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363화 (363/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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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 연수

"나가기 전에."

내 말에 모두 나를 바라본다.

"나와 안나가 모두 벙커에 없으니 여기엔 탐지가 없어."

내가 이 여자들을 두고 그나마 나갈 수 있는 건 안나가 탐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파훼가 상당히 많아졌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탐지는 필수 스킬이다.

탐지 없이 밖을 나돌아다니는 건 상당히 위험하다.

탐지가 있어도 기습이나 습격을 당할 수 있는데…. 그마저 없다면 정말 눈뜬장님이 될 수 있는 상황.

"그러니 평상시보다 긴장해야 해. 서로 커버도 해줘야 하고. 작은 변화나 수상한 기색이 있으면 바로바로 확인해. 사소하다고 그냥 넘어가지 마. 항상 뭉쳐서 움직이고. 벙커라서 외부의 침입은 쉽지 않아. 전에도 이야기 한 적 있지? 주의해야 할 것은 잠금 해제랑 페이즈 아웃이고 그 외에는 크게 문제는 없지만, 혹시나 다른…."

"으. 오빠. 탐지가 비면서 걱정되는 건 알겠는데요. 너무 걱정이 심한 거 같아요. 그러니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요."

"아냐. 그런 생각 하면 안 돼. 그런 빈틈과 방심이 딱 노리기 쉬운 타이밍이라고. 만약 내가 여기서 지켜보고 있었다면 지금 같은 상황은…."

"으. 알아요. 알아. 걱정 말아요. 정말로. 자나 깨나 조심. 항상 경계하고. 방심하지 말고.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벙커에 연연하지 말고 물러나라는 거죠? 달천동 벙커로?"

"맞아."

"알겠으니까. 다녀와요."

승희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한다.

그걸 보고 미소짓는 미나, 약간 한심하게 바라보는 세아.

아. 정말. 이 가스나들은 위기 감각이 없어. 어휴.

그렇게 나의 잔소리를 어떻게든 피하려는 세 여자는 결국 나와 안나를 내보냈다.

걱정되지만 어쩔 수 없지. 앞으로는 이런 일이 자주 있을 테니까.

"그렇게 걱정돼요?"

"당연하지. 내가 해온 짓이 있는데 나라고 안 당하겠어?"

"그래도 여기는 찾기 힘들지 않아요? 외부인이 여길 찾는 건 정말 쉽지 않을 텐데요."

"그래. 이 한적한 곳에 산 근처 지하에 벙커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겠지. 우연히 탐지에 들기도 힘든 곳이고. 이렇게 들개들이 있어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면 짖을 테니 금방 알 수도 있고. 근데 제로는 아니잖아. 걱정을 안 할 수는 없어."

"진짜 희한한 사람이에요. 당신은."

그러면서 안나는 내 손을 잡는다.

안나가 나를 당신이라고 부를 때면 이상하게 설렌다.

썽철이 아닌 당신. 아마 호칭이 달라서 그럴 거다. 승희나 미나, 세아는 오빠라고 부르니까.

당신이라는 호칭은 참 미묘하다.

처음 보는 사이도 당신이라고 부르지만, 부부 사이에도 여보 당신이라고 부른다.

같은 단어지만 뜻이 상당히 극과 극인 단어. 그리고 안나가 나를 부르는 것은 후자일 것이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 아닌 극도로 친밀한 느낌.

게다가 맞잡은 손.

깍지까지 낀 손이 차갑다. 하지만 내 손에 의해 금세 손에 온기가 돈다.

차가운 곳에서 온 이 아가씨의 애정. 느낄수록 신기하다.

그저 사람을 신나게 죽이다 발견했을 뿐인데.

그저 그 미모에 넋을 잃어 평소와 다르게 행동했을 뿐인데.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인연이라고 할 수도 있고.

뭐가 됐든 신기한 일이다. 만리타향에서 온 미모의 외국인과 이런 관계가 된 것은.

"어찌 됐던…. 가자."

손을 잡고 떠오르자 안나도 나를 따라서 온다.

섬세하게 속도를 맞추고 앞으로 나아간다. 비행이 마스터 됐기에 우리 둘의 속력은 같다.

서로 멀어지지만 않는다면 이대로 계속해서 갈 수 있다는 뜻.

"어디로 갈 거예요?"

나에게 물어보지만 긴 머리가 바람에 날려 정신없어하는 안나.

"잠깐만."

멈춰 서서 수납을 열어 하이바를 하나씩 꺼내 보여줬다.

지난번에 잔뜩 가져왔기에 하이바는 충분하다.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고를 수 있어.

"이게 다예요? 그럼…. 전 하얀색."

가지고 있는 하이바를 모두 보고 안나가 말한다.

