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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언
그렇게 승희와 돌아다니며 폭발에 대한 테스트를 몇 가지 더했다.
콘크리트 벽을 폭발로 부숴본다던가, 철근이 섞여 있는 건물 벽을 폭발로 부숴본다던가…. 등등.
폭발은 묘하게 애매했다.
위력이 세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막상 이것저것 테스트해보니까 상당히 어중간한 느낌.
사람 잡는 데는 충분하다. 아니 과분하지. 사람이 착용하는 보호구 정도는 무시하고 폭사시킬 수 있으니까.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건물까지는 무리야.
창문이나 잡다한 것들은 박살낼 수 있지만, 조금 튼튼한 건물들은 힘들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이너마이트 같은 것들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화약이 없는 세상이라고 좋아했는데, 마냥 좋은 건 아니네.
아니지, 어차피 화약이 있어도 내가 쓰는 방법을 모르니까 안되나?
아니네. 그것도 아니야. 화약 쓸 줄 아는 사람을 섭외하면 되잖아? 이미 다 죽고 없으려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승희가 나를 보고 물어봤고,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승희가 있었지. 승희를 놔두고 또 나 혼자 심각하게 고민했네.
"아. 아냐. 그냥 이런저런 생각 좀 했어."
승희는 같이 있어서 좋은 거 같은데 약간 심심해 보인다.
하긴, 바람이 아직 차가운데 이런 해변에 여자 혼자 심심하게 둔 건 내가 잘못한 거지.
"좀 걸을까?"
내 말에 기쁜 듯이 와서 팔짱을 끼는 승희.
그렇게 나와 승희는 아무도 없는 바닷가를 천천히 걸었다.
"아. 좋다. 예전에도 둘이 바다를 보면서 걸었죠?"
"그치. 동해. 좋았었지? 그때?"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표정으로 전부 말해준다.
행복해 보이는 표정. 뭔가를 딱히 하지 않아도 그냥 이렇게 팔짱 끼고 걷는 것만으로 이렇게 좋아한다.
"올해도 가야지. 바다."
"그쵸. 올해도 가야죠. 올해는 사람이 많아져서 조금 더 북적북적하겠네요. 게다가 먹을 것도 많고!"
"그럼. 일단 고기가 있지. 게다가 원하는 간식이나 과자 같은 것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고."
"맞아요. 먹을게 풍족해진건 정말 행복한일이에요."
"지난번보다 더 즐거울 거야."
"흐음…. 지난번보다 즐거울 수는 있겠지만, 나는 그때가 더 소중할 거 같은데."
승희의 말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일단, 목소리부터 달랐다. 아련함이 담겨 있는 목소리.
그때 그 여행은 승희에게 정말 소중한 기억이 되었나 봐.
그렇게 나와 둘이 간 여행이 좋았던 걸까?
하긴, 전에도 말한 적 있었지. 다른 여자들은 가지지 못한 경험.
암담함 뿐이었던 세상에서 처음으로 희망찼던 시간.
그래.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바뀌었던 것도 아마 그때 그 시점 이후였던 거 같으니까.
"바다. 파도. 햇빛. 바람. 갈매기 소리. 모래. 달빛. 불꽃놀이. 난 아직도 다 기억해요. 그때 있었던 일들."
"뭐,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잖아."
"아잇! 정말! 무드라곤 아무리 뒤져봐도 없는 사람이야!"
그러면서 내 배를 팔꿈치로 푹 찌른다.
윽. 아프다. 얘 방금 진심으로 찍었는데? 농담 아니고 진짜 아프네.
"불꽃놀이를 조금 더 구해가 볼까요? 어디서 구하지? 모두와 함께 바다에서 불꽃놀이 하면 다들 좋아할 텐데."
불꽃놀이라. 뭐, 낭만적이긴 했지.
내가 그정도로 느낄 정도였으니 다들 확실히 좋아하긴 할 거다.
근데 불꽃놀이라. 어디서 구하지? 그때는 거기에 마트에 있는 불꽃놀이를 쓰긴 했는데….
다른 리조트 같은 데를 뒤져봐야 하나? 아니면 바닷가 편의점 같은 데를 뒤져도 나올 것 같긴 한데.
잠깐.
잠깐…. 뭔가 이상하다.
분명 화약은 전부 없어진 거 아냐? 근데…. 불꽃놀이는 왜 있지?
아니…. 불꽃놀이에 들어가 있는 게 화약 아냐? 위력이 쥐똥만 하긴 해도 분명 화약이잖아.
뭔가가 이상하다. 내가 알기론 지금 세상에 화약은 없다.
총기, 미사일, 기타 등등. 어쨌든 열병기는 지난 5년 동안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렇기에 더 찾을 생각도 안 했다. 근데…. 이게 뭐지?
너무 찌끄레기라서 안 사라진 건가? 아니면 용도가 살상용이 아니라서 놓아둔 건가?
아니…. 용도를 어떻게 알아? 어디다 터트리느냐에 따라서 용도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거잖아?
