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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번째 스킬
안나는 파티 초대를 받고 다시 한번 자신에게 바람 칼날을 사용했다.
이번엔 상처가 나지 않는다. 몇 번 더 자신의 팔과 다리에 스킬을 써보는 안나.
그러더니 이번엔 승희가 조금 떨어져서 자신의 발밑에 폭발을 쓴다.
퍼어엉
폭발 사이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는 승희.
이건 조금 사기네. 파티 스킬 하나로 페널티를 그냥 씹어버리다니.
폭발의 가장 큰 단점이었잖아? 근거리에 쓸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이러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파티에 속해 있기만 한다면 어디든 마음껏 폭발을 날릴 수 있어.
그러면 여러가지 전법이 가능하다.
막말로 파티원중에 하나가 상대를 도망 못 가게 붙잡고 거기다가 폭발이나 썬더 필드를 싸 갈겨도 된다는 소리.
좋아. 효과는 확인했어. 맘에 드는 스킬이야.
사실 첫 번째 효과인 위치 확인만으로 본전은 뽑은 스킬이다. 파티원 피해 면역은 말 그대로 보너스라고 볼 수 있는 능력.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다. 고급이 되면 체력 회복도 된다 그랬지? 마스터 하면 코인도 자동 분배되고?
뭐하나 빠지지 않는 효과들이다.
다만 단점은 파티하고 있으면 페이즈 아웃을 쓸 수 없다는 점?
게다가 광역 스킬 무효화도 신경 써야 한다.
단독일 때는 정말 좋은 스킬이지만, 파티 할 때는 신경 쓰이는 게 많긴 하네.
어쨌든 확인할 것은 다 했다. 이제 파워 포션 드링킹만 남았어.
가만히 앉아서 스킬 숙련을 하는 건 지극히 재미없는 일이다.
스킬을 14개나 배웠고, 스킬 숙련은 익숙하다 못해 지겨울 정도지만…. 이렇게 밖에서 스킬 숙련을 하니 지루함은 덜하다.
겨울이 지나간 게 너무 다행이야. 이번 겨울은 너무 혹독하고 길었어.
진작 이렇게 야외에서 숙련할 수 있었으면 조금 더 성장이 빨랐을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의 상황은 상당히 웃기다.
나는 무슨 불경 외우듯 파티생성 파티해제를 계속해서 읊고 있고, 승희와 안나는 정신없이 블링크하고 있다.
저 멀리 에선 세아가 건물 때려 부수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조금 떨어진 해안가에서는 미나가 들어가면 즉사하는 바닥을 깔고 있다.
다채롭고 다양한 숙련들. 그렇게 반나절 정도가 지나자 안나가 내게 다가온다.
"블링크 마스터 했어요."
"오. 수고했네."
살포시 안아주자 나를 꼭 끌어안는다.
그렇게 좋을까? 참 신기한 아가씨야.
"더 빨리할 수 있었는데. 블링크가 너무 재밌어서…."
"그래. 숙련도 좋지만, 실전 감각을 익히는 게 더 중요하지."
사실 내가 의아해했던 것도 그거다. 안나는 지금 미나에게도 추월당한 상태.
물론 미나가 체력 증가를 찍고 난 뒤 독하게 하고 있는 것도 있지만, 안나가 살짝 힘을 뺀 것도 있을 거다.
그리고 승희랑 같이 속도를 맞춘 느낌도 나고.
"이제 뭐 하면 돼요?"
"안나는 이제 토네이도 나올 때까진 여유가 있지. 배우고 싶은 거 배워도 돼."
"그래요? 그래도 추천할 만한 게 있을 거 아니에요."
"추천이라. 있긴 있지. 반사도 있고 순간 이동이랑 게이트 트리를 타도 되고. 수납을 배워도 되고. 보호막을 배워도 되고…. 넌 탐지를 처음부터 배워놔서 다행이야."
고개를 끄덕거리는 안나. 확실히 그렇다. 안나는 상당히 완성형에 가까운 스킬 구성이다.
예전 같았으면 반사를 필수라고 생각했겠지만, 블링크로 히트 앤 런이 주류가 되어버린 이상 완전 필수는 아니다.
"음. 그럼 조금 생각해볼게요."
"그래. 포션 먹느라 고생했으니 조금 쉰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골라봐."
"네."
승미세안 네 여자는 전투에 풀로 참여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내 전투 자체가 그런 스타일이 아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 정정당당하게 마주 보고 하는 싸움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멍청한 짓이야. 정말 피치 못한 사정이 있지 않은 이상 그럴 일은 없겠지.
적절한 순간에 불러와서 기습적으로 활용하는 것. 그리고 안전한 곳으로 돌려보내는 것.
그게 내 전투방식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항상 그렇게 싸울 거야.
내 허벅지를 베고 누워있는 안나.
세상 편해 보이네. 되게 행복해 보인다.
문제는 자꾸 내 허벅지 안쪽으로 손이 들어온다는 것.
크흠. 좋긴 한데 너무 대놓고 하는 거 아니니?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승희도 내 쪽으로 온다. 승희도 블링크를 마스터 했나 보네. 표정이 밝아.
