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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토리
"거기 뭐가 있어?"
"거기요? 거기 뭐가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뭔가가 지키고 있어요. 근데 웬만한 사람들은 뭔지도 몰라요. 팩토리는 우리나라에서 돌아가고 있는 거의 유일한 공장이에요. 게다가 그 규모랑 세력은 만만하지가 않아요."
"얼래. 그냥 구멍가게 같은 게 아니었어?"
"구멍가게요?"
나를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민희. 뭐지? 내가 뭘 잘못 말했나?
"그렇군요. 내가 팩토리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을 한 적이 없네요."
그러더니 자신의 수납을 열어서 뭔가를 꺼낸다.
저건…. 지도책?
지도책을 들고 어딘가를 펼치는 민희.
그녀가 펼친 것은 청주가 표시되어있는 지도였다. 나를 보여주면서 손으로 크게 동그라미를 그리는 민희.
"여기 보여요? 산업단지라고 되어있는 곳?"
"어."
"그걸 조금 넘어선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여기가 다 팩토리에요."
"엥? 한두 개가 아니잖아?"
"맞아요. 팩토리는 공장 한두 개가 아니에요. 청주에 있는 모든 공장은 다 포함됐다고 생각하면 돼요. 공단에 있는 모든 공장. 아시겠어요?"
"아…. 크네. 내가 스케일이 작았어."
"그리고…. 막상 가보면 알 거예요. 당신은 조금 놀랄 수도 있겠네."
"뭔데? 말해봐."
"직접 보는 게 나을 거에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잖아요?"
"뭔데 그렇게 말을 아끼지? 응?"
내가 그렇게 말하며 민희의 허리를 감싸 안자 그녀는 매혹적인 웃음을 짓더니 오히려 내 입가로 얼굴을 가까이한다.
"내가 표현력이 많이 부족해서 그래요. 게다가 내가 갔던 것도 거의 1년 전이라고요. 그사이 많이 바뀌었을 수도 있으니까."
사근거리며 속삭이는 민희. 그런 그녀의 말투는 등줄기를 살살 간질이는 느낌이다.
듣고만 있어도 몸이 근질근질 해지는 느낌. 그리고 아래쪽에 힘이 꽉 들어가는 기분.
"하여간 사람 애태우는 데는 최고라니까."
그렇게 가까이 다가온 민희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한다.
이 여자는 그렇다. 입술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키스를 하고 싶어진단 말야.
화장을 해서 그런가? 모두가 화장기 없는 밋밋한 얼굴인데 혼자서 생동감 있는 얼굴을 하고 있잖아.
새하얀 얼굴과 붉은 입술. 그리고 눈.
화장을 제대로 모르는 내가 봐도 이 여자의 화장 솜씨는 놀라울 정도다.
물론 원판이 이쁘니까 이정도 효과가 나오는 거겠지만….
"민희."
"네?"
"지금 쓰는 화장품. 팩토리에서 구했다고 했지?"
"네. 그렇죠."
"거기엔 화장품도 종류가 많아?"
"아니요. 누가 먹고 살기 바쁜데 화장품 같은 걸 찾겠어요. 많이 없어요. 물론 찾는 사람들이 있으니 구할 수는 있었지만."
"찾는 사람들?"
"뭐, 있잖아요? 높은 사람들?"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민희.
"높기는…. 근데 짐작 가는 데는 있네."
아마도 로얄 클럽인지 뭐시긴지 그런 새끼들이겠지?
뭔가 아는 것 같은 나를 궁금하다는 듯 바라보는 민희.
"그렇게 운을 띄우면 궁금해지는데요."
민희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나의 가슴에 살짝 닿는다.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가는 손가락. 별거 아닌 움직임인데 모든 신경이 그쪽으로 쏠린다.
마법인가? 사람을 집중시키는 마법 뭐 그런 건가?
"뭐, 천천히 이야기해줄게. 이야기가 짧은 건 아니라서. 그나저나."
