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329화 (329/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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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이 중요한 이유

비행의 최고 속도는 시속 50킬로.

그 말은 몸을 중력과 상관없이 순간적으로 시속 50킬로로 움직일 수 있다는 소리다.

결국, 1미터를 움직이는데 0.07초밖에 안 걸린다는 뜻.

게다가 비행은 움직임에 제약이 없다. 관성도 없고 중력도 없다. 몸을 10센치만 앞뒤로 움직이는 게 가능하다는 거다.

0.007초 만에.

물론 그 속도로 내 몸을 빠르게 앞뒤로 움직이면…. 대참사가 일어날 테니 그렇게는 못 한다.

휠씬 더 천천히 생각만으로 몸을 앞뒤로 움직여본다.

마치 기계와도 같은 움직임. 일정한 속도와 일정한 간격.

승희는 난생처음 느껴보는 움직임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헤 벌린 채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인다.

"이게 머에요…. 어으응…."

내가 내 힘을 써서 움직이는 게 아니기에 지치거나 힘들지도 않다.

분명 내 몸이고 내 물건이지만 나는 가만히 있어도 생각만으로 움직이는 몸.

그렇게 한참을 똑같은 속도와 간격으로 공중에서 몸을 움직이자 승희는 완전히 녹아내린 표정을 하게 되었다.

이거 정말….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네.

비행으로 이 짓을 하는 사람이 나 말고 있을까? 아니 스킬 만든 놈들은 이런 걸 예상했을까?

인간을 피스톤 기계로 만들 수 있다니. 이거 참….

문제는 나도 버티기가 힘들다는 거다. 완전히 녹아내린 승희, 금방 절정에 다다른 나.

그렇게 승희에게 사정하고 나서 그녀를 꼭 안아준다.

공중에서 하는 포옹. 희한한 느낌. 그리고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본다.

마치 침대에 누워있듯 공중에서 편안하게 누웠다.

그걸 본 승희는 아직 붉어진 얼굴로 나를 보다가 내 옆에 비슷하게 누웠다.

뭔가 어설펐지만 몇 번을 꼼지락거리더니 결국 나처럼 편하게 누울 수 있게 되었다.

자기가 해놓고도 신기한 듯이 나를 바라보는 그녀.

"되게…. 이상한 기분이네요."

내 손은 그녀의 몸을 계속해서 어루만졌고, 승희는 나에게 찰싹 붙어서 나른한 표정을 짓는다.

"상상력."

"네?"

"스킬에 설명이 없는 이유…. 그게 아닐까?"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어요. 설명 좀…. 해줘요."

그러면서 승희의 손도 내 몸을 쓰다듬는다. 가슴에서 배로…. 그리고 물건으로.

가느다란 그녀의 손가락이 내 몸을 스칠 때마다 아래쪽에 불끈불끈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 그걸 재밌어하는 모습.

"어…. 비행 스킬은 말 그대로 비행하는 거야. 몸을 띄워서 하늘을 날 수 있는 스킬. 근데 스킬에 그렇게 설명이 돼 있으면 어떻게 될까?"

"어…. 지금이랑 다를 게 있나요?"

"다르지. 달라. 만약 비행에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으면 지금 이런 식의 사용은 하기 힘들었을 거야. 설명에 묶여서 하늘을 나는 것 말고는 활용을 잘 안 했겠지."

"헤에…."

"나는 비행을 실내에서도 쓰지. 발걸음 소리를 없애주니까. 게다가 그냥 걷는 것보다 비행이 훨씬 빨라. 몸을 움직일 필요도 없고."

"으음…. 설명에 묶인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그치? 그런 거야. 물론 스킬을 오래 쓰면서 이 원리나 응용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언젠간 그 설명에서 해방되는 날이 오긴 했겠지. 하지만 이렇게 일찍 응용할 생각은 안 했을 거야."

"투명화가 들고 있던 물건이 같이 투명화되는 것처럼?"

"그래 투명화. 그것도 그렇지. 하지만 비행이나 투명화는 조금 뻔한 게 있긴 하지. 근데 이런 스킬들은 조금 달라."

나는 수납을 열고 초코바 상자 하나를 떨어뜨린 다음 재빨리 수납을 닫았다.

그리고 바로 바닥에 수납을 열어 초코바 상자를 받았다. 순발력을 추가한 기예 같은 행동.

그걸 보고 승희는 신기하다는 듯 나를 바라본다.

"상상력…. 이게 중요하단 말이지. 스킬 중에는 이렇게 상상력에 따라서 활용하기가 천차만별인 스킬들이 있어. 그렇기에 설명을 안 해 놓은 게 아닐까?"

"설명에 묶여서 상상력을 스스로 제한하니까?"

"응."

"그냥 단지 귀찮아서 안 넣은 게 아닐까요?"