안나는 슬그머니 손을 빼고 몸을 일으켰다. 역시, 눈치 빠른 아가씨다워.
"마스터 했어요. 블링크."
"수고했어."
자리에서 일어나 꼭 안아준다. 승희 역시 나를 꼭 끌어안았고 우리는 잠시 그렇게 있었다.
"이제 뭐 배우면 되나요?"
"승희는 배울 게 있지. 일단…. 진동파를 배우자."
"진동파요?"
"어. 네 역할이 상당히 중요해질 거야. 전에 말했었지? 진동파로 비행 쓰는 사람들 추락시켰다는 거?"
"네. 그럼 제 역할이?"
"응. 카운터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이야."
"진동파라…. 알겠어요."
"게다가 진동파는 나중에 EMP도 나와. 스킬이 어떻게 써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름이 그러니까 효과는 확실하겠지. EMP가 스킬 이름대로라면 너는 이 세상을 어둠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어."
"오. 완전 중2병 같네요. 세상을 암흑으로 물들게 하는…."
“그것뿐이 아니지. 추락시키는 자,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이게 하는 자. 승희 The Dark Fall. 이야….”
“아…. 제발.”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지. 말이."
가벼운 농담이었지만 진저리를 치는 승희. 그 정도였니? 하긴, 나도 하면서 조금 힘들긴 했다.
"그럼 바로 배워요?"
"어. 신체 능력 증가 부터 배우고."
"아. 그 패시브? 드디어 다시 세아를 팔씨름으로 이길 수 있겠네."
"응? 무슨 소리야?"
"아. 세아가 그 패시브 배운 다음에 괴력 안 쓰고도 절 팔씨름으로 이겨버렸거든요. 원래는 제가 항상 이겼는데."
"스킬 도핑인가."
"도핑에는 도핑!"
"재밌네. 그런 걸 하고 있던 거야?"
"우리끼리 있으면 심심하니까요."
하긴, 그 겨울 동안 집안에서만 있었으니 어지간히 심심했을 거다. 별별 걸 다했겠지.
"아무튼, 배울게요?"
그렇게 스킬을 찍는 승희.
"찍었어요. 가요!"
나는 승희를 따라갔고 안나도 몸을 일으켜 우리를 따라온다.
"근데…. 이거 어떻게 나가는 거예요?"
"나도 몰라. 당해보기만 해서."
그것도 직격으로 당한 게 아니고 멀찌감치에서 당한 거지만.
"근데…. 진동파를 그냥 공중에서 썼단 말이지? 그럼 바닥에 찍어서 쓰는 범위형 스킬은 아닐 거야. 아마 방출형 스킬일 것 같은데."
"흐음. 일단 써볼게요."
나와 안나는 뒤로 물러섰고, 승희는 아무도 없는 쪽 허공을 보고 외쳤다.
"진동파!"
뭔가가 앞으로 나간 기분이 들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보이는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확실히 나가긴 나갔다. 미묘하게 핑 도는 느낌이 들었어.
"나간 거 같죠?"
"응. 근데 뭐라고 해야 하나…. 으잉? 하는 느낌이 있네."
"저는 모르겠어요. 나간 거 같긴 한데 이상한 느낌은 없어서. 시전자는 효과를 안 받나?"
"진동파라…. 좀 자세하게 들을 걸 그랬나."
머릿속에서 진동파에 대해서 아는 것을 최대한 끄집어내 봤다.
음…. 나름 공학도인데 기억나는 게 아무것도 없네.
고작 5년밖에 안 지났는데 이렇게 까맣게 잊어버리다니. 그래도 고등학교 때 기본으로 배우긴 한 거 같은데.
어쨌든 스킬 이름이 진동이 아니라 진동파라는 것은 진동이 파형으로 나간다는 뜻이겠지?
맞나? 아. 모르겠다. 근데 이런 걸 굳이 따져야 할까? 스킬 만든 놈도 잘 모르고 대충 가져다 붙였을 수도 있잖아?
이 새끼들은 이미 가속화에서 문과라는 걸 증명했잖아. 분명히 그럴 수 있어.
"승희야."
"네?"
"나한테 쏴봐."
"네!?"
"일단 죽을 스킬은 아닌거 같으니 몸으로 체득해보는 게 가장 빠르겠지."
승희는 계속 주저했지만 내 강력한 요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나를 마주 봤다.
나는 비행을 쓰고 한 뼘 정도 공중에 떴다. 과연 저걸 정통으로 맞으면 어떻게 되려나.
"자. 써봐."
"으. 난 진짜 하기 싫은데."
"해봐. 효과를 알아야 알차게 써먹지."
"에이. 몰라요. 죽지만 않으면 힐로 살아나겠지! 진동파!"
오우. 뭔가가 나를 덮쳤다.
이 기분은 그거다. 대학 합격하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처음으로 술을 꽐라로 처먹고 벽에 기댔을 때 느꼈던 그 느낌.
나는 분명 멀쩡하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변기를 끌어안고 안주로 뭘 먹었었는지를 확실하게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었지.
