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369화 (369/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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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d Wild West

벽.

어두운 밤에도 환하게 보이는 벽. 누가 봐도 벽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불이 밝혀져 있는 벽.

와. 나는 봉쇄라고 해서 철조망이나 철책 정도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내가 순진했구나. 정말 벽이라니.

미친놈들. 만리장성을 쌓은 놈들이라 이거지?

콘크리트를 때려 부은 건가?

크고 웅장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함부로 넘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위압감이 장난 아니야. 그래. 저건 그런 용이겠지.

실제로 물리적인 통행을 막는 역할도 있겠지만 다른 의미가 강해 보인다.

'이 벽을 넘지 마라.'

경고의 의미. 그러니까 협박이고 위협인 거다. 넘을 생각도 하지 말라는 듯한 무력시위.

대체 저런 걸 얼마나 만들어 놓은 걸까?

내가 죽였던 최 회장이 말했었다. 분산시키고 봉쇄했다고.

이 새끼들…. 스케일 정말 대단하네. 역시 억압과 감시의 프로들다워.

벽이 있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다. 그냥 지나 가버리면 되지.

근데, 분명 저놈들도 비행이 있을 텐데? 저런 벽이 의미가 있나?

의문이 생겼지만, 지금은 알 수 없다. 그저 조용히 지나갈 뿐.

한참을 해안가를 따라 날아갔다.

상당히 많이 온 거 같은 데 감이 안 잡힌다.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

GPS가 안된다는 건 정말 서글픈 일이야.

현 위치를 알 방법이 뭘까? 여기도 부동산은 있으려나?

아니, 부동산 말고 간판을 보면 되겠지? 그렇게 슬쩍 도시처럼 생긴 곳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간판을 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 맞다. 씨발. 통역은 배웠는데 번역은 안 배웠다.

한자. 씨발. 빌어먹을 한자. 문제는 그 한자도 내가 아는 한자가 아니다.

정말 아무리 봐도 뭐라고 쓰여있는지 모르겠다. 중간 글자는 아는데. 이거 입구 자잖아.

일단 내 지도를 켜고 같은 모양의 글자가 적힌 도시를 찾아봤다.

해안가. 내가 이동한 대략적인 거리. 똑같은 한자. 어디냐…. 어디야….

아. 찾았다. 시벌. 이걸 룽커우라고 읽는구나. 지랄 났네. 어휴.

됐어. 이름을 알았으면 됐다.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돌아간다. 내일 계속 가야지.

공중으로 쭉 올라가 작게 외쳤다.

"저장."

이제 고민의 시간. 음. 일단은 신촌을 지우자. 신촌은 얼마든지 날아갈 수 있잖아.

저장을 마치고 바로 집으로 순간 이동했다.

정말 쓸 때마다 짜릿해. 행복해! 아름다워!

순간 이동은 만세다. 빌어먹게 좋은 스킬이야.

집에 도착하자 침대에 누워있던 승희가 나를 반긴다.

"왔어요? 일찍 왔네요. 조금만 늦었어도 잠들 뻔했잖아."

그러면서 일어나 내 파카를 벗겨서 옷걸이에 걸어준다.

"옷 벗고 씻어요. 옷 빨 거죠?"

"어? 어. 빨아야지."

"속옷이랑 다 줘요. 내놓게."

"응."

묘하게 친절한 승희. 나는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나 생각해봤다.

음.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없어.

그렇게 생각하니 약간 주눅 들어있던 마음이 당당해진다.

"빨리 씻고 와요."

"어. 알았어."

뜨거운 물을 틀어 충분히 온도가 올라가자 샤워기의 쏟아지는 물에 머리부터 들이밀었다.

크…. 얼어붙었던 것 같은 몸이 풀리면서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아무리 껴입어도 이런 날씨에 바다 위 하늘을 날아다니는 건 고역이야.

정말 할 짓이 못 되는지에 미나가 질병 해제가 있으니 하는 거다.

