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305화 (305/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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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스타르체바

거실 테이블에 포션을 쌓아두고 방으로 들어왔다.

아무래도 내가 없는 게 서로 이야기 하는 게 편할 테니까. 있어도 상관은 없겠지만 그래도 눈치가 보이긴 할 거다.

기왕 하는 거면 마음 편하게 하는 게 낫지.

방에 들어와 숙련을 계속한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수납을 마스터 하고 싶지만, 의지와 현실은 늘 비례하진 않는다.

고급 89퍼센트 까지 올리니 슬슬 한계가 느껴진다. 역시 한 번에 하는 건 무리네.

어찌어찌 90퍼를 채우고 수면을 썼다.

힘들다. 자야지. 자고 일어나면 여자들도 뭔가 답을 내놓겠지.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시간은 오전 11시 반.

개운한 몸과 개운한 정신. 역시 인간에겐 잠 만한 약이 없다.

더 누워있으면 싶은데…. 소변이 마려워서 더 잘 수가 없네. 어휴. 자기 전에 뭘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마려운 건지.

그렇게 화장실을 갔다가 밖에 나가려는데 밖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탐지를 돌려보니 네 여자의 기척이 모두 거실에서 느껴진다. 음…. 열심히 방안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

조금 더 시간을 줄 겸 그냥 침대에 누웠다.

가끔 이렇게 게으름도 부릴 줄 알아야지. 느긋하게 말야.

하지만 마냥 쉬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다.

그것도 이렇게 맑은 정신이라면 더더욱.

남은 스킬은 10퍼센트. 스킬 500번. 포션 13개.

이걸 남겨놓을 수는 없지. 바로 해치워버리자.

지금처럼 컨디션이 좋으면 1분에 포션 한 개 먹는 건 우습다.

그렇게 연달아 스킬을 쓰고 포션을 마신다. 13개. 그 정도는 껌이지.

마지막 수납을 쓰고 드디어 수납도 마스터가 되었다.

크으…. 스킬 아홉 개 마스터. 나는야 9 클래스 대마법사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스킬 창을 연다.

수납에서 스킬 표와 펜을 꺼내 들고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음…. 패시브. 역시 또 나오는구나.

스킬 반경 증가4와 스킬 지속시간 4. 보이자마자 바로 배웠다.

순식간에 날아간 80만 코인. 이거야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어?

스킬중에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스킬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비비고 다시 스킬 창을 본다.

내 눈에 들어온 스킬. '통역'

씨발…. 저절로 씨발 소리가 나왔다.

처음으로 이 스킬들을 만든 새끼들에게 고맙다는 느낌이 들었다.

통역? 내가 아는 그 단어 맞지? 통역. 외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그거?

나도 모르게 다른 것들을 다 보지도 않고 스킬을 배울 뻔했다.

후우…. 안되지. 진정하자.

언제든지 배울 수 있어. 무슨 스킬이 있는지는 다 살펴봐야지.

스킬 창을 비교해보며 스킬표에 스킬을 적지만…. 머리는 이미 딴생각으로 가득 찼다.

통역. 이거 하나면 안나와 얼마든지 대화를 할 수 있다. 씨발. 외국어 공부? 좆 까라고 해.

게다가 말이 안 통하는 상대에게도 매혹을 걸고 지시를 할 수 있잖아?

파티고 블링크고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은 바로 이걸 배워야 해.

일단 서둘러서 스킬을 다 옮겨 적었다.

뭔가 많이 있긴 한데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난다.

심호흡을 한번 깊게 하고 통역 스킬을 눌렀다.

['통역' 스킬을 배우는데 50만 코인이 소모됩니다. 배우시겠습니까?]

어라? 씨발? 50만? 설마?

나는 미련 없이 예를 눌렀다.

스킬 창에 떡하니 생긴 통역 스킬. 그리고 반짝이는 스킬 선택 칸.

이예에에에에에!!!

배우는 비용이 50만일 때 혹시나 했다. 역시 패시브였어!

일단 반짝이는 스킬 선택 칸을 놔두고 후다닥 거실로 뛰쳐나갔다.

문을 너무 세게 열어서 쾅 하는 소리가 났고, 네 여자가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본다.

"일어났어요?"

"아오. 깜짝이야. 문 좀 살살 열어!"

"오빠. 그렇게 해서 문 안 부서져요. 더 세게 열어야죠."

"썽철. 살살!"

나에게 한마디씩 하는 네 여자.

나는 그중에서 안나를 바라보고 잠시 머뭇거렸다가 말했다.

"안나야. 내가 하는 말 알아들을 수 있겠니? 길게 말했는데 무슨 뜻인지 알겠어?"

내가 말하자 승희와 미나, 세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안나는 내 말을 듣더니 정말 놀란 표정으로 입을 가리더니 더듬거리며 말한다.

"어….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우리나라 말을 잘해요? 무슨 일이에요? 어떻게 된 거예요?"

다른 세 여자의 반응으로 봐선 지금 안나가 말한 건 분명 러시아어다.

그렇지만 나는 안나의 말을 똑똑히 알아들었다. 그녀가 하는 말, 토시 하나까지 전부다.

