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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클라스
벙커로 돌아가니 상당히 애매한 시간이다.
곤히 자는 네 여자를 깨우자니 조금 미안한 시간.
어지간하면 아침에 하겠지만…. 코인이 너무 많다. 잠이 중요한 상황이 아니지.
"승희야. 승희야."
자고 있는 승희. 방안은 정말 뜨뜻하다 못해 더울 지경이다.
안 덥나? 나는 이렇게 더운 방에서 못 자.
배를 다 들어내고 이불까지 차부치며 자는 승희. 이럴 거면 방 온도를 좀 낮추고 이불을 덮지.
상관없나. 어차피 전기세도 안 내는데 뭐….
"승희야?"
정말 안 일어난다. 역시 이럴 때는 왕자님의 키스로…. 왕자 같은 소리 하네. 우욱.
가슴을 만지고 몸을 쓸어내리고 목덜미와 귓가에 바람을 불어도 움찔거리기만 하고 일어나질 않는다.
어휴. 자고 있는 여자는 왜 이렇게 이쁜 거야. 확 덮쳐버릴까보다.
할 일이 없었다면 그랬겠지만, 지금은 살짝 바쁘다.
조금씩 피어오르는 성욕을 참아내고 부단한 노력 끝에 결국 승희가 눈을 떴다.
"으…. 뭐에요…."
"일어나 봐. 급해."
급하단 말에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리는 승희. 내가 너무 부드럽게 깨웠나. 그래도 놀라게 하고 싶진 않아.
그렇게 승희를 깨우고 미나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불 안에서 고치처럼 돌돌 말고 자는 미나.
승희와는 다르게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다.
지난번처럼 자고 있는데 괜히 잘못 깨우면 화들짝 놀랄까 봐 최대한 부드럽게 깨웠는데…. 그래도 다행이네.
"오빠…?"
"응. 자는데 미안해. 일어나야겠어. 급한 일이야."
"네? 급한 일…? 아!"
그러더니 후다닥 일어난다. 그런 미나를 꼭 안아주고 옷을 입으라고 말해준 뒤 이제 세아의 방으로 향했다.
세아는…. 음. 분명 베개가 여기 있는데 왜 반대로 자고 있는 걸까?
잠버릇이 그렇게 고약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는데. 혼자 잘 때는 좀 다른가?
어쨌든 열심히 가슴을 주무르자 별로 어려움 없이 눈을 뜬다. 역시 승희가 문제였어.
"뭐야…."
눈을 가늘게 뜨고 잔뜩 인상을 쓰는 세아.
그러더니 내가 옷을 전부 입고 있는 걸 보고는 벌떡 일어난다.
"일어나 봐. 급한 일이야."
"뭔데? 무슨 일 있어?"
밖에서 살았던 녀석답게 정신 차리는 속도가 빠르다. 하긴, 안 그러면 죽는 곳에서 살았으니까.
"옷 입어. 밖에 좀 나가야겠다."
의외로 아무 말 없이 부지런히 옷을 입는 세아. 그럼 됐고…. 마지막은 안나.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데 의외로 안나가 제 발로 일어나 나왔다.
"어? 안 잤어?"
"밖에 당신 소리가 들려서 깼어요. 무슨 일이에요? 탐지에 잡히는 건 없던데."
아. 그래도 안나가 이 중에는 제일 낫네. 다행이야. 정말.
그런 안나를 꼭 안아주자 안나도 나를 안는다.
"옷 입어. 밖에 좀 나가야 해."
"알겠어요."
아이고. 여자 넷 깨우는 데도 이렇게 힘들다니.
이건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거 같다. 정말 위급 상황일 때도 이렇게 느긋해선 안 되잖아.
비상벨이라도 하나 달아놔야겠어. 시끄러운 놈으로.
아직은 싸한 2월 중순의 새벽.