독감이고 감기고 약간 이상한 기색이 있으면 바로 다 해제시켜버리면 되니까.

다 씻고 나오니 승희가 침대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어…. 각인가? 슬쩍 승희에게 다가가자 나를 보며 살짝 웃는다.

"옷 입어요."

아니네. 쳇. 좋다 말았네.

"뭐야. 무슨 일 있어?"

평소와 살짝 다른 느낌의 승희. 나는 걱정이 돼서 물어봤다.

"아뇨. 그냥 안기고 싶어서."

섹스를 말하는 건 아닐 거다. 그냥 안겨서 자고 싶다는 뜻.

승희는 예전부터 그랬다.

내가 가슴을 만지는 것을 좋아하듯 승희는 그저 꼭 안기는 것을 좋아했어.

뭔가 우울한 일이라도 있는 걸까? 내가 둔해 빠져서 그런 걸 알아볼 재주가 없으니 문제네.

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 승희를 안아준다.

아이처럼 품에 꼭 안기는 승희. 이상하게 애처로운 느낌이 난다.

"무슨 일 있는 거야? 내가 둔해서 그런 걸 잘 못 알아채. 답답한 일 있으면 꼭 말해줘."

"아니에요. 그냥 한동안 이러지 못했잖아요. 그냥 어리광부리고 싶은 거예요."

아니긴. 내가 그 정도로 바보 멍청이는 아냐.

“니가 괜찮다고 하면 나는 정말 괜찮은 거라고 생각해버린다고. 내가 봤을 땐 너 뭔가가 있어. 그러니 편하게 이야기해봐."

"사실…."

아. 두번 물어보기 잘했다. 눈치 없이 한 번만 물어보고 넘어갔으면 큰일 날 뻔했어.

"비행. 마스터 했거든요?"

"오. 그래? 고생했어. 축하해."

"고마워요. 근데…. 미나 언니도 마스터 했어요."

"미나도? 다들 고생 많았네. 근데 왜…. 아. 알겠다."

그래. 알 것 같다. 여자에 둔감한 나도 이젠 이런 건 안다 이 말이야.

"안나가 부러웠구나?"

비행 마스터를 하고 나랑 둘이 나갈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니, 나랑 둘이 나가려고 기를 쓰고 포션을 마셨을 수도 있고.

근데 하필 미나도 같이 마스터 해버렸으니 둘이 나가는 게 물 건너가 버린 거다.

아마 그것 때문일 거야. 그리고 내 짐작은 맞았다.

"하아."

"걱정하지 마. 함께 나가고 그러는 건 나중일 이야. 너도 미나도 공격 스킬 숙련 조금 더 하고 나갈 거야."

"아…. 그래요?"

"그래. 그리고 다들 따로 나갈 거니까 너무 실망하진 마. 따로 나가서 좋은 데 가자."

"흐음…."

작게 한숨을 쉬더니 몸을 나에게 바짝 붙여온다.

이 한숨은 안도의 한숨 같네. 다행이야. 기분은 풀린 거 같아.

승희는 이내 내 품에서 잠들었다.

다 큰 아가씨 같아 보여도 역시 아직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어.

아니…. 이건 당연한 거겠지. 독차지하고 있던 걸 빼앗긴 기분은 승희만 가지고 있다.

모든 여자에게 다 공평하게 대한다고 했지만…. 이런 것은 어느 정도는 고려해 줘야지.

그렇게 승희를 품에 안고 나도 눈을 감았다.

왠지…. 오늘은 수면을 쓰지 않고도 잘 수 있을 것 같아. 아마도.

눈을 떴을 때는 침대에 나 혼자뿐이었다.

그래도 아쉽거나 하진 않았다. 아직도 승희의 온기가 품에 남은 느낌이었으니까.

어차피 문밖에만 나가도 있을 텐데 무슨 청승이람. 어휴.

어제는 역시 수면을 쓰지 않고도 잠을 잘 수 있었다.

