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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독자님들 모두 메리크리스마스!
조아라도 본문에 사진을 넣을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요
봄바람
펜스를 벗어나 청평으로 가려다가 예전에 유정 형수가 말했던 게 생각났다.
뭐였더라. 그래 MRE하고 소스라고 그랬나?
이런 걸 아직 기억하는 거 보면 나도 웃긴 거 같다. 아마 유정 형수에겐 잘 해주고 싶은 그런 게 있나 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애 엄마라서 그런 걸까? 뭐…. 그런 것도 있을 거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뭐라고 말하기 힘들지만, 형수는 내가 결핍된 무언가를 채워주는 게 있어.
그게 엄마들이 가지고 있는 모정인지, 아니면 어른스러움을 가진 현명한 여자에 대한 동경인지는 잘 모르겠다.
후자는 민희도 포함되나? 그럼 후자일 수도 있겠네.
어쨌든 방향을 서울 쪽으로 틀어서 창고형 할인마트 쪽으로 향한다.
소스가 남아있을까 모르겠네. 몇 군데 들러야 할지도 모르겠어.
마트랑 창고형 할인마트 네 군데 정도를 돌자 소스를 그래도 제법 적당히 구할 수 있었다.
하긴, 이렇게 무거운데다가 단독으로 먹을 수 없는 걸 가지고 가는 사람은 별로 없었을 테니까.
먼지를 뽀얗게 쓰고 있는 대용량 소스들. 하나씩 회귀를 써서 수납에 넣고 바로 물류센터로 향한다.
완전 까먹고 있었네. MRE는 소중한데 말이지.
아무리 먹고 살만해졌다해도 MRE는 중요한 식량이다. 이걸 이렇게 잊고 있었냐.
물류창고에 도착한 나는 냉동 창고를 들어가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그냥 여기를 저장하자. 아예 오늘 다 옮겨버리지 뭐. 냉동 창고는 확보해 놨으려나.
지금 저장된 곳은 벙커, 바다 밑, 베이징 두 곳, 우한, 수원, 청주.
베이징 한 곳에다가 이곳을 덮어씌운다. 그럼 이제 됐고.
청평으로 가자. 오랜만에 가는데…. 뭐 별일 없겠지.
빨라진 비행과 블링크 덕분에 청평 정도까지 가는 건 이제 금방이다.
금방 도착한 청평. 느껴지는 기척들.
몰살당하거나 하진 않았네. 그럼 다행이지.
봄이 온 청평은 뭐라고 해야 하나. 대자연의 향이 짙게 난다.
푸른 산들과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 여기저기에 피어있는 꽃들.
저 분홍색은 진달래겠지? 노란색은 개나리고.
그 외에도 형형색색의 꽃과 나무들이 이곳저곳에서 저마다 제 자태를 뽐낸다.
인간끼리 서로 벌이는 살육에는 관심 없어 보이는 대자연의 모습.
하긴 언제나 그래왔지.
인간이 무슨 짓을 하든 자연은 언제나 자기 할 일만 묵묵히 할 뿐이었으니까.
나답지 않게 잠시 감상에 빠져 따듯한 봄바람을 느끼다가 아래로 내려간다.
이제는 제법 기틀이 잡힌 연수원. 대충 봐도 이것저것 많이 생겨나 있다.
저건 쌀농사용 비닐하우스 같고, 저건 채소 키우는 비닐하우스인 거 같고.
축사도 저기 있고…. 전에는 소들이 비쩍 말랐었는데 지금은 제법 통통해져 있네.
음. 아니지. 지난번에 봤던 소랑 저 소가 같다는 보장이 없구나?
그렇게 슬쩍 둘러보고 있는데 약간 멀리 떨어진 곳에 기척 두 개가 잡힌다.
뭐지? 여기 사람일 텐데. 왜 저기에 있나?
