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337화 (33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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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스가 가야할 길

대호 그룹의 벙커로 가서 최신영을 가지고 놀고 이름 모를 싸모님을 만지작거리고.

벙커에 돌아가 잠을 자고.

다시 SG 센터로 와서 코인 벌이하기를 반복하는 나날.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하고 무난한 날들이 지나가며 나흘이 흘렀다.

벙커에 돌아와 승희를 끌어안고 잠든 다음 눈을 떴을 때 내 품에 안겨있는 건 안나였다.

신기하네. 여자가 바뀌는 마술이라니.

"일어났어요?"

내가 눈을 뜨자 어떻게 알았는지 안나가 살포시 눈을 뜨며 말을 건다.

기다란 속눈썹. 거기에 시선을 빼앗긴 나는 바로 안나의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뻔했다.

푸른색 눈동자.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눈동자엔 사랑이 가득 차다 못해 넘쳐흐르는 것 같다.

"이뻐 죽겠네."

그대로 꼭 끌어안자 안나 역시 나에게 안겨든다.

너무나 행복한 순간. 이루 말할 것 없이 즐거운 아침.

아니, 아침은 아니지. 거의 점심이겠지.

"나. 투명 마스터 했어요."

안나의 말에 조금 놀랐다. 대충 다들 마스터 할 때가 됐다고 생각은 했지만 조금 빠르다.

"벌써? 예상보다 빠르네?"

"나는 물약 멀미를 조금 덜 하잖아요. 그리고 당신이랑 말을 할 수 있게 돼서 한글 공부시간이 조금 줄어든 건 비밀."

"풉. 그래. 잘했어. 솔직히 한글 공부하는 것보다 스킬 아홉 개 마스터 하고 통역 패시브 찍는 게 더 빠르고 확실할지도 모르지."

"그건…. 당신이나 가능한 거고요. 다들 그렇게 쉽게는 안 돼요."

"글쎄. 그럴까? 스킬 하나 마스터 하는데 6,250번이고 물약으로 따지면 대충 313개 정도 되는데…. 하루에 20개씩 먹는다고 치면 보름에 스킬 하나라고. 맨몸에서 스킬 아홉 개 마스터 하는데 135일이면 되는 거야. 넉 달 조금 넘네."

"물론 거기에 드는 포션이랑 스킬에 드는 코인은 땅에서 솟아났을 때의 일이죠?"

"뭐, 그게 문제긴 하지."

"게다가 그렇게 하려면 정말 넉 달 동안 인사불성의 상태가 될 거 같은데요."

"강해지려면 그렇게 해야지."

"괴물."

물론 나도 이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이건 정말 아무것도 고려 안 하고 오로지 스킬만 숙련했을 때의 일이다.

스킬에 따라서 날마다 물약 20개를 먹을 수 있는 숙련을 하기 힘든 것들도 있잖아.

게다가 안나의 말대로 포션 값, 스킬에 배우는 코인은 땅에서 솟아나는 게 아니다.

20만짜리 스킬만 찍어도 아홉 개면 180만이고 물약값은…. 계산도 안 된다. 아니. 해볼까? 그러니까….

"560만?"

"네?"

"아니…. 아홉 개 마스터 하는데 먹는 포션 가격."

"아아."

"물론 체력 증가를 찍으면 포션 값이 빠지긴 하는데…. 어차피 패시브 가격도 있으니까. 얼추 크게 차이는 안 나겠네."

"어쨌든 괴물이라는 거죠. 당신이."

"흐음…. 그냥 운이 좋았지."

안돼. 자만하면 안 된다. 자만은 모든 일의 주적이야.

겸손해하고 조심조심하며 끊임없이 의심하고 빈틈을 메꿔야 한다. 자만하고 방심 같은 걸 할 시간 따위는 없어.

그렇게 생각하다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안나를 보았다.

도톰한 입술. 아찔한 몸의 곡선. 보고만 있어도 성욕이 끓는 느낌이다.

마음 같아선 바로 해버리고 싶지만…. 솔직히 섹스까지 하지 않아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지금은 그냥 이 순간을 즐기고 싶은 마음.

"그래서…. 무슨 스킬을 배울까요?"

그것 때문에 내가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뭐, 겸사겸사겠지.

"공격 스킬은 바람 칼날 배우고 싶다고 그랬지?"

"네."

"그럼 비행이랑 바람 칼날 둘 중에 하난데. 나는 비행이 먼저라고 봐."

"왜 그렇게 생각해요?"

안나의 가느다랗고 하얀 손가락이 내 몸을 가볍게 어루만진다.

좋은 기분. 간질간질하고 설레는 느낌이야.

나는 그런 손길을 음미하며 천천히 말했다.

"숙련의 문제지. 비행은 집 안에서 숙련할 수 있어. 근데 바람 칼날은 확실히 힘들 거야. 밖에서 해야겠지. 게다가 내 생각엔 바람 칼날은 실전을 뛰면서 숙련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러니 비행이 먼저지."

내 말을 들은 안나가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네요. 비행을 먼저 배우는 게 낫겠어요."

