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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장
자신이 저지른 짓을 지켜보는 것.
그게 자랑스러운 일이거나 뿌듯한 일, 당당하고 아름다운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더럽고 추악한 일이었다면 마주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지켜본다.
내가 한 일에 대해 확실하게 책임감을 느끼고 있으니까.
비록 잘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하거나 외면하진 않는다.
내가 저지른 짓을 보면서 끊임없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 죄책감을 간직하고 사는 것. 그게 내 도리다.
물론…. 이 또한, 역겨운 자기합리화의 일종이지만.
최신영은 벙커 중앙의 인공 정원에 앉아 멍하니 식물들을 바라보고 있다.
생기를 잃은 눈, 의욕이 없는 표정.
눈앞에서 피붙이를 살해당하고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본 뒤 이런 지하에 감금된 여자.
저러는 것도 이해한다. 그래도 자살 같은 건 안 하네. 심지가 약하진 않은가 봐.
복수를 생각하고 있을까? 하지만 방법이 없다. 의지와 실력은 항상 정비례하지 않으니까.
그래. 최신영은 그렇다 치자.
가장 의아한 건 고성연이다.
최 상무의 부인. 30대 중반 정도 나이겠지만 관리를 잘해서 20대 중후반이라고 해도 충분히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여자.
그녀는 운동을 하고 있다.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저 여자의 일상은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아니, 달라졌다고 하면 본인이 식사를 챙겨 먹어야 한다는 것?
그것 말고는 없는 것 같다. 몇 번을 지켜봤지만, 그녀는 일상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운동하고 책을 읽고 탈출에 대한 방법을 모색하다가 잠이 든다.
최신영과의 대화는 없다. 둘은 한 공간에 있지만 서로 교류하지 않는다.
소 닭 보듯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며 각자의 생활을 한다. 정말로 기묘한 관계.
게다가 고성연은 자기 전에 항상 자신을 한껏 꾸민다.
정성스럽게 화장을 하고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거울을 본다.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렇게 최상의 상태로 단장을 한 다음 다시 그걸 지워낸다.
그렇게 다시 화장기 하나 없는 알몸이 될 때면 살짝 감탄도 나온다.
정말…. 신기한 여자다. 저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
복수? 탈출? 모르겠다.
삶의 의지를 놓아버리고 가짜 태양 빛 아래 마냥 앉아있기만 한 최신영보단 이 여자가 더 호기심이 생겼다.
신기해. 나는 정말로 여자라는 생물을 죽어도 이해 못 할 것 같아.
어쨌든 그렇게 관음이 끝나고 다시 지상으로 나왔다.
정말 악취미가 아닐 수 없어. 나는 과연 정상일까? 에이. 정상일 리가.
몸을 날려 대호의 사업장을 한번 돌아봤다.
틈틈이 보이던 사람의 기척이 많이 없어졌다. 아니, 거의 없어졌다고 봐야지.
살해당했거나 도망갔을 거다. 자신들을 지켜주던 대호라는 방패막이가 없어졌으니까.
수원은 이제 거의 끝났다. 스마트 팜 쪽엔 사람이 조금 있는 것 같았지만 살펴보니까 SG 쪽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옮겨지고 있다. 아마 천안으로 가는 거겠지?
하긴, SG 입장에서 봤을 땐 수원은 멀다. 가까운 천안으로 옮기는 게 낫겠지.
천안은 서민준 그 녀석의 새로운 둥지가 될 거다.
자신이 이뤄낸 새로운 배. 그럼 청주는? 과연 어떻게 될까?
순간 이동을 써서 청주로 갔다.
아직도 사람들은 제법 보이는 SG 센터.
이들은 아직 회귀에 대한 걸 모른다. 그렇기에 SG 센터와 그걸 이용하려는 사람은 아직도 많다.
물론, 내가 상당히 줄여놨으니 재방문자가 확 줄어들긴 할 거다.
근데 그게 티가 나는 건 조금 뒤가 되겠지. 당장 감소하진 않을 거고.
회귀가 알려지면 이들의 숫자가 줄어들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이들이 여섯 번째 스킬을 언제쯤 찍을 수 있을까?
그리고 찍는다고 하여도 SG에 대항해서 회귀로 뭔가를 하려고 할까?
SG에 잡혀가서 회귀 셔틀이 되거나 사살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곳은 생각보다 오래 유지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서민준이라도 그럴 거 같아. 제 손으로 바로 무너뜨리진 않겠지. 운영할 수 있을 때까지는 운영하지 싶다.
뭐, 그거야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알아서 하겠지.
그리고 이제 로얄 클럽에서 남은 건…. 계림, BFV, 레테.
각각 전북, 강원 그리고 부산.
근데 레테는 무역이라고 그랬잖아? 그럼 결국 거기랑 이어진 곳도 있다는 소린데.
역시 일본이겠지? 일본도 만만치 않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거기도 서울처럼 수도권이 밀집되어있는 곳이잖아. 사람들을 싹 죽이고 성장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
게다가 거기는 대륙의 동쪽 끝이다. 게다가 섬이고.
