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열 번째 스킬
둘러앉은 네 여자.
복잡한 표정의 세아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승희, 답답한 표정의 미나, 언제나 해맑은 안나.
나는 세아를 바라봤고, 그녀는 시선을 피했다.
그래. 그럴 만하지.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다. 아마 머릿속이 잔뜩 복잡할 테지.
"자. 그럼…. 말해볼까요? 윤세아 양? 위에서 멍멍거리는 멍멍이들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발언권을 줬지만 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아까 올라갔다가 와보니 멧돼지 사체는 거의 뼈만 남아있었다.
아니 뼈도 얼마 남지 않았지. 개들이 다 뜯어가서 싹싹 핥아먹었으니까.
세아도 그걸 봤기에 딱히 할 말은 없을 거다. 개 30마리라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내가 조금 모질게 구는 것도 있겠지만…. 이 녀석들도 알아야 한다.
무언가를 책임지는 것에 대한 무게감을.
감성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고 머릿속으로 암만 생각해봐야 실제로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는 사실을.
"그…. 고구마 농사를 지으면…."
"기각."
"아 왜!"
"생각하고 말해. 지금 이 자리는 너보고 변명하라고 만든 자리가 아니야. 괜히 이상한 소리를 해서 니 평가를 더 깎으려 하지 마."
"하아…."
한숨을 내쉬는 세아.
곤란하겠지. 답이 없는 것을 아무리 움켜잡고 애써봐야 나오는 건 없다.
저건…. 세아의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그리고 난 그걸 알고 있다.
내가 세아에게 원하는 것은 딱 하나다. 답을 원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실수와 실패를 인정하는 것.
"모르겠어. 내가 너무 서툴렀어. 미안해."
그리고 세아는 내가 생각한 대로 똑똑한 아이다. 자신의 실수는 바로 인정할 줄 아는 여자.
그래. 그렇기에 같이 사는 거다. 나는…. 아무리 이쁘고 귀엽다고 해도 제대로 되지 않은 여자와 함께 살 마음은 없다.
"그래. 인정했으니 됐다."
세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이번에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귀여운 녀석. 계속 이렇게 쓰다듬고 싶네.
"승희와 미나도 마찬가지일 거야. 안나도 그렇지? 좋은 방법 있어?"
곤란한 표정을 짓던 승희와 미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안나 역시 마찬가지. 짧은 시간 동안 답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번 한 번은 내가 해결해주겠어."
내 말에 다들 나를 바라본다.
놀람과 의아함이 섞인 얼굴. 말을 하지 않아도 나를 바라보는 그 표정은 '어떻게?'라는 표정이다.
"배울 스킬은 많고…. 사람을 죽이거나 내 몸을 방어하는 스킬도 중요하지만, 결국 우리는 살아야 해. 살아가는 데는 단지 의식주만 필요한 건 아니지. 생필품, 소모품, 삶의 질을 올려주는 여러가지 물건들. 많고 많은 것들이 있지만…. 우리는 세상이 망하면서 모든 걸 잃었지.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남겨졌던 물건들 역시 이제 그 기간이 다했어. 지금 쓰고 있는 샴푸 같은 것들. 얼마나 더 쓸 수 있을까?"
내가 말한 것. 다들 생각해보지 않은 게 아닐 거다.
생산 된 지 5년이 넘어가는 물건들. 이제는 슬슬 온전한 상태가 아닌 것들이 많다.
휴지는 삭기 시작했기에 쓰고 싶은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
세제, 샴푸 이런 것들은 아직 어떻게 쓰고는 있지만 불안 불안한 건 마찬가지다.
음식…. 펜스에서 음식을 받아오면서 그나마 풍족해지긴 했지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은 결국 한정적이다.
괜히 유정 형수가 토마토를 키운 게 아니라니까. 케첩만 해도 이제는 그리운 소스가 되어버렸는걸.
"회귀라는 스킬이 있어. 수납 스킬을 찍어야 배울 수 있는 스킬이야. 처음엔 그 이름 때문에 많은 상상을 할 수 있던 스킬이지. 회귀라니. 보통 회귀라고 하면 과거 회귀 같은 거잖아. 그치?"
어느새 내 이야기에 몰입해 있는 네 여자. 회귀라는 말을 들으니 약간 표정들이 아련해진다.
그래. 나도 마찬가지였지. 세상이 망하기 전으로 회귀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런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일단 스킬 만든 놈들의 역량이 그런 스킬을 구현할 수 있느냐도 문제일뿐더러…. 그런 스킬을 만들 리도 없으니까.
게다가 수납과 연관된 스킬이니 그 의도가 어느 정도는 보였다.
남아있는 물건의 회귀. 어디까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맞을 거다.
"나는 이 스킬을 배워서 쓰면…. 지금 남아있는 물건들을 과거의 모습으로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해."
"헤에…."
입을 벌리고 소리를 냈다가 자신이 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입을 다무는 세아.
그런 그녀를 보고 피식 웃은 다음 나는 스킬 창을 열었다.
