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421화 (42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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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다음날.

느지막하게 잠에서 깨어 멍하니 시계를 본다.

10시. 늦은 게 아니네. 아. 어제 일찍 잤지.

습관적으로 탐지를 돌려보니 전부 밖에 나가 있다. 오우. 부지런하기도 하네.

하긴.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집 안에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지.

모두가 밖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문을 열고 거실로 나오자 아무도 없는 게 약간 허전한 느낌이 든다.

신기하네. 이제는 집이 조용하면 어색하다니.

야옹

아니네. 조용한 게 아니구나.

세아의 고양이. 그러니까…. 루시. 암튼 녀석이 나를 보더니 다가와서 다리에 몸을 비빈다.

이야. 이새끼…. 사회생활 할 줄 아는구나?

고양이는 보통 애교 안 부린다고 안 그랬나? 아니 이건 그냥 이놈이 볼이 간지러웠을 수도 있어.

마침 내가 나와서 적당히 비빈 걸 애교부리는 거라고 착각한 것일 수도 있지.

어쨌든 그런 모습을 보니 뭐…. 나쁘진 않았다.

털만 어떻게 하면 이정도는 상관없지. 암.

적당히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반사를 숙련하고 있는 승희.

보호막을 숙련하고 있는 미나.

들개들에게 테이밍 숙련을 하고 있는 세아.

안나…. 안나는?

"안나는 어디 갔어?"

"일어났어요? 안나는 동물 탐지로 물고기를 확인해본다고 나갔어요."

승희가 대답해줬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물고기."

그래서 탐지에 안 걸렸구나. 물고기가 있을 만한 하천이면 거리가 약간 있으니까.

"테이밍은 잘 되가?"

나는 승희와 미나의 어깨를 살짝 짚으며 세아에게 물었다.

"어. 테이밍. 테이밍. 테이밍."

이 시스템은 정말 너무 이상해. 물론 사용하는 것으로 숙련도가 쌓이는 건 이해한다.

근데 안 그런 스킬들도 많잖아? 조금 비효율적인 스킬들이 너무 많다.

특히 그건 파티 숙련할 때 가장 크게 느꼈다. 차라리 코인을 내고 말지.

어휴. 인제 와서 스킬 만든 놈들 욕을 더 해봐야 티도 안 나지.

바닷물에 물 한 바가지 더 붓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역병은? 어때?"

"아. 역병요? 아까 아침엔 87만이었는데요. 지금은 88만이네요."

미나가 역병 패널을 열어서 바로 확인하고 대답한다.

"88만. 이야. 늘긴 느는데…. 이것도 멀었네."

"그래도 다시 올라가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으니까요. 새로운 지역에 퍼진 게 맞는 거 같아요."

"그래. 근데 이거…. 정말 끔찍하긴 하네."

"왜요?"

"질병 해제…. 안될 거 같은데."

"아. 그거요. 그쵸. 아무런 질병이 없더라도 88만 번을 쓰는 건 쉽지 않죠. 하물며 다른 질병까지 있으면…."

"우리가 질병이 몇 개씩 있었지?"

"어…. 그때 고급 20퍼센트까지 썼던가 그랬던 거 같은데요. 30퍼센트였나?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요."

"고급 25퍼센트라고 잡으면 250번에 1,000번에 1,250번. 합이 2,500번. 사람이 다섯이니 한 사람당 500개."

"어머. 그렇게 많았었나요?"

"아마 그랬던 거 같은데. 어쨌든 짱개 놈들은 우리보다 몸 상태가 안 좋을 거란 말이지? 그래도 500번이라고 치면…. 88만이면…."

"무리네요."

"그래. 무섭네. 무서운 스킬이야. 이상하네. 이건 그럼 페널티가 뭘까. 페널티가 너무 없는 게 수상한데."

"우레 폭풍에 비해서 페널티가 너무 없어서 그런 거죠?"

"어. 수상해.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페널티가 있어서 그런가? 근데 그건 우레 폭풍도 마찬가지란 말이지. 아니면 질병 해제 자체가 올리기 끔찍한 스킬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네요. 질병 해제 올린 것 자체가 이미 페널티를 선불로 지급한 것일 수도 있죠."

"그렇긴 해. 그치?"

"게다가 질병 해제는 숫자가 적어도 올리기 힘들고 숫자가 많아도 올리기 힘들잖아요. 적으면 우리처럼 배워야 하고, 많으면 숙련 다 올렸다고 그만 쓸 수도 없고요. 게다가 질병은 계속해서 생겨날 텐데."

"미나 말도 맞네."

근데 의문은 또 있다. EMP. 그건 왜 페널티가 없어 보일까.

생각보다 쓸모가 없어서 그런 걸까? 아닌데. 이건 이유를 모르겠네.

어쨌든 승미세안 네 여자의 숙련은 잘 되고 있는 것 같다.

안나가 빨리 코인 탐지를 배웠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코인 수급이 조금 쉬워질까?

근데 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코인 줍는 것도 짜증 나는데…. 500코인씩 떨어져 있는 걸 언제 줍고 있나.