밖에 나온 여자들은 옷을 잔뜩 껴입었지만 그래도 추운지 몸을 부르르 떤다.
안나만 별로 평상시와 다를 게 없어 보이는 모습. 하긴. 쟤는 여기가 춥기나 할까?
네 여자가 전부 나온 것을 확인하고 나는 차에서 군인 네 명을 끌어냈다.
사람 취급 안 하고 짐짝처럼 질질 끌어서 하나씩 내리는 나의 모습에 지켜보는 여자들의 표정이 썩 밝지만은 않다.
게다가 뭘 해야 하는지 알기에 저런 표정을 짓는 거겠지.
그렇게 군인 네 명을 바닥에 내려놓고 여자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승희가 먼저 내게 다가온다.
"저부터 할게요."
"구구절절이 설명 안 해도 돼서 좋네."
"이제는 그럴 때는 지났죠."
쓴웃음을 짓고 내게 마체테를 받는 승희.
심호흡을 하고 칼을 휘두른다.
깔끔하게 한 방에 처리한 승희는 코인을 먹고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오빠!? 이거 코인이…."
"많지?"
"아니! 많은 수준이 아니잖아요!? 이게 대체…."
미나나 세아가 왜 저러지? 라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고 안나 역시 묵묵히 승희를 바라본다.
"얼마 있디? 250만은 넘게 있었을 텐데."
"269만요…."
승희의 말에 깜짝 놀라는 미나와 세아.
여자 다섯에 250만이고 군인들도 먹였으니 그쯤 나오는 게 맞겠네.
"당분간 코인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승희가 나에게 마체테를 돌려주고 도로 자기 자리에 들어가자 미나가 앞으로 나온다.
세아는 승희에게 뭐라고 속닥거리며 물어봤고 승희는 조용하게 대답해주고 있다.
"위험한 곳 다녀온 거예요?"
나근나근한 목소리로 나를 걱정하는 미나.
나는 그런 미나의 볼을 손등으로 한번 쓰다듬어주고 마체테를 내밀었다.
미나 역시 별다른 주저함 없이 마체테를 휘둘렀고, 코인을 획득했다.
"세상에…."
"미나는 얼마?"
"265만요…. 맙소사."
"얼추 비슷비슷하네."
마체테를 돌려받자 세아가 씩씩하게 내 쪽으로 다가온다.
"어느 쪽?"
"아무거나."
작게 '괴력'이라고 중얼거린 세아가 군인의 목뼈를 주먹으로 박살 냈다.
들어오는 코인을 보고 역시나 깜짝 놀라는 건 마찬가지.
"275만."
"넌 조금 많네."
아마 군인 하나가 더 들어있던 녀석인가 보다. 군인은 열 명이었으니까.
하나는 김유리 그 여자가 먹었고.
한숨을 폭 내쉬고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간 세아.
그리고 마지막은 안나.
빙긋 웃으며 마체테를 받아간 그녀는 역시나 망설임 없이 휘두른다.
나를 위해서라면 어려운 일 같은 건 없다고 말하는 듯한 저 행동.
고맙긴 한데 약간 무섭긴 해.
"265만 나왔네요."
"그래. 고생했어."
"고생은요. 당신이 고생 많았죠."
그렇게 다시 자리로 돌아가자 나는 여자들에게 말했다.
"새벽에 나와서 찝찝한 일 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코인 양보면 그런 생각 안 하겠지? 다들 고생했고, 들어가서 다시 자."
"오빠는?"
승희가 나에게 물어봤고, 나는 그녀를 보고 대답했다.
"난 아직 할 일이 많지."
"대체 뭘 하고 다니는 데 그렇게 바빠요."
나는 그저 말없이 빙긋 웃어줬고, 안나가 세아와 미나를 몰아서 승희까지 데리고 들어간다.
날이 풀리면 너희도 바빠질 거다. 그러니 그때까진 좀 쉬어.