궁금증이 생겨서 가봤다. 강이 보이는 언덕. 주변에 사람 손이 닿은 듯한 꽃들.
그리고 그 가운데 심어진 나무 밑에 진영이와 서현이가 있었다.
얼씨구.
서로 바닥에 한 손을 포개고 키스하고 있는 두 사람.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 어쩌다 보니 쟤들 연애하는 걸 훔쳐보게 되었네.
말로는 관음한다고 몇 번을 이야기했지만, 그동안은 전혀 상관없는 놈들의 전투였다.
근데 아는 사람들이 저러고 있는 걸 보는 건 또 처음이다. 약간…. 느낌이 이상하네.
크게 죄를 짓고 있는 느낌이다.
더군다나 진영이는 나를 많이 따르는 놈이잖아. 그리고 서현이 쟤는…. 아니다. 생각하지도 말자.
본인도 절대 밝히기 싫겠지. 나도 모른 척하는 게 맞을 거고.
두 사람을 한 번 더 힐끗 보니 진영이의 손이 서현이의 가슴으로 향한다.
어휴. 좋을 때네. 야외플레이라…. 좋지. 나도 승희랑 해봐서 알아.
근데 설마 저걸 위해서 저길 저렇게 꾸민 거야? 그렇다면 진영이 너 이새끼 인정이다.
그 정도 공을 들였으면 인정이지. 대단한 새끼.
참 팔자 좋네.
스킬도 전투 경험도 별로 없지만, 저들은 이 험난한 세상에서 별 걱정 없이 살고 있다.
아니 뭐 걱정이야 있겠지. 저들 나름대로 심각하고 어려운 고민과 걱정이 있을 거다.
하지만 그것들은 나랑은 조금 궤를 달리하겠지.
근데 뭐…. 그렇다고 내가 억울하다거나 쟤들이 한심하다는 건 아니다.
어차피 내가 만들어 놓은 평화잖아. 거들먹거리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현실이 그렇다.
누구는 운이 나빠서 강간당하고 죽고, 누구는 운이 좋아서 평화를 누린다.
그게 현실이지. 지독한 아이러니기도 하고.
어휴. 난 또 왜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냐.
코로 따듯한 봄바람이 들어갔다고 머리가 또 맛이 갔나 보네.
바로 연수원으로 향한다. 입구를 들어가려는데 누군가가 입구 안쪽에 있다.
뭐지? 아. 혹시 경비 세워 놓은 건가? 근데 경비 세운 거 치고는 위치가 조금 이상한데.
"어!"
"안녕."
"안녕하세요."
승주. 그래. 얘는 승주다. 자양동에서 바람 칼날로 짱개들을 죽이는 데 큰 공을 세운 녀석.
숨 막힐 듯한 어색함이 서로의 사이에서 신나게 춤춘다. 어우. 이 분위기 어찌할 거야.
"경비냐?"
"네."
"그래. 뭐 별일은 없지?"
"네."
"그래. 안에 들어간다. 고생해라."
"네."
그러면서 꾸벅 인사하는 녀석.
내가 어렵나? 하긴, 나도 나이 많은 남자는 어렵긴 하지. 승규나 정 부장 정도면 상관없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벙커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봤을 때보다 상당히 사람 사는 곳으로 바뀐 벙커.
바로 주방 쪽으로 간다. 주방에서 기척이 느껴지니 아마 유정 형수겠지.
"엄마! 아저씨 왔어!"
"응? 어머! 성철 씨!"
"잘 지내셨어요? 하율이도 안녕."
"앙녕하세여!"
"하율이 이제 다 컸네. 오랜만입니다. 형수님."
"진짜 오랜만이네요. 얼굴 까먹겠어요."
"그러게요. 날도 좋은데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아아. 하율이가 배고프다고 해서 간식 좀 챙겨주려고요."
"간식요? 간식. 아. 간식하면 또 제가 전문가죠."
