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364화 (364/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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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 연수

안나는 생각보다 훌륭한 사냥꾼이었다.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이 사람을 죽이는 모습.

망설임이나 주저함은 거의 없었다. 있다면 경험 부족에서 오는 버벅임 정도?

근데 뭐, 그거야 시간이 해결해줄 테니 크게 문제는 없고.

무엇보다 내가 놀랐던 것은 거리 감각과 명중률.

수천 번이나 수면을 걸어왔던 나는 알 수 있었다. 30미터의 간격.

몸이 외우고 있는 그 거리. 안나는 그 간격을 알고 있었다.

정확하게 30미터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결코 30미터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없었다.

상대가 탐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안나에게 스킬을 쓸 수 없는 상황.

그리고 안나는 그 사거리 밖에서 정확하게 바람 칼날을 맞췄다.

멈춰있든 움직이든 상관 없다. 거의 백발백중이라고 보일 정도.

지금은 바람 칼날이 중급이라서 한 번에 안 죽는 경우가 많은데, 고급만 되도 쓰는 족족 죽일 수 있을 것 같다.

네 번째 무리를 전부 잡고도 별로 지친 기색이 없는 안나.

하긴 지칠 것도 없다. 움직임은 비행이, 공격은 바람 칼날이 다 하고 있으니까.

몇 개의 포션을 마신 것 말고는 크게 달라진 게 없는 모습.

"안나?"

"왜요?"

"궁금한 게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잘 맞추지?"

"바람 칼날요?"

"응. 누가 보면 타겟 지정 스킬인 줄 알겠어. 실수하는 것을 거의 못 본 거 같은데."

"아항. 그거요."

안나. 겨울의 엘프를 닮은 여자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실로 매력적인 웃음. 나도 모르게 넋을 잃고 볼 수밖에 없는 미소.

아. 그래. 엘프라서 그런가? 엘프라서 명중률이 좋은 건가?

"이런 거죠."

땅바닥에서 돌멩이 세 개 정도를 줍더니 하나를 가볍게 던진다.

조금 멀리 떨어져있는 간판, 거기에 그려진 동그라미.

돌멩이가 맞고 떨어졌다. 그리고 두번째 돌멩이가 날아갔고 또 동그라미에 맞았다.

세 번째. 역시 동그라미에 맞았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말도 안 되는 솜씨다.

저게 가능하긴 한 거야? 말이 돼?

"어떻게…. 한 거야? 아니…. 바보 같은 질문이네. 연습한 거야?"

"네. 열다섯부터. 지금까지."

열다섯. 그 나이가 나오니 알 것 같다. 듣지 않아도 어느 정도 예상되는 그림이 그려진다.

"뭐, 그 전에도 이런 거 던지는 건 곧잘 잘했어요. 여자애지만 캐치볼 던지는 것도 좋아했고, 아빠의 영향도 있었죠. 아빠는 카드 날리는 걸 좋아했어요. 어렸을 때는 그게 얼마나 멋져 보이던지."

다시 한번 바닥에서 돌멩이를 주워서 이번엔 아리랑으로 던졌다.

높은 궤적의 포물선을 그리다가 떨어지는 돌멩이. 역시나 간판에 있는 동그라미에 맞는다.

"열다섯. 어린 여자애한테 주어지는 건 없었죠. 어두운 방 안에서 깨진 벽돌쪼가리로 할 수 있는 건 몇 개 없었어요. 나중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 같은 건 안 했어요. 그냥 할 게 없었을 뿐이에요. 잠을 질리게 자고 일어나도 좁은 방에서 나갈 수 없었을 때 할 수 있는 건 돌조각을 던지는 일뿐이었죠. 뭐…. 그런 거예요. 별로 즐거운 이야기는 아니죠?"

통역 스킬. 정말 고맙다고 느꼈다.

이런 이야기. 우울해질 만큼 암울한 이야기지만 그래도 안나의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적어도 지금 그녀의 손을 잡아줄 수 있으니까.

"사실 암석 탄환을 하려고 했거든요? 근데 돌조각은 질렸어요. 인제 그만 좀 던지려고요. 게다가 나는 자유로워졌잖아요. 더는 나를 가두고 있던 벽에 얽매일 필요 없어요. 그래서 바람으로 결정했어요. 자유로운 바람. 어디든 갈 수 있는 바람."

그러더니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와 선다.

안나가 가까이 다가오자 청량한 기분이 드는 것 같다.

존재만으로도 정신이 확 드는 느낌. 내 눈앞에 서 있는 아름다운 여자는 나를 너무나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나를 바람이 될 수 있게 해준 사람."

안나가 나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은 차가웠지만, 따듯했다.

이런 겨울의 냉기가 아니다. 시원한 차가움. 정신을 맑게 만들어주는 느낌.

그런 그녀를 나도 살포시 안아줬다.

짧은 포옹만으로도 많은 것이 느껴진다. 그녀에게서 흘러넘치는 행복이 나의 마음마저 적시는 기분.