자연스러운 수면. 나에겐 그 어느 것보다 귀한 경험.

참 신기해. 역시 불면증은 마음의 병인가?

시계를 보니 10시. 배는 안 고프다. 바로 하루를 시작해도 되겠어.

"잘 잤어요?"

문을 열고 나가니 미나가 나를 반긴다.

반짝반짝 빛나는 듯한 미모. 빛나면서도 차분한 느낌이다.

어떻게 이런 여자가 그렇게 에너지가 넘치는 걸그룹을 했을까?

"스킬 마스터 했다며?"

"어머. 승희가 말했어요?"

소파에 앉아있던 승희가 손으로 브이 자를 그린다.

그리고 나를 보는 눈빛이 깊다. 그리고 옅은 미소.

괜찮은 거 같네. 마음이 놓인다.

"늦잠꾸러기!"

세아가 거실로 나왔고, 바로 안나도 나왔다.

둘이 방에서 뭐한 거야? 왜 같은 방에서 나와?

"세아는 마스터 멀었나?"

"나? 비행? 아. 어제 마스터 할라고 달렸는데, 실패했어. 도저히 못 먹겠더라고. 마지막 5프로 남았는데."

"그래? 진짜 얼마 남지 않았네? 그럼 지금 먹지?"

"안 그래도 그러려고. 나도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뭐야. 그래놓고 나보고 늦잠꾸러기 어쩌구 그런 거야? 웃기네?"

"흥. 나보다 늦게 일어났으면 늦잠꾸러기 맞지."

머리를 헝클이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비행으로 쓱 뒤로 빠진다.

"오? 제법 민첩하신데?"

하지만 나는 블링크로 세아의 뒤로 가 바로 머리를 헝클였다.

"으아!! 블링크는 반칙이라고!"

"꼬우면 너도 쓰던가."

"아오! 나도 쓰고 만다. 딱 기다려! 지금 마스터 한다."

그러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세아. 나는 그런 세아를 불렀다.

"잠깐 기다려봐. 아. 다들 옷 입고 나와봐."

"네?"

"응?"

"어?"

"왜요?"

이들에게 백령도를 소개해 줘야지. 앞으로 우리의 훈련장이 될 곳이니 생각난 김에 가보는 게 좋을 거다.

네 여자가 전부 옷을 입고 나왔고, 준비를 마친 나는 백령도로 가는 포탈을 열었다.

다들 신기해하면서 포탈을 탔고, 내가 마지막으로 넘어가자 네 여자는 비행을 쓰고 하늘로 올라가서 주변을 살핀다.

"오오!"

넷의 공통된 반응.

그래. 바다는 사람을 설레게 하는 힘이 있다. 파도 소리와 바다 냄새.

이유 없이 끌리는 태초의 본능이 아닐까? 어디에서 봤는데. 바다는 모든 것의 어머니라고.

다들 좋아하는 거 보니 해안가로 저장해 놓은 보람이 있다.

일단 왔으니 게이트는 닫아버리고.

"자 댁들이 할 일이 있어."

내가 말하자 다들 나를 바라본다.

일단 이곳은 아무도 없는 곳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지.

"여기는 이제 우리의 훈련장이 될 거야. 승희의 폭발, 미나의 번개, 안나의 바람 칼날. 그리고 그 이후에 나오는 스킬들도 요란한 스킬들이면 여기서 숙련할 거야. 그러니 머물 곳을 찾아. 깔끔하고 사람 살만한 곳으로. 기왕이면 해안가가 좋겠어."

"오빠는?"

승희가 나를 보고 물어본다. 어제의 우울함은 이미 다 날아가버린 듯 하다.

