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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도 하는 물결
모든 게 계획대로 순조롭게 돼가고 있으니 초조함이 생기지 않는다.
지금껏 초조함이 없던 적이 없었다.
항상 불안에 떨고 있었고 마음 한구석에는 의심과 두려움이 자리 잡았었다.
사실…. 그게 내 성장의 원동력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강박증에 가깝게 발현되는 경계심.
그런 삶이었다. 지난 5년간.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더 없이 마음이 편안하다.
살인도 없고 탐색도 없고 공작도 없다.
그저 4월이 된 서해의 바람을 맞으며 내가 사랑하는 여자들과 스킬 숙련을 하는 지금은 더 없이 마음이 고요하다.
폭풍전야. 혹은 쓰나미가 몰아치기 전의 바닷가.
불안과 초조함으로 가득 차야 할 이 순간이 나에겐 더없이 즐거운 시간으로 돼가고 있다.
안나는 결국 반사를 배웠다.
이유를 물어보니 '조금 더 적극적으로 파고들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
무서워. 이럴 때는 안나가 외국인이라는 게 확실히 느껴진다.
약간 사고방식이 우리랑 달라. 지극히 수비적이고 그늘에 숨으려고 하는 나와는 약간 성향이 다르다.
내가 틈이 날 때까지 기다리는 타입이라면, 안나는 본인이 흔들어서 틈을 만드는 타입이랄까?
살짝 불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녀의 의사를 존중한다.
반사가 절대 필요 없는 스킬은 아니니까.
광역 스킬 무효화만 안 맞으면 무서울 게 없지.
파티를 배우고 나흘.
승희, 미나, 세아, 안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속도로 포션을 먹으며 숙련을 했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그녀들이 포션을 먹는 속도는 정말 말도 안 되게 빨라졌다.
터가 안 좋았던 걸까? 아니면 계절이 안 맞았던 걸까?
터랑 계절은 헛소리지만, 그래도 바깥바람을 쐬는 건 확실히 좋은 효과가 있는 것 같다.
그건 나도 체감하고 있잖아.
아무리 환기가 잘 된다고 하더라도 어둡고 침침한 벙커 안보다 바닷가의 펜션이 스킬 숙련하는 데는 훨씬 편한 게 사실이니까.
내가 파티 고급 65퍼센트 정도가 되었을 때, 세아가 강화 주먹을 마스터 했다.
쟤가 정말 포션 먹기 싫어서 찡찡거리던 세아가 맞나? 가슴이 웅장해진다. 진짜.
우리가 머무는 펜션 주변의 건물들을 가루로 만들어버린 세아.
덕분에 우리 건물은 약간 허허벌판에 서 있는 것처럼 됐다. 아마 전봇대만 아니었으면 진짜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을 거야.
"후우. 자. 덤벼."
"뭘 덤벼."
애가 주먹질을 많이 했더니 정상이 아니네.
무슨 무투의 극의 라도 깨우친 거야?
어쨌든 대단하긴 하다. 스킬 일곱 개 마스터라니.
슬픈 건 이래도 짱개놈들의 지급 파견대보단 스킬 개수가 적다는 거다.
하지만, 신경 안 쓴다. 그런 녀석들과 비교할 필요는 없어.
세아는 세아의 역할이 있다. 아주 크고 웅장한 역할.
"코인 얼마나 있지?"
"95만."
"이번에 스킬 올리면 바닥을 보이겠네."
"어."
"걱정마. 코인이라면 뭐…. 앞으로 걱정 없을 정도로 먹을 테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아는 세아는 별다른 말이 없다.
스킬은…. 음. 세아도 반사는 있어야겠지.
"반사 찍자."
"알겠어."
"잊지 말고 패시브부터 찍고."
"사람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
"혹시나 해서 하는 거지. 설마 너를 무시하겠니."
스킬을 다 찍었다고 말하는 세아.
이제 테스트를 해보러 갈 시간.
"그럼 우리 다녀올게?"
"조심히 다녀와요."
승희와 미나, 안나가 인사해줬고, 나는 게이트를 열었다.
세아가 게이트로 들어갔고 나 역시 바로 들어간다.
우리가 온 곳은 충주댐.
지난번에 산샤댐을 보고 느꼈던 그 느낌과 가장 비슷한 곳을 생각해 봤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정한 곳.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댐들을 찾아보기 위해 도서관까지 가서 책들을 찾아보고 알아냈다.
일단 여길 부숴본다. 이정도 댐은 쉽게 박살 낼 수 있어야 그 무지막지한 댐을 어떻게 할 수 있겠지.
"여긴 어디야?"
충주댐의 상공.
주변에 사람 같은 게 있을 리는 없다. 마음껏 박살 내도 누구 하나 신경도 안 쓰겠지.
"충주댐."
"충주댐? 그럼 여긴 충주인가?"
"그렇겠지? 충주댐이니까 충주 아닐까? 자. 이쪽으로 와봐."
바로 앞에 보이는 댐. 바로 앞까지 세아와 함께 간다.