"후후. 계속할까요?"

천천히 몸을 떨어뜨린 안나가 다시 싱긋 웃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훌쩍 날아가는 모습.

세상에. 그러니까 저 여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여자라는 거지?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야. 나 원 참.

안나는 상당히 적극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조급하거나 서두르지는 않았다.

특히 상대가 건물 안에 있을 때는 조용히 기다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도 익히 해봐서 알지만 저건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니다.

이 추운 날 탐지 하나만 바라보면서 상대의 기척을 지켜보는 것. 별로 재밌는 일은 아니지.

하긴, 나는 탐지 없을 때도 저 짓거리를 했지만.

하. 다시 하라면 할 수 있을까? 도저히 못 할 것 같은데.

그러다 한 남자가 담배를 피우러 나왔고, 안나는 그런 남자에게 바람 칼날을 날렸다.

순식간에 비명도 못 지르고 바람 칼날 두 방에 죽어버린 남자.

안나는 바로 그 자리에 서더니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안쪽에서 하나둘씩 사라지는 기척.

나는 너무 순식간이라 커버고 뭐고 탐지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유유히 건물 밖으로 나오는 기척 하나. 투명화가 풀리더니 안나의 모습이 드러난다.

바로 블링크 해서 안나의 앞으로 다가가자 그녀는 나를 보고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한다.

"이번엔 넷 합쳐서 10만이네요."

"방금은 너무 대범했던 거 아냐?"

"그랬나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서 들어간 건데."

"담배 피우러 나온 남자가 들어간 것처럼 한 거지?"

"네. 맞아요."

"혹시라도 누가 탐지로 보고 있을까 봐?"

"네."

"그래도 갑자기 그렇게 들어가면 위험해."

"괜찮아요. 남자들은 생각보다 허술해요. 아니, 허술하다기보단 뭐라고 해야 할까요? 일상적인 것에는 크게 의심을 안 한다고 해야 하나?"

"그건 무슨 소리야?"

"담배를 피우러 한 명이 나갔으면. 그 사람이 들어올 걸 알고 있으므로 경계 대상에서 제외해요. 그리고 바깥의 상황은 담배 피우러 나온 남자에게 책임이 넘어가죠. 제가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안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러니까, 순간적으로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뜻이지?"

"어음…. 조금 설명하기 힘든데. 이런 거죠. 한 남자가 밖으로 나가는 순간 이미 주변 경계는 예외가 생기는 거잖아요? 그럼 남자들은 보통 그 예외적인 상황에 대한 책임을 그 남자에게 몰아버리죠.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기면 밖에 나온 남자가 책임을 져야 하는 거예요. 본인이 해결하든, 아니면 비명을 지르든, 도움을 요청하든."

"으음…."

"모르겠어요. 저는 남자가 아니니까. 근데 대부분 그렇더라고요. 저도 정확하게 설명하기가 힘드네요. 그렇기에 안에 있던 남자들은 밖에 나갔던 남자가 별일 없이 들어오면 그것만 확인하면 되는 거죠."

"근데 그렇게 당당하게 들어가면 어떻게 해."

"재밌는 건, 대부분의 남자는 예외적인 상황에 대해 먼저 생각하지 않아요. 물론 당신 같은 사람도 있겠지만, 당신은 정말 특별한 경우고. 대부분은 제가 말한 대로죠. 안에 있던 남자들도 밖에서 담배 피웠던 남자가 당연히 아무 일도 없이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지 그 남자를 죽이고 투명화를 쓴 누군가가 들어올 거라는 생각을 안 하는 거죠. 그렇게 문이 열렸을 때 '뭐야? 문만 열고 왜 안 들어와? 찬바람 들어오게.'라고 생각했을 것요?"

그래. 이건 나도 이해한다. 예전에 백마촌에서 세아에게도 설명해줬었지.

사람들은 그러한 만일의 경우까지 모두 대비하면서 살아가지 않는다.

그 상황에서 가장 확률이 높은 걸 생각하고. 그다음으로 혹시? 하는 것을 생각한다.

그 누구도 투명화한 누군가가 자기를 따라다니거나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지 않지.

"그런 건 대체 어떻게 안 거야?"

"글쎄요. 이것도 말하면 우울해지는데."

음. 아마 자기를 감시하던 남자들을 보고 깨달은 거겠지.

정말…. 이 아가씨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

아무리 나라가 다르고 살아온 문화가 달랐다고는 하지만, 정말 많은 것들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하긴. 러시아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살기 좋은 나라지. 아무래도 그렇지.

"더 갈까요?"

"괜찮겠어?"

"네. 아직은 여유가 있네요. 생각보다 포션을 많이 먹지도 않았고."

"자신이 얼마나 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아는 것도 중요해. 만용은 용기가 아냐."

"방금 마지막 말은 조금 이상하게 들린 거 같은데요. 뭐라고 한 거예요?"

"만용은 용기가 아니라고. 어…. 함부로 나대는 것을 보고 용감하다고 하진 않는다고."

