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326화 (326/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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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놀이

"니 입으로 말해봐라. 니놈의 형을 재끼고 니가 후계자가 될 확률. 몇이나 되지?"

내 말을 들은 떠버리 놈의 표정은 썩 좋지 못하다.

나도 오늘에야 단편으로 들은 것뿐이지만, 사정을 깊게 알지 못하는 제삼자가 소문으로 들은 게 그 정도라면 상황은 그보다 더 나쁠 확률이 높다.

함부로 밝히기 힘든 속사정 같은 건 더 안 좋겠지.

그리고 그건 잘 모르는 내가 봐도 그렇다.

나이, 기반, 영향력, 연줄, 인재…. 뭐든지 비비지 못하겠지.

하지만 세상은 망했다. 그리고 저런 것들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게 생겼잖아?

능력. 스킬을 기반으로 한 능력. 그게 최우선이 된 세상이다.

나 같은 녀석이 이렇게 재벌그룹의 후계자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신 정체가 뭡니까?"

페이즈 아웃의 단점. 스킬을 쓰지 못한다는 거. 생각보다 나쁘진 않다.

침착하게 서로와 대화 할 수 있으니까. 밖이라면 이런 이야기 못 하겠지. 벌써 내 옆으로 헬기가 몇 대는 떠 있었을 테니까.

"아직 무르네. 내 정체 같은 게 중요한가?"

입을 다무는 떠버리. 할 말이 없나 보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떠들어줘야지.

오늘은 내가 떠버리가 되어줘야겠네.

"SG 센터라 그랬지? SG 시티라고 그랬고. 다 니 형에게 줘버려. 손 놓으라고. 니놈에겐 후계자 경쟁 구도에 얼굴을 내민 것부터가 실책이야. 아무런 기반도, 믿을 것도 없는 니놈이 후계자 경쟁에 오른 순간 너는 그나마 발전할 가능성을 다 잘라낸 셈이지. 포기해. 지금 니가 어영부영하면서 눈꼴신 모습을 하면 니놈에겐 마이너스만 된다. 차라리 포기하고 형을 돕겠다고 선언한 다음 성실하게 이미지를 쌓는 게 더 낫지."

나를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는 떠버리.

아무래도 그렇겠지. 갑자기 나타나 자기를 죽이려던 놈이 후계자 경쟁을 포기하라는 소리나 삑삑 해대고 있으니.

자신의 형이 보낸 사람인가 의심스럽기도 할 거고.

"어차피 아버지와 형이 죽으면 그 자리는 니자리가 된다."

"무슨!"

"이상하네? 내가 읽은 책들에선 재벌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이던데? 역시 현실이랑은 다르나?"

"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죠?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형을 도와. 모든 걸 포기하고 전력으로 그들이 이 팩토리에 목숨을 걸게 만들어. 그래야 팩토리가 망해서 사양길로 접어들 때 둘 다 보내버릴 수 있겠지."

눈을 부릅뜨는 떠버리. 녀석은 내가 말한 회귀 스킬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 지금 내가 말한 것들을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설마 이것도 이해 못 하겠어?

눈으로 한번 보여줘야 하나? 페이즈 아웃 세상에서는 보여줄 수 없는 게 아쉽네.

"니가 할 일은 구멍 난 배를 버리고 새로운 배를 찾는 거야. 아무런 견제나 눈치 없이 안전한 배를 찾는 게 급선무지. 그리고 나는 그 배가 뭔지 안다."

궁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녀석. 자기가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 알까?

"대호 그룹. 스마트 팜. 한국 사람들은 쌀 없이는 못 살지."

"대호 그룹…."

"가서 빌붙던지, 아니면 회사 내에서 사업을 시작하던지 그건 알아서 해. 내 알 바 아니지. 하지만 인제 와서 뭘 일구는 것보단 가서 뺏는 게 더 빠를 거야. 물론, 그것도 그럴 능력이 필요하겠지만, 그런 거야 니가 알아서 하는 거고. 한가지 미리 말해주자면, 서두르는 게 좋아. 조만간 커다란 해일이 칠 테니. 그전까진 안전한 배를 구해야겠지?"

"당신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겁니까!?"

할 말은 다 했다. 녀석이 어려서 다행이다. 충분히 흔들린 거 같으니까.

저게 다 연기일 수도 있지만, 그 정도로 치밀한 것 같지는 않다. 연기라고 해도 뭐…. 나에겐 손해 볼 것은 없다.

나는 녀석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렸고, 녀석은 나를 따라온다.

저 녀석. 그렇게 죽을뻔해 놓고 또 잘도 쫓아오네. 멍청한 건가?

아니지. 호기심. 역시 그 호기심 때문이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궁금한 건 못 참지.

사람이 조금 한적한 곳으로 온 나는 광역 스킬 무효화를 걸었다.

둘 다 현실로 돌아왔고, 녀석은 한번 당해서 그런지 그렇게 놀라진 않는다.