"그럼 난 슬슬 나갔다 올게."

"오늘도요?"

"응. 늦진 않을 거야. 어제 일찍 왔잖아."

"네. 그건 잘했어요. 자. 칭찬의 키스."

그러더니 내게 쪽 하고 키스를 하고 빠지는 미나.

"후후후."

"어! 나도! 나도!"

그러더니 옆에 있던 승희도 나한테 키스를 한다.

미나는 가볍게 입맞춤만 했는데 승희는 혀가 입술 사이를 쑥 파고든다.

"어! 승희야. 나 다 봤어."

"에헤헤. 들켰네!"

아이고. 천진난만하네. 정말.

그렇게 승희와 미나 둘이 웃고 있는데 갑자기 세아가 소리친다.

"오빠! 이것 봐봐! 빨리!"

"어? 왜? 뭔데?"

뭔가 해서 세아에게 급하게 가니 그 앞에 우르르 앉아있는 들개들이 나를 바라보며 일제히 고개를 움직인다.

어우. 왜 그렇게 보냐. 다들. 무섭게.

"왜? 뭐 있어?"

"아니. 이것봐봐. 이거."

세아는 자기 손끝을 가리켰고, 나는 그걸 보기 위해 인상을 찌푸렸다.

"뭐? 뭐가 있어? 뭔지 모르겠는데."

"아잇. 가까이 봐봐. 이거."

그러면서 자신의 손끝을 계속 가리키는 세아.

뭐야? 뭐가 있다는 거야? 손끝이 조금 까만가? 아닌데.

그렇게 보고 있는데 갑자기 세아가 나한테 키스했다.

"캬하하하하. 됐어. 이제 가도 돼."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세아를 바라봤다.

지금 이거 하려고 나를 부른 거야?

아니…. 뭐 결국은 키스한 거라 내가 손해 보는 건 없는데. 약간 열 받는다. 요놈의 가스나를 어떻게 놀려주지.

어쨌든 지금은 좋은 생각이 안 난다. 놔두자. 뭐…. 복수 할 시간은 많으니까.

그렇게 들어가 적당히 씻고, 어제 저장해놓은 청평으로 바로 순간 이동했다.

"으악! 엄마! 젤리 아저씨가 뿅 나타났어!"

"어머나. 성철 씨 왔어요?"

뭐야. 나는 젤리 아저씨가 된 거야? 재밌네. 젤리 아저씨라니. 다른 젤리도 종류별로 모아놔야 할까?

아. 곰 젤리 말고도 다른 젤리도 있을 텐데.

나는 수납을 열어서 젤리들을 꺼내봤다.

"엄마! 엄마! 이거 봐! 쩰리!"

수납 안에는 곰 젤리 말고도 과일 모양 젤리와 포도 젤리, 자두 젤리, 지렁이 젤리…. 암튼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어머. 성철 씨 애한테 너무 그렇게 주시면…."

"이거 회귀 쓰면 어차피 살 안 쪄요. 아시잖아요."

"아. 맞다. 그러네. 그럼 이도 안 썩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충치 자체가 생길 여건이 없어지니까…."

"아아. 그렇겠네요."

"게다가 어차피 질병 해제 있잖아요. 충치도 질병 해제로 없앨 수 있지 않을까요?"

"아. 그런가. 어머. 그럴 수도 있겠네요."

"얼래? 질병 해제 안 쓰고 있어요?"

"아아. 쓰고 있긴 해요. 근데 마스터 된 다음에는 예전처럼은 안 쓰니까."

"마스터 했어요? 질병 해제를?"

"네."

아…. 여긴 사람이 많구나. 그렇네. 하루에 20번씩만 써도 어차피 312일이면 마스터 할 수 있으니까.

이런 걸 생각하면 분명 4년 동안 스킬 마스터 한 사람이 없는 게 살짝 이해가 안 가. 다들 얼마나 게을러 터졌었던 거야?

"형수는 코인 없죠?"

"네. 없죠."

음. 어제 형수도 파티에 포함하고 할 걸. 에이 아깝네.

뭐, 다음에 기회 되면 해야지. 어차피 이쪽도 한 번씩 손은 써야 할 테니.

아니면 승규가 수납 마스터를 할때 부부를 아예 밀어줘도 되고.

"승규 형은요?"

"아. 아마 비닐하우스에 나갔을 거예요."

"그래요? 알겠어요. 전 이만 나가볼게요."

"알겠어요. 하율아. 오빠 간대."

"아조씨. 안뇽!"

역시 젤리의 힘은 위대하군. 하율이가 나를 향해 인사하는 게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그나저나…. 역시 어제 내가 이상했던 거야. 오늘은 유정 형수를 봐도 어제 같은 느낌이 안 드네.

봄바람이 사람을 잠시 헤까닥 돌게 만들었던 거야. 역시 그랬어. 그럴 때 정신 제대로 안 차리면 인생 조지는 거지….

어쨌든 비닐하우스로 나오니 승규는 새로 생긴 수납 스킬로 이것저것을 하고 있었다.