뭔가를 해보기엔 가장 좋은 땅. 자체적으로 정리가 끝나면 진출하기도 편해.
무엇보다 일본애들은 이런 시스템에 익숙할 거라고 생각한다.
게임, 만화, 소설…. 이미 상상력을 짜내서 뭔가를 창작하는 데는 이골이 난 놈들.
근데 크게 걱정은 안 한다. 걔들은 뭐랄까…. 상상력이랑 창의성은 좋은데 존나 쎄다는 느낌이 없어.
세상이 망하기 전에도 그랬잖아.
걔들은 들이 파고 즐기는 놈들이지 게임 같은 것에서도 경쟁을 잘하는 놈들은 아녔어.
뭐, 그렇다고 지금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어쨌든 그렇다.
몸뚱이는 하난데 할 일은 너무 많아.
아마 지금 이렇게 된 세상에는 유일한 절대 강자란 없을 것 같다.
혼자서 뭔가를 하기엔 너무나 넓어.
SG 센터 앞에서 오가는 녀석들이 먹음직스럽긴 하지만, 됐다. 일단은 할 것부터 하자.
일단 승희와 미나, 안나가 훈련할 수 있는 곳을 먼저 만들어야 해.
집으로 순간 이동을 썼다. 먼저 근처에 있는 좋은 곳을 알아보자.
하늘로 날아올라 조금 높게 올라갔다.
그리고 주변 산을 한번 둘러본다. 내가 찾는 곳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
번개도 그렇고 폭발도 그렇고 소리와 시야를 막아줄 수 있는 곳이 중요하다.
폭발음. 생각보다 컸잖아? 물론 숙련이 낮을 때는 그 정도 폭발음은 안나겠지?
그래도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안 그러면 주변에 우리가 여기 있다고 동네방네 광고하는 꼴이 될 거야.
일단 맘에 드는 곳을 하나 발견했다. 거리는 비행으로 한 3문만 가면 되는 거리.
산으로 둘러싸인 옴폭 파인 마을. 좋아. 그럼 여기를 기준으로 잡고 주변을 탐색해보자.
반경 310미터의 탐색. 지름으로 따지면 620미터.
생각해보면 엄청난 크기다. 덕분에 주변을 살펴보는 데는 엄청나게 좋다.
이 범위증가 패시브가 언제까지 나올까? 10까지 나오려나?
10까지 된다면 어디 보자…. 7일 때 380미터, 8일 때 460미터, 9일 때 550미터, 10일 때 650미터다.
어휴. 기척이 감지돼봐야 보이지도 않겠네. 650미터라니. 으엑.
어쨌든 지금도 범위가 넓기에 탐색은 쉽다.
지금 위치를 기준 삼아서 나선형으로 빙빙 돌아 반경 5킬로 이내를 전부 돌아봤다.
역시나 기척은 없다.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는 것은 참 좋은 거야. 위협이 없다는 뜻이니까.
그럼 일단 임시 훈련장은 됐고. 나중에 조금 더 큰 공격 스킬 같은 게 나오면 이정도론 턱도 없겠지.
역시 섬 같은 데가 좋은데. 한번 가볼까? 근데, 어디로 가지?
스마트폰을 꺼내서 진영이가 깔아준 지도를 켜봤다.
역시 이게 좋아. 종이책은 확실히 불편해. 아무리 수납이 있다고 하더라도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지도는 이게 된다. 거리 재기. 어림짐작으로라도 거리가 어느 정도 되는지 알 수 있다는 건 엄청난 거야.
허공에 떠서 한참 지도를 보다가 내가 너무 멍청하다는 생각을 했다.
왜 나는 추위에 벌벌 떨며 이러고 있는가? 한심하네! 정말.
땅으로 내려와 적당히 바람을 막을 수 있는 곳에 와서 다시 지도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외의 것을 알았다. 막연히 생각하고는 있었는데 지도를 보니 확실히 알았어.
산둥반도와 우리나라는 생각보다 가깝다!
아니, 우리나라 본토는 멀지, 근데 최서단 섬이 있다. 아주 익숙한 섬 이름. 백령도.
그리고 그 밑에 섬도 두 개가 더 있다. 대청도와 소청도.
어디서 많이 들어봤나 했더니 예전에 야생 버라이어티 프로 거기에서 본 거 같다. 막 낙오하고 그랬던 거 같은데.
어쨌든 백령도는 익숙한 이름이다. 그리고 여기서 짱개국 산둥반도 끝까지는 200킬로도 안 된다.
와우. 네 시간. 블링크를 쓰면 훨씬 줄겠지.
나쁘지 않다. 전진기지의 느낌이야.
한번 가봐야겠네. 지리적으로는 가장 괜찮아. 문제는…. 지금 저장 포인트가 없다는 것.
순간 이동을 마스터 하고 가야 할 것 같다.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았어. 오늘? 내일? 말 나온 김에 지금 해야겠다.
많은 것들이 정리가 돼서 그나마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유독 긴 겨울이었어. 이제는 조금 한가해지려나?
하지만 겨울도 거의 다 끝나가고 있잖아. 이제 2월 중순도 다 지나가는데.
