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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발
모두가 죽어가는 상황에서 남들을 짓밟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뭔지에 대해서 고민한 적이 있었다.
애초에 경쟁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그리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일찍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세상이 망하고 더 마음대로 살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목표는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당장 죽어도 ‘여기 까진가 보네.’ 하고 죽었을 테니까.
특별한 목표가 없기에,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없기에.
하루를 살아남으면 그것이 내 존재 가치의 고점이 되는 거다.
생존.
그냥 당연한 거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본능.
그걸 날마다 갱신하는 게 내 목표였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대단한 거잖아?
그렇게 죽지 않고 살아남은 나는 어느새 이것저것을 이뤄냈다.
그게 변덕이든, 실수든, 고의든.
어쨌든 지금 이렇게 내 품에 안긴 승희를 보면 나 자신이 대견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안 죽길 잘한 거야. 남을 짓밟으면서 살아남은 건 잘한 거야.
물론…. 나에게 죽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겠지.
역겨운 쓰레기의 듣기 싫은 궤변이니까.
근데 나는 그것도 이해한다.
누군가 나를 죽이고 그놈은 잘살고 있다고 한다면 똑같은 생각을 할 테니까.
상쾌하게 일어나서 이런 생각이나 하는 거 보면 내 대가리는 역시 뭔가 이상하긴 한 거 같아.
"우움."
내게 몸을 파묻는 승희. 안 그래도 따끈한 그녀의 몸이 더욱 잘 느껴진다.
행복한 아침이야.
나는 조금 전까지 했던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래. 그런 건 이미 수천, 수만 번 해온 생각이다. 인제 와서 새롭지도 않고 특별하지도 않다.
잠을 더 자고 싶었지만, 소변이 마려운 건 어쩔 수 없다.
정말…. 이것만 아니었어도 30분은 더 기가 막히게 잘 수 있었는데.
안 그래도 승희를 안고 수면 스킬 없이 잔 날이다. 분명 자기 전에 물도 마시지 않았고 화장실도 갔었는데….
고작 아홉 시간을 못 버티냐. 병신같은 방광 새끼야.
평소 같으면 내가 일어날 때 승희도 같이 일어날 텐데 오늘은 안 깬다.
하긴, 어제 포션을 좀 늦게까지 먹었었지. 그럼 어쩔 수 없지.
습관적으로 탐지를 한번 켜본다.
바깥에 한 명, 나머지는 다들 각자 방.
누구지? 안나인가? 근데 비어있는 방 위치로 봐선 세아다.
아. 테이밍 숙련하나? 웬일이래. 이렇게 일찍부터.
적당히 슬리퍼를 걸치고 바깥으로 나갔더니 역시나 세아가 렉스하고 놀고 있다.
세아가 원반을 던지자 미친 듯이 멀리 날아간다. 뭐야. 괴력 걸고 던진 거야? 겁나 흉흉하게 날아가네.
그리고 렉스는 또 그걸 잡으려고 좋다고 뛰어간다.
"뭐하냐."
"보면 모르나."
세아의 옆에 앉으면서 물어보자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뭐, 세아의 이런 반응은 하루 이틀이 아니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원반과 렉스를 바라본다.
괴력으로 던진 원반은 정말 무식할 정도로 멀리 날아갔지만, 렉스가 더 대단했다.
원반이 땅에 닿기도 전에 이미 도착해서 기다릴 정도.
"저게…. 가능한가?"
"테이밍 효과 같아."
"어?"
"테이밍 되면 신체 능력이 향상되는 거 같아. 말귀도 잘 알아듣고 조금 복잡한 것들도 잘 해내."
"그래?"
저 멀리에서 결국 원반을 입에 문 렉스. 그러자 세아가 짧게 중얼거린다.
"소환."
그러자 원반을 문 렉스가 세아의 앞으로 뿅 하고 나타났다.
"얼래? 뭐야? 아. 이게 그거구나. 소환."
"어. 고급 되니까 되더라."
"전송도?"
"어."
"그게 고급 테이밍 능력이야? 숫자는?"