"후후. 그러네요. 아. 그러면 성철 씨 왔으니 이거 부탁해야겠어요."
그러면서 주방에 있는 선반 하나를 열어 플라스틱 바구니를 하나 꺼낸다.
그리고 내게 내미는 봉지 하나. 아. 이거 내가 저번에 줬던 곰 젤리 봉지네.
"그 이후로 또 먹고 싶다고 얼마나 노래를 부르던지. 드디어 줄 수 있겠네요."
"아이고. 내가 자주 왔어야 했는데. 회귀!"
곰 젤리 봉지는 새것이 되었고 하율이는 그걸 보면서 손뼉을 칠 정도로 좋아한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젤리를 향해 손을 내미는 하율이.
그 모습을 보니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회귀 한번을 써서 얻는 뿌듯함을 따지면 이걸 이길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바로 봉지를 찢어 젤리 하나를 입에 넣고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표정을 짓는 하율이를 보며 나는 유정 형수에게 말한다.
"그 전에 필요하다고 하셨던 소스요. 그것도 가져왔어요."
"아! 정말요!? 어휴. 고마워라. 바쁠 텐데 그런 것도 해주고…. 고마워요. 성철 씨."
"오히려 늦게 드려서 죄송하죠. 어디다 놓으면 돼요?"
"그거요. 이쪽이요. 이리 오세요."
하율이는 젤리에 정신이 팔려있고, 유정은 나를 주방 뒤쪽에 있는 식자재 보관실 같은 곳으로 데려간다.
으음. 앞장서는 유정의 뒷모습이 묘하게 매력적이다.
그 뭐라고 해야 하나…. 유부녀에게서 나오는 색기?
따지고 보면 민희가 유정보단 나이가 많지만, 민희에게는 없는 그런 느낌이 있다.
음…. 어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미쳤나 봐. 아까 정현이하고도 그렇게 하고 왔는데.
음란마귀가 씌였나. 제정신이 아니구나.
"여기에요."
유정의 말에 정신이 든 나는 수납에서 소스들을 꺼내놓았다.
줄줄이 나오는 소스의 양에 깜짝 놀라는 유정.
"엄청 많이 가져왔네요!? 이정도까지 원했던 건 아닌데."
"많으면 좋죠. 감질나게 모자라는 것보단 낫잖아요."
망측한 생각을 해서 그런가 유정의 얼굴을 보기가 약간 민망하다.
뭐, 살인 강간도 하는 세상에서 NTR이 흠이나 되겠냐만…. 뒤를 생각하면 아예 생각도 안 하는 게 맞지.
그러니 이건 떠올리지도 말아야지. 나 자신이 역겨워지니까.
그렇게 소스를 다 꺼내주고 나에게 이것저것을 챙겨주는 유정.
수납 안에 있는 펜스에서 받아온 식량에다가 유정이 챙겨준 걸 포함하니 제법 양이 된다.
당분간은 식량 걱정 안 해도 되겠네.
"승규 형은 어디 갔어요?"
"아. 승규 씨는 민준이랑 동현이랑 재현 씨랑 해서 밖에 나갔어요. 금방 돌아올 때가 됐는데."
"그래요? 흐음."
쓸데없는 생각 말자. 등신아. 어휴.
"그. 재현이란 사람. 어때요?"
잡생각을 지우기 위해 다른 주제를 꺼냈다. 계속 신경 쓰다간 내가 쓰레기에서 핵폐기물이 될것 같다.
게다가 그 김포 녀석의 반응도 봐야 하고.
만약 여기 두기에 해가 되는 놈이면…. 코인으로 만들어버려야 하니까.
"재현 씨요? 그건 왜요?"
"그냥요. 뒷담화 같은 건 아니고요. 정확한 반응을 듣고 싶어서요."
조금 진지하게 말하자 유정 역시 뭔가 눈치챈 듯 진지하게 표정이 바뀐다.
근데 옆에 있는 하율이가 조금 신경 쓰이나 보다.
