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317화 (31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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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사람은 다 정리했으니 다른 것들도 뒷정리해야지.

뭔가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진 않다. 여기선 아무 일도 없던 거야.

시체가 남지 않는다는 것은 그게 좋다.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방법이 없다는 것.

길을 막았던 콘크리트 덩어리들은 대충 길옆으로 치워놨다. 이대로 막아놓으면 다른 차들이 못 다니잖아.

그리고 반파된 SUV…. 이건 어쩌지. 이대로 놓을 수는 없다. 이건 나름 활용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어찌 됐건 이 차는 대호 그룹 놈들의 소유다. SG와 대호 놈들을 서로 싸움 붙일 수 있는 도화선이 될 수 있을 거 같단 말이지.

근데 쉬운 건 아닐 거다. 쓸 수 있을지 없을지도 잘 모르겠고.

세상일은 내가 꾸미는 대로 다 이루어질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하지만 나에게 손해 볼 것은 없지.

되면 좋은 거고 안 되면 마는 것. 밑져야 본전. 마음 편하게 일을 꾸밀 수 있다.

일단 SUV는 챙겨놓기로 했다. 필요할 때 잘 쓸 수 있도록 잘 짱박아야지.

수납에 넣어서 날아가 근처에 보이는 주차장에 잘 세워놨다. 그렇게 두 대를 다 치워놓고 내 전기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보통은 차를 타고 가는 게 정상일 텐데 수납에 담아 비행으로 날아가는 게 너무 웃긴다.

근데 이게 더 빠르거든. 이거라면 고저를 무시하고 직선으로 금방 옮길 수 있으니까.

그렇게 전기차를 꺼내고 팀장 놈을 전기차로 옮겨 실었다.

그리고 남은 멀쩡한 SUV도 아까 두 대를 가져다 놓은 주차장에 함께 놨다.

자. 이제 처리는 됐고.

스킬 지속시간 증가로 인해 수면시간이 40분으로 늘어난 것도 나름 좋다.

아직도 자고 있는 팀장.

수납 스킬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아까 짐을 넣은 양을 보면 마스터라고 생각되는 녀석.

그러면 네 번째 스킬이 있을 거다. 아니면 더 있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이놈은 여러모로 유용한 녀석이다.

거대한 댐에 구멍을 낼 수 있을지 모르는 도구. 물론 그 구멍이 댐의 붕괴까지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말이지.

뭐 그게 아니더라도 이놈의 수납에 들어있는 물건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하다. 함부로 죽일 수 없어.

문제는 순순히 말을 들을 리가 없다는 것.

역시 이럴 때는 매혹이 최고지. 남자라는 게 문제지만…. 뭐 나는 매혹을 가진 여자들을 많이 알고 있으니까.

일단 수면을 한 번 더 리필해놓고 잠시 생각해본다.

이놈을 잡았으니 정보를 빼내는 게 우선이지만, 일단 여길 더 보고 싶긴 한데.

특히 아까 창고. 거기는 한번 봐두고 싶다.

차가 여기 있으면 조금 의심스러울까? 음…. 아니다. 내가 맘에 안 들어. 이렇게 허술하게 일 처리 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만에 하나라도 위험할 수 있는 일은 치워야지.

차를 몰아서 오창 휴게소로 향했다.

그리고 발견하기 쉽지 않은 곳에 차를 주차해뒀다. 그리고 주변을 탐지로 돌아본다.

아무도 없는 기척. 뭐…. 이 정도면 됐겠지.

설마 누군가게 페이즈 아웃으로 따라오고 있다던가 이런 건 아니었을 거 아냐.

혹시나 해서 주변을 한 번 더 살펴보고 하늘을 날아 아까 봤던 창고로 향했다.

멀리서부터 탐지에 잡히는 수많은 기척.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무슨…. 마트 같잖아?

이 많은 사람이 전부 서로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서로 공격을 하지 않는다고?

아마 그건 저기 서 있는 총 든 군인들 때문이겠지? 무력으로 만들어낸 룰.

안에서 허튼짓만 안 하면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약속.

한 아름 물건을 들고 자신들의 차에 싣는 사람들, 제법 큰 트럭에 지게차로 팔레트를 싣는 중년의 남자, 희희낙락하며 차에 타는 여자 셋, 물건을 들고 경계 바깥까지 나오더니 그대로 모습이 사라지는 한 남자.

그리고 그 외에도 제법 많은 사람들.

평범한 모습들 같지만, 하나 같이 공통점이 있다.

눈빛들이 살아있다는 것.

어수룩해 보이거나 상당히 빈틈이 많아 보이는 모습들이지만 허접해 보이진 않는다.

느낌이고 짐작이지만…. 그런 냄새가 난다. 다들 품 안에 날카로운 비수들을 하나씩 들고 있는 느낌.

그래. 그럴 거다. 지금까지 살아왔고 이런 곳에 드나들 정도면 어중이떠중이들은 아니겠지.