"좋아요?"

"아. 성철이 왔니? 이야. 수납 정말…. 말도 안 된다. 진짜로."

"재현인가 그 사람은 이렇게 안 썼어요? 아. 어제 반응 보면 못했겠구나."

"재현이도 방금까지 나랑 연습하다 화장실 갔어."

"뭘 연습씩이나."

"아니…. 근데 이거 수납 말인데."

"네."

"크기가 어떻게 되는 거야?"

"아. 크기요…."

나는 수납에 대해서 내가 아는 걸 다 말해줬다.

활용법, 코인이 안 들어가는 것, 마음먹은 대로 원하는 모양으로 열 수 있는 방법, 입구를 움직이는 방법….

이야기를 다 듣더니 바로바로 써먹는 승규.

"와. 그래. 이거구나. 이렇게 말이지?"

눈앞에 있는 퇴비 더미를 수납으로 담는 승규.

그러더니 바로 밭으로 가서 수납 입구를 길고 가늘게 만든 다음 슬슬슬 뿌린다.

"와. 이게 신세계네. 맙소사."

"게다가 알죠? 안에 들어간 건 시간이 지나지 않는 거? 얼음 보관도 되고 유통기한도 안 지나요."

"그래. 그건 전에 들었지. 근데…. 생물은 안 들어가지?"

"안되죠. 그럼 수납만으로 사람을 죽이겠죠."

"그렇겠구나. 하긴 그렇네."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재현이 이쪽으로 온다.

"어! 왔어…?"

뭐지? 왠지 반응이 조금 밍밍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팔팔하게 살아있는 물고기 같더니 지금은 수조에서 배를 까뒤집기 직전의 모습 같다.

"뭐야. 왜 매가리가 없어?"

"어? 아냐. 별거 아냐."

뭐지? 똥병이라도 걸렸나?

"암튼, 크기 보니 중급 찍었나 보네요."

"물론이지. 이걸 어떻게 참아."

"그럼 냉동 창고 찾은 곳으로 갑시다. 위치 어디에요?"

"아. 거기 가는 거야? 지금 바로?"

"네. 바로 가요."

"그래. 그럼…. 차로 가자."

"차…. 멀어요?"

"한 20분?"

"지도 찍어줘요. 내가 갈게."

"아니 왜. 그냥 가지."

"시간 아까워요. 차를 타고 언제 가요."

내가 스마트 폰을 내밀자 승규는 바로 위치를 찍어줬다.

"주방에 가있어요. 거기 너도."

"어? 나도?"

깜짝 놀란표정의 재현. 뭐야. 쟤 왜저래.

"니도 수납 있잖아. 어제 코인 번 값은 해야지."

"아니. 갑자기 뭔…."

"시끄럽고. 가 있으라면 가 있어."

그렇게 말하고 나는 바로 하늘로 솟구쳤다. 지도를 대충 보며 블링크를 쓴다.

이거…. 호기롭게 나섰는데 길을 헤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근데 다행이도 그리 복잡하진 않았다. 워낙 대형 창고라 찾는 건 어렵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바로 도착하고 승규가 찍어준 곳이 맞다는 걸 확인한 다음 바로 게이트를 열었다.

"이야…. 게이트는 정말 편하구나."

포탈에서 나오며 승규가 감탄한다.

아무렴. 게이트에 한번 맛 들이면 비행이나 블링크도 시시해진다.

그야말로 궁극의 이동기잖아. 이걸 이길 수가 없지.

"여기 있어 봐요. 아. 저 냉동 창고 지금 돌고 있어요?"

"어. 돌고 있을 텐데. 전에 왔을 때는 돌았어."

"안에 물건은 있고요?"

"어. 조금 있던데."

"그럼 안에 있는 물건이나 좀 빼고 있어요. 쓸만한 건 남기시고요. 게이트 남기고 갈 테니까 두꺼운 옷 필요하면 입고와도 돼요. 거의 두 시간은 열려있을 거니까."

"그래. 알겠다."

"그럼 다녀올게요."

"어디 가는 데?"

"물류센터요!"

그리고 집으로 순간이동.

바로 밖으로 나온 뒤 깜짝 놀라는 네 여자를 뒤로하고 바로 물류센터로 블링크 한다.

에이. 괜히 덮어씌웠나. 아냐.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 없어. 이게 빨라.

물류센터로 도착한 나는 바로 청평을 향해 게이트를 열었다.

"어머나. 이젠 두 개에요?"

"미안해요. 주방을 무슨 만남의 광장처럼 만들어 놔서."

"아니에요. 괜찮아요."

"혹시 모르니 하율이 못 들어오게 부탁 좀 할게요."

"알겠어요. 그건 걱정 마요."

다시 창고로 게이트를 타고 넘어가니 거기엔 이미 청평의 인원 몇 명이 와있었다.

서현이랑 진영이, 연서랑 미연이 식물 자매, 지연이와 미래.

"어!"

나를 발견하고 진영이와 다섯 여자가 나를 바라본다.

윽, 약간 쫄리네.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말이지. 아니….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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