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354화 (354/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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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가는 수레바퀴

진영이는 내 스마트폰을 가져가더니 혼자 쿵짝쿵짝 허이짜허이짜 하더니 나에게 다시 돌려준다.

바탕화면에 못 보던 앱 하나. 열어본다. 바로 뜨는 지도.

"GPS가 안돼서 지금 위치를 못 찍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커다란 건물들 같은 건 뜨더라고요? 그러니까 어느 정도 현 위치를 파악하는 데는 쓸만할 거에요. 다만 실시간 업데이트가 안 되는 관계로 최소 5년 전 자료라는 것과…."

"나도 지도 쓰는 법 정도는 알아."

내가 말을 끊자 약간 머쓱해 하는 진영이.

"고맙다."

하지만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 바로 표정이 밝아진다.

한참 그렇게 지도를 둘러보니 볼수록 만족스럽다.

우리나라는 그래도 제법 상세하게 표현이 되어있다는 게 맘에 들었고, 세계 지도도 가능하다는 게 더 좋았다.

물론 디테일한 부분은 없어서 아주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없는 것보단 낫지.

"옜다. 선물."

수납에서 회귀한 물품들을 잔뜩 꺼내주자 좋아하는 녀석.

누구든 받으면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 물건들.

게다가 쓰레기만 있으면 얼마든지 되돌릴 수 있는 것들이다.

적은 수고로 최고의 효율을 만드는 스킬.

진짜 맘에드는 스킬이야. 정말로.

"그럼. 간다."

"유정이 누나한테 가죠? 같이 가요."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함께 주방으로 갔다.

다른 여자들이 있을까 봐 살짝 쫄았지만 다행히 유정과 하율이 둘만 있었다.

나를 보고 반갑게 다가오는 하율이. 크크. 그럴만 하지. 이 아이에게 나는 간식의 천사쯤으로 보일테니까.

"어머. 왔어요? 성철 씨? 안 그래도 볼일 있었는데."

"승규 형이 오라고 해서 온 거예요."

"아아. 그래요? 그럼 혹시 이야기 들었어요?"

"뭐요?"

"MRE요."

"아뇨. 아. 그것도 있네."

물류센터. 깜빡 잊고 있었다. 창고 입구에 테이프 붙여놓고 신경도 안 쓰고 있었네.

어휴. 종종 가서 확인했어야 했는데.

"근데 MRE는 왜요?"

"저번에 성철 씨가 가져다준 걸 제법 먹었거든요. 그만큼은 또 있어도 될 거 같아서."

"아아. 그래요. 다음에 올 때 챙겨올게요. 근데 생각보다 빨리 먹었네요?"

"그렇죠. 아무래도. 지금은 생산 같은 게 완전히 궤도에 올라간 게 아니라서요."

"그런가."

"아 참 그리고."

"네?"

"전에 그 스킬요."

"회귀?"

"네. 그거. 혹시 소스 같은 것들도 돼요?"

"당연하죠. 병만 있으면."

"아아. 그럼 정말 미안하지만 소스 같은 것들 좀 구해줄 수 있어요? 종류별로 상관없으니까 되는 데로?"

"물론요. 그것도 다음에 올 때 챙겨볼게요."

"미안해요. 맨날 이런 것만 부탁해서."

"신경 쓰지 마요. 그 정도는 웃으면서 부탁할 수 있는 사이잖아요."

내 말에 유정이 웃는다.

그래. 이런 게 좋다. 따지고 보면 청평 이곳은 내가 받는 것보다 퍼주는 게 훨씬 더 많은 곳이다.

사실상 나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는 곳. 이득이라고 해봐야 자잘하고 사소한 것들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데도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이곳은 그런 거다. 내 첫 실험체.

미친 매드사이언티스트가 가지고 있는 아무 쓸모 없는 실험물 1호 같은 곳.

그냥 아무 역할을 못 한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그 존재만으로 가치가 있는 곳이니까.

자주 들여다보거나 구태여 화려하게 업그레이드를 해 줄 필요는 없다.

그냥 있어 주기만 하면 된다. 평화롭고 온화하게.

"안나는 잘 있죠?"

"네. 제가 통역이란 스킬을 얻어서 이제 완전하게 서로 말할 수 있게 됐어요."

그러면서 안나의 이야기를 하자 자기일 같이 기뻐해 준다.

뭐, 굳이 복수의 이야기는 안 해도 되겠지. 그건 안나 본인이 할 이야기일 테니까.

그렇게 유정과 이야기도 마치고 청평을 나섰다.

좋은 곳이긴 하지만 오래 있고 싶진 않다.

여기 있는 여자들을 다 마음대로 한다고는 했지만, 사실 약간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야.

될 수 있으면 안 마주쳤으면 좋겠다. 마주친다고 하더라도 오랜만에 한 번씩? 그런 정도.

저 김포에서 온 녀석이 여기에 있는 임자 없는 여자들을 다 자기 걸로 만든다고 해도 솔직히 아깝진 않을 거 같은 마음이니까.

모르겠다.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다음 할 일이나 신경 쓰자.