"숫자도 늘었지. 지금은 세 마리 가능."
"아. 그래. 그럼 중급은 뭐였는데?"
"중급이 신체 능력 향상."
"오…. 그래? 그럼 하급은?"
"그건 나도 모르지."
"뭐 특이한 거 없었나?"
"모르겠어. 그때 너무 빨리 지나가서."
"으음…. 그래. 그렇구나. 숙련은 잘 돼 가?"
"뭐…. 비슷하지. 고급 32퍼."
"멀었네."
다시 원반을 던지는 세아. 원반은 미친 듯이 또 멀리 날아가고, 렉스는 신나게 뛰어간다.
웃긴 건 다른 개들이 그걸 굉장히 부럽게 바라보고 있다는 거다.
근데 막상 뛰쳐나가진 않는 거 보면 확실히 렉스가 들개의 대장이긴 한가 보네.
"다들 아직 자나?"
"어. 직접 본건 아니고. 탐지로 보니 아직 자는 거 같아."
아직 미동 없는 다른 여자들. 그렇게 말하자 세아가 슬쩍 일어나더니 내 무릎에 앉는다.
"뭐함?"
"아. 바닥이 딱딱해서 엉덩이 아파."
큭. 웃기는 가스나. 그냥 여기 앉고 싶다고 말해도 되는데.
나는 그런 세아의 허리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별 저항이 없는 세아.
손을 슬그머니 후드티 안으로 넣어 가슴으로 향했다.
집 앞을 나올 때도 어차피 아무도 없으니 브라 따위는 하고 있지 않은 세아.
손에 그녀의 가슴이 잡히고 말캉한 기분 좋음이 손에 퍼진다.
"빼."
"좋으면서 뭘 빼."
아예 다른 손까지 옷 안으로 넣어 양손으로 가슴을 만진다.
살짝 움찔하는 모습. 자기 딴에는 티를 안 낸다고 노력했지만 이렇게 바짝 붙어있는데 그걸 못 알아차릴 리가 없다.
게다가 빼라는 소리를 더 하지 않는다. 역시. 하여간 이 가시나는 맨날 좋으면서 틱틱거려.
렉스가 원반을 물어왔지만, 세아는 원반을 받지 못했다.
"뭐해. 원반 던져야지."
"으…. 진짜. 이러면서 뭘 던지라는 거야."
겨우 원반을 받아 다시 던져보지만 내가 양쪽 가슴을 잡고 있어서 그런가 이번엔 그리 멀리 날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렉스는 또 좋다고 달려간다. 내가 저놈의 신나는 놀이 시간을 방해하고 있는 거 아닌가 몰라.
이러고 있으니 아침부터 야한 생각이 스믈스믈 난다. 으음. 잠시 세아랑 나갔다 올까?
세아도 어느 정도는 스위치가 들어간 거 같은데….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기척이 움직였다.
이건…. 미나인가? 미나 맞네. 미나 방에 있는 기척이니 미나겠지.
내가 손을 빼자 세아가 나를 돌아본다.
살짝 붉어진 얼굴, 왜 손을 뺐냐는 의문.
"미나 나오네."
그 말에 세아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휙 돌리고 폴짝하고 내 무릎에서 내려갔다.
때마침 원반을 물고 온 렉스. 그걸 받아든 세아는 전력으로 원반을 날렸고 원반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간다.
"아음. 일찍 일어났네요. 세아도 안녕. 뭐 하고 있어요?"
"세아랑 렉스가 노는 거 구경해."
"헤에."
그러더니 내 옆으로 와서 슬쩍 앉는 미나.
세아는 나와 미나를 힐끔 보더니 작게 한숨을 쉬는 게 보였다. 아쉬워하는 건가? 저런 거 보면 귀엽긴 해.
미나는 그렇게 내 옆에 앉아서 세아가 하는 것을 바라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나도 밖으로 나왔고, 승희도 밖으로 나왔다.
"왜 다 밖으로 나오는 거야?"
"날씨도 좋은데 집에 있는 것보단 밖이 좋죠."
