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422화 (422/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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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다들 한마디씩 인사를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해주고 창고 쪽으로 간다.

다섯 여자의 시선이 조금 미묘하긴 하지만…. 그걸 일일이 신경 쓰다간 내 명에 못 살겠지.

지금은 그냥 모른 척하자. 모른 척. 어차피 할 일도 많으니까.

"금방 왔네?"

"뭐. 그렇죠."

포탈이 조금 멀기에 창고 입구 쪽에서 다시 청평으로 포탈을 열었다.

이제 됐고…. 안에는 어떤가? 안에는 춥겠지? 뭘 좀 껴입어야겠네.

수납에서 파카 하나를 껴입고 안으로 들어간다. 어우. 추워. 냉동 창고 답네.

"이것들은 뭐예요?"

"오징어 같더라."

"음…. 이건 못쓰잖아요?"

"아무래도 그렇지. 아. 이건 그 회귀 그거 안되나?"

"글쎄요. 한번 해봐야겠는데요."

공산품 같은 것들은 회귀를 쓰면 딱 처음 모습 그대로 돌아간다.

근데 이 말린 오징어같이 생긴 건…. 처음 모습이 언제일까? 살아 숨 쉬던 때? 죽자마자? 건조된 다음?

혹시 몰라서 깡깡 얼어있는 오징어 하나를 떼어서 회귀를 써봤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모습.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고 말했다.

"그냥 치우죠."

"그래. 그게 낫겠다."

"근데…. 어디다 치우지."

분명 밖에다가 던져두면 온 동네 주변의 벌레들이 신나게 모여들어 파티를 벌일거다.

그건 별로 즐거운 일은 아니잖아? 아. 그래. 좋은 방법이 있네.

"여기에서 여기까지 다 오징어에요?"

제법 커다란 창고. 거기에 잔뜩 쌓여있는 오징어 상자들.

승규형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바로 상자 밑에 게이트를 열었다.

목표는 우한 상공. 가로세로 6.4미터의 워프 게이트가 바닥에 깔리고 상자들이 몽땅 바닥에 빠진다.

"어우!"

기압 차이인지 창고 안의 냉기가 쫙 빨려가며 싸늘했던 냉동 창고가 좀 덜 추워졌다.

그렇게 게이트를 여닫기를 반복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창고 안에는 필요 없는 것들이 몽땅 사라져 상당히 널널해졌다.

"이제 승규 형이랑 거기도 나 좀 도와요. 따라와요."

게이트를 거쳐 청평의 주방으로 간 우리는 다시 게이트를 타고 물류센터로 갔다.

승규 형은 편안하게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게이트를 보며 연신 감탄하고 여길 처음 오는 재현은 호기심을 가지며 물류센터를 둘러본다.

"이거 창고 전원 어떻게 내리죠?"

"아. 내가 할게."

승규가 한쪽으로 가더니 창고의 전원을 내렸다.

윙윙거리던 소리가 멈추며 주변을 울리던 소음이 사라진다.

"그 후로 누구 오진 않았지?"

다시 내 쪽으로 오면서 물어보는 승규.

"네. 아무도 여길 열어본 흔적은 없어요."

나는 내가 표시했던 테이프들을 확인하고 창고 문을 열었다.

쏟아지듯 나오는 냉기. 나는 문을 활짝 열었고 재현은 그 안쪽을 바라보더니 놀란 표정을 짓는다.

"이게 다 그 MRE라고?"

놀랄만하지. 이정도 MRE면 한참은 굶어 죽을 염려가 없으니까.

말 그대로 무지막지한 양. 나는 아직 냉기가 가득한 창고 안으로 들어가 바로 수납에 MRE 박스를 잔뜩 채웠다.

"수납 안에 들어간 물건은 꺼낼 때 내 맘대로 꺼낼 수 있어요. 그러니 잘 봐요."

다시 게이트 두 개를 거쳐 냉동 창고로 온 나는 수납을 열어 아래에서 위로 쓱 올렸다.

오와 열을 맞춰 가지런히 쌓이는 MRE 박스들. 그렇게 쌓인 박스를 보며 승규와 재현은 신기한 표정을 짓는다.

"요령은 어려울 거 없으니 금방 익힐 거에요. 이거 다 옮기려면 한참 걸리니 빨리해요."

그렇게 작업이 시작됐다.

승규의 수납은 별로 안 커서 그리 큰 도움은 안 되지만, 어쨌든 숙련도 할 수 있으니 계속 시킨다.

재현의 수납이 그나마 마스터라 다행이지만…. 결국은 내가 하는 일은 가장 많다.

단순 비교만으로도 그렇다. 가로세로높이 2미터라고 해봐야 8세제곱 미터 밖에 안된다.

재현은 64세제곱미터, 나는 262세제곱미터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양의 크기가 다르다.

역시 패시브가 답이야. 기를 쓰고 스킬 숙련을 올릴 수밖에 없어.

이동 거리를 최소로 줄여놔서 그런지 생각보다 작업은 수월하게 진행된다.

근데 사실 내가 다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두 사람이 없었어도 크게 차이는 없었을 거 같네.

