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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번째 스킬
잠에서 깨니 웬일로 아무도 없었다.
이런. 내가 너무 내 여자들이랑 함께 있는 게 익숙해졌나…. 아무도 없는 게 이렇게 허전하다니.
시계를 보니 11시. 의외로 일찍 깼네. 그리 많이 잠을 잔 건 아니야.
언제나 잠에서 깨는 이유는 대부분 비슷하다. 소변이 마려워서.
정말 싫다. 뭔가를 먹고 뭔가를 싸는 거. 정말 피곤해.
그런 스킬은 나오지 않나? 안 먹어도 되고 안 싸도 되고 안 자도 되고….
그럼 인간을 벗어난 거라서 안 되나? 근데 이미 지금 있는 스킬들도 인간을 초월한 것들이 많은데.
어쨌든 화장실을 다녀와서 나가기 전에 탐지를 돌려본다.
음. 거실에 모여있네? 포션 먹나? 그런가 보네. 아직 밥 먹을 시간은 아니니까.
괜히 나가면 또 소란스러워지겠지? 얌전히 누워서 나도 스킬이나 올려야지.
회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금방 올릴 수 있을 거야.
빨리 올리자. 꾸물거릴 이유가 없어.
몸 상태가 좋을 때의 스킬 숙련은 뭐 어려울 게 없다.
한참 종이를 찢고 되돌리길 반복한 끝에 회귀 역시 마스터가 됐다.
후하하하. 별거 아냐! 이정도야 뭐! 익숙하지!
수납을 열어 스킬 표를 꺼낸다.
아. 이것도 이제 한번 새로 써야겠어. 종이가 너덜너덜해졌어.
그래도 이 종이는 내 성장을 함께 해온 증명서 같은 거다.
살아남은 녀석 중에 이걸 적는 녀석이 몇 명이나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만큼 적어 놓은 놈이 있을까?
그만큼 대단한 종이라는 거지. 엄청난 거라고.
자. 이제…. 갱신해보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스킬 창을 열어본다.
이 순간은 언제나 짜릿해. 어떤 병신같고 무책임한 스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스킬 반경 증가5와 스킬 지속시간 증가5. 이건 뭐 그냥 바로 찍었다.
단숨에 사라지는 100만 코인. 뭐, 괜찮아 괜찮아. 100만 정도야 뭐…. SG 센터 앞에서 하루면 되니까.
스킬 반경과 지속시간이 점점 비약적으로 오른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패시브야. 탐지가 몇 미터야? 어휴…. 250미터? 히익?
그리고 새로운 스킬들.
어디 하나하나 보자.
강한 의지. 생존 의지라는 스킬이 생겼다.
뭘까? 의지라는 게 스킬로 가능한 거야?
한번 눌러보니 데미지 감소 스킬을 요구한다. 얼씨구. 지랄하네.
보호막 트리잖아? 근데…. 스킬 이름은 패시브처럼 보이는데. 설마 패시브도 선행 스킬이 있어야 하는 거야?
근데 무슨 스킬인지는 모르겠다. 패시브면 뭐든 좋을 텐데.
봉인.
봉인…. 봉인...이거 설마 스킬을 봉인하는 건가?
사람을 봉인하는 건 아닐 거 아냐. 왠지 그럴듯한 이름이다.
스킬 봉인이라니…. 상당히 유용해 보이긴 하네. 무조건 사람을 죽여야 하는 상황만 있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당장 찍을만한 스킬은 아니다. 그래도 한번 눌러봐?
['봉인' 스킬은 '침묵' 스킬을 배우지 않아 배울 수 없습니다.]
얼래? 침묵? 그런 스킬이 있었어? 아. 있네. CC스킬 중에 있네.
스킬 봉인일 확률이 높아졌다. 근데…. 더 배우기는 싫어졌다. 침묵이라니. 이런 걸 배워야 해? 패스.
금제.
뭔가를 하지 말라는 스킬 같은데.
그런 거지. 자위하지 말아라. 이런 스킬.
근데 이게 되나? 잠시만…. 그럼 상당히 좋은 스킬 아냐?
나를 공격하지 마라. 이런 금제를 걸면 상당히 좋은 거 같은데.
근데 모르겠다. 이런 거 배울 거면 마리오네트가 낫지 않을까? 뭔가 서로 다른 영역이 있는 건가?
그렇게 눌러보니…. 마리오네트를 배워야 배울 수 있다고 뜬다.
엥? 그래? 그럼 뭔가 상위 스킬이야?
잠시만…. 그럼 마리오네트가 상당히 구리다는 뜻인데.
잘 모르겠다. 마리오네트를 찍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갑자기 확 하기 싫어졌어.
약탈.
와…. 이거 좀…. 거시기 하다.
약탈이라니. 사람에게서 약탈할 만한 게…. 코인밖에 없지 않나?
근데 뭐 하러 코인을 약탈하지? 걍 죽이면 되잖아?
으음…. 모르겠네. 이게 필요한가?