모두 다 벙커 안에 들어간 걸 확인했으니…. 이제는 나도 할 일을 마저 해야지.
일단, 이 밤이 지나가기 전에 대호 그룹의 중추를 끊어놔야 한다.
밤이 짧아. 할 게 너무나 많아.
그래도 다행인 건 대호와 SG를 싸움 붙일 필요는 없다는 것.
대호만 팍팍 박살 내면 된다. 문제는 최 회장이랑 최 이사 그놈들을 어떻게 하냐는 건데.
아. 귀찮은데. 일단 최 상무는 건졌으니 다른 두 놈은 필요 없지 않을까?
일단 김유리에게 가보자. 가서 들을만한 것들은 다 들어야지.
본진 벙커로 날아가 안에 들어가니 김유리는 그저 다소곳하게 방안에 앉아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나를 갈망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여자.
당장이라도 옷을 벗고 달려들 것 같은 그 여자를 두고 대호 그룹에 대한 것들을 하나하나 물어봤다.
일단 알아야 하는 것은 많지만, 일단 중요한 건 대호의 주력 병력이다.
그게 사라지면 나머지는 있으나 마나다. 알아서 SG가 꿀꺽하겠지.
"비행장에 있다고?"
"네. 그렇습니다."
무슨 소리지? 비행장은 내가 지겨울 정도로 왔다 갔다 했는데. 아…. 생각해보니 비행장을 전부 돌아보진 않았네.
하긴, 크기는 드럽게 컸지. 이런 멍청한 짓을 하고 있었네.
"인원은?"
"그것까지는 정확하게 모릅니다."
"쓸모없네."
내 말에 충격받았다는 표정을 짓는 김유리. 매혹에 걸린 여자에게는 이런 사소한 말도 커다란 충격이 된다.
한도 끝도 없는 애정에 비례하는 자책감이라고 해야 하나.
근데 무슨 의미가 있냐. 매혹이 풀리면 아무것도 아닌걸.
아무튼, 비행장이라. 귀찮긴 하지만 결국 직접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번거롭고 귀찮다고 놔둘 수는 없는 놈들이잖아.
바로 순간 이동을 써서 비행장으로 향했다.
아직 깊은 새벽. 최 상무가 돌아오지 않았지만, 벙커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니 당연히 조용하다.
저긴 잠시 두고…. 어디 보자. 비행장에 있다고?
탐지를 돌리며 비행장 구석구석까지 꼼꼼히 확인해본다.
그리고 정말 발견했다. 비행장 서쪽 끝, 바글바글한 기척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숫자가 제법 된다. 한 50명 되려나? 숫자를 전부 세기는 힘들 정도의 숫자.
SG에 비하면 숫자가 적네? 근데 이놈들이 전부 스킬 네 개씩은 있다는 소리지?
그래도 가진 코인은 얼마 없을 거다. 아까 들었던 말을 들어보면 이놈들은 철저한 관리하에 키워진 놈들이다.
근데 걱정은 안 된다. 이놈들, 분명 대단한 놈들이긴 할 거다. 문제는 그게 세상이 망하기 전의 기준으로 대단했다는 거다.
특수부대 출신의 인간 병기 같은 느낌?
하지만 이게 대가리 굳은 놈들의 실책인 거다. 아까 겪어봐서 알지.
이놈들은 총이 있던 시절에는 그 누구보다 무서운 놈들이었을 거다.
체계적이고 꼼꼼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훈련과 풍부한 실전 경험들.
말 그대로 일당백의 군인이었던 자들.
하지만 스킬로 싸우는 것에 대해서는 정말 끔찍하게 무능하다.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가 그거다.
이놈들은 무서운 놈들이긴 하지만 스킬로 싸우는 데는 젬병이야.
생각해보면 그렇다. 애초에 덤비는 놈들도 없을 거고 스킬을 쓰기도 전에 공기총으로 제압할 수 있었을 테니까.
