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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323화 (323/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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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입

두근두근하는 마음.

그렇게 벙커를 다녀봤지만, 사람이 사는 벙커는 들어가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여기는 대호 그룹의 오너 일가가 있는 거로 추정되는 벙커.

사실 그렇게 큰 기대를 하고 있진 않다.

오너 일가라고 해서 한 명당 막 백만 코인씩 들고 있진 않을 거 아냐.

그래도 뭔가 있긴 있을 거다. 설마 시시하게 별거 없거나 해서 실망하게 하진 않겠지.

적어도 나 같은 소시민이 놀랄만한 무언가가 있긴 있을 텐데.

들어가기 전에 일단 탐지를 잘 살펴본다.

방금 차 타고 온 남자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지 기척 하나가 아래로 쭈욱 내려간다.

출입구는 하나인가? 그것도 엘리베이터?

그럴 리는 없을 텐데. 너무 위험하잖아? 엘리베이터 하나만 정지시키면 그대로 안에 고립이라고?

하물며 토끼 같은 놈들도 입구를 세 개씩 뚫어 놓는데…. 그럴 리는 없다.

뭐, 어차피 나야 입구로 다니는 놈이 아니니까 크게 상관은 없지만.

아래쪽…. 탐지로 보니 거리감이 잘 안 잡힌다.

얼마나 깊은 거야? 상당히 깊은데? 역시 내려가 봐야 알겠지. 여기서는 파악하기 어렵다.

그럼…. 간다. 페이즈 아웃. 그리고 다이브!

어두운 시야. 땅속으로 쭉쭉 내려가는 나의 몸.

이제 이 짓도 참 익숙해졌어. 쓰는게 참 자연스러워.

주변이 밝아졌다. 뿌옇긴 하지만 주변은 고급스러운 방이다.

비어있는 방. 빈방…. 맞지?

탐지에 익숙해져 있다가 페이즈 아웃을 쓰면 바보가 되는 느낌이다.

탐지에 의존도가 너무 높아.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나는 진화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퇴화하고 있는 걸까?

어쨌든 스킬을 쓸 수 없기에 맨눈으로 방안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그럼…. 잠깐만 풀어보자.

해제. 투명화, 탐지.

순식간에 스킬들을 쓰고 주변을 돌아본다.

두 개…. 아니 세 개의 층. 사람은 한 서른 명?

위에서 볼 때는 평면으로 기척이 느껴졌는데 여기 와서 보니 입체라서 더 많아 보인다.

자. 일단 확인했으니 됐다. 다시 페이즈 아웃.

소리는 들을 수 없지만 그래도 이게 제일 안전하다.

물론 그 믿음도 페이즈 아웃 쓴 사람들끼리 만날 수 있다는 걸 알면서 많이 희석됐지만, 그래도 이만한 스킬이 없잖아.

천천히 벙커 안을 둘러본다. 익숙한 구조. 몇 번 봤던 구조잖아.

총 세 개의 층. 맨 위의 층과 중간층은 청평에 있는 벙커와 아까 공원 밑에 있던 벙커랑 크게 다르지 않다.

중앙이 뻥 뚫려있고 가장자리에 방들이 있는 구조.

이제야 이해했다. 이놈들은 벙커 시공 회사에 벙커를 만들어달라고 해놓고…. 그걸 그대로 베낀 거다.

아니지 어레인지라고 해야 하나? 만들어진 벙커를 참조해서 더 좋게 만든 거야.

공원에 있는 벙커는 그런 거다. 자신들이 참고하려고 전문 업체를 시켜서 만든 샘플.

역시…. 돈많으면 이런 짓도 가능하구나.

그리고 웃긴 건 2층과 3층에는 정장 입은 녀석들만 있다는 거다.

아…. 정말 정장 진짜 좋아하네. 컴퍼니 놈들이 생각나잖아. 아니지…. 컴퍼니 놈들이 여길 따라 한 게 맞을 거다.

그러고 보니 그 컴퍼니 대표라고 했던 놈. 묘하게 이놈들 하는 짓이랑 비슷하네.

정장을 고집하는 거랑 수납이 있는 거, 회사 직급을 그대로 쓰는 거, 사람을 모아서 캐슬에 보내고 식량을 받는 거.

그러네. 그 새끼…. 분명히 이 시스템을 본 거구나.

아는 놈이었어. 대호든 SG든 이 실상을 알고 있던 거야. 하긴 민희도 청주에 와봤다고 했지?

결국, 이 거대한 시스템에 감명받은 녀석이 자기도 해보겠다고 빠져나가서 뭔가를 꾸민 거였구나.

이제야 이해했다. 나는 그놈이 똑똑한 건 줄 알았는데…. 그냥 카피캣이었어. 그것도 상당히 열화 판으로.

용의 꼬리가 되느니 뱀의 머리가 되고 싶었던 걸까?

음. 그래. 시도는 괜찮았다. 다만…. 뱀은 뱀이다. 마체테를 든 놈한테 갈가리 난도질당했지.

