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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번째 스킬
"일단 통 줘봐."
아이스크림 통을 들어 편의점 테이블 위에다가 탈탈 털었다.
살짝 녹은 아이스크림이 테이블 위에 보기 싫게 떨어졌고, 나는 빈 통을 그 옆에 올려둔 뒤 심호흡을 한번 하고 다시 스킬을 썼다.
"회귀!"
한번 썼더니 아이스크림의 일부만 생겨났다.
연달아서 세 번을 더 썼더니 비로소 뚜껑까지 다시 생겨난 아이스크림.
그리고 테이블에 떨어뜨려 놨던 아이스크림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어라?"
"없어졌어!"
"그럼? 우리가 먹은 건?"
"으음…."
다들 당황스러운 얼굴로 아이스크림 통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배를 만진다.
네 여자가 다 저러니 너무 웃기네.
나도 가만히 뱃속의 상태를 느껴보지만…. 잘 모르겠다. 적게 먹어서 그런가?
먹은 게 어떻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네.
"근데 이거요."
승희의 말에 다들 그녀를 바라본다.
"조금 웃기지 않아요? 아이스크림 통이 '원래대로' 회귀 한 거잖아요?"
"응."
"그럼…. 안에 들어간 음식물들이 우리 뱃속에서 없어졌다고 하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좋은 거고 아니어도 좋은 거 아니에요?"
"계속해봐."
"들어 봐봐요. 만약 아이스크림이 우리 뱃속에서 사라졌으면…. 식량의 효과는 없는 거지만 우리는 살이 찌지 않아요."
승희의 말에 미나와 세아가 충격적이라는 표정을 짓는다.
안나에게도 승희의 말을 전달해 주자 안나 역시 엄청나다는 표정으로 승희를 바라본다.
"그…. 그 말은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찐다는 말?"
떨리는 미나의 목소리. 그녀의 심정이 약간 이해됐다. 걸그룹 출신의 전 아이돌. 먹는 것에 대해서 민감한 여자.
"가정이에요. 가정. 만약 우리의 뱃속으로 들어간 건 그대로 안 사라지고 남았고, 저 아이스크림이 새로 생긴 거라면…. 그건 무한 증식이죠! 회귀 수준이 아니에요! 우리는 쌀 한 포대만 있어도 무한으로 밥을 먹을 수 있는 거라고요."
승희의 말은 상당히 일리가 있었다.
그래. 내가 생각한 것도 그거다. 먹은 것까지 사라진다면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거고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개사기지.
"맞아. 그리고 내 생각은 전자가 맞는 거 같아. 사라진다고 봐야지. 왜냐하면, 이거 다음 스킬이 복제니까."
"아…."
"그래요?"
"호오…."
"으음…."
흥미롭다는 반응들. 그리고 그녀들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아무리 먹어도 회귀 한방이면 안 먹은 게 된다고요…?"
"이거 완전…. 책임 없는 쾌락…."
그래. 그거다. 맛은 느낄 수 있는데 몸에 칼로리로 안 넘어간다고?
물론 다른 식량이 없다면 끔찍한 상황이다. 아무리 먹고 회귀를 써봐야 허기가 계속될 거라는 이야기잖아.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우리는 먹을게 제법 넉넉하니까.
식사는 다른 거로 하고 디저트나 간식을 무한대로 먹을 수 있다? 이거 완전 개씹사기….
주사위를 굴려서 6이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주사위가 다섯 개 정도 더 뿅 하고 나타났더니 전부 6이 뜬 상황.
"그러면…. 지금 우리가 이러고 있을 게 아니네. 더 좋은 곳으로 가야 해…. 어디가 있지?"
결연한 세아의 목소리. 뭔가 웃긴다. 두뇌를 풀가동해서 어디로 가야 가장 맛있는 것을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모습.
그리고 승희나 미나 역시 심각한 표정이 됐다.
바로 알아듣지 못한 안나만 아이스크림 통을 들고 숟가락으로 퍼먹는 모습.