그렇게 물류센터에 있는 MRE를 전부 다 옮기자 어느새 해가 떨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이야. 진짜 드럽게 양이 많긴 하다. 이걸 다 먹을 수 있긴 할까?

"진짜 궁금하네. 이걸 여기다 가져다 놓은 사람은 누굴까?"

비어버린 물류센터를 보며 중얼거리는 승규.

그래.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이 많은 양을 옮기려면 어지간히 많은 인력과 장비가 필요했을 텐데.

하지만 이젠 알아낼 방법은 없다. 아. 혹시 기억 읽기가 사물에도 되려나?

혹시나 해서 창고에다가 써봤지만 역시 안된다. 하긴, 사물에도 됐으면 개씹사기지.

"이제 물류센터랑은 완전 작별이네요."

"그렇지. 별일이 다 있던 곳이었는데."

살짝 감회에 젖은 승규. 그리 오래 있던 건 아니지만 그에겐 상당히 인상 깊은 곳이긴 했겠지.

"아. 이런 날은 짜장면 먹어야 하는데."

내가 중얼거리자 승규가 씨익 웃는다. 아. 내가 말해놓고도 후회되네.

짜장면이라니. 그건 회귀로도 안 되겠지. 괜히 생각했네. 실수했어.

아니지. 펜스에 가면 중국집 주방장 한 명 정도는 있지 않을까? 재료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잖아?

그래. 안될 게 없지. 치킨도 가능할 거 같은데. 햄버거도 그렇고.

사실 회귀만 있다면 그때 그 맛들을 전부 복구하는 건 크기 어렵지 않을 거 같다.

그래…. 이것도 한번 추진해 보긴 해야겠어.

‘잃어버린 그 맛을 찾아서.’ 프로젝트. 캬. 그래. 이거지.

사람이 먹고사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잖아.

아니구나? SG 시티인가 거기 가면 이미 있는 거 아냐? 생각해보니 그렇네? 다음에 가면 한번 봐야겠다.

"그럼 이제 게이트 닫을게요."

"그래."

게이트가 닫혔다. 이로써 물류센터와의 인연도 완전히 끝났다.

냉동 창고 쪽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청평으로 돌아왔고, 그쪽 포탈도 닫았다.

이제 청평서 할 일은 다 끝났는데…. 아직 남은 게 있긴 하지.

"승규 형? 이야기나 좀 하죠."

"나는 그럼 가도 되지?"

"그래. 수고했어."

내가 말하자 살짝 눈치를 보더니 자리를 뜨는 재현.

"쟤는 왜 저래요?"

나는 하루 만에 달라진 재현의 태도가 궁금해서 승규에게 물어봤다.

"아마…. 어제 네가 하는 걸 보고 조금 충격 받았나 봐."

"어제요? 아. SG 센터?"

"그래. 거기. 그런 곳이 있다는 것도 충격이었고 네가 하는 걸 보고도 충격이었나 보더라고."

"그게 그럴 만한 일인가."

"우리야…. 네가 한 일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알고 직접 보기도 했으니까."

"희한한 놈이네. 기껏 안 죽이고 살려줬더니 그때는 그런걸 못 느꼈나."

"그런 게 있던 거 같아. 운이 나빠서 졌다? 그런 생각?"

"어휴. 지랄은."

근데 어제 하는 걸 보고 그제야 격차를 느낀 건가? 하여간 저놈도 웃긴 놈이네.

"근데. 무슨 이야기?"

"아. 여기서 할거에요?"

아직 주방에 서 있는 나와 승규.

승규도 그걸 느꼈는지 웃으며 나를 방으로 데려간다.

지난번에도 왔었던 VIP 방. 둘 다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때요. 여기 삶은 괜찮아요?"

"더없이 좋지. 시설도 좋고, 식량도 넉넉하고. 사실 그 두 개만 있으면 이 세상에선 남부러울 것 없잖아?"

"그렇긴 하죠."

"게다가 날씨도 많이 따듯해져서 다들 이래저래 마음이 들뜨는 것 같기도 하고."

"승규 형."

"어?"

"BFV라고 알아요?"

"BFV? 거기 고기 파는 회사 아니니?"

"맞아요. 알고 계시네요."

"광고도 많이 했고…. 근데 거긴 왜?"

"강원도 어딘가에 거기 회사가 있데요."

"춘천에 있을걸?"

"엥? 그걸 어떻게 알아요?"

"예전에 들어본 거 같은데. 정확하진 않아."

"으음. 아무튼, 어제 SG에서 만들어 놓은 거 봤죠?"

"어. 나도 조금 소름 돋더라."

나는 SG와 대호의 이야기를 짧게 했다. 그리고 BFV와 계림, 레테의 이야기도.

"그걸 말하는 이유는…."

"조심하라 이거죠. 여기서 춘천까진 그리 먼 거리가 아니잖아요."

"근데 회사는 춘천에 있어도 거긴 축산업 하는 회사니 실제 작업장은 춘천이 아니지 싶은데."

