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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
"너. 코인 얼마나 있지?"
"31만 7천…."
"끝까지 다 안 불러도 돼."
"네."
30만이 넘는다고? 새끼. 존나 모아놨네. 하긴 그럴 만하다. 이놈의 말을 들어보면 오너 가족들이 믿을만한 인물인 거 같으니까.
역시 노비를 해도 대감댁 노비를 해야 하는 거야. 그래야 콩고물이 우수수 떨어지지.
"정 부장님."
"네?"
"스킬 마스터라고 했죠?"
"저요? 네. 마스터입니다."
"기절이랬나요?"
"네."
잠시 생각하고 결정을 확인한다. 31만. 적지 않은 코인이지만 이런 기회도 흔치 않다.
팀장 놈을 재우고 정 부장을 보고 말했다.
"이놈. 정 부장님이 죽이세요. 나오는 코인 얻으시고 스킬 배워요."
"네?"
"쉽게 오지 않는 기회에요. 이정도 코인을 단번에 얻기는 힘들어요. 만약 펜스에 무슨 일이 난다면 가장 보호해야 할 사람은 정 부장님이에요. 그러니 생존 스킬로 얻어요. 투명화나 가속화. 아니면 비행. 아니다. 비행은 투명화 없으면 효과가 반타작이니 됐고."
"그래도 됩니까? 30만이 적은 코인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정 부장님에게 기회라는 거에요. 지금 아니면 언제 스킬 배울 수 있을지 기약이 없어요. 그리고 지금 스킬을 마스터 해야 수납을 배울 수 있죠."
"아아…. 수납 소리를 들으니 거절할 수가 없네요."
살림을 도맡아 하는 정 부장이면 수납 스킬은 효율적으로 잘 쓸 거다.
게다가 내가 쓰는 방법도 알려줬으니 어지간한 중장비 역할도 할 수 있고.
그러려면 스킬을 배우게 해야 한다. 그의 생존은 펜스의 존속과 직결되니까.
정말 잔인하게 말해서 다른 사람들은 전부 대체나 교체할 수 있지만, 정 부장 저 사람은 아니다.
무조건 지켜야 할 대상 1순위.
그의 수완과 능력, 그리고 인품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다.
"알겠습니다. 저도 기회를 막 발로 차는 놈은 아니니까요."
그러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정 부장.
나는 수납에서 마체테를 꺼내서 내밀었고, 그는 주저 없이 받았다.
"후우."
팀장의 앞에서 심호흡하는 부장. 의외네. 사람 죽이는 게 익숙해 보이질 않잖아?
여긴 선별이란 걸 했을 텐데…. 본인은 끼어들지 않은 건가?
"흡!"
그의 마체테가 팀장의 목을 찔렀다.
사람을 죽이면 그동안 썼던 코인이 뿜어져 나왔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지. 그랬다면 세상에 남은 사람은 지금보다 십 분의 일도 남지 않았을 거다.
"코인이 익숙하지 않은 숫자가 됐네요."
"금방 쓸 텐데요. 뭐."
"그래도요. 하하."
그래도 사람을 죽이고 웃을 여유는 되나 보네. 하긴 죽여놓고 벌벌 떨만한 사람은 아니다.
그 정도로 나약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곳은 운영 못 했겠지.
나는 그렇게 정 부장과 이야기 하다가 채원이를 봤다.
아무 표정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
매혹은 아까 풀렸고, 지금은 그녀의 원래 상태.
그녀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물어봤다.
"나에게 실망했어?"
내 질문을 들은 채원이 그제야 표정이 풀린다.
"글쎄요. 실망까지는 아니지만…. 사람을 막 죽이는 걸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하죠. 근데 또 머리로는 이해해요. 당신이 틀린 게 아니라는걸. 뭐라고 해야 할까요. 누구나 정답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껄끄러워 말하지 못하는 걸 여과 없이 내뱉는 사람?"
"넌씨눈이네."
"아니요. 그런 거 말고…."
그러면서 피식 웃는 채원. 그래 웃어야지. 웃어야 이쁘다. 표정을 굳히고 있으면 이마에 주름만 생겨.
"나도 나를 이해하라고 말하진 않아. 그렇다고 너희들의 눈치를 보지도 않지. 그냥 가장 좋은 방법을 택할 뿐이야."
"그래요. 그게 문제에요. 당신은 정말 적이 많을 타입이에요."
"아냐. 없어. 다 죽었거든."
그래. 채원이의 말이 맞다. 그리고 나는 내가 만든 적들을 계속해서 상대할 만큼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다.
라이벌과의 엎치락뒤치락하는 경쟁, 상대방과의 치열한 결투, 모두에게 인정받는 대결…. 그런 건 내 타입이 아니다.
싸우기 전에 죽이고, 싹이 자라기 전에 짓밟고, 나중에 내 앞길을 막기 전에 미리 목을 쳐버리는 타입.
정의로움 같은 건 사치고, 로망이나 서사, 당위성이나 개연성. 그딴 건 필요 없다.
문제가 생기기 전에 뿌리 뽑는 것. 그게 내 방식이다.
