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400화 (40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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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연

부모님이 모두 은행원인 평범한 여자.

어렸을 때부터 외모는 출중했다. 부모님이 내심 걱정할 만큼.

남녀공학 중학교를 졸업하고 여고를 졸업했는데 얼마나 이뻤는지 학교 교문까지 남학생들이 보러올 정도였다.

그렇게 대학을 간 고성연은 대학교에서 남편인 최정규를 만났다.

그때는 최정규가 대호 그룹의 후계자라는 걸 밝히지 않고 학교에 다닐 때였다.

그런 의미에서 둘은 순수한 연애결혼을 한 셈이었다.

최 상무 그놈도 대학생 때는 재벌 2세 치고는 상당히 로맨틱한 놈이었어.

고성연이 최정규의 집안을 알았을 때, 연애를 포기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고성연을 잡아준 건 최정규의 어머니였다.

재벌 집 사모님은 돈 봉투 쥐여주면서 '우리 아들에게서 떨어져.'라고 말한다더니.

역시 그건 드라마였나 봐.

최치호 회장의 부인이자 최 상무의 어머니인 재벌 집 사모님은 성격 똑 부러지고 건실한 집안에서 바르게 자란 고성연을 마음에 들어 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보통은 끼리끼리 만나지 않나? 하긴, 모든 재벌이 그런 건 아닐 테니까.

이런 놈도 있는 거고 저런 놈도 있는 거겠지.

그렇게 시어머니가 될 사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고성연은 결국 최 상무랑 결혼하게 된다.

굴지의 대기업인 대호 그룹이 일반인 며느리를 들인 것에 대해 매스컴과 찌라시들은 신나게 기사를 써댔지만, 정작 그 둘은 행복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아들도 하나 낳고 순탄하게 결혼 생활을 하는 모습.

행복하고 여유로운 삶. 하지만 자신을 이뻐해 준 시어머니가 사고로 죽으면서 집안 분위기가 점점 안 좋아졌다.

그래서 그런가? 고성연은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

자식의 교육을 핑계로 떠난 거였지만. 시어머니가 없어진 집안 분위기는 그녀에게 너무 무거웠던 것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일이 터졌다. 최 회장의 생일.

자식을 핑계 삼아 오고 싶지 않았지만, 최 회장과 최 상무는 반강제적으로 그녀를 귀국하게 했다.

그리고 벌어진 참사. 그녀의 눈앞에도 메시지가 떠올랐다.

세상이 멸망한 것을 모두에게 알려줬던 그 메시지.

고성연은 정신이 나갈것 같았다. 미국에 두고 온 아들. 하루에도 수백 번씩 자신을 자책했다.

왜 혼자 왔을까. 왜 한국으로 왔을까. 억지로라도 안 오고 버텼어야 했는데.

아들 곁에 있었어야 했는데.

그래도 내심 기대했었다. 명색이 대호 그룹의 손자다. 돌봐주는 사람도 제법 됐고, 별도의 경호도 있었다.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잠깐의 헤프닝이라고 생각했다.

비행기도 배도 다니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한 번 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국내 최고의 재벌가다.

그녀의 아들이기도 했지만, 최 회장의 손자이기도 했고 최 상무의 아들이기도 했으니까.

그룹 차원으로 미국에 있는 아들을 데려오기 위한 팀이 꾸려져 출발했고, 그들은 반년 만에 돌아왔다.

드디어 아들을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던 고성연은 돌아온 그들 사이에 자기 아들이 없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못 했다.

아들은 찾지 못했다고 한다. 사용인, 경호원, 아들. 모두 없었다고 했다.

주변을 수소문해보며 어떻게든 찾으려 노력했지만, 결국은 찾지 못했고 미국 내부의 사정도 심상치 않아져서 귀환했다고 한다.

그렇게 고성연의 세상은 완전히 끝났다.

그날부터 고성연은 그저 뛰기 시작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뛰고 끊임없이 몸을 움직였다. 잠깐이라도 멍하니 있으면 아들 생각이 났으니까.

시아버지가 젊은 여자를 품든 남편이 밖에서 다른 여자와 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자기가 왜 살아남아 있어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생각을 멈췄다.

그냥 뛰었다. 그냥 몸을 움직였고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살아남을 뿐이었다. 아들이 죽었다는 게 확실하진 않으니까.

만약 죽었다는 것이 확실하면 당장이라도 목숨을 끊어서 아들을 보러 갔을 거다.

하지만 그게 확실하지 않은 이상 죽을 수는 없었다.

언젠간 우여곡절 끝에 아들이 돌아왔을 때, 자기가 없으면 말이 안 된다.

그렇기에 그녀는 억척같이 살아남았다. 조금이라도 오래 살기 위해 자신을 관리했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언젠간 자신이 직접 미국으로 가기 위해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찾고 싶어서. 그것 말고는 할 게 없으니까.

그런 그녀의 기억을 들여다보고 정신을 차린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일까? 왜 눈물을 흘리지? 왜 울지? 내가?

모르겠다. 어머니의 마음, 부모의 마음. 나는 앞으로도 평생 느껴보지 못할 감정이겠지.