여기서 죽일 수도 있지만…. 참아본다. 지금 당장 죽여봐야 그저 목숨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살려두면 조금 더 많은 것을 하겠지. 죽이는 건 나중에 해도 된다.

이 순간을 수없이 후회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이게 맞는 것 같다.

"수납."

내가 수납을 열자 움찔하는 녀석.

초코바 하나를 꺼내 껍질을 깠다.

SG그룹이니 이 초코바의 의미를 누구보다 알 것이다. 지금은 볼 수 없는 것.

나는 그걸 한입 먹고 녀석에게 보여줬다. 내가 뭘 하려는지 잔뜩 궁금해하는 모습.

"회귀. 회귀."

손에 들었던 한입 먹은 초코바가 포장지가 까지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녀석의 눈이 커진다.

좋은 반응이야. 역시 백문이 불어 일견이지.

나는 초코바를 던져줬고 녀석은 바로 받았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손에 든 것을 바라보는 떠버리.

그리고 헬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씨발. 무슨 헬기를 달고 다녀. 안 답답한가?

나는 바로 투명을 쓰고 빠르게 뛰기로 몸을 날렸다.

멀어지는 떠버리의 표정이 마치 꿈을 꾼듯한 표정이다.

내가 준 초코바는 SG그룹의 몰락을 확정해주는 증거물이다. 저걸 보고도 아무 생각이 없다면 그냥 망해도 싸지.

남자를 살려준 것, 흔하지 않은 경험이다.

하지만 이런 식은 처음이다. 청평에 있는 사람들, 펜스의 정 부장. 캐슬에 있는 서…. 암튼. 어린애.

어쨌든 다 내 통제안에 있는 사람들이고 내게 우호적인 사람들.

하지만 저 녀석은 다르다.

물론 곧 기반이 모두 망할 녀석이고 손발이 잘릴 녀석이라지만 이렇게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은…. 사실 내 스타일이 아니야.

훗날 과연 나는 오늘을 어떻게 생각할까?

오늘의 이 변덕이 나름 잘한 일이라고 추억할 수 있을까?

아니면 죽어가는 상황에서 끔찍한 결정이라고 자책할까?

조금 먼 거리에서 모여드는 헬기를 바라본다.

요란한 녀석. 대체 얼마나 중요하길래 저런 보호를 받는 걸까?

아니 일단 SG그룹의 회장 놈이 가장 이해가 안 간다. 왜 저 녀석을 후계자 전쟁에 끌어들였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나 같은 일반인들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

모여드는 헬기 때문에 잠깐 소란스러워진 창고 앞.

멀리에서 가만히 그걸 지켜본다. 그렇게 소동이 끝나고 멀어지는 헬기들.

참나. 저렇게 화려해서야 원, 몰래 다닐 수는 있는 거야?

어쨌든 다시 조용해졌으니 나는 코인 벌이를 계속한다.

간만에 코인을 신나게 빨아먹을 수 있는데 이걸 놓치면 안 되지.

코인도 다시 300만을 넘었고 앞으로 찍을 패시브와 포션 값들을 생각하면 빡쎄게 벌어놔야 한다.

근데…. 아까 떠버리에게 말했던 게 생각난다.

58만 명이라고? 어휴. 최소 2억9천 코인?

평생 코인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니 정말 앞이 캄캄해진다.

중국, 인도…. 인구 10억이 넘는 놈들.

게다가 거긴 인권도 없다. 나라 비슷한 게 있을 때도 없었는데 지금은 어떨까?

소름 돋네. 진짜.

지금 이순간에도 누군가가 코인을 쓸어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오한이 들정도다.

그런거지. 니렙에 잠이오냐?

그렇기에 코인벌이를 소홀히 할 수 없다. 더 죽여야지. 빨리빨리 죽여서 우위에 서야 해.

어차피 한 번만 삐끗하면 죽어버리는 세상이다.

결국은 기동성 그리고 사거리.

스킬 하나를 마스터 할 때마다 찍을 수 있는 패시브. 이게 핵심이다.

상대보다 1센치라도 먼저 스킬을 걸 수 있는 사거리.

스킬 숙련을 쉬어선 안 돼. 코인이 아무리 많아도 스킬 숙련 속도에는 한계가 있다.

그건 뒤처져서는 안 된다. 절대로.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창고, 그러니까 SG 센터.

맘에 드는 먹잇감을 포착하고 따라가서 죽인다.

이 짓도 회귀 스킬이 풀리면 더는 할 수 없어. 그러니 지금 잡을 수 있는 놈들은 부지런히 잡아야 해.

저녁 10시. 센터가 문을 닫았고 나는 마지막 사냥감을 찾아본다.

가장 늦게 나오는 남자 두 명. 저놈들을 오늘의 마지막 사냥감으로 하자.

뭐가 그렇게 좋은지 껄껄거리고 웃으며 차에 타는 남자 둘.

뭘 샀을까? 남자들이 뭐 살 게 있다고 여기까지 오지?

