냈다.

그걸 들고 옆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고 잠시 뒤에 물을 찰랑거리게 받아왔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에 병과 꽃다발을 올려놓더니 포장지를 벗긴다.

자연스럽게 수납에서 가위를 하나 꺼내고는 풀어낸 꽃들을 살짝씩 다듬는다.

"나 참. 왜 이런 걸 가져와서 화도 마음껏 못 내게 하고. 어휴. 진짜. 정말."

혼자서 중얼거리더니 금세 꽃들을 다듬고 화병에 꽂아 넣었다.

내가 만들었을 땐 뭔가 상당히 조잡했었는데, 민희의 손을 거치니 되게 그럴듯한 꽃병이 됐네?

뭐지? 여자들은 꽃을 이쁘게 만드는 스킬을 패시브로 가지고 있는 건가?

"뭐해요? 아직도 서 있고? 거기 앉아요."

그래도 목소리가 많이 부드러워졌다. 어휴. 한고비는 넘긴 건가.

볼품없는 꽃다발 하나로 연락도 없이 근 두 달 만에 온걸 넘길 수 있었으니 내가 이득이긴 하지?

그렇게 꽃병을 완성한 민희는 다듬은 것들을 한데 모아 버리고, 꽃다발의 포장지로 썼던 색지는 잘 접더니 수납 안에 넣는다.

"그건 뭐하러 수납에 넣어?"

"내 맘이에요!"

그렇게 말하더니 저벅저벅 다가와 내 무릎에 옆으로 털썩 앉는다.

은은하게 풍기는 향수 향. 그리고 화장품 향.

코끝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느낌이다. 게다가 오랜만에 느껴지는 민희의 몸은…. 굉장히 유혹적이다.

그저 닿기만 해도 사람을 자극하는 느낌.

"자. 이제 말해봐요. 대체 뭘 하다가 이제 왔는지."

변명하는 심정으로 그간 있었던 일들을 말했다.

승미세안의 이야기는 하지 않고 되는대로 이야기는 다 해줬다. 중국에 갔던 일, 가서 만난 짱개들, 스킬들, 산샤 댐, 내 스킬 개수.

중간에 무전기가 울렸지만, 민희는 단호하게 '손님이 와있으니 급한 거 아니면 나중에 보고해.'라고 말하더니 깔끔하게 끊어버린다.

지금 이 순간을 방해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한 그 목소리에 민희가 나에게 얼마나 진심인지 느껴졌다.

킁. 이거 정말 고맙네. 어휴.

"중국…. 맙소사. 진짜 당신이란 사람은…. 이젠 더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내 상식으로는 당신의 행보를 따라갈 수가 없어요. 못살아. 정말로. 게다가 뭐요? 산샤 댐? 어휴…. 스킬이 열다섯 개? 나, 그동안 스킬 세 개나 더 배워서 자랑할 생각에 잔뜩 들떠있었는데! 이게 뭐야."

"정말? 세 개나 배웠어? 이야. 대단하네! 노력 많이 했구나!?"

"뭐가 대단해요! 놀리는 것도 아니고!"

"아니지! 엄청난 거라고! 근데 뭐 배웠어? 말해봐."

"뭐 그렇게 눈을 반짝이면서 물어봐요? 나보다 내가 배운 스킬에 더 관심이 있는 거 같네요?"

눈을 살짝 흘기며 토라진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민희.

"하. 정말. 우리 정민희 씨가 아직 나를 모르네."

그러면서 나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러자 마치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바로 나를 맞이하는 민희의 혀.

화장품 향이 코에 한가득 차며 그녀의 도톰한 입술과 혀가 한껏 느껴진다.

어른의 향기, 어른의 스킬.

어설픈 내 키스가 아닌 능숙한 민희의 키스에 리드 되며 서로의 입술과 혀를 탐한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옷 안으로 손이 들어갔고 민희의 브라가 만져진다.

레이스의 까슬까슬함, 그리고 터질듯한 탄력. 손끝은 브라의 가드에 막혀 더는 진전이 안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황할 내가 아니다. 이젠 이런 상황 정도로 당황하는 풋내기가 아니라고.

그녀의 등 뒤로 손을 돌려 후크를 한 손으로 풀었다.