"하아…."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깊은 한숨. 폐부 깊은 곳 안쪽에서부터 나온 진한 한숨.

잠들어 있는 고성연을 두고 잠시 바깥으로 나왔다.

최신영이 바라보고 있던 인공 정원.

최신영의 마음이 이해 가네.

우울하고 암울한 기분일 때 저 인공 정원이 주는 빛은 묘하게 마음을 안정시켜준다.

빛과 녹음. 그것들이 주는 안정감.

멍하니 앉아서 인공 정원을 바라본다.

씨발…. 기억 읽기. 성능은 좋다. 빌어먹을 정도로 좋다. 너무 좋아서 문제다. 젠장.

영화나 티비 수준의 몰입감이 아니다.

그저 기억을 읽었을 뿐인데 내가 고성연이 되는 느낌이었다.

자식을 놓고 왔던 것에 대한 자책. 찾지 못했다고 들었을 때의 절망.

그런 것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자식도 없는데.

그런 감정을 그대로 느끼는 건 좀 억울하네.

너무나 성능이 좋은 스킬. 그 자체가 장점이고 단점이다.

감정 이입이 되어버리는 것. 그렇게 사람을 쳐 죽인 내가 고작 이런 감정에 동조되고 매몰되다니.

게다가 시간. 시간도 문제다. 너무 오래 걸려.

아니 이건 뭐 어떻게 조절할 수 있다. 내가 테스트한답시고 오래 본 거니까.

그래도 고성연의 인생 하나를 통째로 본 걸 로 기억 읽기에 상당히 익숙해지긴 했다.

원하는 부분만 딱 볼 수는 있게 되었어. 앞으로는 짧게 짧게 필요한 만큼만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가장 큰 문제는…. 숙련이다.

이 생각을 못 했네. 기억 읽기 숙련을 하려면 어쨌든 누군가의 기억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감정에 동화되어버린다. 제기랄. 이거 조금 심각해.

우울한 기억을 피하고 밝은 기억 위주로 봤다.

근데…. 그것도 문제다. 고성연의 기억에도 해맑은 기억은 있다.

즐겁고 행복한 기억. 너무나 아름다웠던 추억.

보는 내가 부럽다고 여길 정도로 눈부신 기억들.

그렇지만 그것 또한 부작용이 있었다.

고성연에 대해 너무 이입해버리는 것.

이 여자가 점점 이뻐 보인다. 아니…. 뭐라고 해야 하나. 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이 여자를 죽일 수 없어졌다.

물론 죽일 수야 있겠지. 잠들어 버린 여자를 마체테로 찍는 건 일도 아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해온 일이니 어려운 일 없다. 하지만…. 힘들다. 어려워졌어.

이 여자에 대해 너무나 많은 감정이 공유되어버렸다.

기쁨, 슬픔, 아픔, 분노, 행복.

가장 큰 감정은 연민. 이 여자를 진심으로 안타깝다고 느끼게 되었다.

하아.

가장 큰 문제는 아직 기억 읽기 숙련이 많이 남았다는 것.

생각보다 숙련은 잘 올랐다.

기억을 읽는 것. 하급일 때는 한번 쓸 때마다 대략 1분 정도의 기억을 읽었다.

기억이 1분이 넘어가면 이어져서 스킬이 사용된다. 넋 놓고 보고 있다간 체력이 쭉쭉 빠지는 건 일도 아니다.

다행히 언제든지 끊을 수 있기에 그리 큰 문제는 없다.

중간에 끊어도 스킬 숙련은 쌓이니 상관없긴 하니 그나마 다행이야.

앞으로는 기억 읽는 것은 좀 신중하게 해야겠네.

뭐…. 이 여자의 인생이 기구해서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일 수도 있다.

개쓰레기 같은 놈의 기억을 훑어보면 어떻게 될까? 감정 이입이 이렇게 심하면…. 기억 읽고 나서 바로 쳐 죽이고 싶어지는 거 아닐까?

모르겠네. 이것도 테스트해봐야 하는데.

일단은 고성연만 가지고 테스트해보자. 최신영은…. 볼 엄두가 안 나네. 근데 궁금하긴 하다.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성연은 의외로 나에 대해선 크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게 가장 의아한 부분이다. 그래서 기왕 숙련 하는 김에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읽어봤다.

아들을 잃은 걸 은연중에 시아버지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그녀.

그녀는 내색하지 않아도 마음속으로는 최씨 일가를 원망하고 있었으니까.

자식을 잃은 원인은 세상이 멸망해서다.

하지만 세상을 멸망시킨 그놈들은 원망하기에 너무 멀리 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그렇기에 가까이 있는 원인을 찾았고, 자신을 반강제로 한국에 오게 한 최씨 일가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대놓고 내색할 수도 없었던 그녀.

그렇기에 그녀는 뛰었다.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그저 뛰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해가 안 간다.

아무리 원망한다고 해도 그들을 죽인 나에게 악감정을 안 가진다고?

모르겠네.

