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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C
정 부장을 보러 왔는데, 어쩌다 보니 정현이랑 질펀한 시간을 보냈다.
이럴 계획은 없었는데.
했으면 민희하고 했어야 했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를 있는 대로 탐할 생각은 있었다.
크게 생각 않고 있던 정현이와 이렇게 본격적으로 해버리는 계획은 전혀 없었어.
그렇다고 후회하거나 실수했다는 생각은 아니다.
그냥 계획이 조금 틀어졌을 뿐. 아니 뭐 틀어진 것도 아니다. 내가 뿌린 씨앗인걸. 이런 건 감수해야지.
사실 내가 이런 거만한 소리를 할 처지는 안된다.
그저 고마워해야지. 이 무슨 배부른 소리야.
누워있는 정현이의 배에 글씨를 쓰듯 손가락을 움직인다.
간지럽다는 듯 웃는 정현. 이런 걸 보면 정말 이 여자도 눈부시도록 이쁜 여자다.
아마 세상이 망하기 전이었다면, 엄두를 내지 못할 여자였겠지.
본인의 성격이나 의사가 어떻든 간에 남자들에게 떠받들어지며 살게 됐을 그런 여자.
"이제 돌아갈까?"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정현.
근데 생각해보니 게이트를 닫았다. 그리고 동두천은 내가 저장을 안 해놨다.
아. 다시 가야겠네. 이거 참….
"정현아."
"네?"
"그게. 어…. 잠깐 여기서 혼자 있을 수 있나?"
"네??"
"한 5분이면 되는데."
"알겠어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정현이. 나는 바로 옷을 입고 순간 이동했다.
집으로 돌아가서 바로 페이즈 아웃을 쓰고 밖으로 나간 뒤 북쪽으로 블링크 한다.
에휴. 멍청이. 저장을 안 해놔서 이 고생을 하네. 하긴, 아까 그 자리를 저장할 정신은 없었지. 저장할 자리도 없고.
블링크를 사용할 수 있는 거리는 상당히 길기에 이런 날씨 맑은 날이면 금방 먼 거리도 이동할 수 있다.
그렇게 포션을 마셔가면서 블링크 했고 바로 동두천 상공까지 올 수 있었다.
하늘 높은 곳에서 수원으로 게이트를 열었고, 나는 바로 모텔로 향했다.
어느새 옷을 다 입고 있는 정현이.
"투명화 써."
"네."
그런 그녀를 안고 나도 투명화를 쓴다. 그리고 모텔을 나가 바로 비행장에 있는 포탈로 들어간다.
"으아아아."
아까 정현이를 안고 날았을 때는 지상에서 얼마 안 되는 높이였다.
이렇게 높은 곳은 처음 와보는 그녀는 잔뜩 무서워하며 내게 꼭 안긴다.
나는 바로 땅으로 내려가 한적한 곳에 그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제 투명화 풀어도 돼."
"네. 해제. 으하아."
모습을 드러내며 놀란 가슴을 붙잡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정현.
"자. 이제 제대로 된 정 부장님의 방을 알려줘."
그렇게 말하자 나를 바라보고는 얼굴을 붉힌다.
자기도 자기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이제야 실감이 나나 보다. 한껏 부끄러워하는 모습.
"설마, 또 사람 없는 방으로 갈 생각은 아니지?"
"크흠…. 대장이 또 연락도 없이 오랜만에 오면요."
"음. 그래? 그럼 계속 그렇게 해야겠네."
"아잇…. 대장!"
"농담이야. 자. 가자. 정 부장님 있는 곳으로."
정현이는 앞장서서 걸었다.
내 손을 잡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람이 많은 곳이라 그런지 이내 손을 거둬들이는 모습.
무슨 몰래 하는 연애 같네. 비밀로 하는 사내 연애? 뭐 그런 느낌인가.
둘 다 안 해봐서 정확한 느낌은 모르지만.
그런 정현이가 안내한 커다란 건물. 탐지로 살펴보니 건물 안에 사람이 꽤 있다.
이번에는 제대로 가고 있는지 몇 번 본 얼굴들이 많이 보인다.
집행부 인원 몇 명과 반장들의 인사를 받으며 복도를 걷는데 저쪽에서 지원이와 지아가 다가오다가 나를 발견하더니 크게 소리친다.
"대장!!!"
으. 지아 저 녀석.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지원이는 그런 지아를 보며 못 말린다는 듯 이마를 짚는다. 정말 얘네도 웃기는 자매야.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요!"
말 그대로 오랜만에 봤는데도 마치 어제 만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하는 지아.
참…. 저것도 능력이다. 능력이야.
"내 맘이야."
"근데 왜 정현 언니랑 같이 와요!? 둘이 어디 갔다 왔어요?"
"요 앞에서 만났어. 정 부장님 방에 안내하는 중이야."
"흐음. 뭔가 수상한데. 냄새가 나는데…."
이크. 냄새? 같은 보디샴푸를 썼으니 같은 냄새가 나긴 할 텐데…. 아니지. 여기서 말하는 건 그냥 수상하다는 뜻이겠지.