크…. 한손으로 후크를 풀다니. 나도 제법이잖아?

그리고 다시 손은 그녀의 가슴으로 넘어온다. 아직도 서로를 탐하는 키스.

그런 그녀의 가슴을 손아귀 가득 담는다. 그리고 손가락에 걸리는 그녀의 꼭지.

엄지와 검지로 살며시 잡고 살짝 힘을 준다.

"으음…."

키스하며 살짝 신음을 내는 민희.

그녀의 몸이 조금 더 깊게 나에게 밀착한다.

나는 그녀의 가슴과 꼭지를 조금 더 게걸스럽게 만졌고 그녀는 계속 키스를 하며 몸을 움찔거린다.

아. 더는 못 참겠다. 이건 이미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어.

그렇게 가슴에서 손을 떼고 아래쪽으로 내려가려는데…. 입술이 떨어졌다.

"어?"

"흐흥. 왜요?"

"아니…."

"벌이에요. 두 달이나 나를 기다리게 만든 벌."

"와…."

민희의 말에 나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살짝 흐트러진 모습으로 의기양양하게 나를 바라보는 민희.

지금 이 상황에서 끊는다고? 이야. 이 여자…. 와….

근데 또 나는 민희가 이렇게 해도 할 말이 없다.

내 무릎에서 일어나더니 다시 후크를 채우고 옷매무새를 고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 민희는 수납에서 거울과 화장품을 꺼내더니 가볍게 화장을 고친다.

그리고 티슈를 하나 뽑더니 내게 다가와 입술을 살짝 닦아줬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냥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보듯이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어…. 정말 이러기야?"

한참 만에 내가 겨우 말하자 민희는 풋 하고 웃는다.

"말했잖아요. 벌이라고."

"그게…. 어, 그래. 뭐. 그건 내가 할 말이 없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와."

"왜요? 당신은 나랑 섹스하려고 만나는 거예요?"

인터넷에서만 보던 대사를 직접 들어보니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와. 이런 기분이구나. 8톤 트럭이 명치를 치는 기분이네.

순간 아무 생각도 안 들고 혀가 굳는 느낌이다. 이거 뭐라고 말해야 하나? 오우…. 묵직하네.

"아니지. 아닌데…. 그래도…."

그렇게 말하다가 그냥 입을 다무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나를 보면서 빙긋 웃고 있는 민희.

이야. 역시 만만한 여자가 아니야. 와. 얼떨떨하네. 정말.

그러더니 다시 내 귓가로 입술을 가져오더니 작게 속삭인다.

"설마, 나라고 하기 싫겠어요? 근데 조금 참아봐요. 그 정도는 해야죠."

그렇게 말하곤 내 맞은편으로 가서 자리에 앉는 민희.

마치 나보고 보란 듯이 다리를 꼬는 모습이…. 도발적이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서 개처럼 박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럴 수는 없다.

내가 잘못한 건 사실이니까. 게다가 민희는 강제로 당한 경험이 있으니 그런 식으로 하고 싶진 않다.

저 여자는 그것도 다 생각하고 저러고 있는 걸 거야.

요망한 여자. 고약한 여자. 음흉한 여자. 오랜만에 느껴보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느낌.

그래. 여기서 그렇게 달려들면 결국은 내가 진 거잖아? 좋아. 한번 참아보자고.

그 정도도 못해서야 체면이 말이 아니지.

"좋아. 그래. 알았어. 후우."

침착함을 되찾기 위해 짧게 심호흡을 했다. 그런 나의 모습도 귀엽다는 듯 바라보는 여자.

아이고. 어쩌다가 저런 여자에게 흠을 잡혀서…. 다음부턴 조심해야지. 두번 이랬다간 아주 박살 나겠네.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지?"

"풋."

결국, 웃음을 터트리는 민희. 어? 내가 뭘 했다고 그렇게 웃냐. 민망하게.

"스킬요. 스킬."

그러면서 계속 큭큭 하고 웃는 민희.

입을 가리면서 웃는 모습이 너무 이쁘다. 와 권성철이 너 이제 큰일 났다. 어쩌냐.

"아. 그래. 그랬지. 근데…. 뭐하나만 물어보자. 얼굴이 많이 산뜻해졌는데? 봄이라 그런가? 여기 빛이 좋아서 그런가?"