불꽃놀이에서 화약만 잔뜩 모아서 터트리면 폭탄 만들 수 있는 거 아냐?
뭔가가 번뜩였다. 빈틈을 찾은 느낌이야.
화약, 그리고 화약이 들어간 모든 제품을 세상에서 삭제한 것은 아닌거 같다.
이 빈틈, 한번 찔러 볼 수 있을 것 같아.
"오빠 진짜 웃기다."
"어?"
"왜 표정이 그렇기 시시각각 변해요? 아무 말이 없길래 지켜봤더니 표정이 완전 막 바뀌는데?"
"내가 그랬어?"
"네. 그래도 마지막은 표정이 밝아졌네요? 뭐 좋은 생각이라도 났어요?"
"응. 네 덕분에 뭔가 하나 찾아낸 거 같아."
"내가 뭘 어쨌다고."
"넌 뭘 안 해도 돼.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걸 좋게 만들어줘."
그렇게 승희를 꼭 끌어안았다. 품에 쏙 들어와 역시 나를 안아주는 그녀.
내가 한 말은 빈말이 아니다.
승희가 없었으면 나는 훨씬 더 괴팍하고 미친놈이 되었겠지.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아졌으면 다행이죠."
나를 바라보는 승희의 입술이 너무 매력적이다.
나도 모르게 가볍게 입 맞췄다. 그러자 배시시 웃는 승희.
이뻐 죽겠네. 왜 이렇게 이쁠까? 나도 이유를 모르겠네.
"또 바빠지는 거예요?"
다시 팔짱을 끼면서 천천히 걷는 승희.
살짝 야한 생각이 들었지만, 승희의 행동에 그런 생각은 사르르 사라졌다.
승희는 그런 게 있다.
나와 섹스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싫어하는 건 아닌데 그런 것보단 이렇게 함께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많이 해서 그런 걸까? 아니, 그런 단순한 이유는 아닐 거다.
이미 그 영역을 넘어선 거겠지. 굳이 섹스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단계 같은 건 지난 거다.
그저 함께 있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걷는 것. 그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끼는 사이.
"나야 늘 바빴지."
"그렇죠. 늘 바빴죠. 한가한 적이 없었어."
그렇게 대화는 끊겼고 우리는 그저 바닷가를 계속 걸었다.
모래사장에 찍히는 발자국이 우리를 따라온다.
그저 아무 말도 없이 걷는 우리를 조용하게 따라오던 발자국은 이내 파도에 쓸려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발자국은 바다로 떠난 걸까? 이제는 우리 말고 누구를 따라가고 있을까?
"이만 갈까요?"
"그럴래?"
"네. 오랜만에 오빠 파워를 충전했으니까 됐어요."
"뭐야. 그 오빠 파워라는 건."
"음…. 있어요. 그런 게."
그런 승희의 두 뺨을 손으로 감싸고 한 번 더 키스했다.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엔 조금 더 진하게.
그렇게 짧은 키스를 마치자 승희가 나를 보고 웃으며 말한다.
"아. 과충전됐네."
적당히 붉어진 승희의 얼굴이 보기 좋다.
아직도 키스에 이정도로 얼굴이 붉어지다니. 사람 참 설레게 하네.
"가자."
집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열었고, 게이트가 열리자마자 승희는 냉큼 들어갔다.
그렇게 나도 안으로 들어가 집에 모두 와있는지를 확인했다.
미나, 세아. 안나. 다 있네. 됐어. 그러면 이제….
"나갔다 올게."
게이트를 모두 없애버리고 바로 수원으로 순간 이동했다.
청주로 가야 하는데 저장을 지워버려서…. 에휴. 빨리 날아가지 뭐.
빠르게 지하벙커에 있는 두 여자가 살아있는지만 확인하고 청주를 향해 날아간다.
저 여자 둘도 마냥 저렇게 가둬놓을 수는 없는데. 아. 번거롭네…. 정말.
중국 땅을 날아다니다가 우리나라 위를 날아보니 땅이 확실히 작은 게 체감이 된다.
블링크를 섞어가며 금방 청주에 도착한 나는 헬리콥터들이 떠 있는지 확인해본다.
지금 시간이면 SG 센터에 그놈이 있을 텐데…. 아. 헬기 떠 있네. 지금 가면 있겠어.
페이즈 아웃을 쓰고 SG 센터 앞으로 갔다.
마치 원래부터 여기 있었다는 듯 동상처럼 서 있는 떠버리. 서민준.
"오랜만이네요?"
살짝 분위기가 다르다. 평소의 경박한 모습이 많이 사라진 느낌.
"뭐, 잘못 먹었냐? 왜 죽상인데?"
내 말을 듣더니 슬쩍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기쁜 표정이 아니다.
웃고 있음에도 지독하리만큼 쓴웃음.
"먹긴…. 먹었죠. SG 그룹을 먹었습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하지만 상당히 엄청난 말이다.
저 녀석은 계승권을 포기했던 차남. 정상적인 루트로는 SG 그룹을 먹을 순 없다.
고작 3주 정도 만에 무슨 짓을 한 걸까?
