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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가는 수레바퀴
그런 생각은 했다.
이 녀석들이, 정확하게 말하면 도현이 이 녀석이 캐슬로 순순히 따라가는 건 인질을 잡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동생을 끼고 있는 이상 자신이 불리한 건 어쩔 수 없는 상황.
그래서 그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얌전히 따라가서 내가 아끼는 사람을 인질로 맞잡고 뭔가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지만 그럴 확률은 낮다고 본다.
인질을 맞잡는다고 본인이 유리해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나에겐 믿는 구석이 있다.
일단 동생. 동생의 존재 자체가 저 녀석에게는 많은 의미가 된다.
살아갈 의미와 함부로 굴지 못하는 이유.
친동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건 조금 멀리 간 거 같아서 관뒀다.
뭐, 그럴 수도 있잖아? 친동생이 아닌 전혀 상관없는 아이인데 매혹을 걸어놓고 동생인 척 연기하는….
근데 저번에 광역 스킬 무효화를 걸었었으니까 그건 아닐 거다. 소거법은 이래서 좋아.
무효화와 매혹.
일단 그걸로 동생은 확실하게 제어할 수 있다.
게다가 동생도 매혹이 있는 한 저 녀석은 쓸데없는 짓은 못 해.
그런 분위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녀석을 100퍼센트 신뢰할 수는 없잖아?
신뢰와 믿음이라니. 그거 힘든 거라고. 아직은 나에게 쉽지 않은 개념이야.
그런 나의 음흉한 속내가 무색하게도 셋의 분위기는 상당히 좋다.
민희. 정말 신기한 여자야. 생각해보면 나는 저 여자를 그렇게 잘 알지 못한다.
나보다 5년은 더 많이 산 여자. 의사라고 했으니 공부도 잘했을 거고 머리도 좋았을 테지.
고영준인지 나발인지에게 남자친구를 잃고 노리개로 살았다고도 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또 안 좋은 일도 당했고.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어도 저 여자는 당당하고 믿음직스럽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의지할 수 있는 기분? 벙커에 있는 네 여자하고는 다른 느낌이다.
확실히 그래. 믿음의 방식이 달라.
그리고 또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항상 도도하고 매력적이며 우아하고 퇴폐미가 있는 그녀였는데, 지금은 아니다.
자상한 표정, 무슨 말이라도 들어줄 것 같은 분위기, 여유 있는 몸짓.
남매를 이끌고 편안하게 이끄는 모습. 왜 당장 데리고 오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자신이 있던 거였구나? 그들이 살인자든 뭐든 간에?
남매의 표정을 보니 참 웃기다.
처음으로 첫사랑 누나를 만난 표정을 짓고 있는 도현이.
이쁜 언니를 부러움과 동경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하은이.
어린 애들은 정말 알기 쉽네. 어른들처럼 표정 숨기는 게 능숙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나?
특히 도현이 녀석은 정말 웃기다.
인질 어쩌구를 생각하고 있던 내가 한심할 정도.
솔직히 말해서 그냥 놔둬도 될 것 같다.
사근사근한 태도로 이야기를 들어주며 이것저것 챙겨주는 민희와 다소곳하게 그걸 따르는 남매.
정말 예상 못 한 장면이야. 보고 있자니 신기하네.
한참을 남매와 이야기하는 민희. 나는 마치 호위무사라도 된 양 뒤에서 그저 지켜봤다.
그러다가 그녀는 나를 보고 말한다.
"이제는 나한테 맡겨도 될 거 같아요."
민희의 말 안에는 여러가지 뜻이 담겨 있는 것 같다.
그중에 가장 큰 건 그렇게 뒤에서 감시하듯이 서 있지 말라는 뜻.
그 정도도 못 알아먹을 내가 아니라서 나는 바로 남매에게 말했다.
"모쪼록 여기가 맘에 들었으면 좋겠다. 너희가 살던 집보다는 불편하겠지만."
그러면서 수납을 열어 간식거리들을 잔뜩 내놨다.