물론 3월이 돼도 아직 추위는 남겠지만, 그래도 느낌이 다르다.
냉기가 남아있다 하더라도 3월은 봄이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밖에서 순간 이동하기가 너무 귀찮아 방으로 저장 위치를 바꾸기 위해 벙커로 향했다.
근데 안나가 아직도 밖에 나와 있다. 허. 열심이네? 왜 아직 밖인 거야?
"안나."
"왔어요? 일찍 왔네요."
"오늘은 그리 바쁜 건 아니었으니까. 근데, 아직도 안 들어갔어?"
"이거 쓰는 게 재밌어서요. 투명화나 비행은 그냥 숙련하기 위해 의미 없이 반복만 했다면 이건 쓰는 재미가 있어요."
"그래? 나는 공격 스킬 써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이렇게 논타겟팅 스킬은 솔직히 자신 없어."
"그래서 연습하고 있는 거예요. 스킬을 써도 못 맞추면 의미가 없잖아요?"
그러면서 안나는 짧게 중얼거렸다.
"바람."
보이지 않는 바람의 칼날이 드럼통 중앙을 맞춘다.
고작 잠깐 나갔다 왔는데 이미 드럼통 중앙의 페인트는 다 벗겨지고 약간 찢어져 있다.
"오? 중급 찍었나 보네?"
"그럼요. 250번 정도는 금방이잖아요."
그러고 보니 발밑에 포션이 담긴 쇼핑백이 놓여 있다.
안나는 포션에 크게 멀미를 안 해서 다행이야. 아마 승희나 미나, 세아보다 월등하게 빠른 성장이 가능하겠지.
생각해보면 웃긴 세상이다.
스킬을 잘 고르고, 머리를 써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고 운이 좋아 지금까지 문제없이 살아왔다고 해도 결국엔 포션빨이 받냐 안 받냐다.
그건 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보인다.
주량 같은 거니까.
아무리 술을 많이 먹으면서 주량을 늘려보려 해도 결국은 간이 거덜 날 뿐이잖아.
원래부터 술 잘 먹는 사람을 이길 수는 없다. 이것도 마찬가지.
그런 면에서 안나는 축복받은 셈이다. 비록 시작이 많이 늦었지만, 그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다.
본인의 체질, 노력, 그리고 동기.
안나의 복수는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잖아. 그렇기에 그녀는 이렇게 즐기면서 스킬 숙련을 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 조급해하지는 말고."
주어를 상당히 생략했지만, 안나는 내 말뜻을 이해했다.
나를 보고 예의 그 해맑은 미소를 지어준다.
차가운 늦겨울의 공기가 따듯해질 정도의 미소.
"나. 하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안나의 말에 약간 설레는 느낌이 났다.
속으로 약간 야한 생각도 한 건 사실이다.
저 아름다운 여자가 나를 바라보며 옷을 벗고 안기는 상상.
물론 그건 상상만으로 끝나진 않는다. 언제든지 안을 수 있는 여자.
그리고 서로 즐겁게 알몸으로 뒹굴면서 웃을 수 있는 여자.
"이 스킬…. 직접 써보고 싶어요."
예상했던 것과 조금 다른 말.
안나의 말은 사실 엄청난 말이다. 스킬로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이야기.
하지만 이미 이 망한 세상에 완벽하게 동화된 나는 별다른 거부감이 없다.
그저 그녀의 요청에 어떻게 하면 그게 가능할까에 대해서 생각할 뿐.
"그럴래?"
"정작 중요한 순간에 주저하고 싶진 않아요. 그 전에 버려야 할 건 버려야죠. 나약한 마음이라던가 주저함이라던가."
"좋은 마음가짐이네. 그럼 옷을 조금 더 든든하게 입고 가자. 날아가려면 더 따듯하게 입어야지."
뭐가 됐든 사람을 죽인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걸 따지기엔 이미 너무 늦었어.
벙커 안으로 들어가 숙련 하는 승희와 미나, 세아에게 말했다.
"안나랑 실전을 하러 다녀올 거야."
그 말에 살짝 놀라는 세 사람.
내가 코인을 담아온 인간들을 죽이는 것과는 다르다.
그건 그저 처형. 하지만 지금은 사냥이다.
수동적인 입장에서 능동적인 입장으로 바뀌는 순간.
지금껏 어미 새가 물어오는 먹이를 받아먹던 새끼 새가 처음으로 둥지를 떠나 먹이를 잡기 위해 떠나는 첫 사냥.
승희가 일어나 안나를 꼭 안아준다.
"잘 다녀와. 다치지 말고."
그리고 미나 역시 그런 안나를 안아준다.
안나는 웃으면서 그런 승희와 미나를 역시 안아줬고. 세아는 내게 다가와 발로 내 종아리를 톡 찬다.
"안나 잘 돌봐. 무슨 일 있게 하지 말고."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지. 나는 세아를 보고 씨익 웃었다.
"웃기는. 징그럽게. 오빠는 알아서 잘하고."
하여간, 꼭 말을 저렇게 해요. 짜식이. 누구보다 걱정하고 있는 주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