"맞아. 일단 너희는 아직 약하니까. 안전과 기동력부터 확보하는 게 낫지."

그리고 내가 아직 파티 스킬이 없는 것도 크다.

다들 준비가 되기 전에 빨리 순간 이동이랑 게이트를 찍고 파티를 올려야 할 텐데.

"알았어요. 그럼 지금 바로 배워요?"

"응. 안나 코인 얼마 있지?"

"36만 정도."

"음. 그럼 바로 배울 수 있겠네. 배워봐."

"네."

내게 안긴 상태에서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결국 작게 중얼거린다.

"비행."

그리고 역시나 의아한 표정의 안나.

다들 이러네. 비행이라고 하면 자동으로 날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안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몸을 둥실 띄웠다.

그리고 뽈뽈뽈 거리며 방안을 날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여유롭고 자연스러운 모습.

"잘하네?"

"당신 하는 걸 봤으니까요. 씅히도 봤고."

그렇게 안나가 허공에서 자세를 바꾸며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오! 안나! 비행 배웠어!?"

"와! 결국, 안나도 해냈네!"

"힝. 나만 제일 느리네."

어차피 서로 말도 제대로 안 통하면서 왜 나간 거야? 자랑하려고 나갔나?

아무튼, 그런 안나를 보며 나는 바로 화장실로 갔다.

어휴. 오줌 참고 있느라 힘들었네.

그렇게 몸과 마음을 비우고 밖으로 나가니 승희와 안나가 공중에 떠서 서로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안나랑 놀아요."

"이거 재밌어요!"

하긴, 비행은 확실히 저런 면이 있긴 하다.

스킬 중에서 상상력이 가장 많이 쓰이는 스킬이 아닐까? 아니지. 페이즈 아웃이 있구나.

어쨌든 비행 역시 상상력이 많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근데 여자들은 공간지각능력이 조금 부족하다고 하던데. 괜찮으려나?

"세아는 괴력 많이 남았나?"

"글쎄. 한 일주일?"

"고생하네. 미나는? 투명 얼마큼?"

"저도 한 나흘이면 될 거 같아요."

지금도 계속 포션을 먹고 있는 두 사람. 확실히 동기 유발이 중요해.

백번 숙련하라고 말하는 것보다 서로 경쟁하면서 자연스럽게 할 마음을 만들어주는 게 효과가 좋잖아.

"둘 다 마스터 찍으면 비행 배우면 돼."

"네."

"근데 비행은 꼭 필수 인 거야?"

세아가 나를 보며 물었고 나는 잠시 생각하고 대답했다.

"뭐, 필수는 아닌데 어딘가 이동하거나 전투가 있을 때마다 나에게 안겨있고 싶으면 안 배워도 되고."

"끄응. 나쁘진 않은데 번거롭긴 하겠네."

"나쁘진 않아?"

세아의 말에 나는 슬쩍 숙련하고 있는 세아의 뒤로 다가갔다.

"그럼 싫겠어!? 근데 지금은 아니야. 노노노. 지금은 숙련 중이라고. 나 괴력 있다?"

그런 말에도 무시하고 나는 뒤에서 세아를 끌어안았다.

가느다란 허리와 체구에 맞지 않는 큰 가슴.

자연스럽게 손이 갔지만 세아는 내 손을 거절하거나 하진 않았다. 웃긴 가스나. 튕기기는.

그리고 그걸 보면서 부러운 듯한 표정을 짓는 미나.

"미나도 이리와."

미나가 냉큼 내게 왔고, 나는 소파에 기대고 앉아 미나와 세아를 품에 안고 잠시 앉아있었다.

공중에서 율동 비슷한 것을 하면서 몸을 한 바퀴 돌리는 승희와 안나.

쟤들은 대체 왜 저러는 거야? 뭐…. 저런 것도 필요하긴 하지만.

"승희는 비행 얼마나 남았어?"

"글쎄요. 열심히 하고는 있어요."

"고급 비행이랬지?"

"네."

"승희는 비행 마스터 하면 바로 실전 나갈 수 있겠네."

내 말을 듣자 다들 약간 분위기가 바뀐다.

실전. 물론 악독한 나 때문에 살인까지는 했지만, 정말로 목숨이 오가는 실전은 해보지 않은 여자들.

실전이란 그런 거다. 99번 잘해도 한번 실수하면 끝인 행위.

언제나 자신이 당할 수 있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하는 상황.

그렇기에 긴장하는 게 이해가 간다. 걱정이 되기도 하겠지.

"너무 걱정들 하지 마. 알아서 준비해 줄 테니."

아무리 스킬이 준비됐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걸맞은 사냥터는 있어야지.

이제 막 실전에 들어온 여자들을 바로 SG 센터 같은 곳으로 끌고 갈 수는 없다.

물론…. 어찌어찌 하면 할 수는 있겠지만 위험도가 너무 높잖아. 굳이 그런 걸 감수 할 필요는 없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일어나자 여자들은 전부 나를 바라봤고, 미나가 나에게 물었다.