"물론, 내 생각들이 망상이 될 확률도 높지. 근데 이건 다른 효과가 생각나는 게 없어. 아마 차이가 있다면 그 기한의 문제겠지. 얼마나 회귀할 수 있냐. 그 정도?"
스킬을 배울 수 있기 시작한 다음부터 정보 없이 내 맘대로 스킬을 찍는 것은 처음이다.
내가 확실히 보고 효과를 알게 된 스킬들만 찍었던 나다. 사실상 처음 해보는 도박.
1이 나올지 6이 나올지 모르는 주사위. 그래도 던져본다. 적어도 1은 아닐 거 같으니까.
게다가 그다음 스킬인 복제. 이걸 위해서라도 찍어야 한다. 제발…. 생각한 것처럼 효과가 나오는 스킬이길.
스킬 선택 칸을 눌러 회귀를 눌렀다.
['회귀' 스킬을 배우는데 30만 코인이 소모됩니다. 배우시겠습니까?]
30만. 좋아. 좋은 느낌이야. 30만짜리는 지금껏 실망시킨 적이 없지.
바로 예를 눌렀고, 스킬 창에 회귀 스킬이 생겨났다.
"좋아. 뭐 테스트할 거 없나?"
갑자기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더니 뭔가를 들고나오는 세아.
"혹시 이런 것도 되려나…?"
0.5L 페트병 하나를 들고 온 세아. 안에는 작은 구슬 같은 게 잔뜩 들어있다.
"이건 뭐야?"
"아…. 최루탄…."
"최루탄? 아! 나 처음 만났을 때 던졌던 거?"
"어."
"근데 이걸 왜 이런 데다가 넣어놔."
"아니…. 이거 한번 가방 안에서 터져서 난리 난 적이 있어서…. 이런 데다가 옮겼지…."
"그럼 이거 막 꺼내면 안 되는 거 아냐? 안에 있는 거 비워봐."
"괜찮아. 그렇게 막 터지지는 않아. 잠시만."
안에 있는 작은 구슬들을 빼내는 세아. 그렇게 비어버린 페트병을 내게 내민다.
"음…. 될까? 되면 사긴데."
페트병을 향해 스킬을 쓴다.
"회귀!"
뭔가 변화는 생겼는데…. 정확하게 모르겠다.
페트병이 조금 깨끗해진 느낌?
"뭐가 달라진 거야??"
세아가 나를 보고 말했고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또 해보면 되겠지?
"회귀!"
크게 또 변화가 없는 페트병.
숙련도는 분명 올랐다. 두번 다. 스킬은 제대로 나가고 있다는 이야기.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숙련이 오르고 있으니 뭔가 진행은 된다는 소리다. 바로 한 번 더 써본다.
"회귀!"
갑자기 라벨이 생기고 뚜껑이 생겼다. 그리고 안에 가득 차 있는 검은 액체.
"어!?"
나를 비롯해 네 여자 모두 황당한 표정이 된 모습.
세아가 재빨리 잡아들고 뚜껑을 돌린다.
까드드득
맙소사. 새 병을 따는 소리라니…. 바로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는 세아.
"윽."
"왜?"
"냄새가 이상한데?"
"그래?"
미나가 받아들고 냄새를 맡아보더니 역시 인상을 쓴다. 승희도 안나도 한 번씩 냄새를 맡아보고 똑같은 모습이 된다.
음…. 그렇단 말이지?
"내려놔 봐."
안나가 페트병을 내려놨고, 나는 다시 스킬을 썼다.
"회귀!"
분명 열어놨던 뚜껑이 다시 생겨났다. 테이블에 놓여있던 뚜껑은 사라졌고.
세아가 다시 가져가려는 걸 손으로 제지하고 다시 스킬을 써본다.
"회귀!"
외관은 변한 거 같지 않은데 숙련도가 올랐다. 그럼 한 번 더….
"회귀!"
숙련도가 안 올랐다. 그렇다면…. 이건….
바로 콜라를 집어 들고 뚜껑을 땄다.
까드드득
그리고 아까와는 다른 확연한 차이가 느껴진다. 갈색으로 피어오르는 거품.
그걸 보는 여자들의 눈이 커진다. 잔뜩 기대하는 모습.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뚜껑을 열자 하얗게 살짝 피어나오는 증기. 오…. 이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그대로 입에 대고 살짝 맛을 봤다.
"으악! 뭐해!?"
세아가 깜짝 놀라서 외쳤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미지근하긴 하지만…. 이건 분명 내가 아는 맛이다. 탄산과 설탕, 그리고 오묘한 콜라 특유의 맛.
"오오오…."
내 반응을 본 여자들의 궁금증이 더 커졌다. 서둘러 내가 들고 있던 페트병을 가져가 마셔보는 세아.
눈이 커지는 그녀. 다들 그런 세아를 집중해서 바라본다.
신중하게 맛을 본 세아가 그런 우리를 바라보고 외친다.
"콜라야!"
"진짜!?"
"정말!?"
승희가 받아서 맛을 보고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미나와 안나도 바로 돌려 가면서 한 모금씩 마시고 충격받은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모두들 나를 보더니 같은 생각을 한 거 같다.