고민과는 별개로 몸은 움직인다. 녀석들도 세종에 사나? 고속도로로 안 가고 국도로 가는 녀석들.

고맙네. 그러면 처리하기 편하지.

세종 사는 놈들이 맞나 보다. 아까 잡았던 놈들하고 비슷하게 가네.

남자들만 있는 파티는 잡기가 편하다.

굳이 뭘 물어보고 할 필요가 없잖아?

과속방지턱을 넘기 위해 속도를 줄였을 때, 녀석들의 머리 위에서 수납을 열었다.

낮에 넣어놨던 픽업트럭이 아찔한 높이에서 떨어져 녀석들의 차를 덮친다.

그리고 안에서 연속으로 터지는 빛. 차를 찍은 픽업트럭이 기우뚱하며 옆의 인도로 떨어진다.

쿠웅

[84,559 코인을 획득했습니다.]

[121,442 코인을 획득했습니다.]

오늘의 영업 끝.

떠버리와 헤어지고 이놈들을 포함해서 네 팀을 잡았다.

조금 전 까지 수익이 72만이었는데 이놈들을 잡고 92만이 되었다.

아까 낮의 놈들까지 합치면 더없이 짭짤한 수익들.

이거 당분간은 여기서 꼼짝을 못하겠네. 수익이 이렇게 높아서야 원….

벙커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게 번거로울 뿐이지 이렇게 좋은 곳이 없어.

이제 돌아갈 시간.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하루 더 있다가 내일 가고 싶지만, 벙커의 여자들에게 포션을 리필해줘야 한다.

오늘은 집에 가서 쉬고 내일부턴 이틀에 한 번씩 돌아가야지.

하늘을 날아 고속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간다.

아. 가기 전에 대호네 벙커도 좀 들렀다 가볼까?

뭐 다른 게 더 있을 수 있잖아? 거기 동향은 매번 확인해놓는 게 좋지.

매번 오고 갈 때마다 들러서 확인해 봐야겠다. 루트 괜찮네.

비행장. 주변에 아무도 없는 기척. 그리고 지하에서 느껴지는 기척들.

페이즈 아웃을 쓰고 그대로 쭉 내려간다. 11시가 넘어서 그런가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없다.

밤이 이르네? 하긴 지금은 사람들을 밤늦게까지 있게 할 것들이 별로 없지.

다시 아래층.

여기도 조용한 분위기. 회장 녀석의 방으로 가보니 커다란 침대에 회장 놈이 누워있고 여자 둘이 양쪽에 붙어서 자고 있다.

에휴. 진짜 이러고 사는 거야? 대단하네.

상무. 아까 운동하던 탱탱한 여자와 자고 있다.

부부가 맞긴 한가 보다. 한침대에서 자고. 나름 금실이 좋은가 봐?

딱히 더 볼 건 없으니 마지막 방으로 간다.

음…. 좋은 풍경이네.

성깔 있어 보이던 젊은 여자.

미간을 찌푸리지 않고 있는 걸 보니 훨씬 보기 좋다.

아니…. 속옷 차림으로 이불을 차부치고 자고 있어서 보기 좋은 건가?

이쁘장한 여자가 인상도 안 쓰고 이렇게 무방비로 자는 걸 보니…. 음흉한 생각이 든다.

한번 할까? 어차피 자고 있을 때 해버리면 모를 텐데.

세상이 망하고 수면을 배우고 질리도록 하던 짓인데…. 최근 들어서는 거의 한 적이 없다.

언제 마지막으로 했지? 기억도 안 나네.

거…. 진영이 동생 현정이 때가 마지막인가? 암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걸 그대로 넘어가면 병신이겠지?

크흠. 병신이 될 수는 없지.

페이즈 아웃을 해제했다.

고요한 세상에 있다가 소리가 있는 세상으로 돌아오자 느껴지는 현장감.

낮게 돌아가는 환풍기 소리, 작게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 그리고 느릿한 여자의 숨소리.

무효화를 한번 쓰고 수면을 걸었다.

좋아. 이제 이러면 쉽게 깨지는 않을 거고.

혹시 모르니 투명화와 반사, 비행은 켰다. 비행을 켜도 난다고 생각만 안 하면 평범하게 행동은 가능하니까.

그리고 잠자는 여자의 곁에 가서 앉았다.

음…. 이러고 보니 이쁘긴 이쁘네.

대체 이 여자는 정체가 뭘까? 지갑 같은 거 없나? 신분증을 보면 될 텐데.

몸을 일으켜 방 앉을 조금 살펴봤다. 괜히 만졌다가 흩트리고 싶지는 않아서 함부로 만지지는 않는다.

근데 딱히 정체를 알 수 있는 건 없다. 왜 지갑도 없는 거야?

됐어. 알게 뭐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곤히 자는 여자. 허벅지를 한번 쓸어내려 본다.

아. 좋네. 물건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그럼 슬슬…. 맛을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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