하얀색. 하얀색 하이바라….

수납에서 하얀 하이바가 데구루루 나왔고 그걸 잡은 뒤 안나에게 물어본다.

"이거 맞아?"

"네. 맞아요."

하얀색 하이바. 거기에 희미하게 하늘색으로 날개 모양이 그려있다. 흐음.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하이바를 써도 안나의 미모는 가려지지 않는다.

크크.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자랑하고 싶어. 안나의 미모를! 이 아름다운 자태를!

다만, 자랑하고 난 다음엔 죽여야 하는 게 문제다. 아. 어차피 투명화를 쓰면 못 보겠구나?

그렇게 다시 하이바를 쓰고 하늘을 날아가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요!?"

"신촌! 한 30분 안 걸릴 거야!"

"신촌!?"

아. 신촌이라고 말해봐야 어딘지 모르겠구나.

"서울의 북서쪽!"

문제는 이렇게 말해도 모를 확률이 높다.

안나도 그걸 느꼈는지 그냥 내 손을 더욱 꽉 잡는다.

그런 안나의 손을 잡은 채 내 파카 주머니에 넣었고 하이바 안쪽에서 안나가 해맑게 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조금 더 밝아졌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렇게 도착한 신촌.

지난번에 한번 싹 훑었기에 어느 정도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안다.

처음으로 사람의 기척이 탐지 끝에 잡혔고, 나는 거기서 바로 멈추고 땅으로 쭉 내려왔다.

나를 따라오는 안나. 내가 하이바를 벗자 안나도 하이바를 벗는다. 하이바 두 개를 수납에 넣으며 나는 안나에게 말했다.

"자. 이제부터 실전이야. 너는 탐지가 있으니 사냥이 굉장히 쉬울 거야. 게다가 투명과 비행도 있지. 그리고 바람 칼날은 논타겟팅 스킬이라 상대방이 반사가 있는지 살필 필요도 없어. 그 정도는 알지?"

"네."

"그러니 이제부터 니가 주도적으로 사냥을 해봐. 어디로 가든 상관은 없어. 어떻게 사냥을 해도 상관없고. 다만 니가 조금이라도 위험한 것처럼 보이면 나는 바로 개입해서 상황을 끝낼 거야. 그러니 내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해봐. 피드백은 사냥이 한번 끝날 때마다 하자."

"알겠어요."

"니 뒤에 내가 있다고 방심하지는 말고."

"물론이죠."

그렇게 빙긋 웃은 안나는 투명화를 썼다.

그리고 나 역시 이제야 투명화를 썼다. 투명화를 배우고 밖에 나와서 이렇게 투명화를 오래 안 쓴 적은 처음인 거 같네.

어쨌든 안나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의 관찰일기도 시작됐다.

조금 새로운 느낌이다. 한 번도 안 해본 일인데.

물론 이렇게 다른 누군가의 전투를 지켜보는 것은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마지막 남은 사람을 잡아 죽이는 게 목적이었지.

이렇게 누군가를 케어해주는 건 처음이다. 확실히 조금 흥미진진한 느낌도 나네.

탐지거리가 압도적으로 넓고 오래 쓸 수 있기에 상황을 쉽게 볼 수가 있어서 좋다.

내 탐지거리 끝에 걸려있던 사람의 기척은 넷으로 늘었다.

그리고 안나도 그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아직은 그녀의 기척에 걸리진 않아서 그런지 움직임이 가볍다.

앞으로, 앞으로.

그렇게 나아가던 안나의 움직임이 조심스러워졌다. 거리상 탐지범위에 들어온 거 같다.

잠시 멈칫하던 안나는 과감하게 하늘 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느긋하게 따라붙고 상황을 살펴본다. 저 멀리에서 길 쪽으로 나오는 네 사람.

녀석들은 경계나 걱정 같은 건 없어 보인다.

그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면서 길을 걷는 모습.

생존자치고는 상당히 어이없어 보인다. 저런 놈들은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운이 억세게 좋은가? 아니면 지역 빨?

아마 이 근방에서는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무방비 할 리가 없어.

안나는 그런 그들의 머리 위쪽에서 거리를 좁혔다.

대담한 반응. 나와는 다르다. 나는 절대 미리 거리를 좁히지 않는데.

안나 생각에는 머리 위쪽, 그것도 뒤쪽은 시선이 잘 안 갈 거라고 생각하는지 제법 거리를 좁혔다.

네 녀석은 아직도 자기들끼리 왁자지껄하면서 제 갈 길을 간다.

과연 저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그렇게 녀석들을 따라가던 안나가 비스듬하게 아래로 내려갔다.

남자들의 뒤쪽에서 왼쪽으로 내려온 그녀가 손을 앞으로 뻗으며 스킬을 쓴다.

