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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
보호막을 쓰기 시작한 미나는 아예 본인이 사냥을 전담하기 시작했다.
아직 반사가 없기에 불안한데도 본인은 괜찮다고 한다.
사실 하는 걸 보면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긴 하다.
투명화도 있는 데다가 블링크를 자유자재로 쓰기에 위험에 노출될 일이 거의 없는 상황.
게다가 나도 지켜보고 있으니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거다. 그래. 그래도 불안한 건 사실이지.
어쨌든 미나는 SG 센터가 문 닫을 때까지 무난하게 사냥을 마쳤다.
항상 온화하고 조금 소극적인 모습의 미나치고는 놀라운 발전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걸 좋은 변화라고 봐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벙커로 돌아오니 승희와 세아, 안나가 모두 나를 반긴다.
"왜 이렇게 생글거려?"
"우리 셋 다 스킬 숙련 마스터 했거든요."
"아. 그래? 승희랑 세아는 오늘이라고 하긴 했지. 근데 안나도 하루나 앞당겼네?"
미나를 데리고 나갔던 게 자극이 된 걸까? 나를 보며 해맑게 웃는 안나.
나 참. 이렇게 사랑받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 더 잘해줘야겠어. 훨씬 많이.
"어디 보자아. 그럼 승희부터 할까? 일단 패시브 먼저 찍고."
"네. 스킬 반경 증가3이랑 스킬 지속 증가3요."
"응. 그리고 EMP 찍으면 되는데…. 그거 혹시 50만이니?"
"잠시만요. EMP. EMP. 네. 50만."
"그것도 숙련 없는 스킬인가 보구나. 좋긴 한데…. 일단 찍어봐."
뭐가 그리 신나는지 생글생글 웃으면서 스킬을 찍는 승희.
"찍었어요. 그리고 스킬 선택 창 나왔어요."
"크. 역시. 그럼 지금 60만에 50만 썼지? 110만…. 너 얼마 있었지?"
"270만요."
"그럼 아직 여유 있네. 아니다. 너도 통역 나왔지?"
"네."
"아이고. 빠듯하려나. 160만 남았을 테니. 일단 패시브 4짜리 두 개 찍어봐. 80만 남지?"
"네."
"간당간당하네. 통역은 일단 먼저 찍고. 반사 찍자."
"반사요?"
"어. 그럼 넌 일단 스킬 트리가 거의 완성 된 거야. 다음에 탐지만 찍으면 완전히 끝나지."
"아아. 알겠어요. 그럼 바로 찍을게요."
바로 스킬을 찍는 승희.
"너 20만 남았지?"
"네."
"어휴. 다들 코인 가뭄이구나. 그럼 다음은 세아?"
"테이밍!?"
"그래. 테이밍…. 근데 너는 아직 보호막이랑 데미지 감소 안 찍었어. 탐지도 배워야 하고."
"알았어. 테이밍."
"하아. 내가 왜 말을 꺼냈을까."
"찍는다? 테이밍?"
"근데…. 하아. 테이밍. 그래. 맘대로 해라. 패시브부터 찍는 거 잊지 말고."
"오예!"
원래대로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당분간은 크게 나갈 일이 없으니 약간 분위기 전환을 시켜줘도 괜찮을 것 같다.
테이밍 하나로 승희랑 미나, 세아 전부 효과가 있을 테니 크게 나쁘진 않을 거다.
게다가 역병용으로 쓸 수도 있고. 뭐…. 낭비하는 건 아니니까.
"다음은 안나."
"네에."
여전히 해맑은 모습. 나를 바라보는 표정에서 꿀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어휴. 그렇게 좋을까. 물론 나도 좋긴 하지만.
안나야말로 완성된 스펙이다. 탐지, 투명, 비행, 블링크, 반사, 보호막, 데미지 감소.
이렇게 필수 스킬들을 이미 다 익혔다.
게다가 바람 칼날도 있어서 공격도 가능한 상태. 말 그대로 스킬의 낭비가 하나도 없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스킬 트리.
거기에 안나 특유의 집념과 센스를 생각하면 맞대결에서 안나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거야.
"안나는 내가 요구하는 스킬을 다 배웠어. 그러니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봐. 너는 니가 하고 싶은 거 배워도 돼."
"토네이도가 다음 티어에서 배운다고 했죠?"
"응."
"통역도요?"
"그렇지."
"그럼…. 저는 동물 탐지요."
"어? 동물 탐지? 왜?"
"코인 탐지 스킬은 결국 있어야 하잖아요? 그거 제가 하려고요."
"오. 그래? 그럴래?"
안 그래도 고민하고 있었는데, 안나가 직접 나서 주니 상당히 반갑다.
"안나가 뭐라고 한 거야?"
승희와 미나는 통역을 배웠기에 안나의 말을 전부 알아들을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선 세아 말고는 전부 대화가 가능한 상태.