나는 저렇게 어르고 달래는 건 못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먹을 거로 회유하는 방법뿐이야.
그래도 효과가 있는지 수북하게 쌓인 간식거리에 시선이 돌아가는 녀석들.
그래. 저 나이에 저걸 마다할 수는 없어. 만약 그랬다면 나는 녀석들을 절대 안 믿었을 거야.
"갈게."
"그래요. 자주 들리고요."
아이들 앞이라서 그런지 애정표현은 자제하는 민희.
이거 조금 억울하네. 애들 깰까 봐 섹스 못 하는 부부가 이런 느낌일까?
"조심히…. 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나에게 인사까지 해주는 녀석들.
참나. 진짜 신기한 애들이야. 진짜로.
내가 나가자마자 바로 이빨을 드러내고 그러진 않겠지?
페이즈 아웃을 쓰자 바로 탐지를 쓰는 도현이의 입 모양이 보인다.
크. 역시. 저 정도 센스는 있어야지.
하지만 탐지에 걸리지 않는 걸 느끼고 놀라는 표정을 짓는 녀석.
내가 페이즈 아웃 설명을 안 했지? 아무렴. 모든 걸 다 밝힐 수는 없지.
나는 그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냐.
그냥 갈까 하다가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어차피 내 페이즈 아웃을 해제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없잖아? 그리고 녀석들의 태도도 궁금하고.
그렇게 지켜보고 있자니 민희가 남매를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머물 방을 알려주고 캐슬의 이곳저곳을 설명해주는 모습.
그리고 그 누구냐…. 아. 씨발. 이름 진짜.
암튼, 전에 컨테이너에 같이 갇혀있던 여자 둘과 남자 하나도 소개해준다.
순수하게 놀라는 모습과 살짝 경계하는 모습.
민희 쟤는 뭘 어떻게 소개했길래 쟤들 반응이 저래? 설마 솔직하게 다 이야기했나?
그리고 예준이. 그래. 쟤는 이름 외웠다.
암튼 17살인 녀석은 도현이를 보고 정말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긴 저 녀석은 그럴 만하지.
질병 해제라는 스킬을 골라서 지금까지 고생하고 살다가 이제야 빛을 보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남자들은 다들 예준이 저놈에게 고마워하게 될 거야.
힘세고 오래가는 똘똘이를 볼 때마다 예준이의 평가는 높아지겠지. 아무렴.
적당히 소개를 다 끝내고 여기저기를 도는 민희와 남매.
뭐, 이정도면 충분한 거 같다. 뭔가 다른 마음이 있었으면 이미 했겠지.
믿음이란 거, 쉽진 않지만 해본다. 솔직히 말하면 도현이보단 민희를 믿는 거지만.
캐슬 바깥으로 나와서 제법 떨어진 뒤에 해제하고 비행과 투명화, 반사를 킨 뒤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로써 캐슬은 한층 안전해졌을 거다. 안전해졌겠지?
그러기로 했으니 이제 신경 끄자. 이정도로 걱정했으면 됐지.
하늘을 날아 방향을 동쪽으로 잡는다. 이번에는 청평.
과연 김포에 있던 그놈은 잘 도착했을까?
날이 꽤 지났는데…. 아직 도착 못한 건 아니겠지.
아니다. 걸어갔으면 힘들 수도 있겠네. 뭐…. 가보면 알겠지.
청평과 가까워질수록 마음속에서 의심암귀가 설치기 시작한다.
청평에 도착했는데 어떠한 기척도 잡히지 않는다면?
텅 빈 벙커 안에 쪽지 한 장만 붙어있는 거야. '잘 놀다 갑니다.'
아마 그렇게 되면 정말…. 두고두고 나를 용서 못할 거 같은데.
아. 이래서 문제야. 보낼 때만 해도 크게 걱정은 없었는데.
꼭 지나고 난 다음에 나 혼자서 이렇게 혼자 헛된 망상을 하고 있어.
계속해서 머릿속에 들어있는 안 좋은 생각을 털어내 보지만 말끔하게 지워지진 않는다.