"어. 고민은 좋은데. 일단 먼저 가야 할 곳이 있다."
"네?"
"어디요?"
"어디! 좋은 데 있어? 말해봐!"
승희랑 미나는 그래도 아직 정상인의 범주에 머물러 있는데, 세아는 아니다. 거의 폭주 모드 같은 느낌?
5년간 먹지 못했던 맛있는 것들을 아무런 페널티 없이 먹을 수 있게 된 여자의 집념?
하지만 나는 편의점 밖을 가리켰고, 문밖의 들개들을 본 세아가 퍼뜩 뭔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는다.
"개 사료가 있는 곳. 포장지만 남아있어도 상관없어. 안에 내용물이 다 썩어있어도 상관없고. 포장지만 찾아. 상태는 엉망이라도 무조건 많이 있는 곳을 찾아야 해."
"나 어디 있는지 알아! 창고형 마트! 거기에 좀 싸도 양이 엄청 많은 사료 포대들 있어!"
세아가 말했고 다들 그렇지! 하는 표정이 됐다.
그래. 나도 본 적이 있다. 역시 집념이 있는 여자는 생각해 내는 것도 빠르군.
"그럼…. 나 혼자 빨리 다녀올게. 너희는 집으로 가 있어."
"어? 혼자요?"
"멀잖아. 내가 금방 다녀오는 게 나을 텐데."
"어….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창고형 마트면 이것저것 쓸만한 것이 많을 텐데요."
미나의 말에 다들 같이 가고 싶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음. 하긴. 상관없나? 그냥 같이 가는 게 낫긴 하겠다.
"그럼…. 차를 가지고 가자."
"차요?"
"차를? 괜찮을까?"
"괜찮아요?"
"차?"
"어. 전기차니까 상관없을 거야. 어차피 다들 투명은 있으니까 크게 문제는 없을 거고."
이번 패시브로 인해서 탐지거리가 200미터로 늘었다.
그야말로 지금의 나는 인간 레이더 수준. 게다가 펜스에서 가져온 소리가 나지 않는 전기차니까 그리 문제는 없을 거다.
방심은 금물이지만…. 상대가 알아채고 다가오는 것보단 내가 요격하는 게 더 빠르겠지.
"일단 돌아가자. 집으로."
우리가 편의점에서 나오자 들개들이 또 우리를 졸졸 쫓아온다.
그런 들개들에게 세아는 기분 좋은지 사근사근하게 말을 걸며 걸어간다.
"그래그래. 금방 다녀올 테니 놀고 있어? 너희 먹을 거 잔뜩 가져올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래. 으휴. 너! 점박이! 너는 너무 촐랑거려! 자꾸 그렇게 핥지 말라고!"
개랑 대화가 되는 거야? 왜 이렇게 개들이 말을 잘 듣냐?
그렇게 차를 준비하고 여자들을 태웠다.
비행이 생긴 뒤로는 거의 안 쓴…. 아니지 펜스에서 올 때 한번 써보고는 그 뒤로 한 번도 안 쓴 전기차지만 관리는 계속했다.
무슨 일이 어떻게 있을지 모르니 충전은 항상 해둬야지.
우리 중에는 그래도 몸이 제일 큰 안나를 앞자리에 태우고 승희와 미나, 세아를 뒤에 태웠다.
셋이 타면 조금 좁을 줄 알았는데 세아가 아담해서 그리 불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다행이네. 작은 몸이 도움이 될 때도 있고.
"뭘 그렇게 쳐다봐? 빨리 가자!"
세아의 말에 피식하고 한번 웃고 바로 차를 출발시킨다.
차가 움직이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건 정말 이상한 기분이다.
함께 탄 여자들도 그게 이상한지 신기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 바로 차를 달려 내가 알고 있는 창고형 마트로 향했다.
역시나 탐지에 잡히는 인간은 없다. 조용하고 정적으로 가득한 도시.