그런 세아에게 승희가 전달해줬고, 세아는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좋은 생각이야! 안나가 동물을 탐지해 주면 내가 테이밍 하는 거지! 캬! 안나 역시 똑똑해!"
승희가 안나에게 전달해 주자 안나는 예의 그 해맑은 미소를 보인다.
"그럼 배울게요?"
"응. 그래. 패시브 먼저 찍고."
"물론이죠."
그렇게 스킬을 찍는 안나. 묘하게 기분 좋은 모습이다.
이상하네. 왜 이리 좋아하지?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해보자. 어쨌든 지금은 스킬들을 먼저 테스트해볼 시간.
"자, 그럼…. 밤이 늦었지만 바로 스킬 테스트를 해보러 가겠습니다."
내 말에 다들 망설임 없이 나갈 준비를 한다.
하긴 쟤들도 궁금하겠지.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어.
특히나 승희의 EMP. 이건 정말 궁금하다.
과연 최승희 양은 사이언스 베슬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했던 것만큼만 스킬이 나와도 엄청날 텐데 말이지.
"자. 일단, 나가자."
밤이라고는 하지만 4월이라 그런지 날씨가 포근해져서 다니기 좋은 계절이다.
그렇게 여자 넷과 함께 모두 파티를 맺고 서울 쪽으로 날아간다.
"아. 혼자 왜 이리 빠르냐고!"
세아가 투덜거리자 나는 놀리듯이 세아의 주변을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나를 잡으려고 쫓아오지만 속도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지. 후후.
시속 50킬로랑 80킬로는 차원이 다르잖아?
"으악! 굼벵이다! 굼벵이가 나를 잡으러 온다!"
"이잇. 꼭 잡는다. 잡고야 만다."
"어어? 블링크 쓰시네? 나는 블링크 못 쓰는 줄 알아? 얍! 얍!"
"으으. 꼭 명치에다가 한 방 먹일 테다!"
"야야. 니가 나 때리면 나 한 방에 죽어!"
"걱정 마! 괴력이랑 강화 주먹은 안 쓸게!"
나는 세아에게 도망치며 서울 쪽으로 계속해서 이동한다.
그런 나와 세아를 따라오며 한심하게 바라보는 승희. 빙긋 웃는 미나. 자기도 끼고 싶어 하는 안나.
그렇게 장난을 치며 우리는 서울까지 왔다.
적당한 곳에 도착한 나는 세아를 향해 손을 내밀고 말했다.
"자. 여기까지 왔는데도 못 잡았으니 니 패배야. 이제 다 왔으니 그만하자."
"으으. 진짜."
순순히 받아들이는 척하더니 내 앞으로 바로 블링크 하는 세아.
하지만 나는 예상했다. 윤세아가 순순히 받아들인다고? 애초에 그럴 거란 생각을 안 했지롱.
세아의 블링크와 동시에 나는 뒤로 휙 이동했고, 허공에 헛손질한 세아는 나를 바라보다니 분통 터진다는 표정을 짓는다.
"으! 열 받아! 거 한 대 맞아주면 안 되냐!?"
"그러니까 실력으로 잡았어야지. 솔직히 내가 봐주면 그건 그거대로 열 받을 거 아냐?"
"아! 말이라도 못하면!"
결국, 포기하는 세아. 후후. 아직은 내 손바닥 안이다. 가스나야.
하지만 큰일이야. 이러다가 한번 당하면 정말 두고두고 놀림당할 텐데.
내가 업보 스택을 열심히 쌓는 느낌이기도 하고.
"아무튼, 자…. 이제 써보자. 일단 여기 아파트 단지 있지? 여기다 한번 써봐."
"네."
승희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내가 가리킨 아파트를 바라보며 가볍게 중얼거린다.
"EMP."
아파트 중심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그래. 터져 나왔다는 표현 밖에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건물을 포함한 모든 것들은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평상시와 똑같은 모습.
다만…. 그 지역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세계가 멸망한 지 5년. LED 전등의 성능이 좋아졌기에 한 번도 빛을 잃지 않았던 불빛들이 모두 자취를 감췄다.
완벽한 어둠. 마치 별이 가득한 하늘을 검은 종이로 가려 놓은 것 같은 모습.
"와."
나는 감탄했다. 딱 내가 원하던 장면이다. 딱 원했던 성능이고.
"불 끄는 스킬인가 봐요."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 승희의 목소리는 가볍다.
그래. 이런 쪽에 관심이 없다면 이게 어떤 일을 초래할 수 있는지 쉽게 연결이 안 되겠지.
"크크크크."
내가 웃자 다들 나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특히 세아는 '결국 미쳤나?'라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다.
너. 내가 다 봤어. 꼭 기억할 테다.
"어…. 왜 웃는 거예요?"
내가 너무 변태같이 웃었는지 승희가 약간 나를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로 물어본다.