"나는 할 일이 있어. 그러니 너희끼리 찾아봐. 이곳은 내가 봤었을 때는 아무도 없는 곳이었어. 근데 지금은 또 혹시 모르잖아? 그러니 넷이서 꼭 같이 다녀. 안나는 탐지에 신경 쓰고. 난 30분에 한 번씩 이쪽으로 올 거야. 그러니까, 여기.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지. 그러니 머물 곳을 찾든 못 찾든 30분 뒤에는 여기로 와. 서로 확인하고 다시 움직이는 거로 하자."

조금 번거롭지만, 어쩔 수 없다.

아. 이거 파티를 빨리 배우긴 해야겠네. 그래야 이런 번거로움이 사라지지.

"알았어요. 그럼 지금부터 30분 뒤?"

"지금이 10시 22분이니까 처음은 11시로 하자. 11시에 여기서 보는 거로."

"알겠어요."

승희가 대표로 대답했고, 넷은 바로 섬을 둘러보러 떠났다.

안나의 탐지가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다. 그리고 다들 투명과 비행은 기본으로 있는 여자들이니 무슨 일이 있지는 않겠지.

하지만 물가로 내놓은 아이들 같다.

어휴. 큰일이네. 매번 이런 감정이 들면 안 되는데.

어제 마지막으로 갔었던 저장 위치로 순간 이동했다.

뭐였지? 룽커우? 씨발. 이름하고는. 아무튼, 낮에 보는 분위기는 또 다르다.

탐지를 돌리니 잡히는 무수한 기척들. 어휴 바글바글.

정말 바퀴벌레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냐.

그대로 해안가를 따라 계속 날아간다.

그렇게 11시가 다될 때까지 날아가자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만이 보인다.

와. 크네. 이걸 해안가를 따라갈 필요가 없겠지? 지도를 보니 건너가도 될 것 같다.

일단 여기서 다시 저장. 그리고 백령도로 순간 이동했다.

11시가 아직 안 됐는데 이미 네 여자가 와있었다.

"왔다!"

"뭐 소득 있었어?"

"두 군데 정도는 찾았어요."

바닷바람을 쐬어서 그런지 넷 다 얼굴이 조금 상기돼있다.

표정도 밝고. 크게 문제는 없었나 봐.

"그럼 거기 중에 고를 거야? 아니면 더 찾아볼 거야?"

"더 찾아볼게요."

승희가 말하고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안나도 이젠 저 정도 말은 알아듣네.

"알겠어. 그럼 30분 뒤에 다시 여기서 보자."

네 여자는 다시 떠났다. 나도 아까 그 위치로 순간 이동해서 돌아왔다.

아. 정말 순간 이동 진짜 좋네. 진작 이거부터 배웠으면 뭔가 더 발전이 있었을까?

음. 모르겠다. 그거야 아무도 모르겠지.

바다 위를 날아가며 멀리 보이는 중국 땅을 바라보니 참…. 징글징글하다.

뭐가 저렇게 넓냐. 그리고 뭐가 저렇게 많냐.

직접 와서 보니 이제야 그 크기와 인구 숫자가 실감 난다.

씨발…. 이 많은 걸 어떻게 다 죽이지?

답답하네. 이건 매혹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광역 공격이 필요하긴 하다.

억 단위의 짱개를 마체테 한 자루로 하나하나 쳐 죽이는 건 불가능해.

그렇다고 해서 내가 광역기를 배우자니 효율이 너무 떨어진다.

물론…. 언젠간은 배우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아직 배워야 할 스킬이 너무 많아.

광역기는 미나의 몫이다. 번개. 그 마지막 트리. 우레 폭풍.

메테오는 건물을 망가뜨릴 거다. 그럼 코인 줍기가 피곤해지겠지.

눈보라는 어떤 성능일지는 모르지만, 계절의 영향을 탈 거다.

한여름에도 그 효과가 다 미칠지는 의문이야.

그래서 우레 폭풍이 가장 낫다고 생각했다. 과연 어떨지, 제대로 된 선택일까? 모르겠네.

일단은 생각한 대로 한다.

뭐 누가 찍어본 사람이 있어야 후기를 알든지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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