"사실 그게 맞는 것 같긴 하지만."

나는 수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갑자기 종이를 꺼낸 나를 의아하게 생각하는 승희.

"봐봐. 이 종이. 내가 회귀 스킬 숙련을 할 때 쓰는 종이거든?"

"네."

"한 몇천 번은 찢어졌지만, 다시 원래 모습대로 돌아왔지. 이렇게."

종이를 찢고 바로 회귀를 쓴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 종이. 신기한 장면이고 말도 안 되는 스킬이다.

적어도 나는 앞으로 유리 컵 같은 걸 깰 일은 없어졌다.

"근데 봐봐. 이 종이…. 왜 이 상태로 돌아왔을까?"

"네?"

"이 종이의 '원래' 상태라는 것은 내가 생각한 거야. 그럼 이런 것도 가능하겠지?"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 가능할 것 같았다. 나는 종이를 반 정도 찢고 잠시 있다가 완전히 찢어버렸다.

그리고 회귀를 썼다. 반만 찢긴 종이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종이는 다시 붙어 반만 찢긴 상태가 되었다. 놀란 모습의 승희.

물론 나도 뜻하는 대로 되었기에 놀란 건 마찬가지지만 겉으로 내색은 안 했다.

"짠."

"어!?"

"결국, 회귀라는 건 그 물체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야. 내가 생각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회귀하는 거지."

"아아. 신기하네요. 어떻게 이런 걸 다 알아요?"

"그럴 것 같았거든…. 아무튼 결국은 그거야. 그 회귀 시점을 머릿속에서 아예 특정을 해버리는 것. 스킬을 사용할 때 무의식적으로. 처음에 우리가 세아가 가져온 콜라 페트병으로 테스트했을 때 생각나?"

"네."

"나는 그 페트병의 '원래' 모습을 그렇게 생각한 거지. 콜라가 담겨있는 페트병. 처음 갓 만들어져 담겨나온 콜라. 근데 만약 내가 페트병의 원래 연료인 플라스틱 소재를 생각하고 썼으면 어떻게 될까?"

"뭐가 그렇게 복잡해요…."

"내 생각은 그래. 조금 더 원래의 모습. 소재의 모습까지 안다면 회귀는 훨씬 더 처음으로 돌릴 수 있지 않을까?"

"그게…. 될까요?"

"음…. 되지 않을까?"

그렇게 대답하고 종이를 바라본다. 그리고 상상한다. 종이의 원료는…. 펄프. 그러니까 나무. 과연 가능할까?

나무를 생각하고 회귀를 썼다. 하지만 변함없는 종이.

"얼래."

"한 거예요?"

"어. 근데 안되네."

"그 정도까지는 회귀가 안 되나?"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원래 상태를 정확하게 몰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 종이의 원료가 나무라는 것만 알지 어떤 나무인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도 모르니까."

종이를 잘게 잘게 찢은 다음 한 조각만 남기고 던져버렸다.

그리고 남은 한 조각에 회귀를 쓰니 바닥에 뿌려져 있던 종이가 사라지며 원래의 모습으로 차례차례 돌아간다.

"근데…. 이런 이야기는 왜 하는 거예요? 머리 아프게?"

흥미롭다는 표정이긴 하지만, 승희의 표정은 그리 밝진 않았다.

하긴 어려운 이야기인가? 그렇긴 하지. 신기하고 놀랍긴 한데 그 원리를 따지는 일은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인 건 맞다.

"음…. 결국 상상력이 스킬 활용도를 높인다?"

"으음."

이해는 한 거 같은데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는 느낌이다.

뭐, 이런 건 본인이 깨닫는 거지 누가 알려준다고 아는 건 아니니까.

"춥겠다. 옷 입을까?"

"네. 그래요."

아직도 알몸으로 공중에서 부둥켜안고 있는 나와 승희였기에 우리는 그대로 화장실로 날아갔다.

둘 다 공중에 뜬 채로 몸을 씻고 옷을 입는다. 승희는 그렇게 양말을 신으면서 나를 보고 말했다.

"확실한 건, 다시는 양말을 신으면서 넘어질 일은 없다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승희를 보면서 나는 킥하고 웃었다.

하긴. 공중에 떠서 옷을 입는 건 상당히 편한 일이다. 양말을 신거나 바지를 입으면서 한발을 들고 균형을 잡을 필요가 없잖아.

그렇게 옷을 전부 입은 나와 승희는 벙커를 나서서 집으로 돌아간다.

공중을 날아가는 하이바 두 개.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포션을 잔뜩 사서 거실 탁자에 올려놨고, 다들 그런 나를 말 없이 바라본다.

"밥은 먹고 가요."

미나의 말에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나는 바로 주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놨던 포션들을 옆으로 옮겨놨다.

승희와 세아, 안나가 다가와 옮기는 것을 돕자 금방 끝났고, 나는 그런 그녀들을 바라본다.