"여기, 가장 두꺼워 보이는 이곳. 여길 한번 부숴봐."
"흐음. 발 디딜 곳이 없네?"
"어차피 비행으로 날아와서 칠 거잖아?"
"아. 그렇네. 난 왜 가만히 서서 할거라고 생각했지?"
"그 스킬이 어떻게 계산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비행을 쓰고 전속력으로 날아와서 치는 게 데미지를 가장 많이 줄 수 있겠지?"
"그러네요. 그럼…. 간다?"
뭐라고 더 말할 것 없이 세아는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빠르게 콘크리트 덩어리 쪽으로 날아갔다.
빠르게 쇄도하더니 댐 바로 앞에서 휘둘러지는 작은 몸, 작은 주먹.
쿠웅
사람이 주먹을 휘둘러서 저런 소리를 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쩌적거리며 갈라지는 콘크리트 덩어리들.
댐이 한방에 박살 나고 그 틈으로 물이 솟구친다.
하하…. 내가 바로 보고 싶던 장면이었어. 좋네. 이정도면 될 거 같은데.
댐이 부서지자마자 내 옆으로 다시 블링크 해온 세아.
자기가 한 일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보니 몸집 작은 아가씨가 아닌 늠름한 여전사처럼 보인다.
"오빠. 그거 알아?"
"응?"
"나. 방금 괴력 안 썼다?"
세아의 말에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얘는 지금…. 저 큰 댐을 강화 주먹 한 방으로 박살 냈다고 말하는 건가?
"이제 본 게임으로 가자. 오빠."
나를 보고 씨익 웃는 세아. 미치겠다. 왜 이렇게 사랑스럽냐?
다시 백령도로 이동한 나와 세아.
그리고 밤이 되길 기다린다.
당장이라도 가서 때려 부숴보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급할 것 없어. 급할 것 없다.
릴렉스. 릴렉스. 진정하자고. 워. 워.
오히려 당사자인 세아는 상당히 즐거워 보인다.
컨디션 조절하라고 스킬 숙련도 못 하게 했는데 날름날름 포션을 마시는 거 보니 저 가스나 저거 분명 반사 숙련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하하…. 아까까지만 해도 정말 마음의 평화가 가득했었는데….
세아 저 가스나가 마음속에 파도를 만들어버렸어. 그것도 쓰나미급으로.
해가 지기 시작했고, 나는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흥분하지 말자. 어차피 오늘 댐은 부서진다.
나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 세아와 함께 가서 해야 하는 일.
댐도 댐이지만 세아의 안전이 우선이다. 집중하고 가서 할 일에 대해서 생각하자.
있을 수 있는 상황과 모든 것들을 다 고려해서 대안을….
"오빠."
어느새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는 세아.
"오빠 만나고 이렇게 긴장하는 건 처음 본다."
"그런가."
웃기는 일이지. 지금까지는 사람 죽이면서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그래. 이건 그거다. 단지 많은 짱개들을 죽일 수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계획을 세우고 거기에 투자해서 그 결과를 확인하는 자리.
그것에 대해서 흥분하는 거다.
세아 말이 맞다. 지금까지 평온하게 있어 놓고 인제 와서 긴장할 필요는 없지.
"고마워."
별거 아니라는 듯 쿨하게 다시 자리를 뜨는 세아.
그래. 진정하자. 진정. 이럴 거면 차라리 수면을 걸고 한숨 잡어라는 게 낫지.
가만히 마음을 다스리며 눈을 감고 시간을 보냈다.
자정. 맞춰놨던 알람이 울렸다.
드디어 출격할 시간.
"가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세아가 투명화와 비행, 반사를 쓴다.
나 역시 똑같이 걸고 게이트를 열었다.
바로 쏙 들어가 버리는 세아. 바로 따라 들어간 다음 게이트를 닫았다.
눈앞에 보이는 산샤댐. 밤인데도 그 커다란 댐은 켜있는 조명만으로도 대단한 위용을 자랑한다.
"이야. 진짜 크네. 바로 갈까?"
"아까 말한 건 다 기억하지? 문제가 생길 시엔…."
"아오. 알아. 뭔가 이상한 낌새가 조금이라도 느껴질 땐 모든 걸 멈추고 무조건 하늘 높이 블링크 할 것, 그다음 무조건 오빠 쪽으로 블링크 할 것. 오빠가 멈추기 전까지 멈추지 말 것. 또?"
"그래…."
"그럼 간다?"
"알았어. 화이팅."
세아는 블링크를 써서 댐 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
탐지와 파티로 인해 선명하게 보이는 그녀의 기척.
잠시 멈춰있던 세아는 하나의 선이 되어 댐으로 향한다.
비행이 저렇게 빨랐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에 세상을 깨우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쿵
최초의 타격. 요란한 소음이 주변을 울려 퍼지지만 이곳에 있는 짱개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른다.
그리고 그사이 세아는 다시 뒤쪽에 나타났다.
다시 한번 댐으로 향한 그녀는 두번째 울림을 세상에 풀어놓았다.