순간 이동을 써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페이즈 아웃을 바로 쓰고 밖으로 나갔다.

승세미안에게 걸리면 안 돼. 걔들을 보게 되면 다른 일을 하러 나가고 싶은 생각이 급속도로 사그라들 거다.

나태해질 수는 없지. 해야 할 일들은 마저 끝내고 쉬어야지.

차라리 순간 이동 위치 저장을 내 방으로 해놓는 게 아니고 이 근처로 해놓는 게 낫겠다. 그게 여러가지로 편하겠어.

그렇게 저장 위치를 바꿔 놓고 생각난 김에 바로 물류센터로 가봤다.

그리고 아직 제대로 붙어있는 테이프를 확인했다. 결국, 그 이후로는 아무도 안 왔다는 소리.

뭘까? 여길 아는 놈들이 다 죽어버린 건 아닐 텐데.

관심이 없어진 걸까? 아니면 정말 약은 다른 곳에 있었고 그건 이미 가져간 걸까?

뭐. 이것도 깊게 생각할 거리는 아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자.

펜스를 갈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가보기로 했다.

다 큰 성인이니 내가 없어도 자기들끼리 잘 해내겠지만, 그래도 궁금하잖아.

가서 정 부장만 슬쩍 만나고 와야지. 번거롭지 않게.

펜스에 도착해 공중에서 내려다보자 뭔가가 상당히 북적거리는 모습이다.

집을 짓고 있는 구역은 점점 지어진 게 많아지고 있다.

공사라는 게 저렇게 빨리 되는 거였나? 뭔가 조금 말도 안 되는 속도 같은데.

그건 그렇다 치고…. 눈에 띄는 부분이 보였다.

잔뜩 세워져 있는 픽업트럭들. 차 색깔도 종류도 전부 제각각이지만 전부 픽업트럭이라는 게 웃긴다.

음…. 차량 숫자가 꽤 되는데? 설마 저걸로 북쪽까지 왔다 갔다 할 셈인가?

하긴 이들은 비행도 수납도 없을 테니…. 저렇게 물리적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지.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여기도 문제가 많네. 철기에 익숙해진 사람이 청동기 문명을 바라보는 느낌이야.

아니, 그 수준이 아니지. 열병기와 냉병기의 차이 정도? 아무튼, 그렇다. 약간…. 걱정이 될 정도네.

대충 건물 안으로 들어가 탐지를 쓴 다음 정 부장이 있을 만한 곳으로 향했다.

다행히 자신의 방에 있었고, 나는 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우. 깜짝이야."

"잘 지냈습니까."

"물론이죠. 그러고 보니 제 방에 오는 건 처음 아닙니까?"

생각해보니 그렇다. 맨날 정 부장이 내 쪽으로 왔지, 내가 찾아간 적은 없으니까.

"그렇네요. 삭막하군요."

"노총각 방이 다 그렇죠. 그건 그렇고 웬일입니까? 이렇게 일찍? 뭐, 저야 자주 보면 좋긴 하지만."

허허 웃으며 말하는 정 부장. 저렇게 보면 그저 인상 좋은 아저씬데.

"그냥 지나가다 들러봤어요. 북쪽으로 가는 건 어떻게 됐나 궁금하기도 하고."

"하긴.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솔직히 아직 제대로 진행은 안 되고 있어요. 북한은커녕 이제 동두천 쪽 확인하고 있는데요."

"무슨 문제 있어요?"

"문제…. 문제는 있죠. 생각보다 동두천 쪽에 생존자가 많다는 거?"

"그래요? 왜지?"

"일단은…. 미군 부대 때문인 거로 생각하고 있어요."

"미군 부대? 아. 그런가. 근데 그게 왜요?"

"저희도 정보 수집 중이라 정확하게는 몰라요.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해보자면…. 아마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사람이 많아서?"

"군인들은 전부 사라진 거 아니에요? 미군이라고 다를 거 없을 텐데. 아…. 전 군인인가?"

"네. 그렇겠죠. 군인과 화약 무기들은 전부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군대의 흔적은 모두 사라진 건 아니니까요. 게다가 군인이 사라졌다고 예전에 군인이었던 사람들까지 사라지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렇게 따지면 우리나라는 남자 대부분이 사라졌겠죠."

"그러네요. 나는 아니지만."

"아. 미필이에요?"

"신검은 받았었죠."

"캬. 축복받았네요."

"그렇죠. 얼마나 다행인지. 아무튼…. 그럼 충돌이 있었어요?"

"네. 다행히 아직 사망자는 없지만, 조금 까다로워요. 생존자들이 미군 부대 안에서 제법 많이 자리 잡고 있어서."

"하긴, 총이나 화약 무기만 사라졌지 다른 물품들은 그대로 남았겠네요."

"네. 그래서 쉽게 접근이 안 되고 있어요. 시간을 들여서 조금 천천히 공략해볼 생각입니다."

"도와드려요?"

"아뇨. 그건 나중에요. 무슨 일이 있거나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성철 씨에게 의존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안 돼요. 지금 있는 사람들만으로 한번 할 수 있는 데까지 할 생각입니다. 당신은 치트키니까요. 일을 너무 쉽게 해결해버려요."