"지겹지?"

내 말에 똑같이 쓴웃음을 짓는 세 여자.

하긴, 나야 스킬 욕심과 편집증적인 강박 때문에 포션을 먹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들은 포션 먹는 동기가 약하긴 하다.

무엇보다 후유증이 크다고 하니까…. 안나는 좀 덜한 것 같지만.

"그래도 먹어야지."

가장 먹기 싫어하는 세아.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

확실히 괴력을 배운 다음엔 포션 먹는 게 조금 나아진 거 같긴 하다.

괴력을 써보니 느껴지는 거지. 왜 빨리 스킬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

이내 미나가 반찬을 옮기기 시작했고, 다들 주방으로 가더니 반찬들을 옮기기 시작한다.

말없이 시작한 식사.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별다른 말은 없다.

그렇게 싹 정리까지 끝나고 다시 내가 포션을 사서 올려두자 승희가 약간 당황한 듯 말한다.

"양이…. 조금 많은 거 같은데요?"

"오늘치만 놓은 게 아니니까.“

"아. 오늘 못 들어와요?"

"응.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있어."

"고생이 많아요."

내 등 뒤로 다가와 꼭 안기는 승희. 조금 전에 느꼈던 그녀의 온기가 다시 살아나는 듯하다.

"할 것도 많고 배워야 할 스킬도 많아. 어휴."

"정말…. 오빠 보고 있으면 브레이크 없는 트럭 같아요."

"어쩔 수가 없어. 눈에 걸리는 것들이 너무 많은걸."

"오빠 성격을 알고 있으니 뭐라고 말을 할 수도 없고."

모르고 있었으면 모를까, 알고 있는데 방비를 안 하는 건 나 스스로가 참을 수 없다.

괜찮겠기 하면서 안주하는 것. 불가능하다.

어느 정도 확실한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는 무조건 달리는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어. 그게 나니까.

포션. 총 100만 코인어치.

개수로 500개. 정말 산처럼 쌓인 포션.

그렇게 포션을 남겨두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다들 나를 따라 일어난다.

"그럼. 다녀올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들. 왠지 비장한 느낌이 난다. 왜지?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벙커를 나섰고 빠르게 남쪽을 향해 날아갔다.

목적지는 수원. 일단 한번 훑고 가야지.

회귀의 좋은 점은 날아가면서 숙련할 수 있다는 것.

체력이 떨어졌을 때 비행이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살살 숙련하면서 날아간다.

그렇게 도착한 비행장. 주변은 평온한 모습.

바로 페이즈 아웃을 쓰고 들어가 본다. 별다른 차이는 없는 위층.

근데 이 직원들은…. 못 나가나? 보안을 위해서 못 나가는 걸까?

괜히 들락날락하면 여기 위치가 노출되는 것은 한순간이잖아? 그렇다고 외출을 안 시킬 수도 없을 텐데?

뭐, 방법이 있겠지. 그것까진 내가 신경 쓸 필요 없지.

하다못해 기절이라도 시킨 다음에 데리고 나가서 아무 데서나 깨워주면 되니까.

들어올 때도 똑같이 하고.

다시 한층 아래로 내려간다. 오너 일가의 영역.

내려오니 어제 그 젊은 여자가 중앙의 식물들을 보고 앉아있다.

약간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모습.

팔자 좋네. 한가해 보여.

일단 여자는 놔두고 다른 곳을 한 바퀴 돌아본다. 근데…. 회장이 없다. 같이 있던 여자들도.

밖에 나갔나? 어제는 그냥 쉬는 거였나.

상무의 방에 갔는데 상무도 없다. 음…. 벙커에 항상 콕 박혀있는 건 아니었구나?

하긴 이 큰 조직을 그렇게 쉽게 다루긴 힘들겠지.

상무의 부인인 듯한 여자는 오늘도 운동하고 있다. 열심이네. 대단해.

결국, 안에는 여자 둘밖에 없는 상태. 더 보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렇게 다시 올라가기 전에 여자나 한 번 더 보려고 나왔는데…. 여자가 자신의 아랫배를 만지고 있는 게 보였다.

들켰나? 뭔가 느끼긴 했나? 하긴 거의 살짝 깨긴 했지?

밤을 생각하니 묘하게 야한 기분이 든다.

음…. 그래. 그럼 오늘 밤도 기대하라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 이젠 청주로 향한다.

일단 코인은 계속 파밍 해야지. 경쟁자도 없는데 쉴 수는 없지.

백마촌이랑 수준이 다른 곳이잖아. 남김없이 잡으려면 한참 걸릴 거다.

남김없이 다 먹어야 한다. 그대로 두면 전부 언젠간 나를 위협할 수 있는 놈들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진다. 빨리 가자. 가서 하나라도 더 잡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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