괜히 내가 과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잖아? 나는 알아서 자멸하는 바보 멍청이 정도는 아니라고.
"반가운 건 알겠는데 헛소리는 그만하고. 너네는 어디 가냐?"
"저희요? 아. 저희는…. 저희도 정 부장님 방에 가요."
옆에서 지원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지아를 바라본다.
"그래? 그럼 따라오던가."
"오? 오예!"
"대장…. 거기선 지아를 끊으셨어야죠."
나를 보고 중얼거리는 지원이.
"왜? 같이 가라고 해. 알아서 고생을 자처하겠다는데."
내가 그렇게 말하자 지아의 표정이 약간 흠칫하는 표정이 된다.
"어? 왜요. 무슨 일 있는 거예요? 고생이라뇨? 무슨 고생요?"
"가보면 알아. 가자. 나야 같이 가준다면 좋지."
"어? 어…. 아 맞다! 사실 저 언니랑 지금 밥 먹으러 가는 중이었어요! 대장! 미안해요! 배가 너무 고파서 저흰 가볼게요!"
그러더니 지원이의 손을 잡고 자리를 벗어나려고 한다.
"에휴. 죄송해요. 동생이 아직 철이 없어서…."
정말 진심을 담아 사과하는 지원이.
"뭘 그런 거로 그래. 나도 알고 있어. 근데 정말 밥 먹으러 가는 중이야?"
"네. 지아가 조금 늦게 일어나서."
"그래. 그럼 가봐."
"자주 와 주세요. 너무 오랜만인 거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지원이의 말투에도 갈망과 아쉬움 같은 게 묻어있다.
에휴. 나는 진짜 여자들의 마음은 전혀 모르겠어. 진짜로. 정말로.
"알았어. 어서 가봐."
"네. 가볼게요."
그렇게 떠나는 지아와 정원. 정현이는 빙긋 웃다니 다시 앞장섰고, 나는 그런 그녀를 따라간다.
"여기에요."
제법 큰 문. 아마 여기가 미군 부대였던 걸 생각하면 가장 높은 사람이 있던 곳인가 보다.
음…. 주한 미군 부대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면 누구지? 이거 뭐 군대를 안 갔다 와서 그런지 아는 게 전혀 없네.
"정 부장님 보고 나서는 바로 가실 건가요?"
지원이의 말투에 갈망과 아쉬움이 들어있다면, 정현이의 말에는 아련함이 들어있다.
"응."
"또 언제 와요?"
"글쎄. 약속할 수 없어."
정현이는 잠시 입술을 한번 깨물더니 다시 나를 보고 말한다.
"자주 와줘요."
나는 그저 빙긋 웃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함부로 약속할 수는 없다.
정현이에겐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나에겐 승희와 미나, 세아와 안나가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그다음은 어찌 됐든 민희다.
만약 정현이가 내 마음에 자리를 잡게 된다면 그 뒤가 될 수밖에 없다.
이 무슨 복에 넘치는 해괴한 짓거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순위라는 걸 정한다면 그렇다.
진짜 웃긴 일이지. 정말 웃긴 일이야.
정현이도 멍청한 여자는 아닐 거다. 나의 태도로 충분히 알 수 있겠지.
그러니 저렇게 말하는 거다.
하지만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걸 테지. 바보같이. 내가 뭐라고.
결국, 정현이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
그 뒷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 내 마음도 약간 찝찝하고.
어렵다. 어려워. 왜 현실에서는 만화처럼 그렇게 쉽게 안 될까.
그래. 현실은 만화가 아니니까 그런 거겠지. 생각을 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여자들.
다 같이 하하 호호 웃으면서 모여 사는 하렘은 환상 같은 일이다.
나와 함께 사는 네 여자가 그렇게 사는 게 기적적인 일인 것처럼.
다시 하라고 해도 할 자신 없다.
넷도 그 정도인데…. 거기에 누구를 더 들인다고? 사람이 많아질수록 불행만 늘어나겠지.
나는 그럴 자신은 없다. 하고 싶지도 않고.
상념은 그만. 이런 생각을 하다가는 여기서 몇 날 며칠은 서 있어야 한다.
이런 건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을 때 고민하자.
지금은 정 부장이 먼저야.
똑똑
가볍게 노크하고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성철 씨? 오! 제대로 찾아왔군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나를 반기는 정 부장.
"그렇게 친절하게 편지까지 써놨던데요. 못 찾아올 리가 없죠."
"하기야 그렇겠죠. 어휴. 앉으세요. 얼마 만에 보는 겁니까. 한 달 됐나요?"
"그런 거 같네요. 그동안 많이 바빴으니."
그렇게 소파에 앉았다. 오. 뭐야. 이 소파 되게 좋네. 집에 하나 가져다 놓고 싶을 정도네.
"뭐 마시겠습니까?"
"아뇨. 됐어요. 마실 건 아마 제가 더 많이 가지고 있을 걸요?"
"아. 맞다. 그렇죠."
그러면서 내 맞은편에 앉은 정 부장.
또 한 달 사이에 사람이 많이 변한 모습이다. 뭐라고 해야 하나. 듬직함 같은 게 생긴 느낌이네.