거지 같네 진짜. 어휴. 이게 문제야. 대체 이런데 어떻게 믿으라는 거야?
마음이 조급해서인지 블링크를 쓰는 빈도가 높아진다.
다행히 캐슬에서 청평은 그리 멀지 않다. 금세 도착한 청평.
그리고 탐지 범위 안에 수많은 사람의 기척이 잡혔을 때야 내 어두운 망상은 비로소 사라졌다.
다행이네. 아무 일도 없구나. 어휴. 씨발. 하여간 망상. 씨발.
하지만 확인할 건 해봐야지.
녀석이 도착하고 나서 아무도 안 죽은 건지, 아니면 아직 도착 안 한 것인지.
그런 걱정 역시 금방 사라졌다.
비닐하우스와 축사 사이에서 승규와 진영이랑 함께 뭔가 작업을 하고 있는 녀석.
탐지를 돌려도 상관없을 정도로 주변에 사람이 많으니 그대로 내려가 뭘 하고 있는지 살펴봤다.
"와. 염력이 생각보다 편하네요."
"그럼. 근데 배울 생각은 하지 마. 이런 짓 하자고 염력 배우는 건 비추다. 비추."
진영이에게 말을 거는 김포남. 뭘 하고 있나 보니까 비닐하우스 천장에 있는 스프링클러 부분을 고치고 있는 것 같다.
염력 덕분에 굳이 사다리를 놓지 않고도 쉽게 작업을 하는 녀석.
손에 든 멍키스패너를 안 보이는 손이 받아가더니 능숙하게 공중에서 이음새를 조인다.
누가 보면 여기서 몇 년은 같이 산 사람 같네.
"뭐해요."
"어. 왔니?"
"왔어요?"
"아! 깜짝이야!"
내가 나타나자 승규와 진영이는 익숙하다는 듯 나에게 인사를 했고, 김포남은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본다.
"뭘 놀라? 죄지었어?"
"죄는 무슨! 야. 그나저나 잘 왔다. 너 정말 좋은 놈이다. 고맙다. 여기 오게 해줘서."
갑자기 나에게 다가오더니 내 등을 토닥여주는 녀석.
"뭐야? 왜이래?"
"야. 진짜…. 와. 밥도 맛있고 고기반찬도 기본이고 채소도 많아! 게다가…. 어휴. 야. 여긴 대체 뭐냐. 여기 여자들은 왜 다 이렇게 이쁘냐?"
아. 역시 그건가. 여자라…. 당연히 이쁘겠지. 안 이쁜 여자들은 여기 못 왔으니까.
게다가 녀석을 여기 보낸 이유에도 그런 목적은 있었잖아.
청평을 조금 더 문란하게. 프리한 청평. 굶주림 없는 청평.
"어때요? 이 사람 쓸만해요?"
녀석의 호들갑을 무시하고 승규에게 물었고, 승규는 빙긋 웃기만 한다.
"야. 쓸만하다니? 어? 인마. 내가 인마. 도서관에서 읽은 책만 몇 권인데? 엉? 살아있는 지식창고라고!"
아. 이런 성격이었으면 오라고 하지 말걸.
유쾌한 게 너무 과한 거 아냐? 왜 이렇게 경박한 거야. 정말…. 경박한 건 딱 질색인데.
"재현이 형 오고 나서 도움받은 게 많아요. 저는 잘 왔다고 생각해요."
진영이 얘는 또 왜 이렇게 커버해주는 거야? 나 참. 나는 모르겠다. 인싸놈들의 친화력은.
그나저나. 그래. 이름이 재현이였지. 어차피 또 까먹을 거지만.
"근데 야. 너는 왜 여기 안 사냐? 이렇게 좋은 곳에? 다른 데 살고 있다며?"
"내 맘이다."
"희한한 놈이야. 어떻게 저런 놈이 있나 몰라."
자꾸 친한 척하는 녀석을 조금 제쳐두고 나는 진영이에게 바로 물었다.
