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347화 (347/703)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미니 시리즈

천안으로 향하는 차를 따라가며 대체 내가 뭔 짓을 하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냥 보이는 족족 죽였으면 되는걸. 왜 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심리의 전문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을 조종할 만큼 똑똑한 것도 아닌데….

왜 이 생지랄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아니…. 모르는 건 아니지. 나는 나를 시험하고 있는 거잖아.

그저 모든 것을 다 죽여버리는 것보단 이러는 게 그나마 나은 결과가 나올 수 있으니까.

모든 걸 죽여버리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다. 그만한 힘은 있어.

내가 방심만 안 하면 된다. 자만하지만 않으면 되고 대충대충 하지만 않으면 된다.

자신과 자만은 달라. 용기와 만용이 다르듯이.

지금 하는 행동은…. 그래. 돌탑을 쌓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돌탑을 쌓다가 무너지면 그냥 돌들은 다 깨 부숴버리면 되는 거야. 고민할 것 없어.

그런데 어떻게 잘 쌓으면? 뭐…. 그대로 두는 거지. 그거다. 그런 거지.

지켜보는 배우들은 많고 각자의 이야기도 쓸만한 것들이 많다.

특히 여자들이 있기에 어떻게든 상황은 풀어나갈 수 있다.

나는 아직 매혹을 제대로 안 썼으니까. 그리고 여차하면 마리오네트 같은 것도 배워서 쓸 수 있을 거다.

그게 어떤 효과인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매혹 다음 스킬이니 조종같이 쓸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건 가장 마지막이다. 매혹이든 뭐든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어.

게다가 지금 가장 골치 아픈 건 그런 것들이 아니다.

사람이야 지워버리면 그만이야. 백 명? 천명? 결국은 다 죽일 수 있다.

하지만 SG 시티는 다르다.

58만 명. 2억 9천 코인.

결국은 이게 문제다. 내가 독식하기엔 너무나 오래 걸리고, 누군가와 나누기엔 너무 큰 금액.

결국은 저 SG 시티가 문제야.

너무 많은 인원, 너무 많은 코인, 차마 손이 안 가는 아이들.

마음 같아서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다 데려와서 SG 시티의 모든 이들을 죽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말이 안 된다.

사람 한두 명 잡는 것과 이야기가 달라. 도시 하나를 학살하는 것.

그것도 평화롭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아무 이유 없이 죽이는 것.

그게 가능한 사람은 얼마 안 될 거다. 나같이 미친 새끼나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거지.

'자! 이제 다 모였으니 지금부터 민간인들을 잡아 죽이러 갈 거예요! 숫자는 58만 명이니까 어…. 일 인당 만 명 넘게 죽여야겠네요! 그러면 와! 500만 코인이 넘네!? 개꿀!'

이렇게 말하면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SG 시티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려 들까?

아니면 나를 죽이려 들까?

고민할만한 일이다. 나를 죽이려 들진 않아도…. 크게 실망하겠지. 관계를 끊고 싶어서 한다던가.

그게 문제인 거다. 사람 한두 명, 열댓 명 죽이는 거랑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

게다가 명분이 없다.

뭔가 큰일을 치르는데 대의명분이란 중요하다.

청평 사람들이 자양동의 짱개들을 백 단위로 잡아 죽이고도 힘들어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먼저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정당방위라는 것과 짱개에 대한 반발심, 혐오감.

이런 것들이 있기에 대규모 학살을 하고도 쉽게 넘어갔지.

하지만…. 여긴 다르다. 어떠한 명분도 빌미도 없어.

그냥 손대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손댄 놈이 미친 싸이코에 대량학살자 살인마가 확정되는 곳.

아무리 코인이 엄청나다고는 하지만 쉽지 않다.

아마 그래서 SG 시티가 지금까지 유지가 됐던게 아닐까?

아직 남아있는 도덕심, 윤리가 그들의 마지막 방패막인 셈이려나.

내가 이런 잡생각을 하는 이유는…. 김유리 일행이 하는 짓이 재미가 없어서다.

아무 기척도 없는 천안. 역시나 황량한 도시.

그리고 그들이 도착한 대규모 스마트 팜.

공사 현장에서나 보이는 사람들의 기척.

거의 완성되어 마지막 정리가 한창인듯한 곳에 들어간 김유리는 도통 나올 줄을 몰랐다.

끙. 괜히 왔나. 있을 필요가 없네.

쟤들은 신경 쓰지 않고 이제 내 할 일이나 해야겠다.

그래도 천안까지 내려온 덕분에 청주까지는 금방 갈 수 있었다.

블링크. 진짜 좋은 스킬이야. 이것도 쓰는 사람에 따라서 효과가 천차만별로 달라지겠지?

나도 상당히 잘 쓰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보다 잘 쓰는 사람이 있을까? 있겠지? 없을 리가 없지.