쉽게 이해 못 하겠다. 사람은 살려놓고 싶은데 코인만 계속 빨아먹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또 나쁘진 않네.
약탈당하는 사람은 죽어도 스킬을 배울 기회가 없어지는 거잖아?
상당히 인권 따위는 개나 주는 스킬이네. 하긴 이딴 세상에 인권 따위가 어딨겠느냐마는.
게다가 이건 복권 스킬을 찍어야 한다. 정말…. 미친놈들 같네.
투시.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나 방금 이상한 생각 했어. 어휴. 바로 배울 뻔했네.
투시라니. 상당히 남자들을 설레게 하는 스킬이야.
정말 그런 스킬인가? 상대방의 옷 안쪽을 보는 스킬이야?
어디. 한번 눌러볼까? 한 번씩은 눌러봐야지.
엥. 천리안 스킬을 찍어야 한다고?
어…. 그럼 이건 단지 옷 안쪽을 보는 용이 아닌가 보구나.
그래. 천리안을 연관 지어서 생각하니까 대충 어떤 것인지 감이 잡힌다.
이건…. 그냥 장애물을 다 뚫고 볼 수 있는 거 같다. 와. 천리안에 투시라니.
그럼 가만히 앉아서 주변을 다 볼 수 있는 거야?
생각해보니 나쁘진 않은 거 같다. 게다가 그렇게 본 상대에게 스킬까지 쓸 수 있다면……. 어마어마하네.
저격이잖아? 스나이핑이라고.
지금 내 수면 스킬이 75미터가 됐으니…. 이렇게 스킬을 섞어서 쓰면 개사기가 되겠네.
으음…. 일단 장바구니에는 넣어본다. 지금 당장 찍을 건 아니지만.
파티 창고.
이게 가장 눈에 띈다.
누가 봐도 파티 스킬 트리에 있는 스킬 같은데.
당연히 눌러본다.
['파티 창고' 스킬은 '통신' 스킬을 배우지 않아 배울 수 없습니다.]
역시. 맞네.
아마 스킬 트리는 파티 - 소환/전송 - 통신 - 파티 창고 이렇게 되겠지?
그리고 아마 수납도 있어야 할 거 같은데.
아닌가? 수납은 수납 별도고 이건 이거 별도인가?
음…. 그것도 그럴 수 있겠네. 그건 뭐 해봐야 알겠고.
일단 이정도.
막 미친 듯이 찍고 싶은 스킬은 없다.
역시 그럼 원래 계획 했던 스킬을 찍어야지.
문제는…. 원래 계획 했던 스킬도 잔뜩 있다는 거다.
파티, 블링크, 복제, 마리오네트.
아오. 씨발.
진짜 씨발 소리가 절로 난다.
원하는 것에 비해 얻기는 너무 힘들다.
매 순간이 선택이고 고민이야.
씨발. 빌어먹을. 어쩔 수 없다. 소거법 간다.
일단 마리오네트.
분명 좋을 것 같지만, 일단 상급 스킬이 있다. 오늘 나온 금제.
결국, 효과가 그리 좋지는 않을 것 같다. 뭔가 제한이 있겠지.
게다가 불편하긴 해도 어쨌든 대책이 있긴 있다. 채원이의 도움을 받으면 되긴 하니까.
게다가 지금은 당장 마리오네트가 있어도 쓸 사람이 없다.
매혹이든 마리오네트든 당하는 사람은 기억이 남는다. 한번 쓰면 쓰는 순간부터 멈출 수 없는 스킬.
일단 패스. 지금은 아니다. 나중을 기약하자.
파티.
승미세안은 아직 준비가 안 됐다. 슬슬 준비가 돼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일러.
민희도 그렇지. 아직은 조금 더 자신들을 발전시켜야 할 시간.
한텀 정도는 쉬어도 될 것 같다. 결국, 찍긴 해야겠지만.
복제.
후우. 고민되긴 하지만 이것도 그리 급하진 않다.
회귀만으로도 이미 누릴 수 있는 건 다 누릴 수 있잖아.
이것도 당장은 급하지 않다. 이것도 패스.
블링크.
하아. 순간 이동을 쓰기 위해 배워야 하는 스킬일 뿐이다.
블링크가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은 안 하지만…. 모르겠다.
뭐였지? 전에 고급이 100미터였지?
하급이 20미터고. 중급이 30미터고.
모르겠네. 이걸 당장 어디다 쓸 일이 있을까?
결국…. 전부다 애매하다.
지랄. 염병. 거지 같네.
다 좋아 보이고 다 당장은 필요 없으면 어쩌라는 거야.
에휴. 그래도 하나는 골라야지. 빨리 골라서 빨리 마스터 찍는 게 낫다.
블링크 하자. 블링크 해서 개처럼 숙련하고 빨리 순간 이동 찍자.
순간 이동은 결국 필수로 있어야 하는 스킬이잖아. 이게 있어야 뭐든지 할 수 있다.
파티 스킬에 전송과 소환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내가 이동이 자유로워야 한다.