그래서 죽이는 거고. 죽은 자는 복수할 수 없으니까.
나를 보는 채원이의 표정이 살짝 질린듯하지만, 그래도 그 안에는 아직 호의가 남아있다.
놀라워 정말. 이런 나라도 이해해준다니.
이러니 복수를 원하는 미녀는 넘어가지 못하는 거다.
복수가 주는 효과는 어마어마하니까. 심각한 콩깍지를 장착시켜주잖아.
마음 같아선 그녀를 안고 싶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오늘은 그만 가야지. 회귀 산타 쑈는 다음 기회에 하자.
"그럼…. 스킬 잘 정해서 배우시고, 저 생필품들 잘 배분해서 쓰시고. 아. 저 생필품들 한 개씩은 다 남겨놔요."
"한 개씩요? 가져갈 겁니까?"
"아뇨. 나중에 필요해질 거에요. 그리고…. 뭐 하나 부탁 좀 합시다."
"네. 말만 하세요. 성철 씨 부탁이면 뭐든 하죠."
나는 그에게 여러가지 쓰레기를 부탁했다.
아이스크림 통, 음료수 페트병, 과자 봉지 등등.
정 부장은 내가 원하는 것이 왜 필요한지 전혀 이해를 못 했지만, 굳이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저 잔뜩 모으라는 이야기만 했고, 그는 그러겠다고 대답한다.
이런 걸 보면 참 편한 사람이야. 역시 꼭 있어야 할 사람.
"이만 갑니다. 채원이도 잘 있어."
"조심히 가세요."
"다음에 봐요."
차를 탈까 비행으로 갈까 하다가 비행으로 가기로 했다.
차가 따듯해서 좋긴 한데…. 운전하는 것보다 비행이 편하다.
전기차를 수납에 넣고 하늘로 솟구친다.
날이 추워도, 바람이 차가워도 하늘을 나는게 기분 좋다.
물론 하이바랑 침낭은 둘러야 하지만 그래도 이게 낫다. 자유로움이 있으니까. 그리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움직일 수 있잖아.
일단 목적지는 정해졌다. 수원. 대호 그룹.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고 싶다. 분명 대단하겠지?
내가 청주에서 봤던 그 떠버리. 그 새끼도 분명 오너 일가든 아니면 매우 중요한 놈일 거다.
그놈 하나를 위해 헬기가 네 대나 떴다. 그런 놈을 별거 아닌 놈이라고 생각하면 이상한 거겠지.
가서 그놈을 다시 까보고 싶지만…. 지금 거기는 벌집 쑤신 꼴일 테니 일단 놔둔다.
조금 잠잠해질 때까지 다른 곳을 돌아보자. 지금은 대호부터 가자.
그러기 위해선 준비를 좀 하고 가야지. 잠을 푹 자고 가야 해.
가서 얼마나 걸릴지 모르잖아. 잠은 리필하고 가야지.
씨발. 잠이 리필이라니. 거지 같은 불면증.
그렇게 벙커로 돌아오자 어느 때보다 나를 반기는 여자들.
"왔다!"
"오빠! 나 이거!"
"난 이거랑 이거. 이것도."
"나도 이거 해주세요."
내가 좋은 거야? 내 회귀가 좋은 거야?
약간 섭섭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웃고 있는 여자들을 보니 섭섭함은 사라진다.
얘들이 일부러 이러는 걸 알잖아. 장난인데 진지하게 받으면 내가 속 좁은 놈이지.
게다가 회귀하는 게 뭐 어려운 것도 아니고. 어차피 숙련도 오르니까.
그렇게 하루를 푹 쉬었다.
먹고 싶은 것들을 잔뜩 먹고도 살찔 걱정을 안 해도 되는 여자들은 정말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런 그녀들에게 포션을 잔뜩 사서 나눠줬다.
찬물을 끼얹은 듯한 분위기.
"큭. 아냐. 그래도 나는 행복해! 아이스크림과 함께라면 이정도 포션은 우습지!"
결연한 세아의 외침. 그리고 승희와 미나도 그런 세아의 말에 '우오!' 이러면서 호응한다.
회귀…. 괜히 찍었나 봐. 애들 상태가 조금 이상해지는 거 같아.
"뭐라고 하는 거예요?"
안나가 나를 보고 넌지시 물어본다.
아직도 안나가 말하는 걸 똑똑히 들을 수 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난다. 가끔 정말 신기하게 생각될 때가 있어.
"포션 먹기는 힘든데 아이스크림과 함께라면 괜찮데."
"세아답네요."
말을 알아듣기 전의 안나는 약간 맹한 느낌이었는데, 말을 전부 알아듣게 되니 안나는 생각보다 차분하다.
그래도 해맑게 웃어주는 모습은 여전하니 상관없지. 그녀가 변한 건 아니니까.
"포션을 준다는 건 나간다는 뜻이죠?"
"맞아. 가볼 데가 있어."
"언제쯤 당신이랑 함께 나갈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 내 손을 쓰윽 잡는 안나.