청주. 그러니까 SG 시티.

하늘에서 내려다본 커다란 도시.

이 도시는 갈라파고스섬이다. 멸망을 피한 도시. 광기와 학살에 절여지지 않은 도시.

오늘도 평화롭게 돌아가고 있는 도시를 보면 기묘한 느낌이 든다.

이대로 보존하고 싶은 마음과 당장이라도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

전혀 다른 상반된 마음이 드는 곳.

어떻게 이런 게 가능했을까? 역시…. 세상에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아. 대단해 진짜.

도시를 부숴버리고 싶다는 마음을 잘 모아서 SG 센터로 집중한다.

도시는 놔두자. 이놈들이나 어서 처리하자.

번거롭게 나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지 않아도 처리가 가능한 곳이니 쓸 수 있을 때까진 써먹어야지.

그렇게 SG 센터 앞에서 먹잇감을 물색하는데, 흥미로운 게 보였다.

주변을 날고 있는 헬기 네 대.

주변을 경계하듯이 돌고 있는 헬기들.

SG 센터에 온 사람들은 익숙한 일인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래. 저런 경계를 하고 있으니 여기 온 녀석들이 말썽을 부릴 생각을 안 하는 거겠지?

근데 나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저건 경계나 방어용이 아니야. 저건…. 떠버리 놈을 찾고 있는 거다. 분명해.

그리고 나는 그 녀석이 어디 있는지 알 것 같다.

페이즈 아웃을 쓰고 있으면 뭐하냐. 주변에서 저렇게 다 알려주는데.

나 역시 페이즈 아웃을 썼다.

그리고 SG 센터 입구 쪽으로 다가간다.

역시나 그곳에 서서 SG 센터를 바라보고 있는 떠버리. 서민준.

페이즈 아웃 세상은 외부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말 그대로 고요의 세계.

하지만 그곳에서 내 발소리는 들린다. 왜 들리는지는 모르겠다. 이런 발소리도 내가 구현하는 걸까?

어쨌든 그런 고요의 세계에서 내 발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고, 서민준 역시 그 소리를 들었나 보다.

"왔군요."

"한가하냐?"

"그럴 리가요. 바빠죽겠어요. 그러니 여기서 이러고 쉬고 있죠."

"이게 쉬는 거냐."

"적어도 저를 귀찮게 구는 사람들은 없으니까요."

여전히 여유가 넘치고 약간 능글거리는 느낌.

이건 정말 쉽게 익숙해지지 않네. 익숙해지고 싶지도 않고.

"이것저것 열심히 하긴 하더라."

"역시! 저를 지켜보고 있었나요?"

녀석의 말에 나는 인상을 썼다.

아. 저 새끼 게이 아냐? 약간 이상해. 도끼 병인가?

"미친놈."

"당신 같은 사람한테 그런 소리를 듣는 건 칭찬이죠?"

게이 맞는 거 같아. 위험한 놈이야.

"자꾸 여자가 해도 쉽게 소화하기 힘든 소리하지 마. 짜증 나니까."

내 말에 녀석은 피식 웃는다. 어휴. 씨발. 그래. 여자들이면 저런 태도에 환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키도 크고 생긴 것도 잘생겼고 재벌 집 차남에 능력도 있다. 스킬도 나름 있고.

그런 놈이 저렇게 생글생글 느물느물하면 정신 못 차리는 여자들이 많겠지.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남자다. 그렇기에 저런 태도는 그저 속이 거북해지는 행동일 뿐이다.

"새로운 배는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침몰하는 배에 실려있는 짐은 어차피 바다에 던져질 운명이니 그런 것들을 잔뜩 내주고 있죠."

"천안은 얻을 수 있는 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가요?"

"대충 니가 대호랑 꾸미는 일들은 어느 정도."

"흐음. 정말 당신이 뭐 하는 사람인지 감이 안 잡히네요. 대호 소속은 아닌거 같은데…. 혹시 말해줄 생각 없습니까?"

"지랄하지 말고."

"당신이 여자였으면 좋았을걸."

우엑. 방금 소름이 쫙 돋았다. 농담 아니고 진짜 소름이 확 돋았어.

우와. 진짜 세상이 망한 이후로 죽을 고비는 몇 번 넘기긴 했는데 그때보다 소름이 돋았던 거 같다.

그래. 감전 트랩에 걸렸을 때보다 기분이 더 더러웠어.

와씨…. 고작 한마디 말로 사람의 기분을 최악으로 만들 수 있다니. 저 새끼 저거 능력 있네.

아주 씨발놈이야.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하면 진짜 찢어 죽일 거야."

"뭘 부끄러워합니까? 당신 제법 순진하군요?"

농담 아니고 페이즈 아웃 해제를 한 다음 광역 스킬 무효화에 수면 콤보를 넣을 뻔했다.

뒷수습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일단 저지를 뻔했어.