"크크크. 아. 이걸 안 웃을 수가 있어야지. 자…. 내가 왜 웃는지 말해줄게…. 크크크."
그래도 평소에 어지간히 미친 짓을 해놨으니 다들 저 정도로 쳐다보고 마는 거겠지? 역시 평소의 평판이 중요해.
오늘의 교훈. 평소에 미친 척하고 다니면 대뜸 미친 짓을 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들어봐. EMP란 그런 거야. 내가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공과대 학생이라고. 아무 의미는 없지만. 아무튼…. EMP란 핵폭탄이 터질 때 나오는 충격파인데…. 어…. 그런 과학적인 걸 다 설명하면 너희들이 별로 안 좋아할 거 같고, 결론만 말하자면 모든 전자기기를 무력화 시킨다고 보면 돼."
"전등도요?"
"어. 정확하게 말하면 전등이라기보단 흔히 말하는 두꺼비집이 맛이 가는 거겠지만…. 암튼 그건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니 넘어가자. 어쨌든 봤다시피 EMP를 맞으면 그 구역은 선사시대로 돌아가는 거야. 전기가 없는 세상이 된다고 보면 되는 거지."
"아…."
네 여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승희가 나에게 다시 물어본다.
"근데, 이거 범위가 고작 이거 정도밖에 안 되는데요? 이거 중국에 쓰려는 거죠?"
"어. 뭐…. 중국뿐만이 아니라 어디에든 쓸 수 있지."
"그럼 그 넓은 땅덩이에 이걸 다 쓰려면…. 대체 얼마나 걸리는 거예요? 아. 스킬 반경 증가 패시브를 열심히 찍어야 하나?"
나는 그런 승희의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 준다.
"자…. 잘 들어봐. 이 세계는 5년 전에 망했지. 근데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든 놈들이 무제한으로 놓아둔 게 있어. 뭔지는 다들 알지?"
"물이랑 전기죠."
승희의 대답. 나는 그런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대답한다.
"그치. 이놈들은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물이랑 전기를 무제한으로 풀어줬어. 아마 그편이 더 재밌어 보인다고 생각했나 봐."
잠시 멈췄다가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떻게 물이랑 전기가 무제한으로 나올까?"
아무도 그걸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여자들.
"웃긴 건 내가 여러 번 말했지만…. 물이랑 전기는 수도꼭지와 콘센트에서 나오지 않아. 인프라에 연결이 돼 있지 않으면 아예 안 나오거든. 그리고 그런 인프라는 여러가지가 있겠지? 물이라면 상수도 시설이 있을 것이고…. 전기는?"
"발전소!!"
세아가 대답하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잘 대답했어요. 세아 어린이."
"캭! 애. 취급. 하지. 말라고!"
"암튼 조용해 봐. 중요한 이야기니까. 내가 말했지? 전기는 콘센트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고. 만약 벙커에서 전기를 무제한으로 쓰고 싶으면 어찌 됐든 발전소까지 전선이 이어져 있어야 나오는 거야. 전봇대든 지하든 전선이 연결되어있어야 하는 거지. 중간에 변전소나 기타 등등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 전봇대나 변전소 같은 걸 박살 내면 그 지역은 정전이 돼. 게다가 지금 세상에는 그걸 고칠 사람들도 없지."
아. 뭐라도 한 개 마시고 싶네. 수납에 마실 게 있던가? 아니…. 말을 전부 끝내고 먹는 게 낫겠다.
"자…. 그렇다면. 발전소가 박살 나면?"
내 질문에 그제야 네 여자의 표정이 변했다.
"승희가 방금 쓴 EMP는 일정 구역의 전자장비를 모두 무력화시키는 스킬이야. EMP라는 게 그런 거지. 근데 이걸 발전소에 때려 박으면 어떻게 될까?"
"아…."
"전기가 아무리 무제한이라지만 전기를 담당하는 영역은 구획으로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어. 결국, 발전소가 하나 뒤지면 그 지역은 그냥 어둠의 세상으로 변하는 거지. 전기가 무제한이었던 세상에서 희희낙락하며 살고 있던 놈들에게 전기를 빼앗으면…. 과연 그놈들은 어떻게 될까?"
나는 짱개놈들로 부터 물을 빼앗았다. 아니…. 빼앗은 게 아니고 더 해줬지.
상수도에 바닷물을 잔뜩 퍼부어줬으니까.
그렇게 무제한인 물을 못 쓰게 만들었고…. 이젠 전기 차례다.
물과 전기. 무제한이기에 마음껏 쓸 수 있었던 것들.
그것들이 있었기에 짱개놈들은 그 많은 인원을 제어할 수 있었다.
일단 식량 생산이 가능하니까. 먹고 살 수 있었으니 봉쇄나 제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없어진다면?
"우리는 이제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일 수 있게 된 거야."
무슨 판타지 세상의 허접한 마왕이나 악당이 말할 법한 대사네.
물론…. 나는 진짜 어둠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