"만세다! 씨발!"

나는 안나에게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고 번쩍 들어서 빙빙 돌았다.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 여자.

그리고 아직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안나.

"맙소사…. 맙소사. 이제야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안나는 내 품에 안겨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나를 꼭 끌어안는다.

이 통역이라는 패시브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그저 그동안 답답했던 언어의 장벽이 완전히 무너진 것만으로도 기뻐서 춤추고 싶을 정도.

그렇게 한참을 감격에 겨워 안나와 기뻐한 뒤 겨우 자리에 앉아서 진정시킨다.

"그러니까…. 오빠는 지금 안나가 러시아어로 말한 걸 다 알아들었다는 이야기죠?"

"응."

미나가 확인하듯이 물어봤고, 내 대답을 듣자 신기하다는 듯이 다시 말한다.

"그리고 오빠가 한국어로 말한 게 안나는 전부 알아들었고요?"

"그런 거 같아. 근데 내가 말한 게 한국어로 들렸니?"

"네. 평소와 다름없었어요."

정말…. 말도 안되는 스킬이다. 게다가 이건 패시브야.

별도로 사용하지 않아도 상시 적용이 된다는 거다.

게다가 따로 조건 같은 게 적혀있지 않았으니…. 아무런 제한 없이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게 된 거 같다.

그러면 저기 아프리카의 토착 부족민과도 대화할 수 있게 된 거 아닌가? 이론상으론 그렇게 된 거 같은데?

"너희도 빨리 스킬을 올려야겠다."

내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방금 눈앞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직접 봤으니 내 말이 완전히 수긍되겠지.

"다행이에요. 이제 그럼 한번 거쳐서라도 안나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게 된 거잖아요?"

"그렇지. 답답한 게 많이 줄어들게 될 거야. 그래도 아직은 너희와는 원활하게 대화는 안될 테니까."

그래. 뭐 그건 어쩔 수 없다. 통역 스킬이 나오는 건 스킬 아홉 개를 마스터 해야 하는데…. 이들은 아직 멀었잖아.

그래도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다. 마냥 불가능 한 건 아니라는 말이지.

나와 말이 완전히 통하게 된 뒤로는 계속해서 내 팔짱을 끼고 있는 안나.

평소처럼 해맑게 웃고 있지만, 그때와는 조금 느낌이 다르다.

그 전에는 말이 통하지 않아 웃음으로 넘기고 있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진짜로 기뻐서 웃고 있는 모습?

"다행이네. 정말 다행이야."

혼자서 중얼거리는 세아. 항상 틱틱거려도 이런 모습을 보면 속은 따듯한 여자다.

진정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저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거잖아.

게다가 그건 승희와 미나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안나와 짧게나마 계속 대화를 시도하는 건 승희였다.

그리고 안나의 한글 공부를 가장 열심히 봐준 건 미나였고.

결국은 모두 다 안나를 위해서 언제나 신경 써주고 걱정해줬던 거다.

참 착한 여자들. 내게는 과분한 여자들.

그렇게 감격스러운 분위기가 지나가고 완전히 진정이 되자 미나가 식사를 준비해야겠다고 일어섰다.

승희와 세아도 미나를 따라 일어섰고, 그런 그녀들을 따라 안나가 일어서자 미나가 웃으면서 말했다.

"오빠랑 이야기 더 하고 있어. 지금은 그게 먼저야."

무슨 뜻인지 말해달라는 듯 나를 바라보는 안나.

나는 미나의 말을 그대로 전해줬고, 안나는 내 말을 듣더니 미나에게 다가가 꼭 끌어안는다.

어휴. 왜 눈에서 땀이 나냐. 아니 눈에 뭐가 들어갔나? 나도 참….

막상 둘이 남겨져 거실에 앉았지만, 안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서 렉이 걸린 느낌?

그렇게 잠시 생각하던 안나는 결국 힘겹게 입을 연다.

"나한테 뭐 궁금한 거 없어요? 아. 뭐부터 말해야 할지 진짜 모르겠어. 한국어 공부를 하면서 언젠간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아직 마음의 준비가 다 안 됐었나 봐요. 갑자기 찾아오니 말문이 막히네요."

"급할 건 없잖아. 천천히 해도 돼. 시간은 많으니까. 근데 이거 진짜 이상하다. 네 입 모양이랑 들리는 말이 완전 다르니까 조금 신기하네. 그런 거 있지? 더빙. 영화 같은 거 더빙 한 느낌이야. 그래도 알아듣는 데는 이상 없으니 상관없지만."

"나도 그래요. 정말 신기한 일이야. 갑자기 이렇게 되다니. 너무 좋네. 진짜 좋아요."

그러면서 안나 특유의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좋네. 그냥 바라봐도 좋은 미소였는데, 담겨있는 뜻을 알고 나니 더 좋다.

씨발. 스킬 만든 새끼들. 그동안 욕했던 거 사과한다. 이걸로 없던 일로 해줄게. 개새끼들아!

"썽철. 내 이름은 안나에요. 안나 스타르체바."