그러지 않은 나 자신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하아. 잘했어. 권성철. 너는 지금 한 단계 성장한 거야.

"난. 두번. 경고. 안 해."

녀석은 입을 다물었지만 생글거리는 미소는 계속 남아있다.

씨발…. 진짜 저런 새끼는 상성 상 가장 안 좋아. 저 새끼 저거…. 꼭 죽여야지. 이 일 다 끝나면 꼭 죽일 거야.

"천안을 얻으면 사람은 어떻게 하지? SG 시티를 옮기나?"

"네? 뭐하러요?"

녀석의 반응에 물음표가 뜬 건 오히려 나였다. 뭐하러요라고?

"SG 시티. 58만 명. 팩토리가 사라지면 이 도시는 급격하게 망할 거다. 천안으로 옮겨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그러니까…. 왜 그래야 하죠?"

뭔가 핀트가 안 맞고 있다. 뭐지? 이 이질감은?

SG 그룹의 최우선 보호는 SG 시티 아닌가? 노동력이자 코인 저장소잖아? 근데 저놈의 반응은 왜 저러지?

"천안에 있는 스마트 팜은 필요 노동인구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이 로봇 장비와 AI로 대체되죠. 사람이 아주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저 인구를 다 데려갈 필요는 없어요. 끽해야 만 명? 그것도 가족들 포함해서."

"뭐라고? 미친 거 아냐? 저 많은 인간을 내팽개친다고?"

뭔가…. 내 입에서 나오기엔 상당히 어색한 말이다.

그만큼 저 녀석의 말은 이해가 안 갔다. 대체 저 녀석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팽개치다뇨. 저들은 알아서 잘 살겠죠. 아버지와 형님이 알아서 챙길 테니까요."

"아니.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야. 58만 명. 그중에서 네가 만 명을 빼가도 57만 명이다. 코인이 2억 8천 5백만이 넘는…."

"네? 코인요?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녀석의 어리둥절한 표정. 그리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 이질감의 정체를 찾았다. 서로 중요시하는 가치가 달랐던 거다. 그리고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잠깐만…. 설마…. 저 SG 시티에 사는 사람은…. 코인이 없나?"

"당연한 거 아닙니까? 왜 사람들이 저들을 죽이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씨발. 이제야 알았다. 58만 명이라는 도시 하나의 인구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이유를.

저들은 죽일 가치가 없는 거다. 코인이 제로인 녀석들.

도덕심, 윤리 운운했던 내가 무안해질 정도다. 아직도 말랑말랑한 건 내 쪽이었구나.

게다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네.

사람을 한 번도 안 죽였다고 보유 코인이 500일 리가 없잖아. 0일 수도 있는 거였어.

결국, 저 도시는 자신들의 코인을 제로로 만들고 난 뒤에야 멸망에서 자유를 얻은 거다.

저들을 죽여봐야 얻는 건 불쾌함과 멘탈 마모밖에 남지 않는 거지.

그리고 살인자라는 오명. 헛짓거리했다는 조롱.

하…. 씨발. 누군지 몰라도 생각 존나 잘했네.

저게 진정한 무소유 그거네.

"당신 정말 이상한 사람이네요? 설마 이걸 몰랐다는 겁니까? 대체 당신은 어디에서 나타난 거예요? 뭐, 미래에서 온 겁니까? 오! 설마!? 스킬중에 그런 스킬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네요!? 진짜입니까? 미래에서 왔어요? 아니면 과거? 근데…. 미래에서 왔어도 이런 건 알 수 있었을 텐데. 진짜 알 수가 없네."

떠버리 녀석이 뭐라고 하든 귀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내 모든 계획은 저 SG 시티를 보고 떠올린 거였다. 저 많은 코인. 혼자 죽이기엔 너무 많고 죽일 수도 없는 인간들이 껴있는 곳.

그렇기에 그걸 대신 처리해줄 사람들, 서로 치고받고 하게 만드는 계획.

그런 것들이 다 의미가 없어진 거다. 애초에 전제 조건 자체가 틀렸으니까.

"하. 병신같네."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사람들이 없는 쪽으로 이동하는 나.

그리고 그런 나를 부르며 따라오는 녀석.

나는 귀찮아서 바로 해체를 쓰고 블링크부터 썼다.

아직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진 않았지만, 그냥 썼다.

비행도 투명화도 반사도 없이 블링크부터.

순식간에 주변의 풍경이 휙휙 변했고 그제야 나는 투명화와 비행, 반사와 탐지를 돌렸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기척. 이제야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몸을 띄우고 근처에 높아 보이는 건물 옥상으로 날아올랐다.

다리를 바닥에 늘어뜨린 채 건물 위에 앉아 차가운 바람을 맞는다.

뇌가 좀 쿨링이 돼서 이제야 좀 제대로 돌아가는 거 같다.

그래. 다시 생각해보자 다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