하긴, 여섯 살이면 이것저것 다 알아들을 나이지. 입단속 같은 게 될 것 같지도 않고.
"자. 하율아. 이거도 먹어볼래?"
나는 수납에 들어있던 과자 같은 것들을 여러 개 꺼내서 하율이 앞에 늘어놓았다.
그렇게 과자에 정신을 팔게 해놓자 유정은 살짝 웃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말한다.
"재현 씨요…. 조금 경박한 건 있고 대책 없이 유쾌한 면이 있긴 한데 나쁜 사람 같진 않아 보여요. 아는 것도 많고."
"누구랑 트러블이 있거나 그런 건 없고요?"
"그런 건 없어요. 트러블 까지는 아니지만 호불호는 조금 있다고 해야 하나?"
"호불호요? 하긴, 무슨 소린지 이해는 가네요."
"재현 씨는 왜요?"
그러면서 나를 지긋하게 바라보는 유정.
아. 그렇게 보지 마시라고요. 기껏 다른 주제로 돌렸구먼.
"아니에요. 내가 오라고 했으니 책임은 져야죠."
"걱정 마요. 그렇게 문제 있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래요. 참고할게요."
"아. 뭐 마실 거라도 줄까요?"
그러면서 냉장고를 열고 나에게 계속 말한다.
"지난번에 담아놓은 과일청들이 제법 있어서요. 원하는 거로 줄 수 있는데."
"뭐가 있는지 모르니 그냥 제일 자신 있는 거로 주세요."
"음. 그럼 내 비장의 블루베리청을 줘야겠네."
그러더니 병 하나를 꺼낸다.
"블루베리청? 블루베리?"
"마음 같아선 청귤청이나 자몽청 같은 것도 담고 싶은데 그건 구할 수가 없어서요."
"청귤? 그건 또 뭐예요. 파란 귤인가?"
"제주도에서 나는 귤이에요. 파란색은 아니고 짙은 초록색? 그런 색이죠?"
병에 담긴 건 검은색으로 보였는데, 컵에 담아 물을 섞고 내 앞에 내준 걸 보니 와인색에 가까웠다.
한 모금 마시니 뭐라고 설명하기 힘들다. 생각해보니 나는 블루베리를 생으로 먹어본 적이 없네.
이게 블루베리 맛인가? 뭐…. 달아서 잘 넘어가니 좋긴 하네.
그렇게 잠시 느긋하게 음료를 마시며 하율이를 바라봤다.
아마 유정에게 눈이 가는 게 어색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정말 내가 미쳤나?
정액이 머릿속까지 파고들었나 봐. 적당히 하자. 어휴.
그렇게 하율이를 보고 있는데 마침 탐지에 저 멀리에서 새로운 기척이 잡혔다.
기척은 넷. 방향을 보아하니 도로 쪽이다.
"왔나 봐요."
"네?"
"나갔던 사람들이 왔나 봐요."
"어머.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 탐지? 항상 탐지를 쓰고 있는 거예요?"
"항상 까지는 아니고요. 게다가 저는 지속시간이 조금 길어져서. 게다가 거리도 아직 멀어요. 들어오는 데는 조금 더 걸리겠네요."
조금 수준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걸 전부 다 설명하기엔 살짝 귀찮아졌다.
게다가 유정과 말을 길게 하는 건 조금 자제해야 할 것 같다.
봄바람이 너무 지랄 염병을 해서 나에게 쓸데없는 기운을 넣은 게 분명해.
아니면 진영이랑 서현이를 봐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일시적인 기분일 거야. 아무렴.
그렇게 잠시 기다리자 네 명이 벙커로 들어와 주방 쪽으로 왔다.
"어!? 성철!?"
"오랜만입니다."
승규와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민준이, 동현이 그리고 재현.
나는 그들을 보며 인사했고, 그제야 쓸데없는 생각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