쾌활하게 대답하는 승희. 표정이 밝아 보이는 모습.
그렇게 다들 멍하니 한참을 세아가 렉스랑 노는 걸 바라본다.
들개들은 승희와 미나가 나온 걸 보곤 자기들도 혹시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묘하게 기대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승희와 미나는 별생각이 없나 보다. 그저 강아지들을 살펴보는 모습.
그걸 보고 시무룩해지는 들개들. 웃기네. 무슨 시트콤 같아.
"오빠."
강아지를 보다가 나를 부르는 승희.
"어?"
"그 수납이요. 혹시 꽃 같은 것도 넣어놓으면 안 시들고 남아있을까요?"
"아마도?"
"어. 그럼 꽃 좀 따다가 오빠한테 맡겨도 돼요?"
"뭐, 상관없지. 어차피 공간은 넘치니까. 근데 꽃은 왜?"
"좋잖아요. 지금이야 여기저기 넘치지만, 나중에는 보고 싶어도 못 보니까. 어차피 안 시들면 겨울에도 꺼내서 생화로 장식해 놓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가. 나는 그런 감성을 몰라."
"기대도 안 했어요."
패시브를 찍을수록 늘어나는 공간. 마스터를 한 이후에도 수납에 뭔가를 가득 채운 일은 별로 없다.
전에 수원의 계단 막을 때 흙 펐을 때? 그때 말고는 없는 거 같은데.
아무튼, 널널하니 저 정도 부탁은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다. 어차피 나도 내 수납에 뭐가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니까.
특히 회귀해놓고 짬 때려놓은 건 얼마큼 있는지 가늠도 안 된다. 언제 한번 정리를 해야 하긴 할 텐데.
승희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가 보다. 내가 승낙하자 미나와 안나, 게다가 세아마저도 꽃을 따라간다고 우르르 몰려간다.
안나도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세아는 정말 놀랐다. 확실히 여자는 여잔가 보네.
내 벙커는 산 초입을 지난 곳에 있기에 주변에 꽃은 지천으로 깔려있었다.
그렇기에 금방 끝날 줄 알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내 수납이 무지하게 넓다는 것, 그리고 꽃은 무료라는 걸 간과했다.
여자들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양의 꽃을 '채집'해왔다.
"어…. 최승희 씨? 이건 뭡니까."
"뭐긴 뭐에요. 꽃다발이지."
"양이 많은데요?"
"고작 이 정도로요? 한 두어 번 더 갈 생각인데?"
빨간 꽃, 노란 꽃, 분홍색 꽃…. 뭐 하여간 많다. 말 그대로 꽃다발을 만들어서 잔뜩 가져온 승희.
게다가 그건 승희뿐만이 아니었다. 미나, 세아, 안나…. 다들 제 취향대로 잔뜩 꽃다발을 만들어 왔다.
"세아 너는 니 수납도 있잖아."
"오빠 수납이 넓잖아. 기왕 보관하는 김에 같이 보관해."
"쳇."
그렇게 신나게 꽃을 모으는 여자들. 근데 뭐…. 이러고 있으니 기분은 나름 좋았다.
풍겨오는 꽃향기, 그리고 즐거운 듯한 네 여자.
사실 행복이 별것 아니니까. 이런 게 행복이지.
그렇게 꽃들을 잔뜩 수납에 넣고 간단하게 브런치를 먹었다.
다들 생각보다 먹는 양이 많지 않은 게 신기하다. 어떻게 저만큼씩만 먹고 살지.
밥을 먹으며 각자의 숙련 상황이나 필요한 것들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역병도. 밤사이에 95만으로 늘어난 숫자. 본격적으로 퍼지는 건가? 사망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네. 아는 방법 없나?
"그럼 오늘도 또 나갔다 올게."
"일찍 와요?"
항상 귀가 시간을 물어보는 미나. 나는 그런 그녀에게 웃으며 대답해줬다.
"이번엔 조금 걸릴 수도 있어. 뭐 하나 처리 좀 하고 와야 하거든."
"몸조심해요. 항상요."