"진영아."
"네."
"너 얘한테 그거 들었냐? 지도?"
"아! 맞아요! 안 그래도 그거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재현이 형 폰에서 지도 추출해놨어요!"
"역시. 너라면 할 줄 알았다."
"어떻게, 지금 바로 넣어드려요?"
"어. 그럼 나야 좋지."
"승규 형. 저 성철이 형이랑 잠시 방에 좀 다녀올게요."
"그래라. 어차피 여기는 거의 다 끝나가니까."
진영이가 승규와 말하는 사이 나는 저 녀석…. 그러니까…. 그래. 재현. 암튼. 저 녀석에게 다가가 말했다.
"맘에 드냐."
내 질문이지만 녀석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여기? 당연하지. 솔직히 그 메시지 나온 날 이후로 이렇게 좋은 곳은 처음 오는 거 같다."
"그래? 그럼 다행이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고 니 집이다 생각하고 너도 열과 성을 다해서 지켜."
"너. 진짜 특이한 놈이다. 여긴 대체 너에게 뭐냐? 여기 뭐 네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닌거 같던데."
"취미 생활."
"뭐?"
"됐어. 어쩌다 보니 만들어진 곳이야. 이렇게 잘될지는 몰랐지만."
"대체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이해를 못 하겠네. 말은 많이 하는데 알아들을 수 있는 게 몇 개 없다?"
"그냥 그런 줄 알아. 어지간한 건 승규 형이랑 상의하고 해라. 그것만 지키면 된다."
"여기서 살지도 않는 놈이 간섭은…. 어휴."
수납에서 마체테 손잡이만 살짝 꺼내 보여줬고, 녀석은 알았다고 대답을 한다.
거참. 손 많이 가는 녀석이야.
"진영. 가자."
"네. 형."
"성철아. 너 지도 그거 하고 바로 갈 거니?"
"아마도요."
"그럼 가기 전에 유정이는 한번 보고 가라."
"아. 그래요. 알았어요."
그렇게 진영이와 벙커 쪽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재현이가 크게 소리를 지른다.
"뭐가 됐든 고맙다! 자식아!"
나는 녀석을 보지도 않고 중지 손가락을 세워서 어깨 위로 팔을 올렸다.
새끼. 남자들끼리 이정도면 충분한 대답이 됐겠지.
"이야. 진짜 신기하네요."
"뭐가."
"형이요."
"나? 그러니까 뭐가."
"형 처음 봤을 때랑 비교하면…. 뭐가 많이 바뀌었네요."
진영이의 말에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 바뀌었지. 나 자신도 그걸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이 갑자기 멸망하고 온 주변이 팔팔 끓는 지옥의 불가마라고 생각하며 조심조심 살았었는데….
어느새 그 지옥의 불가마는 적당히 따듯한 물이 되어 오히려 들어가 있으면 뜨끈하게 몸이 풀리는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내가 세상을 덜 무서워하게 된 만큼 여유가 생겼고, 그 여유만큼 사람다워졌고.
그래. 그건 진영이의 말이 맞다. 역시 이 녀석은 센스가 좋아.
"사람은 바뀌어야지. 그러니까 너도 좀 빨리 바뀌어라. 투명화는 잘 돼 가냐?"
"네. 숙련은 열심히 하고 있어요. 자. 들어오세요."
벙커 안 진영이의 방. 분명 처음엔 이런 방이 아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방안은 온통 컴퓨터투성이이다.
이 새끼. 무슨 세상을 멸망시킬 AI라도 개발하나? 뭔 놈의 컴퓨터가 이렇게 많아?
"좀 정신없죠?"
"여기서 잠은 잘 수 있냐?"
"어…. 가능하긴 한데…. 요즘은 거의 서현이 방에서 자서…."
새끼. 살판났네 아주.
그래. 여기 50인 벙커로 와서 가장 이득인 건 이런 커플 놈들이겠지.
아주 완전 신났을 거야. 이 새끼 이거 지가 말해 놓고 입이 귀에 걸린 거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