"아아. 그런 뜻이구나. 이해했어요. 아마 당신이 가지고 있는 통역 스킬이 제대로 통역을 못 해줬나 봐요."

아. 그런가? 하여간 이 새끼들 뭐 하나 제대로 만드는 게 없네.

아니지…. 욕하면 안돼. 이 정도로 안나와 자유롭게 대화하는 것도 감지덕지하지.

불평불만 가지지 말자. 아쉬운 건 내 쪽이니까.

"아무튼, 더 할 수 있다는 거지?"

"네."

"그래. 그럼 고고."

안나는 다시 앞장섰다.

신촌.

아무래도 젊은 애들이 많았기에 생존율이 그리 높았던 걸까?

지난번에도 확인했지만, 의외로 생존자가 많다. 그리고 생각보다 평화롭다.

서로 지나가다 소리를 지르며 안부인사를 물어보는 모습도 보일 정도. 근데 얘들은 대체 뭘 먹고 살지?

코인으로 상점에서 사 먹나? 이런 도심 한복판에서는 식량 생산이 힘들 텐데.

어쨌든 제법 많은 인간이 있었기에 안나의 데뷔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면서 약간 허무함도 들었다.

바람 칼날. 너무 사기잖아.

안나의 미친듯한 명중률을 빼고 봐도 좋다.

상대가 반사를 들고 있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인원수에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

고급 수면, 그러니까 내가 세 명만 제압할 수 있던 시절.

숫자가 많으면 어떻게든 숫자가 갈라질 때까지 목숨 걸고 쫓아다니다가 야금야금 털어먹었던 기억.

하지만 안나는 그런 게 없다. 사람이 많으면 바람 칼날을 많이 날리면 된다.

그야말로 학살. 혹은 양학. 무쌍?

물론, 말도 안 되는 에임과 투명화, 비행의 도움이 큰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제외하더라도 바람 칼날의 효과는 수면과 비할 수가 없다.

역시 공격 스킬과 CC기의 차이인가. 두 개가 같을 리는 없지. 그건 당연하다.

근데 생각해보면 역시 나에겐 수면이 맞다.

바람 칼날은 상대를 죽일 수밖에 없다. 제압이 안 되는 스킬.

제압해서 정보를 얻거나 끌고 가서 감금하거나 강간할 수는 없는 스킬이다.

역시 장단이 있는 거지. 아무렴.

어느덧 해가 지고 안나도 슬슬 지쳐가는 게 보인다.

탐지는 회복 물약을 미친 듯이 많이 먹어야 하는 스킬이다.

바람 칼날보다 탐지 유지에 포션을 더 많이 썼을 거야. 원래 그렇지.

이번엔 여섯 명의 남녀를 깔끔하게 끝내고 나를 부른다.

그녀의 앞에 서서 모습을 드러내니 나를 보고 묘한 표정을 짓는 안나.

"오늘은 이만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 충분히 많이 했어. 솔직히 첫날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야."

"이만큼 준비하고 나왔으면 이 정도는 해야죠."

하긴, 탐지, 투명, 비행, 공격 스킬.

어디 가도 쉽게 죽을 스킬 구성이 아니다.

비록 양산형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경험이야 지금부터 얼마든지 쌓으면 된다.

게다가 살아남으면 장땡인 곳이니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지.

"고생했어. 오늘 코인은 어느 정도 들어왔어?"

"다 합쳐서…. 38만 정도네요."

"대체로 그리 많이 들고 있진 않네. 그래도 양으로 커버했으니 된 건가."

다행인 건 제법 많은 숫자의 사람을 죽였지만 별로 타격이 없어 보이는 안나의 모습이다.

하기야, 정신력으로 따지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여자다. 겪어온 고통의 급이 다르니까.

"그럼 이제 돌아갈까?"

내 말을 듣자 안나는 나를 보더니 손을 이마에 짚고 말한다.

"으음…. 힘들어요. 우리…. 조금만 쉬었다 갈까요?"

그러더니 옆쪽을 슬쩍 바라본다.

안나가 바라본 곳은 으리으리한 건물이었다.

그리고 입구엔 뭔가 이름 같은 게 쓰여 있었고, 나는 그 밑에서 HOTEL이라는 글씨를 찾을 수 있었다.

"대체 그런 건 어디서 본 거야?"

누가 봐도 어설픈 연기. 내가 말하자 안나는 꺄르르 웃으며 말한다.

"미나가 가지고 있던 영화요. 나, 이거 꼭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영화? 알아듣지도 못하잖아? 근데 영화를 봤어?"

"한글 공부하면서 봤어요."

"아아…."

그래. 그건 이해했다고 쳐도…. 호텔? 말이 호텔이지 시설 좋은 모텔이다. 뭐였지? 그 부티크 호텔?

안나를 보니 상당히 기대하고 있는 모습이다. 어휴. 저걸 내가 어떻게 거절하니.

"가자."

환하게 웃는 얼굴. 그녀는 내 팔에 팔짱을 끼었고, 우리는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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