화제를 돌릴 겸 아까 하던 이야기로 돌아간다.
"그럼 지금 쓰는 화장품은 원래 니가 쓰던 화장품이 아니라는 거지?"
"그렇죠? 최대한 맞춰서 쓰고 있긴 하지만…. 완전히 맘에 드는 건 아니에요."
"어때. 나랑 쇼핑하러 안 갈래?"
"쇼핑요?"
"좋은 스킬을 얻었으니 써봐야지."
그러자 민희는 내가 말한 말을 이해했다는 듯이 환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가자. 백화점."
"화장품에도 회귀를 쓸 수 있군요. 정말…. 당신은 정말 똑똑한 거 같아!"
"잘 알았으면 바로 가자. 자리 비워도 되나?"
"네. 잠시만요."
그러더니 무전기를 들고 뭐라고 지시를 하는 민희.
여기도 바로 무전기를 쓰나 보네. 하긴. 통신 만큼 중요한 게 없지. 실시간으로 상환을 받는 것. 그건 중요한 일이다.
어디에서든 하나의 조직을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잖아.
"됐어요. 가요."
"흠. 체계를 잘 잡았나 보네."
"두번 실수할 수는 없잖아요."
웃고 있긴 하지만, 그 구석에는 결코 밝아질 수 없는 그늘이 묻어있다.
어쩔 수 없지. 험한 꼴을 당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렇기에 더욱 민희를 웃게 해주고 싶다. 뭐,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어떻게 가죠?"
민희의 물음에 창문이 어느 정도 열리는지 확인하는 나.
그리고 그런 나를 보는 민희는 약간 사색이 된다.
"설마…. 또?"
"그게 제일 빠르잖아."
"안돼요! 무섭단 말야!"
"낮게 날게."
"아니…. 그래도."
"여긴 열리는 곳이 없네. 나가자. 옷 따듯하게 입어."
비행에 대해서 상당히 두려워하는 민희.
큰일이네. 무릇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비행 정도는 익히고 있어야 하는데.
뭐, 다른 사람이 안고 가는 것과 본인이 직접 나는 것은 느낌이 다르겠지.
단지 무섭다는 이유로 안 쓰기엔 비행은 너무 사기다. 무조건 배워야 하는 스킬이야.
코트를 챙겨입는 민희. 그걸 보고 내가 한마디 했다.
"안 추워? 더 따듯한 거로 입지?"
"괜찮아요. 이정도로도 충분해."
정말…. 저런거 보면 여자들은 대단해. 한겨울에도 맨다리 내놓고 다니는 거 보면 정말…. 다른 생물 같아.
민희와 밖으로 나왔고, 나는 그녀에게 정중하게 팔을 내밀었다.
한숨을 폭하고 내쉰 다음 나에게 안기는 민희.
그런 그녀를 안정감 있게 끌어안고 비행을 썼다.
무섭다고 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공포심을 줄 필요는 없으니 낮게 떠서 바로 출발한다.
캐슬의 컨테이너 벽을 넘을 때는 잠시 무서워하는 민희였지만, 그 이후로는 지상에서 한 1미터 정도만 띄워서 이동했기에 그녀의 표정은 제법 여유가 생겼다.
"근데, 어디로 가는지 알고 가는 거예요?"
"간판 보고 가는 건데."
"아. 간판."
"그럼. 간판은 유용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적혀있거든."
그렇게 도착한 백화점.
언제나 백화점 1층은 여자들 화장품 가게로 가득하다.
어떠한 백화점이든 거의 열에 아홉은 다 그렇다. 뭐, 당연한 결과지. 백화점의 주 소비층이 누구인지는 명확하니까.
접근성이 가장 좋은 곳에 화장품을 두는 것은 아주아주 당연한 일이고.
지금은 폐허나 다름없는 1층.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민희에게는 세상이 망하기 전 사람들이 와글거렸던 그때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발걸음도 가볍게 화장품 매장들 사이를 지나가는 민희.