쿵
그제야 곳곳에서 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 하지만 그들도 알 거다. 그 진원지가 댐 쪽이라는 것을.
혹시나? 설마? 에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그들에게 세아는 세 번째로 굉음을 선사한다.
쿵
저런 거대한 댐은 가둬져 있는 물의 무게만 해도 엄청나다.
그걸 지탱하고 있는 게 댐이다. 즉 거대한 힘이 항상 댐을 밀고 있다는 것.
그렇기에 세아가 저 댐을 박살 낼 필요는 없다.
단지 금 하나. 확실하게 그 균형만 깨준다면 나머지는 물이 알아서 할 거다.
그렇게 세 번의 주먹질에 온 주변이 소란스러워질 때쯤, 댐이….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쩌어어어어억
모르겠다. 고작 콘크리트가 갈라지는 건데 저런 소리가 날 수 있는 건가?
하지만 내 귀에는 똑똑하게 들렸다.
자신들의 길을 막고 있던 물의 아우성과 댐의 마지막 비명을.
쿵!!!
그리고 그런 댐에 사망선고를 내리듯 세아의 네 번째 주먹이 휘둘러졌다.
그다음은…. 세상의 그 어떤 영화도 담아내지 못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거대한 댐이 천천히 무너지는 모습.
그리고 그 족쇄가 풀리자 풀려난 물들이 거짓말처럼 쏟아져 내리는 광경.
콰아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
노도 하는 물결들이 부서진 댐 사이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물은 아직 부서지지 않은 댐의 남은 부분들을 깎아내며 미친 듯이 쏟아진다.
그 압도적인 물의 위력에 나는 가만히 서서 그것들을 바라봤다.
맙소사.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저걸 대체 그 어떤 것이 막을 수 있을까?
"짜잔."
세아가 내 옆에 나타났다.
정말 아무 문제 없이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준 세아.
나는 그런 그녀를 꼭 끌어안았고, 내심 으쓱으쓱한 기분인 것 같은 세아도 나를 꼭 끌어안는다.
"앞으로 슬프고 우울한 일이 있으면 이 장면을 기억하려고."
나에게 속삭이는 세아.
"걱정마. 동영상 찍고 있어."
그런 그녀에게 답해준다.
아까 세아가 내려갔을 때부터 스마트 폰은 켜고 있었다.
이런 장면을 동영상으로 안 찍을 수가 없잖아? 평생 쓸 수 있는 소화제인데.
"이정도면 성공이지?"
"물론이지. 이뻐 죽겠네."
머리를 쓰다듬어줬지만, 오늘은 오히려 좋아한다.
그렇게 세아를 칭찬해주고 하늘 높은 곳으로 조금 더 올라가 게이트를 열어줬다.
"그럼, 먼저 간당."
"그래."
"페이즈 2. 화이팅!"
"그건 이따 정오나 돼야 시작인걸."
"뭐든 간에. 고생할 거잖아."
나는 씨익 웃어주고 게이트를 닫았다.
그래. 이 물이 엄청나게 많은 짱개들을 쓸어버릴 테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고작 물난리 정도로는 큰 타격이라고 할 순 없지.
물론 고작 물난리라고 말하기엔 스케일이 어마어마하지만….
원래 다다익선이라고 그랬다. 이럴 때 쓰는 말은 아닌가?
그럼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이면 되겠다.
그래. 그게 딱 좋다. 맘에 드네.
쏟아지는 물을 따라 강을 타고 내려간다.
한계 돌파 2를 찍어서인지 비행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계산상으로는 30퍼가 증가한 속도다. 그렇다면 시속 65킬로. 좋은 패시브야. 비행속도가 빨라지는 건 너무 감사하지.
물은…. 정말 시원하게 모든 것을 쓸어내려 가고 있다.
파도.
파도라고 해야 하나? 육지를 내달리는 파도는 주변의 온갖 것들을 삼키고 박살 내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산 사이를 내달리던 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도시를 마주했다.
밤인데도 그 모습은 정말…. 공포스러웠다. 아니, 밤이라서 더 공포스러운 건가?
제법 높은 지대에 있는 도시 같은데…. 해일이 밀려온다.
그 이질감. 그게 진정한 공포다.
최악의 상황이라고 가정했던 것이 이뤄졌을 때의 참담함이랄까?
물은 순식간에 도시를 잡아먹었다.
건물이고 뭐고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저 물 앞에 평등하게 잠길 뿐.
어두운 밤이라 그런지 도시 안에서 반짝반짝하는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사람이 죽을 때 나는 빛이란 걸 알고 있다.
정말로 기괴하고 아름다운 장면.
무수하게 많은 짱개들이 물에 휩쓸려 수많은 반짝임을 만들어 낸다.
이런 걸 동영상으로 찍고 있는 나는…. 제정신이 맞나 모르겠다.
근데 정말 웃긴 건…. 이게 시작이라는 거다.
댐을 벗어난 물은 이제 겨우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앞으로 이 넘쳐나는 물들이 가야 할 길은 한참 남았다.
이 많은 짱개들이 죽은 건…. 티가 안 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