"어머? 이젠 그런 것도 알아채요? 화장을 바꿨으니까요. 당신이 구해준 화장품이 잔뜩 있잖아요. 그래서 조금 바꿨죠. 그런 건 절대 못 알아챌 줄 알았는데. 제법이에요?"

"어…. 솔직하게 말하면 화장품 생각은 못 했어. 아. 웃기네. 아까 화장품 냄새가 좋다고 생각까지 했으면서."

"후후. 그래도 알아봐 줬으니 기분은 좋네요. 좋아요. 플러스 10점."

"응? 뭐야? 그 플러스 10점은."

"글쎄요. 용서 포인트라고 할까요?"

"용서 포인트? 아. 그런 거야? 그럼 만점은 몇 점인데?"

"음. 100점 만점이라고 할까요?"

"어우. 아직 멀었네. 뭘 어떻게 해야 100점을 채우나? 그리고 100점을 채우면 어떻게 되나?"

"글쎄요? 일단 채워보면 알겠죠?"

그러면서 꼬았던 다리를 반대로 꼬았다.

봄이라 그런지 민희의 옷도 가볍다. 특히 짧은 치마에 스타킹이라 그런지 다리를 꼴 때 모습은…. 어우. 너무 좋다.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삼켜진다. 아이고. 몸이 이렇게 솔직하다니. 이래서 남자들은 안돼. 어휴.

"꽃다발은 점수에 안 들어가나?"

"흐음. 그래요. 그럼 그것도 10점으로 하죠."

"와. 20점이나 모았네. 우와. 신난다."

내가 장난스럽게 두 손을 들고 신난다는 포즈를 짓자 나를 보며 계속 빙긋 웃고 있는 민희.

아. 돌겠네. 어떻게 보고 있기만 하는데도 이렇게 꼴리니.

"하아. 아무튼. 그래…. 스킬. 스킬이라고. 스킬 뭐 배웠어?"

장난기는 좀 거두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비행이랑 탐지, 광역 스킬 무효화요."

"와. 알짜배기만 다 배웠네. 근데…. 비행? 비행을 배웠다고?"

"배워야 한다며요."

"아니. 당연히 그렇긴 해. 아까 내 이야기 들었잖아. 중국의 그놈들."

"네. 들었죠."

"비행은 필수야. 필수는 맞는데…. 내가 안고 갈 땐 그렇게 무서워하더니. 어떻게 배웠데?"

"저도 걱정은 많이 했는데…. 막상 배우고 나서 써보니 괜찮더라고요. 아니 처음엔 무서웠죠. 근데 다른 사람 품에 안겨서 나는 거랑 내 생각대로 나는 건 조금 다르더라고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멀미가 심한 사람도 자기가 운전할 땐 멀미 안 하는 거. 알죠?"

"아. 그래?"

"네. 자기가 어떻게 움직일지 다 알잖아요. 멀미는 전정 신경계랑 시각의 불일치로 인해 증세가 나오는 거니까요."

"전정…. 뭐? 전정 신경계?"

"아. 그…. 감각수용체랑 그런 거…. 아. 그러니까 반고리관은 알죠?"

"오! 아는 단어 나왔어! 귀에 있는 거 그거 말하는 거지?"

"네. 아무튼…. 그냥 넘어가죠. 대충 알아들었죠?"

"어. 뭔지 알 거 같아. 암튼 직접 날아보니 괜찮더라 이거잖아?"

"맞아요."

"이야. 그럼 이제 민희도 하늘을 막 날아다니는 거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그럼 지금은 광역 스킬 무효화 숙련 중?"

"네. 근데 이거…. 숙련하기가 조금 번거롭네요."

"아. 그렇지. 맞아. 근데 그거 편법 있으니 편법 쓰면 되는데."

"뭐요? 편법이 있어요?"

"어. 있지. 지금 숙련도 몇인데?"

"저요? 저 중급 22퍼센트…."

"다행이네. 얼마 숙련 안 해서."

"그 편법이란 게 뭔데요?"

"어허. 이거 알려주면 포인트는 얼마나 주나?"

나는 빙긋 웃으면서 민희를 바라보았다.

후후. 두고 봐라. 나도 반격 같은 거 할 줄 안다 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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