"안나 스타르체바. 그렇구나. 이제야 제대로 된 이름을 알았네. 근데 통역은 돼도 아직 썽철이라 부르네."

"아이…. 그건 어쩔 수 없어요. 쌍시옷 발음…. 그거 너무 어렵다고요."

막혔던 언어의 장벽이 무너지니 안나의 감정까지 풍부해진 것 같다.

아니. 실제로 그렇겠지. 제한적인 표현, 겨우 단어로 의사 표현을 할 땐 감정까지 매끄럽게 전달하긴 힘들었으니까.

"그래. 뭐 상관없지. 썽철이든 성철이든 어차피 나를 부르는 건 같으니까. 그럼…. 내가 궁금한 것들 물어봐도 될까?"

"네. 차라리 그렇게 해줘요. 정말…. 나는 말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머릿속이 막 엉킨 실타래 같아."

"그래. 그럼…. 안 좋았던 때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괜찮을까?"

"물론이에요. 다시 생각하기도 싫었던 시간이었지만…. 한번은 속 시원히 이야기해야죠. 당신에게도요."

안나가 나에게 말한 당신이라는 표현이 왠지 깊게 다가오는 느낌이다.

그동안 항상 썽철이라고 부르던 것과는 다른 느낌.

"어쩌다가 한국에 오게 된 거야?"

"흐음…. 그래요. 그 이야기는 해야겠죠. 음…. 올리가르히라는 말 알아요?"

"아…. 들어본 거 같아. 러시아의 재벌. 그런 거지?"

"맞아요. 내 아버지는 올리가르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운이 좋았죠.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줄을 잘 선 아버지는 급격하게 부를 얻었어요. 그런데 세상에 영원한 건 없죠. 특히 러시아에서는요. 줄을 잘 섰다는 건 줄이 끊어지면 끝없이 낙하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거든요. 줄이 끊어진 아버지는…. 자살 당했죠. 집안은 엉망이 됐고요. 어렸던 저는…. 팔렸어요. 헐값에."

"가만…. 지금 안나 네가 말하는 건 세상이 망하기 전의 이야기지?"

"네. 맞아요. 세상이 망하기 전부터 제 삶은 엉망이 되었죠."

"그럼…. 그건 대체 언제 이야기야."

"제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죠. 지금으로부터 8년 전."

"하…. 그럼 대체…. 열다섯부터 팔렸다고? 세상이 망하기 전부터 그런 삶을 살았다는 거야?"

내 말을 들은 안나는 미소를 지어보지만…. 그 미소는 지독하게 슬픈 미소였다.

웃고 있는데 울고 있는 것 같은 모습.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

"내가 왜 당신을 주저 없이 따라온 줄 알아요?"

"몰라. 그래. 나는 그게 늘 궁금했어.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이해가 안 가."

"열다섯. 헐값에 팔린 소녀는 그 이후로 그 누구에게도 호의를 받아본 적 없어요. 나를 보는 남자의 눈은 언제나 똑같았죠. 몸. 나를 보는 게 아니고 몸을 봤어요. 단 한 번도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본 적 없어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전 그래도 어머니를 닮아서 제법 괜찮은 외모와 몸을 가지게 됐어요. 그래서 지독한 꼴도 당했지만, 세상이 이렇게 되고도 죽음의 위협은 받지 않았어요. 다들 어떻게든 저를 곁에 두고 싶어했지 죽일 생각은 안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감사해 본 적은 없어요.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았다고 생각한 게 더 많았죠. 나…. 만난 날 기억해요?"

"그 비지니스 호텔."

"거기서 혹시 봤어요? 내 머리맡에 놓여있던 수면제?"

"어. 봤지. 불면증이 있어서 수면제 같은 건 제법 알고 있으니까."

"나를 찾는 사람들은 거의 다 예약제였고…. 그렇게 손님이 없을 때는 내게 항상 수면제를 먹였어요. 쓸데없는 짓 못 하도록."

"하…. 그래. 잠으로 가둬놨다는 거지."

"그 말…. 조금 무섭네요. 정확하기도 하고."

"뭐…. 잠에 대해서는 나도 할 말이 많으니까. 암튼 내 이야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 니 이야기 계속해."

"그 이후는 당신도 아는 이야기에요. 나는 열다섯 철이 들기도 전에 팔렸고 불합리와 폭력 속에서 세상을 배웠죠. 그리고 그거에 절망할 때쯤 세상은 망했어요. 그리고 혹시나 기대했지만 나는 스킬을 고를 수 없었어요. 한글을 몰랐으니까. 대체 왜 나는 스킬이 한글로 나온 걸까요?"

"모르겠어. 그건 나도 짚이는 게 없어. 그저…. 세상을 이렇게 만든 놈들이 실수 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만 하고 있어. 그 새끼들은 병신들이거든.“

이크. 욕하면 안 되는데. 습관적으로 욕을 해버렸네.

"어쨌든…. 내게 구원은 없었어요. 세상이 망하든 말든 나는 여전히 감금돼있었고 내 몸을 노리는 남자들만 마주했죠. 그리고…. 당신을 만난 거예요. 처음으로 내 몸을 거절하는 남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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