그리고 나는 그 순간부터 정말…. 아무말 못하고 그녀의 뒤를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제야 여자가 모든 화장품을 마음껏 원하는 대로 구할 수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처음 깨달았다.
그녀는 몹시 신중했고, 놓치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철저히 계산된 것이었고, 일체의 낭비가 없었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으로 끊임없이 제품들을 집어 확인하는 민희.
그녀가 입을 열 때는 나에게 부탁할 때 뿐이다.
"이것 좀 회귀시켜줄래요?"
"회귀. 휘귀."
새것으로 변한 화장품을 열고 냄새를 맡고 손등에 발라보고 손끝으로 문질러보는 여자.
그렇게 확인해본 화장품은 바로 자신의 수납에 넣는다.
"이것도요."
"회귀, 회귀."
뿌려보고 발라보고 만져보고…. 꼼꼼히 읽어보고 다시 한번 확인한 뒤 수납에 넣는 여자.
내게는 그저 크림일 뿐이었다.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분명 산 걸 또 산 거 같고, 아까 거랑 지금 거랑 뭐가 차이 나는지 전혀 모르겠다.
하늘색 병, 하얀색 병, 투명한 병, 갈색 병. 분홍색 병.
길쭉한 병, 네모난 병, 동그란 병, 납작한 병.
그저 내 눈에는 병을 모으는 컬렉터처럼 보였다. 아…. 이 병이 이뻐서 가져가는구나. 딱 그 정도.
그렇기에 그냥 생각을 멈췄다.
그저 민희가 부탁하면 나는 '회귀, 회귀' 하고 반복해서 말해주면 되는 간단한 일.
한참을 그렇게 화장품을 고른 민희가 나를 보고 말한다.
"미안해요. 지루하죠?"
"아냐. 솔직히 말해서 좀 신기하긴 해. 재밌어 보이기도 하고."
"그럼 다행이에요. 아직 반의반도 못 봐서…."
그 말에는 약간 아득한 느낌이 들긴 했다.
반의반이라고? 이만큼이? 진짜로?
민희는 미안한지 나에게 설명을 하면서 고르기 시작했다.
"방금까지는 토너하고 스킨, 에센스 위주로 봤고요…. 지금은 이제 앰플하고 세럼을 볼 거에요. 크림도 몇 개 먼저 보긴 했는데 아직 제대로 보진 않았고…. 아. 이것도 해줄래요?"
"회귀, 회귀."
솔직히 말해서 뭐라고 하는지 거의 못 알아들었다.
아마 내가 게임 아이템이나 장비 성능에 관해서 설명하면 민희가 거의 못 알아듣는 거랑 비슷하지 않을까?
그래도 민희가 설명하는 걸 좋아하는 거 같아서 묵묵히 듣는다. 뭐, 언젠간 이런 지식을 쓸 일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그리고…. 아이 크림도 챙겨야 하고…. 여기까지가 기초화장이에요."
"엉? 기초?"
"네. 좀 많죠?"
"대충 웨이터에게 코스 요리를 다 설명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애피타이저 소개였다는 거랑 비슷한 느낌인데."
"뭐…. 얼추 비슷하네요."
"하하…. 근데 그런 건 누가 가르쳐 주는 거야?"
"음. 글쎄요. 자연스럽게 알게 되죠. 누구한테 막 단기간에 배우는 게 아니고 어렸을 때부터 하나씩 하나씩 배워나가는 거죠."
"그렇구나. 평생을 걸쳐서 배우는 거네."
"아무래도 그렇죠. 나이에 따라서 바르는 게 달라지는 것도 많으니까요. 피부 상태에 따라서도 다르고. 계절 따라도 다르고."
"그럼 그만큼을 다 쓰는 거야?"
민희가 이미 챙긴 화장품만 해도 제법 많은 양이다. 그걸 정말 한자리에서 다 바르는 건가?