지금도 그렇다.
나는 분명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머리를 잡고 있었다.
승희와 안나가 괜찮냐고 말하며 내게 다가왔고, 승희는 힐을 써준다.
어…. 힐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거 같은데. 좀 누워야겠어.
내가 땅바닥에 드러누워 버리자 승희와 안나는 난리가 났다.
특히 승희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 됐다.
"아…. 그런 거 아냐. 오바하지마."
최대한 멀쩡한 목소리로 안심을 시켜줬지만 그다지 안심이 안 되나 보다.
어휴. 나는 맘 편히 누워있지도 못하는 운명인가 봐.
조금 괜찮아진 거 같아서 몸을 일으켰더니 그제야 승희의 표정이 조금 나아졌다.
그리고 안나도.
안나 얘도 이런 표정은 처음 보네.
맨날 생글거리던 얼굴만 보다가 이렇게 울상인 모습을 보니 느낌이 색다른 느낌이야.
음…. 승희도 안나도 눈이 촉촉한 게 상당히 이쁘다.
평소에 못 보던 모습이라 그런가? 되게 이쁘네.
종종 울려야 하나? 어휴. 이 무슨 쓰레기 같은 생각을.
"어우. 진동파 효과 좋네."
"괜찮은 거예요? 무슨 고장 난 드론처럼 뚝 떨어졌다고요."
"고장 난 드론…. 비유 좋네. 보통은 끈 떨어진 연이라고 비유했을 텐데. 세상이 좋아졌어."
"괜찮긴 한가 보네요. 농담할 여력이 있는 거 보면."
나는 머리를 한두 번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괜찮네. 이정도면 괜찮은 거 같아.
"자. 그럼…. 계속해보자."
"네!? 또 한다고요?"
"한 번에 이뤄지는 실험이 어딨어."
"아니! 그래도!?"
"괜찮아. 안 죽었으면 됐어. 두번 말하게 하지 말고 빨리하자."
마땅찮은 표정이지만 결국 승희는 내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
이번엔 승희와 아까보다 거리를 조금 더 벌렸다. 아무래도 거리가 멀어지면 효과가 떨어지겠지?
"자! 고고!"
"으…. 진짜 못살아 정말! 할게요! 진동파!"
이번엔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언제였더라. 1학기 중간고사 끝난 뒤였나?
과에서 시험 끝났다고 부어라 마셔라 하는 자리였던 거 같다.
그리고 다들 세희 년 주변에서 알짱거리느라 바빴지.
그 사이를 끼어들 엄두가 안 났던 나는 결국 혼자서 잔을 비우다가 일찌감치 술집을 나왔다.
내가 나가는 걸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그놈들은 다 죽었잖아? 아. 이게 아니고…. 아무튼.
그날 집 앞까지 와서 전봇대에다가 비둘기 먹이를 잔뜩 살포했었지.
그때 기분이다. 어쨌든 그날은 쓰러지지 않고 집까지 들어왔으니까.
"괜찮아요?"
"어…. 어우. 거리가 좀 있는데도 어질어질하네."
"이번엔 안 쓰러졌네요."
"어. 사나이가 같은 일에 두번 쓰러질 수는 없지."
"뭐라는 거야. 정말. 머리 다친 거 아니죠?"
"네. 괜찮습니다. 마님. 그럼 계속해보실까요?"
"아냐. 확실히 정상이 아냐."
"내가 언제는 정상이었니? 암튼…. 아고고. 거리를 더 벌려봐야겠다."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승희와 승희의 말을 완전히 이해 못 해 약간 어리둥절해서 하는 안나를 두고 다시 거리를 벌린다.
이번엔 30미터 밖으로 아예 물러섰다.
조금 전에는 안 쓰러져서 그런가? 승희는 망설임 없이 진동파를 썼고, 이번엔 과거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흠. 이정도 거리면 괜찮은 건가? 근데 약간 느낌이 오긴 하네."
다행히 겨우 비행을 유지할 정도는 된다.
근데 이거 겨우 하급이잖아? 흐음…. 이런 식이다. 이거지? 확실히 좋긴 하네.
"블링크!"
어처구니없게도 블링크는 안 나갔다.
비행은 유지 되는데 블링크는 안나가? 이정도 거리에서도?
생각보다 블링크가 상당히 섬세한 스킬이구나. 마냥 맹신하고 있다가 당하면 그냥 푹찍 당할 수 있겠네.
"됐어요? 이제 숙련하면 돼요?"
"무슨 소리야. 이제 시작인데."
전에 지급 파견대 놈들과 상해당 놈들이 싸울 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진동파는 한 방향으로만 나가지는 않았다.
그런 것들까지 전부 테스트 해봐야 해. 거리와 범위, 그리고 숙련도가 올랐을 때 어느 정도 강해지는지까지.
안나는 내가 쓰러지지 않는 걸 확인하더니 이젠 안심되는 듯 옆으로 가서 의자 하나를 가져와 자리에 앉았다.
그래. 조금 길어질 수 있으니 저러는 게 현명하다. 역시 똑똑한 여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