미나의 걱정에 웃으면서 알았다고 대답해주고 밖으로 나왔다.
그래. 이번엔 조금 걸릴 거야. 민희한테 가야 하니까.
하늘을 날아가면서 민희에 대해 생각했다.
민희도 스킬을 제법 배웠겠지? 지난번에 본 게 언제더라. 벌써 거의 두 달이 다되어가네.
아뿔싸. 지금 민희 스킬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나를 걱정해야겠네.
아무리 짱개 때문에 바빴다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오랫동안 못 찾아간 건 내 실책이다.
게다가 그 일산 꼬맹이들…. 뭐 문제는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잖아.
사실 그동안 걱정을 안 한 건 아니다. 아니긴 한데…. 아오. 모르겠다. 일단 빨리 가서 확인부터 하자.
멍청이. 으휴. 할 말이 없어. 그냥 잠깐씩만 가서 확인했어도 됐을 텐데.
정 부장이랑 승규야 산샤댐 무너지는 영상으로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깔끔하게 설명이 되긴 하겠지만….
민희는 그걸로 해결이 안될 거란 말이지.
쯧…. 암튼 일단 가자. 가고 나서 생각하자.
그렇게 도착한 캐슬.
다행히 탐지에는 많은 사람의 기척이 걸린다.
일단 나오는 안도의 한숨. 하지만 민희를 확인하기 전까진 안도할 순 없다.
제일 높은 건물 옥상에 올라가 페이즈 아웃을 쓴다. 그리고 내려가자 민희가 보였다.
별문제 없어 보이는 모습. 아. 다행이네. 다행이긴 한데…. 뭐라고 핑계를 대지.
잠시 그렇게 민희를 보고 있다가 다시 일단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페이즈 아웃을 해제하고 바로 블링크로 먼 곳까지 이동했다.
멀쩡한 건 확인 했으니…. 뭐라고 변명을 하냐 이건데.
잠깐 공중에서 머리를 짜내봤지만, 딱히 그럴듯한 건 없다.
어휴. 씨발. 돌대가리. 그러니까 자주자주 봤으면 됐잖아. 왜 인제 와서 이렇게 고생을 하니. 멍청하게.
그렇게 멍하니 생각하고 있는데, 캐슬 뒤편에 있는 산에 울긋불긋하게 피어있는 꽃들이 보였다.
아. 꽃. 그래. 꽃다발이라도 안겨주면 되지 않을까?
꽃 싫어하는 여자들 없잖아. 그건 아까 확인 했고.
그래. 꽃다발이라도 하나 만들어서 가져가자.
근처에 화사해 보이는 꽃들이 잔뜩 있는 곳으로 가서 일단 꽃들을 모았다.
근데…. 뭐가 썩 보잘것없다? 왜 이러지? 뭔가 어정쩡한데.
한참을 하다가 영 이상해서 들고 있던 꽃들을 내던졌다.
아. 그냥…. 아까 네 여자가 모아놓은 꽃다발 하나 꺼낼까?
그렇게 생각하고 수납에서 꽃다발을 하나 꺼냈다. 확실히 내가 만든 거랑은 많이 차이가 난다.
이대로 그럴듯한 종이 한 장만 두르면 꽃집에서 만든 것처럼 보일 것 같은 꽃다발.
근데…. 이걸 그냥 주는 건 좀 아닌거 같다. 다른 여자가 만든 걸 또 다른 여자에게 준다고?
물론 그걸 알아채지는 못하겠지만…. 상도덕이 아냐.
사람을 쳐 죽이는 내가 봐도 그건 아닌거 같다.
게다가 여자들이면 이걸 만든 게 나인지 아닌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래. 그건 멍청한 짓이야. 차라리 이걸 보면서 비슷하게 만들어가면 모를까.
그렇게 꽃다발을 옆에 두고 다시 천천히 만들기 시작했다.
아까 승미세안 네 여자한테는 저런 걸 왜 모으나 생각하던 내가 이렇게 직접 만들고 있는 모습도…. 웃기긴 하네.
어쩌겠어. 화를 풀어주려면 뭐든 해야지. 내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