스킬보단 자신들의 실전 경험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스킬 같은 것은 그저 자신들의 실전 전투 경험을 보완해주는 보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머저리 같은 놈들.
그래. 스킬 두세 개 있는 놈들에겐 그게 먹히겠지.
하지만 잘못 짚었다. 스킬의 성능은 개수에 정비례해서 오르지 않는다.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지.
녀석들의 한계는 딱 거기인 거다. 방향을 잘못 잡았어.
차라리 SG 센터에 생필품 사러 오는 놈들이 더 강할지도 모르겠다. 어휴.
그렇기에 이만큼 있는 녀석들…. 무섭지도 않다. 귀찮을 뿐이지.
게다가 잡놈들이 여럿 있는 것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스킬로 싸우는 것은 쪽수가 많다고 무조건 유리한 건 아냐.
그리고 이렇게 여러 명이 모여있고…. 여자가 섞여 있으면 나는 아무 짓도 안 해도 된다.
여자가 전혀 없지는 않겠지. VVIP에 여자가 있는 이상 여자군인들은 분명히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발견할 수 있었다.
여자 여섯. 외모는 남자들과 크게 다른 바 없는 모습.
머리가 조금 더 길지 않았다면 죽어도 몰랐겠네. 무서워라.
페이즈 아웃으로 가볍게 방 안에 침투해서 들어간 뒤 자는 여자 여섯에게 매혹 네 번과 수면 두 번을 썼다.
그리고 매혹 걸린 여자들을 툭툭 쳤다. 군인 포지션이라 그런지 대충 쳤는데도 벌떡 일어나는 여자들.
쉽게 네 명의 여자를 깨우고 짧고 간단하게 지시했다.
"이 비행장에 있는 남자들은 나를 빼고 다 죽여. 최대한 조용히, 은밀하게. 다 죽이면 이 방으로 돌아와."
내 지시를 받은 여자들은 조용히 방 밖으로 나갔고 나는 탐지를 키고 가만히 지켜본다.
평면이라 인식하기가 조금 힘들기에 방 밖으로 나가서 당당하게 하늘로 올라갔다.
그제야 확실하게 보이는 상황.
굉장히 웃긴다. 게임 같은 데에서 미니맵으로 전투 상황을 지켜보는 느낌.
상세한 움직임은 알 수 없어도 대충 움직임으로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알 수 있다.
빨빨거리며 방 밖으로 나가 움직이는 네 개의 기척.
가장 먼저 다른 움직이는 기척들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기척이 하나씩 꺼진다. 아마도 불침번이나 야간 경비조겠지?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기척을 지워가는 여자들.
깊은 새벽.
너무나 허무하게 대호 그룹에서 키운 주력 병력이 조용히 사그라든다.
매혹 대책은 없는 건가? 너무 쉽게 정리되는데?
소란 같은 것은 없다. 그저 계속해서 기척이 사라질 뿐이다.
정말 허무하리만큼 한심한 모습.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집을 피우던 자들이 의미 없이 사그라지는 모습은 슬프다기보단 웃기다.
나름 우리나라에서 가장 최고 기업이라고 불리던 녀석들이 만들어 낸 게 이 꼬락서니라니.
너무 병신같아서 한숨이 나온다. 그래. 애초에 이놈들 방식 자체가 잘못됐어.
자신의 안전을 타인에게 의존하는 순간부터 멍청하다고 스스로 낙인을 찍은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이 망했는데, 스킬이라는 엄청난 게 생겼는데.
그거에 집중해서 살아남을 생각을 안 하고 하던 짓을 계속하려니까 저 모양 저 꼴이 나는 거야.
병신들. 엉망진창이야. 지금까지 살아있던 게 용하다.
대호라는 간판이 있어서 살아남았던 걸까? 간판에 쫄아서 애초에 접근도 못 했던 걸까?
어쨌든 한심하다. 그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대호가 이정도면…. 다른 곳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