"아니, 굳이 편한 방법을 두고 고생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

"경험이죠. 경험. 그리고…. 적당한 동기와 희생도 있어야 하고요."

정 부장의 말에 약간 소름이 돋았다.

역시 이 사람…. 마냥 착한 사람은 아냐. 방금 자기 입으로 희생이라고 말했어.

"아. 이런 건 비밀입니다. 뭐,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아시겠지만."

"그래요. 걱정은 안 하지만…. 그래도 노파심에 말해보는데요."

"무슨 말 할지 알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쓸모 많은 사람을 함부로 소모하거나 하진 않습니다. 외부조나 매혹조, 집행부는 저희의 중요전력이에요. 쉽게 당하게 두진 않을 거예요."

역시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냐. 이 남자도 사람 좋은 미소 안에는 새까만 괴물이 도사리고 있어.

하긴, 동산의 2인자로 지금까지 이 넓은 곳을 거의 혼자서 유지하며 살았던 사람인데…. 어지간하진 않겠지.

내가 여기에 뭐라고 말을 얹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주제넘은 짓이네.

"그래요. 알았어요. 근데 저 밖에 픽업트럭은 뭡니까?"

"아. 그거요.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는 게 있어서요. 일단 모아놔 달라고 해봤습니다."

"수송용은 아닌가 봐요?"

"하하. 세상에 어떤 부대도 수송을 저렇게 요란하게 하진 않죠."

"그렇겠죠. 혹시나 했어요."

아무래도 내가 너무 이 사람을 쉽게 봤나 보다. 그냥 얌전히 입 다물고 찌그러져야겠다.

"될 수 있으면 성철 씨에게는 도움을 안 받을 생각입니다. 하지만 전혀 안 받는 건 아니죠. 그러니 종종 들러주세요."

"그래요. 그 정도야 뭐."

"아. 그리고…. 식량 가져가셔야죠? 그 회귀 스킬 때문에 필요 없는 건 아니죠?"

"물론이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까."

"알겠어요. 그러면…. 저랑 같이 식당에 가시죠. 이모님이 간절하게 찾아요."

"그분은 대체 왜 맨날 나를 이렇게 찾으실까."

그렇게 정 부장이랑 식당으로 향한 나는 이모님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그녀가 가져오는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아…. 이것 때문에?"

이모님이 가져온 것들은 비어있는 MSG 봉지들이었다. 그것도 대포장.

"맛의 비법이…."

뭐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보니 맥이 조금 빠지긴 하네.

나야 뭐 MSG가 몸에 나쁘다는 소리를 믿는 사람은 아니니까 크게 상관은 없지만 세아는 실망할 수도 있겠다.

아닌가? 상관없나? 어쨌든 맛만 좋으면 장땡인가?

그렇게 이모님이 요구하는 것들을 회귀시켜주고 식량을 챙겼다.

이제 볼 건 다 봤으니 돌아가 볼까.

"성철 씨."

"네."

"잠깐만 이야기 조금만 더 하죠."

진지한 표정의 정 부장.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와 함께 한적한 곳으로 갔다.

그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나에게 말을 하기 시작한다.

"아까 제가 말한 희생…. 그걸로 실망하거나 한 건 아니죠?"

난 또 뭐라고. 나는 피식 웃으면서 그에게 대답했다.

"설마요."

"그래요. 나도 성철 씨가 이해할 거라고 생각해서 말한 거예요. 근데 저도 확신이 안 서서 이렇게 다시 물어보네요."

"생각한 대로 하세요. 제 눈치 볼 필요 있나요."

"그래도 상사의 기분을 거스르면 안 되죠."

"상사는 무슨.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펜스는 실질적으로 정 부장님 당신이 운영하는 곳이에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결국 부장님이 책임 있는 거고요. 내가 왜 발을 뺐는데."

내 말에 쓴웃음을 짓는 정 부장.

"희생은…. 어느 정도는 필요해요. 이해해줘요."

"신경 안 쓴다니까 그러네요. 마음껏 해보세요. 야망이 있으면 펼쳐 보시라고요."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고맙기는요. 어쨌든 망하지만 마요. 나는 내 밥줄 끊기는 건 싫어."

이젠 쓴웃음이 사라지고 가벼운 웃음으로 바뀌었다.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듯한 모습.

"알겠어요. 고마워요."

"방금 그 말 했는데."

"고맙다는 말은 몇 번을 해도 상관 없는 거예요."

"그래요? 좋은 말이네요. 암튼, 그럼 정 부장님 믿고 갑니다."

"조심히 가요."

그렇게 펜스를 바로 나섰다.

하늘에 떠서 지상에 내려다보이는 펜스를 한번 바라본다.

과연 여기는 어떻게 될까?

소질 있는 사람이 재능이 만개해서 커다란 성과를 이루게 될까?

아니면 까불다가 망해서 있는 곳마저 말아먹게 될까?

그걸 지켜보는 것도 심심하진 않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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