단지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놈들은 아니라는 거다. 수라장을 지나 지금까지 살아있는 이들.

음식 같은 것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고, 이런 생필품 같은 것들까지 신경 쓸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들.

그런 그들을 보며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이 난다.

그리고 솔직한 심정으로는 저들이 맛있게 보였다.

전부 먹잇감이다. 살이 통통 올라서 당장이라도 도축해버리고 싶은 놈들.

그리고 그건 나만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더 넓은 탐지 범위를 가지고 있기에 나는 더 많은 것을 볼 수가 있다.

하늘에 떠 있는 놈들도 이미 세 놈이나 된다. 당연히 투명까지 쓰고 있는 놈들.

탐지도 있을까? 근데 거리로 봐선 탐지는 없는 것 같다. 탐지가 있다면 저런 애매한 위치에서 날고 있을 리가 없어.

그렇다 하더라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 뭔가 자신이 있으니까 저렇게 당당하게 지켜보고 있는 거잖아?

승합차 한 대가 바깥으로 나갔고, 날고 있던 한 녀석이 그 차를 따라간다.

일행인가? 아니면 습격? 궁금하다. 따라가 볼까?

음…. 아니다. 굉장히 구미가 당기긴 하지만 저걸 따라갈 시간은 없다. 여기만 간단하게 둘러보고 팀장 놈을 처리해야 한다.

괜히 저런 걸 따라갔다가 이런저런 일에 휘말리는 건 사양이야.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지금 목표는 저 창고. 문제는 저길 어떻게 들어가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세단 한 대가 창고 쪽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평범하게 주차를 하고 차에서 두 명이 내렸다.

운전석에서 나온 남자와 보조석에서 나온 여자.

주변을 날카롭게 훑어보긴 하지만 주변을 경계하는 느낌은 아니다. 조심하는 정도?

그렇게 창고 안쪽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 아무런 확인이나 제지 같은 건 없었다.

그냥…. 들어가면 되는 건가? 정말로? 저렇게 사람들이 득시글한 사이를?

모르겠다. 나는 저걸 이해하지 못하겠어.

내 안전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마음을 놓다니. 그게 가능하긴 한 거야?

무엇보다 나는 내 모습을 노출하고 싶지 않다.

물론 나 같은 놈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그래도 싫다. 그냥 싫다.

모습을 드러내고 저 안에 들어가는 것. 그건 별거 아닐 거다.

반사가 있으니 즉시 당하진 않을 것이고 나에게 다짜고짜 광역 공격을 날리는 놈이 있지도 않겠지.

하지만 안전에 대한 확신이 없잖아.

총 든 놈들이 지키고 있다고? 그건 억제력이지 완전 금지가 아니다.

옆에 가까이 있던 미친놈이 번개 파동이나 얼음 회오리 아니면 폭발 같은 거 한 방만 날려도 나는 죽는데…. 저길 어떻게 들어간단 말야?

총 든 놈들? 내가 죽은 다음 스킬 쓴 놈을 제압하겠지. 그놈을 제압하면 내가 되살아나나? 아니다. 그렇지는 않잖아.

나도 내가 지독하게 답답하게 군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답답한 건 답답한 거고 안전은 안전이다. 내가 여길 아무렇지 않게 들어갈 리는 없다는 소리지.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페이즈 아웃.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안쪽의 상황이니 소리 같은 것은 포기해도 될 거다.

그렇게 뒤로 조금 물러나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페이즈 아웃을 썼다.

뿌옇게 변한 세상 속을 걸어가 창고 쪽으로 향한다.

이 세상이라면 나도 안심할 수 있잖아? 정말 이 스킬을 고른 건 잘한 일이야.

소심하고 병적으로 주변을 경계하는 나에게 딱 맞는 스킬.

창고 안은 마치 커다란 은행 같은 모습이었다.

다른 것은 창구 안쪽에 있는 사람들이 서 있다는 것?

우습게도 입구 옆에는 대기 번호를 뽑는 기계가 있었고, 마침내 뒤로 들어온 사람 하나가 번호표를 뽑고 안으로 들어간다.

페이즈 아웃 특성상 전자기기의 화면이 보이지 않기에 현재 번호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창구 하나에서 한 남자가 물건을 한 아름 받아 나오는 게 보인다.

그리고 가운데 의자 같은 데서 앉아 기다리던 한 여자가 자기 번호표를 보더니 그 빈자리로 다가가 섰다.

새로 온 손님에게 웃음을 지으며 카탈로그 같은 걸 내미는 창구 직원.

여자는 그런 카탈로그는 보지도 않고 뭔가를 이야기했고, 허공에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쌀 한 포대를 상점에서 샀다.

그걸 받아든 창구 직원이 안쪽으로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스에 담긴 뭔가를 가져다줬다.

박스를 바로 열어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

그렇게 바로 창구에서 물러났고 직원은 바로 옆에 있는 버튼을 누른다.

그래. 알겠어. 그리 어려운 시스템은 아니네.