"아버지랑 형을 쳐냈나?"
쓴웃음이 더 짙어졌다. 조금 복잡해 보이는 표정.
"내 손으로 직접 치진 않았습니다. 근데…. 구할 수 있었는데 방관했다면 직접 친 거랑 다를 게 뭐가 있을까요?"
"글쎄. 패륜아와 무능력자 중엔 그나마 무능력이 낫지."
"하아. 당신은 남의 마음 같은 건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군요."
"남자 놈 비위까지 맞춰주고 싶은 생각은 없어."
잠시 말이 없는 녀석. 그러더니 조금 정리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한다.
"어쨌든, 당신 공이 큽니다. 당신이 대호 쪽을 끝장내버려서 결국엔 제가 회장 자리에 오르게 된 거니까."
"대호? 뒤져버린 호랑이랑 무슨 상관이지?"
"대호의 잔당들이 저희 소행인지 알고 남은 사람을 모아 쳐들어왔습니다. 제가 손을 쓰긴 했지만, 어쨌든 아버지와 형은 대호 쪽에게 당했죠."
자세하게 이야기는 안 했지만 대충 무슨 상황인지는 알겠다.
근데, 대호도 대단하네. 그렇게 주력이 전부 나한테 죽었는데도 아직 뭐가 더 남아있던 거야?
아. 하긴, 대호의 오너 일가를 잡아 죽인 거지 다른 임원들까지 전부 잡아 죽인 건 아니구나.
"어쨌든 축하한다. 이제 SG의 회장인 데다가 대호가 남긴 것들도 전부 먹어치우겠네?"
"이미 전부 확보했습니다."
"행동은 드럽게 빠르네."
"기회가 생겼는데 꾸물거리는 건 멍청한 짓이죠."
저런 걸 보면 그래도 저 녀석은 싹수가 있다.
병신같이 구태에 갇혀서 똥볼만 차던 새끼들보다는 저렇게 젊고 추진력 있는 놈들이 낫지.
문제는 저놈을 저렇게 프리하게 놔두면 결국 나에게 위협이 된다는 건데….
"너.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라."
"부탁이요? 부탁이라고 했습니까?"
왜 부탁이라는 말에 저렇게 좋아하는 거야? 저 새끼도 확실히 정상은 아냐.
"기분 나빠졌어. 됐어."
"아뇨. 죄송합니다. 말해보세요. 얼마든지 들어드리죠."
누가 보면 내가 삐진 여자친군 줄 알겠네. 나도 내가 말해 놓고 조금 어이가 없었다.
기분 나빠졌다니. 이런 푸씨같은 말투를 내가 썼다고?
잠시 녀석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잡아 죽여도 시원찮은 놈에게 왜 이렇게 친근하게 대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저 새끼는 명백하게 내 영역 밖에 있는 놈이다.
잡아 죽인다고 말은 이렇게 해도 쉽게 잡아 죽이기도 힘들다.
내가 센척을 하고 있지만, 막상 그렇게 세지도 않은데 말이지.
무엇보다 나는 저 새끼의 스킬이 뭐가 있는지도 정확하게 모른다.
내 사고방식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상대.
나도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대기업 회장씩이나 됐으면 이런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너. 이 세상에 화약 무기가 남지 않은 건 알고 있지?"
"네. 저희가 공기총 따위로 치안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죠."
"근데…. 불꽃놀이는 좋아하냐?"
"네?"
황당한 표정. 갑자기 웬 불꽃놀이냐는 표정이다.
"불꽃놀이나 폭죽에 화약이 들어가는 것 정도는 알지?"
"사람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닙니까?"
"화약 무기가 전부 없어졌어. 뿅 하고 사라졌지. 근데 불꽃놀이나 폭죽은 남아있는 건 알아?"
"네?"
살짝 황당한 표정으로 얼굴이 바뀐다.
하긴, 그 누구도 불꽃놀이나 화약 같은 거에 신경 쓰진 않았을 거다.
그런 걸 쓸 만큼 신나는 세상이 아니니까.
"조사해봐. 불꽃놀이나 폭죽에 남아있는 화약에 대해서. 왜 무기는 전부 사라졌는데 거기에 들어있는 화약은 남아있는지. 그런 다음 화약에 대해서 더 알아봐. 그런 것들을 모아서 폭약을 만들 수 있는지."
"아니…. 대체…. 왜 당신은 만날 때마다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것들만 알려주는 겁니까?"
"일주일 줄 테니까 재주껏 알아봐. 그 정도도 못 알아보면 쓸모없는 거로 간주할 테니 만족스러운 대답을 준비하지 못하면 죽어라 도망다니는 게 좋을 거다."
"꼭 그렇게 악당처럼 말을 해야 합니까?"
"간다."
"아! 진짜!"
녀석이 복장이 터지든 말든 나는 내 할 말만 하고 그곳을 떠났다.
그래. 저 녀석과 관계가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그냥 쓸만한 똘마니라고 생각하자.
그 정도 관계는 뭐…. 인정해줘도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