특히 게이트. 이게 가장 중요하다. 언제든지 안전한 곳으로 내 여자들을 대피시킬 수 있는 스킬.
결국은 순간 이동을 찍고 게이트를 빨리 찍는 게 낫다.
길바닥에서 버리는 시간들…. 아깝잖아. 언제까지 날아다닐 건데.
['블링크' 스킬을 배우는데 30만 코인이 소모됩니다. 배우시겠습니까?]
고민하지 않고 그냥 예를 눌렀다.
좋아. 됐어. 생겼어.
그럼 바로 써보자. 새로 생긴 스킬은 써 봐야지.
방구석. 저기에 서 있는 나를 생각하며 짧게 입을 열었다.
"블링크."
순간 내 앞을 가로막은 벽.
나는 벽을 보고 서 있게 되었다.
"오오…."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나는 지금 공간을 넘었어.
아니지…. 나는 방금 내 존재를 고정했어.
블링크. 단거리 텔레포트.
결국, 나는 깨달았다. 이 세상에 대해서.
과학이 밝혀내지 못한 영역. 방금 블링크 한방으로 나는 이 세계의 구조를 확인했다.
이곳은 결국…. 어느 시스템의 안쪽이라는 것.
물론 모든 스킬들이 과학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 블링크로는 확실하게 밝혀 낼 수 있는 게 있다.
나는 방금 빛의 속도를 넘어선 거다. 결국, 빛의 상수 C보다 더 빠른 상태가 된 거라고.
순간 이동은 원본을 삭제한 복제와 같다.
지금 나의 모습을 어느 한 지점에 투영하고 그대로 복제 한 뒤 원래의 나를 지운 것.
그게 순간 이동이다.
내가 이동한 것이 아니다. 나를 Ctrl + X 로 잘라내어 어딘가에 Ctrl + V 당한 거라고.
방금의 그 블링크로 내 원본은 사라진 거다.
아니…. 원본의 의미가 있을까? 순간 이동한 나는 원본과 같은 걸까?
원본에 있던 나의 생각. 나의 혼. 전부 그대로 복제 된걸까?
나는 그러면…. 어휴. 씨발. 개소리가 길었네.
이런 사색을 하기엔 나는 너무 아는 게 없다.
이런 건 나중에 하자. 나중에.
더는 할 게 없어서 세상이 무료하고 심심할 때.
그때 하자. 그때라면 넘치고 흐르는 게 시간일 테니.
어쨌든 나는 단거리 순간 이동. 블링크에 성공했다.
그때 누구냐. 컴퍼니의 부장 놈. 그놈이 말한 게 이해됐다.
상상력. 역시 필요해.
방금도 그렇다. 나는 벽을 보고 있었다.
내가 상상력이 더 좋았으면 뒤돌아 있는 모습으로 블링크 시켰을 수도 있지.
그럼…. 다시 해보면 되지.
침대 위로 다시 블링크. 다시 벽으로 블링크.
좋아. 이번엔 벽을 보지 않았어. 이번엔 뒤돌았다고.
그래. 이거다. 단순히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 지점에 내가 어떻게 있을지 까지 상상할 수 있어야 해.
여기 스킬들. 드럽게 불친절하고 아무런 설명이 없지만,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다.
상한선이 없어 보이는 스킬들이 많이 있어. 그리고 이런 스킬도 그렇다. 발이 디딜 곳이 필요하다고? 과연 그럴까?
페이즈 아웃. 그리고 지상으로. 해제 후 비행과 투명화.
공중으로 솟구쳐 오른다.
다 똑같아 보이는 공중. 나는 공중의 한 지점으로 블링크 했다.
상상이 가능하다면 공중에 비행을 쓰고 있는 나는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해냈다. 공중에서 블링크 한 나의 모습을.
"크크크."
그래. 불가능 한건 없어.
스킬의 활용법은 무궁무진하다. 가로막고 있는 것은 인간의 고정관념. 그리고 자기가 그어 놓은 한계.
극복의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무한한 상상력. 그리고 창의력.
내가 만들어낸 상상이 아니어도 좋다. 인류가 지금껏 생각했던 상상력. 창의력. 얼마든지 빌려 쓸 수 있잖아.
영화, 만화, 소설, 게임.
창의력과 상상의 산물들.
내 머리가 나쁘면 그들이 개척해놓은 것을 따라가면 된다.
좋아. 한번 해보자고. 내 상상력과 창의성이 얼마나 통용되는지.
하늘. 아무것도 장애물이 없는 그 하늘에서 나는 블링크를 연속으로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금 어색했지만, 그 이후로는 어렵지 않다. 필요한 건 동체 시력과 사고회로.
나는 비행이 걸려있는 상태에서 떨어지지 않고 허공을 가르며 체력이 다 할 때까지 블링크를 쓴다.
재밌어. 이런 건 재밌다고.
블링크를 선택하기 잘한 것 같다.
이거라면 얼마든지 숙련 올리는 재미가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