"나가자!"
내 말에 다들 후다닥 옷을 입으러 각자의 방으로 뛰어들어간다.
부랴부랴 옷을 입고 튀어나오는 여자들.
우리는 바로 벙커에서 나왔고, 우리가 나오자 렉스를 비롯한 들개들이 우리를 슬쩍 바라본다.
"어디로 가지!?"
"편의점!"
세아의 외침에 내가 바로 대답해준다.
마음 같아선 비행으로 바로 날아가고 싶지만, 아직 미나와 세아, 안나는 비행이 없다.
그런 그녀들의 보조를 맞추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편의점으로 뛰어갔고, 그런 우리를 들개들이 쫓아온다.
쟤들은 대체 왜 뛰어오는 거야? 웃기네 정말.
편의점에 도착한 우리들.
나는 비행으로 날아왔기에 숨이 차거나 하진 않지만, 미나와 세아, 안나는 급하게 뛰어와서 그런지 숨을 헐떡거린다.
역시 비행으로 날아와서 아무렇지 않은 승희가 재빨리 편의점 안을 둘러본다.
이미 털릴 대로 털려서 제대로 된 게 남아있지 않은 편의점.
하지만 승희는 거기에서 뭔가를 찾아내 집어 들고 왔다.
"이거 스킬 써줘요!"
초코바 상자.
나는 망설임 없이 상자에다가 스킬을 썼다.
스킬을 써도 큰 변화가 없었지만 아까 콜라를 봤기에 나는 계속해서 스킬을 썼고, 네 번째 스킬이 들어가자 초코바 상자가 마치 방금 만들어진 것 마냥 깨끗한 상자가 됐다.
바로 상자를 뜯는 승희. 초코바 하나를 꺼내서 포장지를 뜯었다.
"냠."
망설임 없이 입에 문 승희는 황홀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그걸 본 미나와 세아, 안나 역시 바로 초코바를 하나씩 들고 껍질을 까 입에 넣는다.
"흐어엉."
"이…. 이 맛."
"맛있어!"
각양각색의 반응들. 근데 세아야. 울 정도로 기쁜 거야?
계속해서 초코바를 씹으면서도 울먹이는 세아. 진짜 좋은가보다. 웃기면서도 슬프네.
나 역시 초코바를 하나 꺼내 껍질을 깠다.
세상이 망하기 전에는 정말 흔하디흔한 거였는데.
지금은 이미 존재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 초콜릿이라니. 구현해낼 수는 있는 거야?
카카오 농사부터 시작하면 되나?
한입 베어 물자 세아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입안에 퍼지는 단맛, 입을 마비시킬 것 같은 맛.
그리고 단순히 달기만 한 게 아닌 복합적인 맛.
초코바가 이렇게 감격스러운 음식이었나…. 눈물이 나올뻔했네. 세아가 저럴 만 하구나.
그렇게 초코바를 하나씩 게눈 감추듯이 먹어치운 여자들. 그러더니 눈에 불을 켜고 다른 것들을 찾기 시작한다.
"나! 나! 이거! 이거! 무슨 일이 있어도 이거!"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들 사이에서 하겐다X 통을 찾아낸 세아.
그리고 그걸 본 승희와 미나, 안나가 바로 세아의 옆에 바짝 붙어서 나를 바라본다.
아이스크림. 크…. 그래. 사치스러운 이름이지.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나는 기도하는 성직자의 마음가짐으로 스킬을 썼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네 번.
비어있는 하겐다X 통을 들고 있던 사아가 깜짝 놀란다.
차가운 냉기를 품고 있는 아이스크림 통.
세아는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깠고,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보고 다시 눈이 촉촉해진다.
"차가워…."
어느새 미나가 바닥에서 플라스틱 숟가락 하나를 주워서 나에게 내민다.
어…. 이런 것도 회귀를 쓰는 거야? 하긴 씻어서 쓰기엔 좀 지저분해 보이긴 하네.
회귀 네 번을 쓰자 숟가락도 새것처럼 돌아왔다. 잔 기스 하나 없는 깨끗한 숟가락.
그걸 받아든 세아가 아이스크림을 한 수저 떠서 바로 입에 넣는다.
볼을 따라 흐르는 한줄기 눈물.
"야. 눈물까진 좀 오버 아니냐."
"시끄럽고 먹기나 해봐요."
한 숟가락을 떠서 내 입에 집어넣는 세아.
잠시 그 맛을 음미한 나는 세아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미안. 오버 아니네. 하아아…."
그렇게 세아는 미나와 승희, 안나에게도 한 숟가락씩 떠줬고, 다들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순식간에 바닥을 비운 아이스크림.
"혹시…. 또 되나요?"
"잠깐만…. 근데 이게 회귀를 하면…. 방금 너희들이 먹은 건 어떻게 되지?"
"어…?"
"에?"
"잠깐만요…. 얼래?"
"먹은 거…?"
모두 의아한 얼굴이 되어버린 여자들.
정말 궁금하네. 어떻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