"저도 안 봤으니 자세히는 몰라요. 어쨌든…. 살아남은 대기업이라 이거죠. 뭔가가 대단한게 있을 수 있어요."

짱개놈들에 비하면 시시하다고 할 수 있는 정도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놈들이 만만한 녀석들은 아니다.

게다가 청평의 수준으로 봤을 때는 상당히 위협적인 곳이겠지.

물론 아직 녀석들이랑 청평이 서로 얽혀있거나 서로 마찰 같은 게 일어난 것도 아니긴 하지만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조심하긴 해야 한다.

강원도의 험난한 산지 안쪽에 파묻혀 사는 청평이 그리 쉽게 발견되진 않겠지만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니까.

"조심하라 이거지?"

"그렇죠. 마음 같아서는 여기 사람들이랑 같이 그놈들을 다 잡아먹고 코인이나 챙겼으면 좋겠지만."

"어? 공격한다고?"

"어차피 다 잡아먹을 거라…."

그래. 살려 놓는 건 SG의 서민준 하나로도 충분하다.

지들끼리 누구는 곡식, 누구는 생필품, 누구는 고기 이렇게 나눠서 협력하고 살았지만…. 이젠 그게 의미 없다.

그냥 한군데서 다 해도 되는 거잖아? 어차피 청주에 인간들도 많은데.

아마 지들끼리 헤게모니를 나눠 먹기 위해 그렇게 판도를 정립한 것 같지만 이제는 쓸모없다.

"뭔가 복잡하게 살고 있구나."

"그냥 위험이 될만한 걸 다 지울 뿐이에요. 늘 그랬듯이."

"그래. 나야 뭐 네가 하는 일에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니까."

"숨어서 아무런 위협 없이 살면 그게 가장 좋겠죠. 갈등이나 싸움 없이. 자기 먹을 양만 생산하면서 늙어 죽을 때까지 사는 삶.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그렇게 살겠지만…. 될까요?"

"무리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걸 아네."

"알죠. 명언이잖아요."

"그거 명언 아닌데."

"엥? 그래요?"

"뭐 말하자면 긴데…. 어쨌든 뜻만 통하면 되니까."

"아무튼…. 난 그런 생각도 했어요. 내가 게이트를 배웠잖아요? 저기 하와이나 괌 같은 섬에다가 여기 청평 사람들을 싹 옮겨 놓는 거로."

"엑? 그게 되나?"

"안될 건 뭐예요. 문제는 여기 사람들이 게이트가 없으면 섬에 고립된다는 거?"

"하와이라. 차라리 그냥 이름 모를 섬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

"근데 그런 이름 모를 섬에는 편의시설이 없잖아요. 적어도 호텔 비슷한 거라도 있어야 살만하지."

"그럼 그런 메이저한 휴양지 말고 조금 덜 유명한 곳으로 하면 되지."

"의외로 거부감은 없나 봐요?"

"거부감이라고 할만한 게 딱히 있나? 어차피 인프라가 없어진 건 똑같으니 차라리 네가 말한 대로 안전한 곳으로 가는 게 훨씬 좋겠지. 게다가 그런 휴양지의 바다라면 심심하지도 않을 거고."

"의외네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 구성원들의 안전이 우선이니까. 식량 생산이 가능한 곳이라면 어디든 안전한 곳으로 가는 걸 반대할 리가 없지."

"또 이사한다면 싫어할 줄 알았는데."

"어차피 지금 당장 이사 가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긴 하죠. 적어도 저 말고 청평의 다른 사람이 게이트를 배워야 갈 수 있겠죠."

"평생 못가는 거 아냐?"

"확실히 그럴 수도 있죠. 다른 건 몰라도 코인이 문제니까."

그렇게 말하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래. 결국은 그거다. 코인. 좋은 스킬을 배우고 싶으면 결국은 코인이 필요하고, 코인을 얻기 위해서는 살인을 해야 한다.

악랄해. 코인 양도가 안 되는 시점부터 정해진 수순인거야.

아니지. 코인 양도가 됐다고 했어도 세상은 충분히 시궁창으로 변했겠지.

다만 조금 덜 죽이긴 했겠지만. 그것도 확실하진 않네.

"어우. 이젠 갈게요."

"밥 먹고 가."

"왜 다들 나만 보면 밥 먹고 가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네가 매번 휙휙 사라지니까 그렇지. 한국인이면 어쩔 수 없어. 뭐라도 먹이고 싶어하니까."

"난 그럼 한국인이 아닌가 봐요. 난 내 집이 좋아."

"그래. 널 어떻게 막겠냐."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나는 뭔가 생각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저 사람은 괜찮겠어요?"

내가 말하자 승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어. 괜찮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요. 형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럼 갈게요."

"그래. 아. 어젠 고마웠다. 제대로 말도 안 한 거 같네."

"그런 거로 일일이 고마워할 사이는 아니잖아요. 진짜 갑니다."

그렇게 나는 순간 이동했다.

순간이동은 정말 좋은 것 같아. 괜히 미적거릴 필요 없이 바로 그 자리를 떠날 수 있게 해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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