게다가 거리가 그리 멀진 않아서 금세 도착했다. 지하주차장으로 대충 들어가 차를 세우고 마트 안으로 들어간다.
"안에 들어가면 막 이상한 냄새가 나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입구 앞에 선 세아가 유리문을 잡고 주저하는 듯 나를 바라본다.
"그럴 일은 없을걸? 이런 대형 마트들은 애초에 음식이 탈탈 털려서 썩거나 할만한 음식이 없을 거야. 목으로 넘길 수 있을 만한 것들은 이미 다 가져갔겠지. 가지 통조림 같은 게 있었더라도 가져갔을걸?"
"가지…. 우욱."
"가지 통조림이라니…. 그런 것도 있어요?"
"세상에. 어떤 제정신 아닌 사람이 그런 걸 만들까요?"
"가지? 가지가 뭐지?"
안나는 가지가 뭔지 물어본다. 러시아는 가지를 안 먹나? 음. 모르겠네.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지. 어떤 미친놈이 가지 같은 거로 통조림을 만들겠어? 그런 놈이 있으면 내가 가서 공장을 불 질러버릴 거야. 아니지. 이미 다른 놈들이 가서 불 질렀으니까 없는 것일 수도."
"근데…. 가지 구워 먹으면 맛있긴 한데."
미나가 작게 중얼거리지만 아무도 호응해주지 않는다.
물론 맛있게 먹는 방법이야 있겠지. 하지만 그냥 가지라는 존재 자체가 싫다.
굳이 맛있게 먹는 방법을 연구하거나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마트 안은 생각보다 쾌적했다.
전기 무제한이란 건 그런 뜻이다. 환기 시스템이 고장 나지 않는 이상 무제한으로 안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쾌적한 것과 별개로 안쪽은 개판이었다. 일단 식재료가 있던 층은 완전 쑥대밭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와. 뭐가 이렇게 엉망진창이래요."
"그럴 만하지. 여기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겠어."
내 말이 미나가 흠칫하며 나를 돌아본다.
장난치지 말라는 듯한 표정. 하지만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그렇게 봐? 사실이야. 통조림 하나를 두고 서로 죽이는 일이 얼마나 빈번했는데? 물론 통조림이 없었어도 서로 죽였겠지만."
그래. 미나는 아직 그때의 실상을 잘 모르지. 인간이 어디까지 추악해지고 타락할 수 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줬던 그때의 상황을.
그렇게 말이 없어진 미나. 나는 그녀의 어깨를 한번 툭툭 쳐주고 앞으로 나갔다.
어디 보자…. 일단 가장 먼저 시급한 거는 개들 사료다. 기껏 사료를 주고 회귀로 돌려버리면 의미가 없으니 무조건 많은 수량을 확보해야 한다.
빨리 복제를 배워야겠네. 회귀가 이렇게 좋은 스킬임이 판명됐으니 복제 역시 내가 생각하는 게 맞을 거다.
그렇게 조금 걸어가니 반려동물 코너가 보였다.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잡동사니들. 그리고 쌓여있었다가 쓰러진 듯한 사료 포대들.
"그래도 여긴 남아있긴 하네."
"네? 무슨 소리에요?"
"아. 개 사료 말야. 남아있어서 다행이라고."
"개 사료를 누가…. 아. 처음에는 개들을 많이 키웠다고 했죠?"
알았다는 듯 밝게 말하는 미나. 하지만 내 표정을 보고 어? 하는 표정이 된다.
"그게 아니면…. 아…."
"배고파 죽겠는데 개 사료라고 안 먹었을 것 같아? 맛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먹을 수 있는 거고 영양가도 들어있다고. 마다할 이유가 없지."
"정말…. 그렇군요…."
미나가 소속사 남자 새끼들에게 감금당해서 끔찍한 꼴을 당한 건 사실이지만, 바깥의 상황은 그것보다 덜하진 않았다.
온갖 지랄 같은 모습들. 사람의 상상력과 창의력이 발전시킨 악의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를 겨루는 듯한 막장.