그럼 과연 마체테는 용도 잡을 수 있을까?

모르겠네.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2층과 3층은 크게 볼 건 없었다.

정장 입은 놈들. 그래. 결국, 이놈들은 사용인이다. 부속품들. 이 아래에 있는 녀석들을 위해 존재하는 시종.

그렇다면 여기보단 중요한 곳을 봐야지. 아래층. 망설일 필요 없다. 바로 내려가 본다.

1층. 뭐라고 해야 할까? 여기 내려오니 확실히 느껴졌다.

2층과 3층에 있는 녀석들은 1층 여기에 있는 녀석들을 위해 있다는 게 확실해졌다.

물론 위의 두 층도 제법 고급스러웠다.

5성급 호텔과 같은 느낌의 정갈함.

하지만 여기는 다르다. 정말 궁궐 같다는 느낌이 확 든다.

2층과 3층을 합쳐놓은 곳보다 커다란 공간. 그리고 뻥 뚫린 중앙에는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유리 벽 안쪽에 자라고 있는 식물들. 그러니까…. 정원?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 식물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다.

페이즈 아웃으로 보니까 실감이 잘 안 나네. 일단 어디에 사람이 있는지는 확인해 봐야 하니 페이즈 아웃을 해제해 봐야겠어.

괜히 방으로 들어가면 나올 수가 없으니 구석진 곳 사각에서 주변을 잘 살펴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해제를 했다.

바로 투명화, 비행, 반사를 걸고 살짝 몸을 띄웠다.

발걸음을 내지 않는 실내 비행. 숨어들어왔으면 이 정도는 해야지.

그리고 탐지. 이 층에 있는 사람은 여섯.

가운데 방 안쪽에 세 명.

왼쪽 방에 한 명. 오른쪽 방에 각각 한 명씩.

음…. 다들 방 안에 있네. 일단은…. 밖을 돌아볼까?

그리고 아까 있던 곳으로 나와서 나는 눈을 의심했다.

식물이 있던 곳. 그러니까 유리 안쪽.

거기의 위쪽에 하늘이 보였다.

아니…. 씨발? 이게 말이 돼? 분명 내가 위층에서 내려왔다고. 저기에 어떻게 하늘이 보일 수가 있어?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가까이 가보니 그제야 하늘의 정체를 알았다.

모니터. 아니지. 디스플레이 장치라고 해야지. 고급스럽게.

유리 벽 안쪽,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정원의 하늘은 디스플레이였다.

그러니까 영상이라는 소리다. 은은한 자연광처럼 보이는 화면.

너무 자연스러워서 저 하늘이 진짜라고 생각될 정도.

그래…. 이정도는 해야 이런 지하에 처박혀있으면서도 정신건강까지 챙길 수 있구나.

아예 나오겠다는 의지가 없는 거다. 이 안쪽에서 바깥과 흡사한 곳을 만들고 짱박혀 있겠다는 생각.

그래 뭐…. 이 수준으로 구현해 놨다면 인정해 줘야지.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그렇게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이 커다란 공간을 여섯이서 쓴다고? 역시 대호 그룹의 오너 정도 되면 이 정도는 기본이라는 건가?

보안과 안전, 건강까지 모두 챙긴다 이거지. 정말 놀랍네.

그렇게 구경을 하는데 갑자기 땡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일단의 사람들이 내린다.

호텔 룸서비스같이 카트를 끌고 오는 정장 입은 사람들.

세 개의 카트가 가운데 있던 방으로 향한다.

식사시간인가? 그러네. 벌써 점심시간이야.

음식 냄새가 확 풍겼고, 나도 허기가 올라오는 게 느껴진다.

이건 무슨 냄새냐. 찌개 같은데.

가운데 방이 열리고 고급스러운 방 안쪽이 잠시 보였다.

카트 세 개가 줄지어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빈 카트로 나왔다.

그리고 다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또 카트 세 대가 내려왔고, 왼쪽 방, 오른쪽 방 두 군데로 각각 카트가 향했다.

먼저 내려왔던 카트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고, 나중에 내려왔던 이들도 빈 카트를 가지고 올라간다.

흐음…. 궁금하네. 노오오오프신 분들은 대체 뭘 먹나 볼까?

페이즈 아웃을 쓰고 가운데 방부 터 들어갔다.

방금 카트가 들어와서 그런지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 스테이크, 샐러드, 그리고 여러 가지 음식들.

그리고 벌거벗은 아저씨…. 아니, 노인? 그리고 그 품 안에 안긴 젊은 여자.

그런 노인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또 다른 젊은 여자.

게다가 저 아저씨, 아니 노인, 아니 중년으로 하자. 하여간 저 남자는 나도 알고 있는 얼굴이다.

대호 그룹의 회장. 최치호.

이야. 씨발. 행복한 삶을 살고 있구나?

벌거벗고 젊은 여자 몸뚱이나 만지면서 떠먹여 주는 음식이나 받아먹고 있다고?