야전사령관? 아마 그런 사람을 직접 보면 이런 느낌이 나지 않을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리 바쁘셨나요. 식량도 안 받아가시고."
"식당 이모님이 워낙 많이 챙겨주셔서요. 게다가 회귀도 있고."
"그쵸. 회귀. 아. 성철 씨가 안 와서 다들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잖습니까."
"크크. 하기야. 그때 그렇게 많이 한 건 아니었으니까. 아쉬우면 빨리 직접 찍으시죠."
"으. 안 그래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 저 스킬 수납 찍었습니다."
"오. 그래요? 어? 그럼 두번째 스킬은 뭐 찍었어요? 들어본 적이 없는 거 같네."
"비행요."
"아. 비행. 잘하셨네. 그래요. 비행은 필수에요. 비행이랑 투명화랑…."
그렇게 중국에서 봤던 것들을 정 부장에게도 말해줬다.
한 달 사이에 있었던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주기엔 내용이 많았지만, 정 부장은 지루해하지 않고 그런 스킬의 활용을 눈을 빛내며 듣는다.
"이야…. 중국 놈들은 기본으로 스킬이 아홉 개라고요. 아홉 개. 비행이랑 투명, 블링크? 그거랑 탐지 같은 건 기본이고요. 게다가 보호막이랑 데미지 감소? 이야. 복잡하다. 복잡해."
"네. 그러니 여기 사람들도 성장하게 된다면 그렇게 유도해 주세요."
"하하…. 중국놈들. 와. 정말 말도 안 되네요. 공산당의 통제라. 이야. 정말 상상도 못 했네. 이거 저도 분발해야겠는데요."
"어? 뭘 분발해요? 설마?"
"음? 왜요? 저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아니…. 갑자기 막 흑화한다거나 그러는 건 아니죠?"
"에이. 제가 흑화하면 성철 씨가 슬쩍 찾아와서 쓱싹 하고 마체테로 목을 칠 거면서."
"뭐, 그건 그렇죠."
"어? 부정 안 합니까?"
"네? 당연히 뭔가 이상하게 흘러가면 정 부장님부터 쳐야죠."
"어우. 생각만 해도 무섭네요. 절대 그런 일 없으니 안심하십쇼."
"당연하죠. 저도 그런 걱정은 안 합니다."
그래도 재밌긴 하겠다. 정 부장이 진짜 스킬을 잔뜩 갖추고 악당이 되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윤서랑 송이랑 정원이, 지아, 정현이에 채원이까지 전부 정 부장의 밑에서 나와 적대하게 되는 거야.
하지만 정현이가 나를 배신할 수 없기에 결국은 내 쪽으로 돌아오지만…. 돌아오는 과정에서 죽어버리는 거지.
그거에 빡친 내가 모든 펜스의 인원들을 미나의 우레 폭풍으로 쓸어버리는….
"성철 씨?"
"예?"
"아니.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하게 하십니까?"
"아. 아니에요. 별거 아닙니다."
괜히 머쓱해진 나는 잠깐 딴청을 피웠다. 에이. 망상도. 어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어.
"아 참. 보여드릴 게 있는데."
나는 내 망상을 깔끔하게 지우며 스마트 폰을 꺼냈다.
갤러리를 열어 동영상 하나를 선택해 띄우고 정 부장에게 건넨다.
"뭡니까? 야동?"
"엑. 누가 그런걸 스마트 폰에 넣어놔요."
"어라. 없습니까? 하긴. 저도 스마트 폰에는 없네요."
그러면서 킥킥 웃는 정 부장. 하여간 웃긴 아저씨야. 농담도 적당히 잘 하고.
"재생해 보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내가 보여주려고 하는 건 산샤 댐이 부서지는 영상.
어디 가서 막 자랑하기도 힘들다. 말을 꺼낸 정 부장 정도는 돼야 보여줄 수 있는 영상.
뭔가 싶어서 재생을 눌러본 정 부장은 딱 내가 원하는 반응을 보여준다.
어리둥절한 표정에서 화면을 뚫어져라 보더니 서서히 경악으로 바뀌는 모습.
"허…. 허허. 이거 설마. 설마. 그…. 산샤 댐?"
"딩동댕!"
"하하하. 미쳤다. 미쳤어. 와. 권성철 씨! 와! 진짜 당신은 정말 미친 사람이에요! 와! 하하하하!"
이 정도 극찬이면 원하는 반응을 넘어섰네.
이야. 정 부장 정도 되는 사람이 저렇게 오바하다니. 하긴, 뭐 내가 한 짓이지만 결코 별거 아닌 일은 아니지.
"와. 이거 저한테 보내 줄 수 있습니까? 와. 이거 소화 안될 때 보면 가슴이 뻥 뚫리겠네. 아니. 이거 복사한 다음 강당 같은데 사람들 다 모아놓고 틀어주고 싶네요."
"보내 주는 게 됩니까? 인터넷은 다 막혔잖아요."
"블루투스 전송 있잖습니까."
"아. 맞다. 그런 건 되겠네. 복사해가셔도 돼요. 아. 그 옆에 몇 개 더 있어요. 줘봐요. 내가 보내 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