이 아가씨는 한시라도 빨리 내 도움이 되고 싶나 보다. 근데 내가 봤을 때는 그러려면 한참 멀었다.
그래도 그 마음이 고맙기에 살포시 그녀의 허리를 두르고 말했다.
"투명화랑 비행 정도는 마스터 해야지. 그리고 공격 스킬도 하나 정도는 있어야겠네. 한참 멀었어."
"열심히 포션을 먹는 수밖에 없네요."
그렇게 빙긋 웃더니 자리를 잡고 앉아서 스킬 숙련을 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차분한 포지션은 미나의 역할이었는데. 뭔가 바뀐 거 같아.
그런 안나를 보더니 미나가 후다닥 자리에 앉는다.
"안나! 혼자 시작하면 어떻게 해!"
그러더니 힐끗 나를 보는 미나.
재밌는 여자들이야. 하긴…. 아무리 성인이라고 해도 이들은 이제 20대 초반의 여자들이다.
게다가 실제 사회 연령은 더 어리다. 오히려 차분하고 진중한 게 이상한 거지.
"나는 그럼 나갔다 올게."
"이번엔 얼마나 걸리는 데요?"
승희가 내게 와서 물었고 미나 역시 나를 바라본다.
세아는 아이스크림을 한입 입에 물었다가 슬금슬금 주변 분위기를 보더니 조용히 숟가락을 내려놓고 뚜껑을 닫았다.
"왜 이렇게 진지해? 그리 오래 안 걸릴 거야. 별일 없을 테니 걱정 마. 금방 돌아올게. 뭐, 오늘 당장 오지는 않겠지만."
"조심히 다녀와요. 아닌 척해도 오빠 나갈 때마다 다들 상당히 예민해진다고요."
그래. 그건 알고 있다. 별거 아닌 외출이라도 돌아오리라는 보장이 없는 행위.
나갈 때 봤던 모습이 마지막 모습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
승희는 그나마 나와 오래 있었기에 익숙해졌다고 하지만, 나머지들은 안 그럴 거다.
예상보다 늦어지면 불안해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내가 귀가할 때마다 저렇게 오바를 하는 거겠지.
"걱정 마. 너희 두고 절대 안 죽어. 무사히 돌아올 테니까 맛있는 거 먹으면서 기다려."
"알겠어요. 다녀와요."
졸지에 신파를 찍게 됐지만, 뭐 그 심정을 모르는 게 아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볍게 벙커를 나섰다.
그러는 편이 저들에게 조금이라도 걱정을 덜어주겠지.
자…. 쉴것도 다 쉬었으니 바로 날아간다. 목적지는 수원.
문제는 죽어버린 팀장 그놈도 오너 일가가 어디에 사는지 모른다는 거다.
하긴 그게 당연하다. 보안은 중요한 거니까.
자기 목숨 중요한 걸 절실하게 아는 사람이라면 응당 해야 하는 짓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놈들은 자세가 됐다. 맘에 들어.
겉으로 드러내놓고 아무리 방어를 좆빠지게 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
어차피 지키는 것도 사람. 아무리 믿음과 신뢰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결국 사람이다.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냐.
스킬 한방이면 골로 보낼 수 있는 세상, 게다가 시체도 남지 않는다.
빈틈은 언제나 만들어질 수 있고 눈앞에서 탐스러운 과실이 살랑거린다면…. 딴마음 품는 건 한순간이지.
그럴 바에는 아예 꼭꼭 숨기고 사는 게 맞다. 당연한 거야. 그게 가성비적으로 훌륭해.
대놓고 도전 의지를 불태우게 하는 놈들은 병신이야. 그럴 필요가 전혀 없어.
어쨌든 가본다. 나에겐 매혹과 탐지가 있으니까.
아무리 꼭꼭 숨어서 산다고 하더라도 노출을 할 수밖에 없는 놈들이다.
그게 나와 그들의 차이.
양지에 있는 놈들이 아무리 음지로 숨어봐야 티가 날 수밖에 없다.
완벽한 보안은 없어. 그걸 역추적해본다.
안되면 수원 전체를 탐지로 훑어서라도 찾아보면 되지 뭐.
평상시에 페이즈 아웃으로 숨어 살 것 아니라면 탐지를 벗어날 방법 같은 건 없다.
그리고…. 나는 이런 노가다에 익숙하다. 지난 5년간 해온 게 이 짓이니까.
청주에 비하면 수원은 앞마당 같은 곳이다. 별로 멀지도 않다. 한 시간도 채 안 걸리는 거리.
수원에 와보니 생각보다 고요하다. 청주를 보고 와서 그런가? 침묵의 도시 같다.
예상했던 풍경이 아닌데? 음…. 생각보다 썰렁해.
뭐, 수원에 있다고 했으니 뒤지면 있겠지. 그나저나…. 팀장이 말했던 곳이 어디려나.
팀장은 자신이 가져온 물건들을 가져다 놓는 곳이 있다고 했다.
일단…. 거기부터 가보자. 거기라면 뭐라도 있겠지.
에휴. 겨울이 끝나질 않네. 이번 겨울은 정말 역대급으로 긴 겨울이야. 끔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