하긴, 이 미친 세상에 정상인이 어딨겠어. 다 대가리가 뭔가 하나씩 삐꾸인 인간들만 살아 남은 거지.

어쨌든 기억 읽기의 효과는 확실하게 알겠다.

어떻게 쓰냐에 따라 얼마든지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스킬. 좋아. 스킬에 대한 효능은 입증했으니 잘 써먹어야지.

이걸로 짱개 놈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정보를 빼내기가 쉬워질 것 같다.

비단 짱개뿐만이 아니다. 여러모로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다.

안나와 민희의 복수도 한결 쉬워지겠지.

기억 읽기의 가장 좋은 부분은 그거였다. 키워드로 원하는 기억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

정말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어.

사람의 기억을 그렇게 동영상 뒤지듯이 검색할 수 있다는 것. 그게 가장 무섭다.

그럼 기억 삭제는 이런 기억들을 지워버릴 수 있다는 거잖아? 마치 동영상을 삭제하는 것처럼?

빨리 배워봐야겠다. 뭐든 잘 쓸 수 있을 거야. 물론…. 여러가지 의문점은 있긴 있지만.

기억 삭제로 기억을 지웠는데 내가 광역 스킬 무효화를 쓴다거나 페이즈 아웃을 쓰면, 과연 그 삭제된 기억은 돌아오는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는 안 돌아올 거라고 생각한다. 기억 조작도 마찬가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건 신체 복구 때문이다.

잘린 다리. 신체 복구를 받고 다리가 재생된 게이트 쓰는 짱개 녀석.

광역 스킬 무효화를 맞고도 재생된 다리가 사라지거나 하진 않았다.

결국, 스킬로 재생된 다리는 스킬의 부산물이긴 하지만 완료가 되어버리면 무효화의 영향을 받지 않는 다는 것.

기억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기억 제거가 아닌 기억 망각 같은 거였다면 무효화나 페이즈 아웃으로 스킬 효과가 사라졌을 때 기억이 돌아올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제거잖아. 제거된 기억을 어딘가에 백업해놓는 게 아닌 이상 삭제만으로 끝날 확률이 높다.

만약 기억 제거 다음이 기억 복구 스킬이었다면, 또 달랐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그건 테스트해보면 알 거다. 지금은 기억 읽기만 신경 쓰자.

하급에서 중급으로 올랐어도 시간이 늘어난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그냥 부지런히 숙련하기만 하면 된다는 소리.

다 맘에 들지만,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은 있다.

기억 읽기는 꼭 신체를 접촉하고 있어야만 쓸 수 있다. 이게 조금 불만이긴 하다.

물론 알몸으로 누워있는 고성연의 몸을 만지는 건 좋다. 싫을 리가 없지.

하지만 나중에는 짱개 남자의 몸도 만져야 한다는 소리잖아? 어우. 정말…. 싫다 싫어.

짱개뿐이겠어? 이놈 저놈 다 만져야 한다는 소린데. 라텍스 장갑이라도 하나 찾아봐야지.

설마 장갑을 끼고 있으면 스킬이 안나가려나? 부디 나갔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숙련을 올리다가 벙커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억 읽기 스킬에 대해서 승미세안 네 여자에게 바로 공유했다.

함께 다니면서 써야 할 일이 많을 테니 미리미리 알려줘야지. 그래야 매혹 꼴 안나지.

"사기 아냐?"

세아의 의문스러운 표정.

"효과가 사기라는 거야? 아니면 스킬 성능을 못 믿겠다는 거야?"

"둘 다."

"음. 테스트해보실?"

"아무거나 다 되나?"

"아마도?"

"내가 돌잡이 때 뭐 잡았는지도 볼 수 있나?"

"엑…. 그건 너무 오래전 아니냐? 무엇보다 니 기억이 남아있긴 한 거야? 내가 청진기라고 대답해도 니가 맞는지 틀리는지 정도는 알아야지."

"그런가. 그럼…. 내 속옷 색은?"

"정답! 흰색! 거기에 파란색 물방울무늬!"

"어!? 뭐야! 벌써 스킬 쓴 거야!?"

"아니. 그건 스킬 안 써도 알겠는데."

"캭! 이 변태가!"

잠깐의 소란이 지나가고 미나가 나를 향해 진지하게 물어본다.

"오빠. 그러면, 궁금한 게 있는데요. 내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그 스킬로 읽을 수 있는 거예요?"

"어? 글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그런 건가? 희미한 기억? 그런 거?"

"네."

"아마…. 네가 기억하는 만큼만 볼 수 있지 않을까? 이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스킬은 아니니까. 있는걸 훔쳐보는 스킬이지."

"흐음…."

"왜? 기억해내고 싶은 게 있는데 기억 안 나는 게 있어?"

"아뇨. 뭐 그런 건 아닌데…."

"혹시 있으면 말해줘. 한번 해보면 되겠지."

"알겠어요. 생각나면 말해볼게요."

다행히 그리 부정적인 반응들은 아니다. 타인의 기억을 읽는다는 것에 조금 경계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긴, 내가 자신들의 기억을 함부로 읽지는 않은 거라는 믿음이 있으니 저러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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