현세에 재림한 지옥도. 그런 상황에서 개밥? 사치스러운 소리지. 기면서라도 먹어야지.
"어쨌든 포장지만 있기만 하면 되지 뭐. 나는 작업을 하고 있을 테니 너희는 원하는 게 있으면 찾아와. 다만 여기 층을 벗어나진 마. 혼자 멀리 가진 말고. 항상 서로를 시야에 두고 있어. 내가 소리치면 무조건 투명화를 쓰고 이쪽으로 와야 해."
여자들이 알았다고 대답했고, 각자 원하는 것들을 찾아 이동했다.
그럼…. 나도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개 사료 포대를 하나 들어 바닥에 내려놓고 회귀를 네 번 쓴다.
그럼 말끔하게 처음 모습 그대로인 상태로 돌아가는 사료.
그렇게 복구된 사료를 수납 안에 넣고 다시 다른 포장지를 들어 바닥에 놓는다.
숙련을 올리면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게 상당히 맘에 들었다.
평소의 숙련은 정말 코인을 허공에 태우는 느낌이었는데…. 이건 그래도 의미라도 있잖아?
회귀 네 번씩 열 번 반복. 그렇게 중급 회복 포션 한 병. 숙련은 착착 진행되었고 수납 안쪽도 천천히 채워지고 있다.
으음. 사료 포대가 아직도 많으니 다른 곳까지 뒤질 필요는 없겠네.
이정도면 다 먹이기 전에 복제도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눈앞에 있는 사료들을 전부 다 회귀시켜서 수납에 넣은 뒤 옆에 있는 진열대들을 살펴봤다.
오…. 개 통조림도 있네. 여기는 배고픈 사람들이 별로 없었나 봐. 이런 걸 남겨놨어?
인간의 존엄성 따위…. 배고픔 앞에서는 별거 아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시체가 사라지게 한 걸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시체가 남았다면…. 세상은 조금 더 지옥도가 펼쳐졌을 거다. 정말 제정신인 놈들을 찾기가 쉽지 않았겠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개 통조림 하나. 그리고 그 옆쪽에 떨어져 있는 24개들이 포장박스 하나.
진열장에도 박스는 많이 있었다.
음. 강아지가 그려져 있는 거 보니 새끼 건가? 아 여기 쓰여 있네.
1세 이상 성견용이라고. 근데 왜 이리 조그마한 개 사진을 붙여 놓은 거야? 헷갈리게.
게다가 들개 새끼들이 성견인지 강아진지 내가 어떻게 아냐? 그냥 다 가져가면 되겠지.
멧돼지 고기도 씹어먹는 놈들인데 설마 이런걸 못 먹을까?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고 해.
근데 궁금증이 들었다. 이렇게 24개 낱개 포장이 되어있는 박스. 여기에다가 회귀를 걸면 전부 다 적용이 되나?
일단 한 개를 꺼내서 통조림 하나를 까봤다. 윽. 냄새. 아무리 통조림이라도 변질이 되긴 하겠지.
그렇게 냄새나는 통조림을 멀리 던졌다. 그리고 박스에다가 회귀를 썼다.
한번 쓰자 방금 던져버린 통조림이 사라지고 박스는 열기 전의 상황으로 돌아갔다.
오…. 이건 좋네. 맘에 들어. 한 번에 다 적용이 된다고?
박스에 회귀를 세 번 더 쓰고 수납 안에 넣었고 진열장에 있는 개 통조림 상자를 하나씩 꺼내서 전부 회귀를 걸었다.
진열장을 비울 때쯤 스킬이 중급이 되었고, 그다음부터는 회귀를 세 번만 써도 처음 상태로 돌아가게 되었다.
흐음. 이런 거군. 결국, 마스터 하면 한방에 원래 모습이 된다는 거네.
어쨌든…. 개밥의 걱정은 없어졌다.
짜식들. 오늘 밤은 영양가 있는 거로 포식 좀 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