"아뇨. 저는 기왕 온 김에 다 구해가는 거죠. 어차피 저도 수납이 있으니까. 이런 기회가 다시 올지 안 올지도 모르고."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어."
"글쎄요. 화장품 쇼핑 한번 따라오면 보통은 두 번 다시 안 오고 싶어 하던데."
경험에서 우러나온 내용인지는 몰라도 민희의 표정은 의미심장했다.
하긴…. 그 말도 이해가 간다. 남자의 눈으로는 절대 이해를 할 수 없는 행위.
이쁘게 화장을 하고 온 것은 좋지만, 화장하는 시간을 기다려 주기는 쉽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재밌으니까 걱정하지 마."
"신기한 사람이야. 정말."
그러면서 다시 화장품들을 고르는 민희.
"근데. 조금 무식한 소리일 수도 있지만, 여기 있는 거 다 챙겨가면 되는 거 아냐? 어차피 너도 수납 마스터니 여기 있는 화장품 어지간한 건 다 넣고 갈 수 있을 거 같은데."
"당신이 피곤하잖아요. 회귀 스킬을 써야 하는데."
"어차피 숙련이라고 생각하면 상관없어. 하는 김에 같이 하는 거지."
"흐음…. 그래요? 그럼 미안해하지 않고 골라도 되는 거예요?"
"응. 기왕이면 거 뭐야. 캐슬에 있는 다른 여자 둘. 걔들 것도 좀 구해주고."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그럼 조금 많이 가져가도 되는 거죠?"
"어.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골라. 계산은 내가 다 할 테니까."
"풋."
약간 허풍선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보고 웃는 민희.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말한다.
"어차피 나에게 보여주려고 그렇게 이쁘게 화장하는 거잖아? 그런 게 싫을 수가 있겠어?"
나는 왜 민희만 만나면 느끼한 척을 하고 싶어 하는 걸까?
민희는 그런 면이 있다. 럭셔리한 면. 있어 보이는 느낌.
그런 그녀와 함께 있으면 나도 그녀와 비슷한 급이 되고 싶은거 같다.
그걸 허세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동경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
나는 이런걸 못 해봤잖아. 그리고 어떻게 하면 럭셔리해 지는지도 잘 모른다.
그렇기에 그런 그녀를 곁에 두면 나도 같은 급이 된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과시욕, 정복욕, 소유욕…. 뭐 그런 뻔한 것들.
다행인 건 민희가 그런 나의 모습을 제법 좋아한다는 거다.
뭐, 속으로는 귀엽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어쨌든 웃으니까. 진심으로 웃고 있으니 상관없지.
내 말을 들은 민희는 정말 본격적으로 화장품들을 집기 시작했다.
아까는 하나하나 일일이 엄선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어느 정도 괜찮으면 합격 목걸이를 걸어주는 느낌?
그렇게 민희가 화장품 쇼핑을 끝낸 건 들어온 지 거의 다섯 시간이 흐른 뒤였다.
"어머…. 너무 열을 올렸나 봐. 미안해요. 시간이 이만큼이나 지났는지 몰랐네."
"그래. 정말 시간 가는지 모르고 고르더라. 그래도 재미있었어. 민희 너의 아이 같은 모습을 봤으니 됐어. 숙련도도 많이 올랐고."
농담 아니고, 숙련도가 15퍼센트 정도 올랐다.
15퍼센트면 회귀 750번이다. 제품당 두번씩 썼으니 375개를 고른 셈.
물론 뭐 화장 솜이나 이런 잡다한 것들까지 모두 포함한 거지만…. 그래도 적은 숫자는 아니다.
신기해 진짜.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
"우리 성철씨. 해준 게 많으니 나도 보답을 해야겠네."
그러면서 나의 팔짱을 끼는 민희.
보답이라고? 크…. 그럼 또 내가 그런 건 사양하거나 하진 않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