"나가게요?"

다들 내가 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눈치가 빠르다.

자기들끼리도 잘 있긴 하지만 내가 있고 없고에 따라 분위기가 많이 다르긴 한 거 같다.

뭐….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넷이 사이가 안 좋거나 하는 것도 아닌거 같고.

"준비해야지. 일단…. 포션부터."

100만 코인어치 포션을 테이블 위에 쌓아두고 방에 들어가 옷을 입고 나왔다.

나를 마중하기 위해 내 곁으로 모여드는 여자들. 하나하나 안아주고 키스해준다.

다들 보고 있지만 별로 부끄러워하지는 않는 여자들. 게다가 안나는 혀까지 넣었다.

"그러면 내가 못 나가잖아. 안나."

나를 보고 씨익 웃는 안나. 그러더니 승희가 나를 보고 말한다.

"딥키스를 하면 안나가는 거였어요!? 이리 와 봐요. 빨리!"

나는 장난치듯 블링크로 도망갔고, 승희가 반칙이라며 외쳤다.

그래. 내보내기 싫은 느낌은 알 거 같다. 믿고는 있지만 불안하겠지.

그녀들이 보기에는 지금도 충분히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일 테니.

하지만 그녀들도 곧 내 상황을 이해하게 될 거다. 그리 멀지 않았어.

벙커를 나와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청주로 바로 가는 게 아니고 북쪽으로 간다.

펜스. 일단 거기를 먼저 들러야 해. 볼일도 있고 할 말도 있으니까.

블링크를 섞어가며 비행을 하니 펜스까지는 금방이다. 직선거리로 10킬로 정도 되니까. 그 정도야 뭐.

펜스 상공에서 바라보니 뭔가 많은 게 진행돼가고 있다.

일단…. 집이 조금 늘었다. 음…. 집이란 게 저렇게 금방 뚝딱뚝딱 지어지는 건가? 신기하네.

바로 중앙 건물로 들어섰고, 조금 뒤져보다가 집행부 몇 명에게 물어보고 바로 정 부장을 찾았다.

"오? 오셨군요?"

"네. 할 말도 있고요. 할 것도 있고요."

"오오. 궁금하네요. 어떻게…. 무슨 일입니까?"

"저번에 요청한 건 다 준비됐나요?"

"아. 그 쓰레기?"

"네."

"일단 모아놓긴 했어요. 대체 어디에 쓰려고 그러는지는 이해가 안 가지만."

"그럼 대회의실로 다들 모이라고 해줘요. 쓰레기도 가지고 오시고요."

"대회의실요? 알겠어요. 근데 다들이면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어디까지요?"

"음…. 외부조, 매혹조, 집행부, 반장님들 전원요. 아. 식당 이모님도."

"순찰 나간 사람들은요?"

"그 사람들은 어쩔 수 없죠. 일단 모일 수 있는 사람들은 다 모이라고 해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저는 회의실에 먼저 가 있겠습니다."

"네."

그렇게 대회의실에 먼저 가서 앉아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둘씩 회의실로 들어왔다.

나를 보고 걸쭉한 인사를 하는 반장들, 보기만 해도 부담스러운 식당 이모님.

매혹조 여자들, 매혹적인 미소를 짓는 채원.

우르르 모여서 들어오는 집행부들, 그 뒤에 들어오는 외부조들.

나를 보고 반갑게 다가오려다가 분위기가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 주변 눈치를 보는 지아.

올…. 그래도 눈치란 게 생기긴 했나 보네.

그런 지아 뒤에서 반가운 눈인사를 하는 지원이. 큰 표정 변화는 없지만, 분명히 반가워하고 있는 표정인 윤서.

나를 보고 얼굴을 붉히는 정현이.

그렇게 올 만한 사람들이 모두 오고 마지막으로 정 부장과 미연이 들어온다.

원장에게 해방된 여자. 매혹조지만 다른 여자들의 상태를 봐주기 위해 따로 머물고 있어서 못 만났었는데.

나를 보더니 꾸벅 목례를 한다. 그런 그녀에게 나 역시 목례를 해줬다.

"올 사람은 다 왔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일단…. 주목해주세요."

이미 전부 나를 보고 있기에 딱히 주목해달라는 말은 할 필요 없었지만, 나는 괜히 한번 말해보고 싶어서 말했다.

음. 이런 것도 좋네. 으쓱으쓱하게 되잖아.

게다가 조금 있으면 이들이 엄청 놀랄 게 뻔하기에 즐거운 느낌도 들었다.

"그것 좀 가져와 주세요."

"아. 네."

정 부장이 쓰레기들을 가져왔고 그걸 바라보는 모두의 시선은 궁금증이 최대가 된 것처럼 보인다.

의아하겠지. 대체 저걸 왜 가져왔을까?

하지만 다들 내가 워낙 기상천외한 것들을 자주 보여줬기에 불신과 의혹의 눈초리라기보다는 기대와 흥미진진함이 더 커 보인다.

후후. 그래 그 기대. 절대 약소하진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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