남자들을 덮치는 보이지 않는 칼날.

특이한 건 세 명은 피를 뿌리며 쓰러졌는데 한 놈이 보호막을 써서 막았다는 거다.

대단한데? 어떻게 막았지?

하지만 안나는 막힌 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오른쪽 위로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다시 바람 칼날.

전혀 엉뚱한 곳에서 두번째로 날아온 바람 칼날이 등판을 날카롭게 베었다.

그대로 쓰러지는 녀석. 바람 칼날의 위력이 약해서 그런가? 네 명 중 아직 죽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또다시 한 개가 아닌 듯한 바람 칼날이 날아갔고, 넷 모두 빛이 되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나는 천천히 내려가 코인을 먹었다.

그렇게 조금 가만히 있던 안나가 나를 향해 소리쳤다.

"됐어요!"

탐지에 걸린 인간이 아무도 없기에 투명화를 풀고 스르륵 안나에게 다가갔다.

안나 역시 투명화를 풀었고, 살짝 상기되어있는 얼굴이 드러났다.

"어때요?"

"잘했네. 보호막에 막혔을 때 놀라진 않았어?"

"놀라긴 했는데 크게 문제는 없었어요."

"그래. 침착하게 다음 액션으로 잘 넘어가더라. 잘했어. 처음치고는 깔끔했지.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네?"

"왜 그렇게 바로 붙은 거야?"

"아. 처음에요?"

"응. 저쪽에서 탐지가 있었으면 어쩌려고."

"그래서 30미터 까지는 안 붙었어요. 그리고 크게 걱정도 안 했고요."

"걱정을 안 하다니?"

"당신 머리 뒤에! 위!"

나는 뒤돌아보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안나를 바라봤을 뿐.

"거긴 아무것도 없어."

"와. 그래도 돌아보지도 않는 건 대단한데요?"

"이미 확인한 곳이니까. 거기 누가 있을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

"제로면 제로지 왜 제로에 가까운 거예요?"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제로에 가까우면 크게 걱정 안 하는 거예요?”

“예전엔 신경 썼는데, 지금은 약간 무뎌지긴 했지. 블링크도 있고.”

“근데 아까 우리 벙커에서는 왜 그렇게 걱정한 거예요? 거기도 발각당할 확률은 거의 제로 아니에요?”

안나의 말에 나는 약간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러게. 그렇네.

“내가 위험한 거랑 너희가 위험한 거랑은 달라. 그리고 확률도 차이가 나고…. 위험도도 다르지. 아무튼….”

그나마 그럴듯한 대답을 한 것 같지만, 안나는 그저 말을 듣고 빙긋 웃기만 한다.

그래. 나도 알아. 과보호하려 하고 있다는 것쯤은.

"어쨌든…. 뒤면 몰라도 뒤쪽 위까지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탐지를 써도 어차피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으면 모르니까."

"보통은 그렇긴 해. 낮은 확률은 아예 배제하는구나?"

"당신도 그렇잖아요. 방금처럼."

"그렇긴 하지만, 나는 거의 불가능한 경우에만 배제해. 방금 같은 경우엔 나는 그렇게 안 했을 거야."

"그런가요."

"음…. 뭐, 그래도 안나는 잘했어. 크게 문제 있거나 한 것은 아니니까. 어차피 상대의 공격 범위는 벗어났고. 그렇지?"

"네."

"나 보다 대범하네."

"그런가요?"

"응. 방식의 차이지. 결국, 나보다 사냥 속도는 빠를 거야. 다만 위험 확률이 조금 더 높은 정도? 내가 한 시간에 95퍼센트의 안전도로 100명을 사냥한다면, 안나 너는 90퍼센트의 안전도로 110명을 사냥하는…. 그런 차이지."

"그렇게 별 차이가 없다면 안전하게 사냥하는 게 나을 수 있겠네요."

"아무래도 그렇지. 목숨은 하나니까. 그리고…."

"네?"

"상대가 스킬이 일곱 개 이상 마스터면 스킬 범위가 늘어나. 그런 건 고려 안 했지?"

"아. 전에 말한 패시브요. 네. 그건 고려하지 않았어요."

"그렇군. 알겠어. 일단은 계속해봐. 내가 까다로울 뿐이지 사냥 자체에는 크게 문제가 없었으니까."

"네. 알겠어요."

"아. 코인은 얼마나 나왔어?"

"넷이 합쳐서 5만 정도요?"

"그래? 첫 수익이네."

내 말에 안나가 빙긋 웃는다.

사람을 죽여놓고 어떻게 더 잘 죽일지 피드백하는 남자와 여자.

첫 수익이라는 말과 웃음. 역시 이상해.

뭐, 지극히 망한 세상답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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