새끼. 남자의 로망이 뭔지 확실히 아는 놈이네. 거의 환갑이 다 돼갈 텐데. 정력적인 삶이야.

아무렴. 저렇게 살아야지. 뭐 부족한 게 있겠어?

근데 부럽다기보단 살짝 추하다.

한심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여자를 탐하는 게 잘못까진 아니겠지만, 이런 깊은 곳에 몸을 숨기고 여자의 시중이나 받아가면서 짱박혀 있는 것.

결코, 좋아보이진 않는다. 그저 남은 삶을 이렇게 살다 뒤지겠다는 듯한 느낌.

그래. 내가 단편적인 부분만 봤을 수도 있지. 평소엔 밖에서 열심히 진두지휘하다가 오늘만 쉬는 날일 수도 있잖아?

넘어가자.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일단 오늘은 탐색전이니까.

방에서 나오고 이제 어느 방으로 갈지 선택할 시간.

일단 가까운 방부터 가본다. 어디…. 여긴 누가 있나 볼까?

방에 들어가니 여기도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최정규. 최치호의 아들. 최 상무.

그는 넓은 방 한가운데 있는 책상에서 넓은 모니터 화면을 보고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움직이는 입.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모니터 화면도 페이즈 아웃 상태에선 알 수 없으니 그냥 일하고 있다고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얘는 좀 정상인 같네.

마음 같아서는 페이즈 아웃을 풀고 뭘 하고 있나 보고 싶지만, 다른 방을 둘러보는 게 우선이다.

방 옆 식탁에는 방금 들어온 이들이 차려놓은 음식들이 보였다. 끼니도 미루고 일이라니. 대단한데?

다음 방. 안에는 여자 하나가 크롭티와 레깅스를 입고 운동을 하고 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여자. 근데 겉으로 보기엔 젊어 보인다.

대신 그게 없다. 젊은 여자에게서 나오는 싱그러움.

아마도…. 관리 잘한 30대. 그리고 내 추측으로는 최 상무의 부인.

지금 이 순간에도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건가? 흠. 노력이 가상하네.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샐러드와 토마토, 삶은 달걀.

본격적이네. 대단해.

이제 남은 건 방 하나.

가벼운 마음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벽을 넘어가니 밥을 먹고 있는 젊은 여자가 있었다.

정갈하게 차려진 한식. 여러 개의 반찬과 밥, 국.

근데 메뉴엔 솔직히 별 관심이 안 갔다.

여자. 상당히 이쁘다. 깜짝 놀랄 정도로.

물론 안나 정도까진 아니지만, 미나랑 비슷할 정도는 되는 거 같다.

그러니까 어지간한 아이돌을 싸대기 칠 수 있을 정도?

게다가 살짝 성깔 있어 보이는 외모다. 그런 거지. 이쁘긴 한데 웃고 있는 것보다 인상 쓰고 있는 날이 더 많은 여자.

불평불만이 가득하며 짜증 내는 날이 더 많은…. 그런 여자?

음…. 이쁘긴 한데 내 스타일은 아냐.

근데 누구지? 누군지를 모르겠다.

최 상무의 딸이라고 하기엔 나이가 많다.

그럼…. 최 회장의 딸인가? 그러기엔 나이가 조금 안 맞지 않나? 늦둥이?

그러고 보니 밖에서 봤던 최 이사 그놈도 가족관계가 약간 이상하다.

최 회장의 조카들인가? 어렵네. 평소에 좀 관심을 가질 걸 그랬나?

어쨌든 여기 있는 걸 보면 중요한 인물이긴 한 거 같은데.

됐어. 뭔가 중요한 사람인가 보지. 뭐 볼 건 다 봤다.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놈들.

생각보다 방비가 부실하다. 벙커를 믿고 있는 건가? 사람들을 저렇게 많이 쓰면서?

페이즈 아웃의 존재를 모르는 걸까? 아니…. 어떤 스킬인지는 알 거다.

그리고 벽을 뚫는 것 정도는 알겠지. 근데 위아래까지는 생각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쉽게 상상하기는 어렵지. 벽을 뚫는 것과 허공에 계단을 만든 것은 아예 차원이 다르다.

있는 것을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필요한 상상력의 급이 다르다.

거기에 자신에 대한 믿음과 이러한 원리까지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겠지.

나야 감명 깊게 봤던 소설에서 힌트를 얻어 이렇게 쉽게 쓰긴 했지만…. 베이스가 없는데 거기까지 하긴 쉽지 않았을 거다.

그 떠버리 놈도 그랬잖아. 젠장…. 생각해보니 그놈한테 너무 대단한 걸 유출한 거네.

씨발. 그 새끼를 빨리 잡아 죽이든지 해야겠네. 생각할수록 짜증 나.

자. 이제 고민을 좀 해야 한다.

거의 손에 넣다시피 한 대호 그룹의 오너 일가.

어떻게 써먹어야 잘 써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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