양도할 수 없는 코인, 존재하지 않는 화폐. 그렇기에 교환 기준 품목은 쌀이 되나 보다.

하긴, 생각해보면 그게 가장 낫다. 어차피 이 도시는 쌀 수요량이 엄청나게 많을 테니까.

게다가 쌀은 생각보다 보존 기간이 길다. 단지 부피가 큰 게 문제일 뿐이지. 무겁고.

하지만 이 정도 규모면 쌀의 부피나 무게는 크게 문제가 안 될 거 같긴 하다.

옮기는 게 그렇게 어렵지도 않을 거고 보관을 그리 오래 할 필요도 없으니까.

통조림으로 하는 것보단 쌀이 낫긴 하겠지. 한국인의 주식은 뭐가 됐던 쌀이니까.

다른 창구를 보니 거의 비슷비슷한 상황이었다. 물품의 양에 비례해서 쌀이 오가는 모습.

그럼…. 직접 쌀을 농사지어서 여기 가지고 와도 되는 건가?

그건 조금 애매하지 않나. 쌀에 모래라도 탔으면 그런 거 일일이 검사하기도 빡칠 텐데.

아…. 인력이 넘쳐나면 그런 것들 검사하는 것도 그리 어렵진 않겠지? 음…. 뭐 하여간 제법 괜찮은 시스템이다.

농업을 배제하고 공산품만 생산하는 청주. 그걸 쌀로 바꿔서 도시의 식량을 확보하는 모습.

여기는 개별 고객 창구처럼 보이니 원재료나 대규모 거래는 굳이 여기에서 할 필요는 없겠지?

아까 팀장 놈이 했던 것처럼 그런 거래는 별도의 공간에서 따로 하면 될 거고.

대충 알 거 같다.

뭐…. 괜찮은 시스템이야. 하지만 사양산업이다. 곧 망할 시스템.

바로 회귀가 있으니까.

확실한 것을 하나 깨달았다.

여기 오는 놈들, 여기 있는 놈들. 이놈들은 회귀 스킬의 존재를 모르는 놈들이다.

스킬 다섯 개를 마스터 하면 목록에 회귀가 뜬다.

그리고 궁금해서라도 눌러보면 수납을 배워야 배울 수 있다고 뜰 테고, 그럼 적당히 어느 스킬인지는 짐작할 수 있을 거다.

내가 그렇게 추측했으니 어지간한 사람들도 비슷하게 추측할 수 있겠지.

그럼 결국 이놈들은 스킬 다섯 개를 마스터 못한 놈들이라는 거다. 근데 뭐…. 크게 중요한 건 아니네.

스킬 다섯 개만 돼도 상당히 강력하긴 하니까.

어쨌든 대충 볼 건 다 봤다.

회귀가 있는 나에겐 이 시스템을 이용할 필요는 없다. 마음껏 밀어버려도 된다는 소리.

궁금증이 풀렸으니 됐다. 오히려 여기가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으면 좋겠네.

알아서 모인 놈들 다 잡아먹을 수 있게.

그렇게 알고 싶은 건 다 알았기에 자리를 뜨려고 했는데…. 저 멀리에서 뭔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뿌옇게 변한 세상에서 또렷하게 보이는 한 남자.

그와 눈이 마주쳤고, 그 역시 나를 보고 흠칫 놀라는 모습이다.

뭐지? 쟤는 왜 저렇게 선명하지? 마치 나처럼…. 혹시?

"멈춰."

내 말에 그는 다가오던 걸음을 멈췄다. 제법 놀란 표정.

그렇다는 건 내 목소리가 분명히 들린다는 건데.

"이런! 설마 당신도 페이즈 아웃 스킬을 쓰고 있는 건가요?"

제법 정중한 말투. 게다가 약간…. 뭐라고 해야 하나 연기 톤? 감정이 과잉된 말투? 그런 느낌이다.

근데 그런 말투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페이즈 아웃에서 사람을 마주치다니. 이런 건 생각해본 적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안에서는 스킬을 쓰지 못한다는 것. 그렇기에 그나마 걱정은 되지 않았다.

대신 어떻게 해야 저 녀석을 잡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맹렬하게 머리를 굴려본다.

빠르게 해제를 한 다음 광역 스킬 무효화를 쓰고 수면을 걸면…. 되긴 할 텐데.

문제는 여기가 사람들이 계속 오가는 창고 한복판이라는 거다.

해제하는 순간부터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게다가 무효화와 수면을 쓰면 그대로 어디선가 날아온 납탄에 맞아 쓰러질 수도 있고.

지랄 같네. 씨발. 어처구니가 없어.

"대답 좀 해주시지! 저는 제법 반갑단 말이에요! 이 스킬을 배운 사람은 처음 봤다고요!"

게다가 저 새끼는 뭔가…. 나사가 하나 빠진 놈 같다.

왜 이렇게 쾌활하고 반갑다는 말투로 말을 하는 거야? 저 새끼도 머리가 꽃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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